주니치 드래곤즈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Central League) | 퍼시픽 리그(Pacific League)
50px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Tokyo Yakult Swallows)
60px요미우리 자이언츠
(Yomiuri Giants)
65px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
(Yokohama DeNA BayStars)
65px주니치 드래곤즈
(Chunichi Dragons)
55px한신 타이거스
(Hanshin Tigers)
55px히로시마 도요 카프
(Hiroshima Toyo Carp)
과거에 참가했던 팀들 →
170px
팀 엠블럼팀 마스코트
도아라(ドアラ)
주니치 드래곤즈
Chunichi Dragons
中日(ちゅうにち)
ドラゴンズ
구단 법인명㈜주니치 드래곤즈
(株式会社中日ドラゴンズ)
창단1936년 1월 15일
연고지아이치나고야
구단 연고지 변천아이치 현 (1952~)
구단명 변천나고야군 (1936~1943)
산교군 (1944)
주부닛폰 (1946)
주부닛폰 드래곤즈 (1947)
주니치 드래곤즈 (1948~1950, 1954~)
나고야 드래곤즈 (1951~1953)
홈 구장고라쿠엔 구장(1948)
나고야 구장 (1948~1996)
나고야돔 (1997~)
2군 구장나고야 구장 (1997~)
모기업주니치신문
감독모리 시게카즈 (森 繁和)
킷 스폰서아식스
일본시리즈 우승
(2회)
1954, 2007
센트럴리그 우승
(9회)
1954, 1974, 1982, 1988, 1999, 2004, 2006, 2010, 2011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우승
(3회)
2007, 2010, 2011
아시아 시리즈 우승
(1회)
2007
공식 홈페이지
1954년 일본시리즈 우승 팀
1953-요미우리 자이언츠주니치 드래곤즈1955-요미우리 자이언츠
2007년 일본시리즈 우승 팀
2006-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주니치 드래곤즈2008-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2007년 아시아 시리즈 우승 팀
2006-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주니치 드래곤즈2008-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1 소개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의 프로야구단. 연고지는 아이치나고야 시. 소유주는 주니치 신문사(中日新聞社(ちゅうにちしんぶんしゃ)
)[1], 홈구장은 나고야 돔.

1934년 일본프로야구 출범 때부터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는 3개 팀[2] 중 하나다. 센트럴리그의 인기 팀.

1990년대에는 한국에게 가장 친근한 구단이였다. 이유는 선동열 선수가 말년에 활약하던 팀이였기 때문. 그외에도 이종범, 이상훈, 이병규 선수가 거쳐갔으며 이 세 선수는 활약이 약간 미미했었고 부상등으로 오래 활약하지 못했었다.

원래는 '공룡타선' 이라고 불리며 작은 구장인 나고야 구장(좌우 91m, 가운데 120m)에서 홈런을 양산하는 플레이 스타일이었다. 당장에 구단 레전드만 보더라도 에토 신이치, 오치아이 히로미츠, 오시마 야스노리, 야자와 켄이치, 우노 마사루, 다이호 야스아키 등 거포들이 떠오를 정도. 그러다 1990년대 초반 들어 잠시 부진하다가 1997년에 현재의 홈구장인 무식하게 넓은 나고야 돔(좌우 100m, 가운데 122m, 펜스높이 4.8m)을 홈구장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팀을 순식간에 투수중심으로 재편하였다. 결과 현재는 12구단 중 가장 수비적인 야구를 하는 팀이 되었으며 타팀에 갈경우 당장 에이스에서 못해도 2, 3선발쯤 할것 같은 선수들이 중계 혹은 2군 대기 중이다(...).

또 하나 일본에서의 주니치의 이미지는 만년 2위팀 홍진호님이 문서를 좋아합니다 근데 게 느낌만 그런게 아니라 통계로도 사실다. 팀은 19501×9+5+0=14, 14는 2의 배수년에 일본 리그가 2리그제가 된 후 616×1=6, 6도 2의 배수년 동안 2위만 무려 24번 을 해먹었다. 는 12구단 중 최고기록. 하지만 의외로 20세기 전체 승률은 한신 타거스에 밀려서런 구단이 일본시리즈 우승 한 번 밖에 없는 건 더 놀라운 사실 3위이다. 1위야 뭐...

사실 세리그 전통의 강호지만 맨날 중요할 때 2위만 해대는 통에 우승경험도 강호의 미지에 비해서는 매우 적다. 거기다 중요한 게임에 워낙에 약해서, 일본시리즈에 진출 횟수는 88도 2의 배수다번인데 우승 횟수는 고작 2번 뿐이다. 그나마도 번째로 우승했던 2007년 시즌의 경우 1위로 진출한 것도 아니고 2위로 리그를 끝낸 뒤 포스트시즌에서 1위 요미우리 자언츠를 발라버리고 올라간 것. 이 정도면 만년 2위팀의 명성에 걸맞는 것 같다(...). 거기다 팀 첫 번째 우승은 19541×9×5×4=180, 180은 2의 배수년인데 번째 우승이 2007년. 실로 우승 한번 하는데 53 5-3=2 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안습 일제가 조선 잡아먹기 전에 우승한 뒤로 백년 넘게 우승 못한 구단도 있는데

등번호 관련해서 재미있는 점 있는데, 일본 야구에서 투수 에스의 등번호가 181÷8=0.125 2x2x2x2+2=18 번인데 비해 팀은 20번이 에스 번호이다.그러니 맨날 2위지 22번으로 바꿔라 스기시타 시게루, 호시노 센, 곽원치 등이 달았고 선동열도 주니치에서 현역시기에 20번을 달고 활동했을 정도. 게다가 보통 에스 넘버인 18번의 취급이 매우 안습인데, 역대 팀 레전드급 투수 보면 18번 달고 있는 사람 매우 드물다. 그래서 드래프트 하위 순위에 입단한 신인한테 18번을 냅다 던져준다. 오죽하면 '실력은 없는데 18번을 달고 싶으면 주니치로 가라'는 농담 아닌 농담 있을정도.

2007년부터 2009년까지 병규선수가 소속했었다. 그러나 성적 외국인 선수 치고는 신통치 않아 언론한테 자주 까였는데, 그럴때마다 라뱅쓰리런 뜬금포를 날려대는 통에 참 대놓고 까기는 뭐한 미묘한 상태였다. 그러나 2009년에는 완전히 말아먹고, 본인은 주니치와 재계약을 원한다고 했으나 결국 팀은 시즌 종료 후 재계약을 요청하지 않았다.[3]

2 역사

2.1 2010 시즌

홈 승률 7할대의 사기적인, 뒤집어 말하면 원정승률은 4할이 채 안 되는 성적을 거두며 2006년 리그 우승에 이어 4년만에 9번째 센트럴 리그 우승을 했다. 하지만 일본시리즈에서는 퍼시픽 리그 3위 치바 롯데 마린즈에 7차전까지 싸웠지만 패하였다. 92 빙그레도 아니고

2.2 2011 시즌

이번엔 가을만 되면 삽질하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게 패해 연속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8년 가을 동안 공들여 삽질해서 만든 게 주니치 무덤

2.3 2012 시즌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도 2010년 일본시리즈와 마찬가지의 사태가 일어났다. 시리즈 초반 3연승으로 3승 1패[4]로 앞서가다 막판 세 경기에서 연패를 당하며(...) 리그 2위로 만족해야 했다. 아오! 콩깐다!!

2.4 2013 시즌

주니치 암흑기의 시작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밀려 2001년 이후 12년만에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였다.

시즌 종료 후 현역 포수 다니시게 모토노부가 차기 감독으로(선수 겸 감독) 선임되었다. 오치아이 히로미츠 전 감독은 GM으로 팀에 복귀하였다. 이후 베테랑 이바타 히로카즈를 퇴단시키고 선수단 전반에 연봉삭감의 폭풍이 몰아치는 등 파란의 오프시즌이 전개되었다.

2.5 2014 시즌

또다시 B클래스

팬들이 걱정하던대로수많은 베테랑에 유망주들을 퇴단시킨 후폭풍이 몰아닥쳤다. 시즌 초반에도 에러연발로 이길수 있던 시합을 패배하는 등 영 좋지못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8월 들어서는 한 달에만 20패[5]로 구단기록을 갱신. 지켜 이기는 야구를 표명했던 주니치는 지키기만 해서는 이길 수 없다는 걸 보여주며지키지도 못했던것 같지만 시원하게 5위로 내려갔다가 막판에 분발해 겨우 4위로 B클래스 1위를 확보했다....

또한 선발 출전 멤버보다 우수한 백업, 2군 멤버가 넘쳐남에도 연공서열식의 선수기용으로 실패했다는 지적을 받았는데, 실제로 주니치에서 방출되어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와 계약 후 괜찮은 성적을 남기고 있는 야나기다 시게오 선수의 경우 주니치전에서 결승타를 치고 주니치에선 결과를 남겨도 (선발 멤버로)기용받지 못한다, (애시당초)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다라며 주니치의 체제를 비판했다.

2.6 2015 시즌

남들은 죄다 선두권 싸움 하고 있는데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한신과의 원정 개막 3연전을 모조리 내주며 우려를 자아냈으나... 그 다음 주 요미우리와 히로시마 6연전을 모조리 쓸어담고 6승 3패로 리그 1위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다시 죽쑤기 시작하며 1위 자리를 요코하마 DeNA(뭐?!)에게 내주었고, 곧이어 2위 자리도 자이언츠에게 양보했다. 5월 기준으로 3위 역시 한신에게 빼앗기며 다시 3약 포지션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리고 6월이 끝나가는 시점에 도쿄까지 주니치를 추월해버리며 잘못하면 밑바닥까지 추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6월 26일, 드디어 바닥까지 내려갔다.

7월 5일 기준으로 세리그 다른 5개팀과 멀찍이 떨어진 4할 3푼대 승률으로 세리그 제일 밑바닥에 가라앉아 버렸다. 그나마 위안인 건 파리그 꼴지 오릭스 버팔로즈 보다는 승률이 높다는 것... 그 외 희한하게도 한신 타이거스 상대로는 이상할 정도로 강하다.킨테츠 더비

그래도 센트럴 리그 전체가 1992시즌을 뛰어넘는 수준의 혼전[6]을 벌이는 중이라 어찌어찌 또 5위 히로시마와 2게임 차까지 따라붙었지만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 투타가 완벽하게 폭망하며 최하위 자리에 고정되었다. 결국 팀 체질 개선을 위해 다니시게 모토노부 감독과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야마모토 마사, 와다 카즈히로 등의 노장 선수들이 올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게 되었다. 그래도 시즌 막판 요코하마가 더 빠르게 역사에 남을만한 DTD를 시전하면서 최하위는 면했지만 3년연속 B클래스는 센트럴 리그 출범이후로만 따지면 1968-1970년 이후 45년만에 두번째 기록이다. 게다가 다음 시즌 전망도 밝은 편은 아니라는 점에서 자칫 잘못하면 경험해본 적이 없는 구단 사상 초유의 암흑기로 돌입할 우려도 있다.

2.7 2016 시즌

21세기 주니치 드래곤즈의 사상 최악의 시즌
19년 만의 최하위 추락

선수에서 은퇴한 다니시게 감독이 본격적으로 감독직에 전념하는 첫번째 시즌이다. 아무래도 지난 2년동안의 부진은 선수와 감독업무를 겸하느라 팀 운영에 집중할 수 없었다는 구실이라도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정말로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평가받는 시즌이다. 그러나 전임 감독이 말아먹고, 단장은 연봉 깎는데는 수완을 발휘했지만 쓸만한 선수들 데려오고 발굴하는 능력은 영... 그래서 시즌 전 예상도 최하위까지는 아니더라도 거의 4~5위에 집중되어 있었다.

전반적으로 혼전 양상인 센트럴리그에서 한때 선두에 오르는 등 A클래스 싸움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며 당초 예상보다는 잘 버텨주는 중. 홈런 선두를 달리는 외국인 타자 다얀 비시에도가 파괴력을 보이고 있고 중간계투인 타지마 신지는 개막 후 27경기 연속 무실점이라는 일본프로야구 신기록을 썼다. 하지만 염원인 세대교체에는 다소 시간이 걸리는 모습. 7월 7일 현재, 비시에도는 홈런(18개)과 타점(55개) 각 리그 3위를 기록중이다. 와카마츠, 오노, 조던, 요시미로 선발 로테이션을 꾸리고 있지만, 타 팀에 비해 중량감은 떨어지는 모습이다. 팔꿈치 부상에서 돌아온 왕년의 에이스 요시미의 페이스가 좀처럼 올라오지 않는 것이 아쉬울 따름. 타선 역시 리드오프 중견수 오시마, 중심타선의 히라타, 비시에도, 주전 포수로 발돋움한 스기야마 정도를 빼면 나머지는 식물인간 수준이라...

그래도 2~4위를 왔다갔다하며 순위싸움을 꾸준히 하고 있다. 1위는 갑자기 넘사벽이 되어버린 서쪽의 어떤 팀에게 넘겨주고 교진되나 안되나 하는 어떤 팀과 함께 순위다툼 중.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6년은 참 존재감이 없게 보내는 중이다. 항상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요미우리나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요코하마와는 달리 위로 치고 올라갈 추진력도 없고 그렇다고 밑으로 내려갈 정도로 개막장인 모습도 안 보이고 그냥 저냥 시즌을 보내는 중이다. 순위가 오르내리는 것도 자신들이 잘하고 못해서라기 보단 요미우리와 요코하마가 못하면 순위가 좀 올라갔다가 두 팀이 좀 정신을 차리면 다시 내려가는 느낌. 아무래도 감독이든 선수든 화제가 될만한 요소가 별로 없다는 것도 최근 3년간에 비하면 그럭 저럭 잘 버팀에도 불구하고 임팩트가 전혀 안 보이는 원인 중에 하나다.

결국 전반기 마지막 10게임을 4승 6패로 마무리하며 39승 45패 4위로 전반기를 마감했다. 아직 2위 추격의 가능성은 남아있으나 올해도 전반기를 B클래스로 마무리했고 3위 경쟁중이던 요코하마와의 전반기 마지막 3연전 맞대결에서 1승 2패로 루징 시리즈를 기록했다는 점에서 상위팀의 DTD가 없으면 올해도 B클래스에 머물 확률이 높아보인다.

후반기 시작하자마자 수위 히로시마를 만나 깔끔히 루징시리즈로 시작한 데 이어, 홈인 나고야돔에서 야쿠르트에게 폭풍 스윕을 당하며 야쿠르트에게 4위 자리까지 내주고 5위로 내려 앉았다. 그리고 올스타전 이후로 전반기까지 2위 경쟁을 하던 팀인지 의심스러운 경기력으로 4승 13패를 기록하면서 마침내 최하위로 추락했다.

결국 8월 9일 다니시게 모토노부 감독이 사임(이라 쓰고 사실상 해임)을 발표했다. 본인은 성적부진이 이유이며 자신은 휴양할 것이라 밝혔다. 잔여시즌은 수석코치 모리 시게카즈의 감독대행 체제로 가게 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감독이 사임하면 그 충격으로 잠깐동안 잘 한다던가 그런 케이스도 있지만 그딴 것도 전혀 없이 정말 제대로 추락 중이다. 8월 13일 현재, 한 때 같이 순위 싸움을 하던 3위 요코하마와는 8.5게임차까지 벌어졌으며 심지어 5위 야쿠르트와도 4게임차가 난다. 8월 16일 시점에서 승률이 파리그 최하위인 오릭스 버팔로즈보다도 낮게 내려가면서 양대리그 최하위가 되었다....

그 와중에 세리그의 캐스팅보트 역할을 제대로 해냈는데, 선두 추격을 벌이던 교진과의 원정 3연전을 모조리 싹쓸이하면서 바로 다음 시리즈로 벌어진 히로시마 도요 카프 전에서는 오히려 스윕을 당해줬다. 덕분에 카프의 매직넘버를 대대적으로 줄여 주면서 카프 최대의 호구와 함께 카프의 세리그 우승에 일조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DTD를 시전하다 결국 9월 16일 VS 히로시마 도요 카프 戰에서 0-8로 무참히 영봉패함으로써 '포스트시즌 탈락이 확정. 양대리그 분리 이후 구단 사상 처음으로 4년연속 B클래스를 확정지었다. 본인이 단장으로 재임한 3년동안 팀이 B클래스에서 벗어나지를 못했으며 자신이 앉힌 감독과 마찰만 빚고 팀을 점점 수렁으로 빠지게 한 단장은 자신이 선수들에게 그렇게 했듯이 시즌 끝나고 칼바람을 피할 수 없을 듯 하다.

B클래스 결정 이후엔 17, 18일 경기를 연승하며 그나마 최하위는 탈출하려 노력하나 싶더니... 곧바로 4연패로 졸렬한 플레이를 선보인 끝에 25일, VS 한신 타이거스 戰에서 4-1로 패하면서 19년 만의 최하위가 결정되었다.[7] 더우기 안습인 건 팀에 규정타석을 채운 3할 타자도 없고, 규정이닝을 채운 선발투수도 없다는 것. 이래저래 주니치에겐 최악의 해가 되어버렸다.

그 후 시즌 최종전 다음날인 9월 29일, 당초 예상되던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2군 감독의 1군 감독 승격설을 뒤엎고 모리 시게카즈 감독 대행을 정식 감독으로 선임했다.

3 최근 5년간 관중수 추이

2012년2013년2014년2015년2016년
연 평균2,080,530명 (-3.0%)1,998,188명 (-4.0%)2,000,912명 (+0.1%)2,049,784명 (+2.4%)2,058,381 (+1.8%)
일일 평균28,896명27,753명27,790명28,469명28,991명

4 홈 구장

나고야돔 항목 참조.

5 유니폼

주니치 드래곤즈/유니폼항목 참조.

6 이야깃거리

파일:Attachment/DOARA07.jpg
이 팀의 마스코트인 코알라 도아라가 서브컬쳐계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pixiv에서도 도아라의 팬아트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수 있으며 심지어 figma브랜드의 액션피규어로 출시되기까지 했다. 말못하는 마스코트가 TV, 라디오에 나오고.. 광고는 물론 책에 음반까지 냈다. 관련상품 중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전 구단 통틀어서 상위권의 인기 캐릭터.[8] 4차원적인 행동 등으로 이상하지만 귀엽긴 하다 라는 반응이 대다수. 하지만 그 역시 2013년 오프시즌의 연봉삭감 바람을 피할 수는 없었다. 시즌 도중 왼손 중지가 골절되는 바람에 퍼포먼스를 할 수 없게 되어 연봉이 식빵 1kg에서 750g으로(...) 25% 삭감되었다고 한다.기자회견 기사



DJ 도아라라는 명의로 음반도 냈는데... 곡조가 너무 노골적이라 "설마 가 만든거 아님??" 생각했고 그 분새 앨범에 수록이 되어서 빼도 박도 못하게 이 분 제대로 확정. 정작 작곡자는 호크스 팬이라는게 함정

얘 말고도 샤오롱과 파오롱이라는 용에서 모티브를 따온 애들도 있다.

구단의 대표적인 응원가로 '燃えよドラゴンズ'(불타라 드래곤즈)가 있다. 주니치가 거인의 센트럴리그 10연패를 저지한 1974년 나고야 지역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지금까지도 즐겨 불러지는 응원가로 자리잡았다. 제목은 당시 일본에 개봉해 인기를 끌던 이소룡 주연의 영화 용쟁호투가 일본에서 '불타라 드래곤'으로 소개된 것에서 따온 것이다. 원본인 74년판 이외에도 거의 해마다 새로 녹음되었을 정도로 버전이 많은데, 선동열-이상훈-이종범 한국인 3총사를 데리고 리그 우승을 한 1999년판 중에는 한국 3총사 헌정 버전도 찾아볼 수 있다.가사 번역 여담으로 이 곡을 작곡한 야마모토 마사유키(山本正之)라는 사람은 첫 작곡이었던 이 곡이 인기를 얻은 후, 타임보칸의 주제가를 작곡하는 등 애니송 작곡가로서 경력을 이어나갔다. 그래서인지 미즈키 이치로가 부른 버전들#도 있다.

한국 고교야구 선수인 송상훈이 2012년 일본프로야구 신인드래프트에서 이 팀에 6순위로 지명되어, 한국 고교야구에서 드래프트로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입단 1년만에 육성선수로 신분이 바뀌었으며 2014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다.

톰 셀렉, 타카쿠라 켄이 주연한 영화 '미스터 베이스볼'의 소재로 다뤄졌다. 톰 셀렉이 분한 강타자가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다 일본프로야구에서 뛰게 된다는 스포츠 영화인데, 영화에서 셀렉이 소속해 뛰는 팀이 주니치. 타카쿠라 켄은 감독 역으로 분한다. 여담으로 영화에서 셀렉을 일본으로 밀어낸 선수 역으로 출연한 배우가 바로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레전드 프랭크 토마스.

요미우리 자이언츠10.8 결전을 벌였다.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경기들 중 하나로 꼽히는 경기다.

7 주요 선수

7.1 감독

7.2 투수

  • 11. 오가사와라 신노스케 [9]
  • 12. 타지마 신지
  • 13. 이와세 히토키
  • 16. 마타요시 카츠키
  • 18. 스즈키 쇼타 [10]
  • 19. 요시미 카즈키
  • 20. 노무라 료스케 [11]
  • 21. 오카다 토시야
  • 22. 오노 유다이
  • 24. 후쿠타니 코지
  • 29. 야마이 다이스케
  • 41. 아사오 타쿠야

7.3 포수

  • 38. 마츠이 마사토
  • 40. 카츠라 이오리
  • 45. 스기야마 쇼타

7.4 내야수

  • 00.엔더슨 에르난데스
  • 2. 아라키 마사히로
  • 3. 타카하시 슈헤이
  • 7. 모리노 마사히코
  • 23. 엔도 잇세이
  • 53. 카메자와 쿄헤이
  • 55. 후쿠다 노부마사
  • 63. 도노우에 나오미치

7.5 외야수

  • 4. 후지이 아츠시
  • 6. 히라타 료스케
  • 8. 오시마 요헤이
  • 60. 리카르도 나니타
  • 66. 다얀 비시에도

7.6 OB

7.6.1 감독

1954년 팀 사상 최초의 일본시리즈 우승 당시 감독.
1974년 20년 만의 센트럴리그 우승으로 요미우리의 V10을 저지할 당시 감독.
주니치의 명선수였으나 감독으로선 별로 좋은 성적을 남기지 못했다.
주니치의 에이스. 감독직을 맡으면서 2번의 리그 우승을 거두었지만 정작 일본시리즈에선(...)
한큐 브레이브스의 레전드. 호시노가 물러가면서 감독이 되었으나 2003년 성적 부진으로 시즌 도중 해임당했다.
주니치의 1988년 센트럴리그 우승을 이끈 선수였고 감독으로선 4번의 리그 우승과 2007년 53년만의 일본시리즈 V2를 이룩한 명장이다. 그러나 프런트 하면서 다 망쳐먹었어요

7.6.2 투수

1954년 일본시리즈 우승 주역. 원조 포크볼 마스터이며, 주니치의 에이스 넘버를 20번으로 만든 이.
짧은 기간 주니치의 에이스로 활약한 뒤 예능인으로 지금까지도 왕성히 활동 중. 응원가 '불타라 드래곤즈!'를 처음 불렀다.
선수 시절에는 주니치의 에이스이자 "곤도-곤도-비-곤도" 로 요약될 수 있는 혹사의 아이콘. 은퇴 후에는 명 투수코치이자 1998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우승 감독으로 활약했다.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열혈남아. 안티 요미우리의 선봉장이었다.
80년대 주니치의 에이스.
대만 출신 투수. 1988년 우승에 공헌한 특급 마무리 투수. 중국어 명은 궈위안즈. 한국식 독음은 곽원치. 선수생활 도중에 일본에 귀화했으므로 일본식 독음인 가쿠 겐지로 적는다.
한국프로야구의 태동기에 데뷔해 30년간 일본프로야구 무대에서 활약한 산신령 좌완투수.
'유리의 에이스'. 혹사로 인한 부상으로 커리어를 일찍 접어야 했던 비운의 투수.
90년대 주니치 중간계투진의 핵으로 활약했다.
사사키 카즈히로, 다카쓰 신고 등과 함께 당시 센트럴리그를 대표하는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다. 나고야 각도기
주니치 재적 당시 등록명은 삼손[12]

7.6.3 포수

7.6.4 내야수

1954년 일본시리즈 우승 주역이었던 강타자. 데뷔는 투수로서 했는데 투수로서 완봉승을, 타자로서 수위타자를 차지한 이색 경력이 있다.
주니치에서 2번의 수위타자를 차지하며 중심타자로 활약했다. 이후 이적한 롯데에서도 수위타자를 차지하며 일본 최초의 양대리그 수위타자가 된다.[13]
빠른 발과 화려한 수비, 정교한 작전수행능력을 자랑했던 명 2루수.
1983년 홈런왕. 70년대 말에서 팀을 떠나기까지 오랜 기간동안 준수한 중심타자로 활약했다.
장훈의 수위타자 타이틀을 저지한 강타자 1루수.
일본프로야구 최초의 유격수 홈런왕이자 유격수 단일시즌 최다홈런 기록(41홈런)보유자. 하지만 그에 반비례한 막장 수비력으로도 팬들을 즐겁게 한 예능형 선수로도 기억된다.
前 감독, 現 단장. 3회의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하며 퍼시픽리그를 평정한 뒤 4:1 트레이드로 주니치에 입단한다. 꾸준한 활약을 보이며 주니치에서 일본프로야구 최초의 억대 연봉자가 된다.
'미스터 드래곤즈'. 유격수, 2루수, 3루수의 내야 세 포지션에서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명 수비수이자 일본프로야구 최다 2루타 기록 보유자.
대만 출신으로, 일본으로 야구유학을 왔기 때문에 드래프트 전 최종학력이 일본 학교여서 일본인 선수로 드래프트되었다. 타이호 야스아키(大豊泰昭)는 등록명. 본명은 진대풍(陳大豊, 천타펑)이다. 참고로 그의 동생 진대순(陳大順) 역시 같은 대학 출신으로 롯데 오리온즈에 드래프트되었는데, 이쪽의 등록명은 타이준 마사히로(大順将弘)였다. 형제가 자신들의 본명을 등록명의 성으로 땄기 때문에 형제의 성이 달라진 흠좀무한 케이스. 주니치에서 홈런왕으로 활약한 형과는 달리 이쪽은 일본프로야구 생활 2년만에 방출되어 대만 프로야구 리그로 돌아갔다. 2015년 1월,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51세.
2000년대 주니치 내야를 책임진 명 유격수. 2루수 아라키 마사히로와의 콤비는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2-유간으로 평가받았다.
쿠바 혁명 이 후 처음으로 일본프로야구에서 뛴 쿠바 출신 선수. 과거 쿠바 야구 국가대표팀이 올림픽 2연패, 월드컵 7연패를 할 당시의 4번타자 겸 3루수로 많은 기대를 모았으나, 진출 당시 나이가 35세여서인지 큰 활약은 하지 못했다.
주니치 역대 최고의 용병타자.

7.6.5 외야수

주니치 초창기의 리드오프 중견수로 1960년 도루왕, 1967년 수위타자, 베스트나인을 5회 수상하면서 1800안타 이상을 기록한 명타자. 요나미네 카나메의 후임으로 1978~1980년 감독직을 맡았으나 별로 좋지 못한 성적을 기록하고 물러났다.
교진군에서 이적하여 여기서 은퇴. 후일 감독으로써 교진군세리그-일본시리즈 V10을 저지하고 2번째 세리그 우승을 이뤄낸다.
1982년부터 3년간 최다안타 타이틀을 차지한 당대의 안타 제조기. 또 도쿄돔 최초의 3루타를 친 선수이기도 하다.(이땐 한신 타이거스 소속) 그의 현역 당시 아직은 앳된 야구소년이었던 스즈키 이치로가 동경하던 선수라고 한다. 은퇴 후 2005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창단 감독이 되었지만.. 처참한 성적을 남기고 그 해 바로 짤렸다(...)
KIA 타이거즈 타격코치. 현역 시절엔 준족 강견의 스위치 히터 외야수로 활약했다.
1996년에 주니치에서 홈런왕을 차지한 뒤 2007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서 만 39세의 나이로 43홈런을 때려[14] 홈런왕에 오른 이색 경력의 소유자.
세이부 라이온즈의 강타자였으나 후쿠도메 고스케의 메이저 진출 후 주니치에 FA로 이적했다. 2010년에는 만 38세의 나이에 리그 MVP[15]에 올랐다.

7.7 구단 출신 메이저리거

7.8 영구결번

주니치 드래곤즈 영구결번
No. 10No. 15
핫토리 츠구히로니시자와 토시오

어째 영구결번 선수들도 유명하지 않다.[16] 역시 콩의 전통!! 그것도 2명

  • 10. 핫토리 츠구히로(服部受弘)
  • 15. 니시자와 토시오(西沢道夫)
  1. 일본의 지방신문사이지만 산케이 신문보다 발행부수가 많고 도쿄와 오사카에 있는 신문사 이외에는 가장 규모가 크기 때문에 전국지에 필적하는 영향력을 갖는다. 논조는 일본에서도 비교적 진보 성향.하지만 나고야에 공장이 있는 도요타에게는 따뜻하겠지 주니치신문 소유 구단이기 때문에 주니치계열 방송사인 THK, CBC, TVA가 홈경기 중계권을 보유하고 있다. 나머지 NBN, CTV는 자체제작 중계가 아닌 키국 중계를 사용해 원정 경기를 방송.
  2. 나머지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한신 타이거스.
  3. 병규 선수 본인도 한국 복귀시 '방출당한게 아니라 그냥 재계약을 하지 않은 것 뿐이다'라고 웃으면서 얘기했다.
  4.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시즌 1위팀은 시리즈 1승을 자동으로 부여받는다.
  5. 한신의 암흑시절이래의 세리그 구단의 월간 20패
  6. 당시 우승팀 야쿠르트는 5할+8, 공동2위 요미우리&한신이 5할+6 밖에 되지 않았다.
  7. 그 전 최하위는 1997년. 호시노 센이치가 2기로 감독을 맡던 2번째 해였다. 그나마 이 해가 새로운 홈부장 나고야 돔에서의 첫 해였는데다가 그런데 마찬가지로 새로운 홈구장 오사카 돔에서의 첫 해였던 긴테츠 버팔로즈는 4위에서 3위로 전해보다 순위 올라간 게 함정 이 해 1월 호시노의 아내가 병으로 사망한 것이 팀의 분위기에 안 좋은 영향을 끼쳤다는 얘기도 있지만, 사실 그것보다 그 전 해까지 탁구장 나고야 구장에 최적화 되어 있던 대포 위주의 팀이 넓이도 넓어지고 펜스도 높아진 새 구장에 적응을 못한 것이 컸다. 나고야 돔 이전 전까지의 주니치 팀 컬러는 '강룡 타선'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공격에 특화된 팀이었다. 그러나 규모가 작은 구장에서 홈런을 날려대던 타자들이 새 구장에 와서는 이전 구장이었으면 홈런이었을 타구가 플라이로 잡히거나 펜스에 맞고 단타로 끝나는 등 공격력 저하가 현저해지면서 팀이 최하위로 추락한 것. 문제점을 파악한 호시노는 팀 개조작업에 착수해서 이듬해부터 공격력 위주의 팀컬러를 버리고 철저하게 투수력과 수비에 올인하는 방향으로 체질개선을 시도했다. 2000년대 전성기 시절의 주니치의 팀컬러는 바로 이때에 확립된 것이다.
  8. 요즘은 오릭스 버팔로스위협하고 있다.
  9. 2015 드래프트 1위로 2015년 여름 고시엔 대회 우승투수이다. 소속팀인 주니치 드래곤즈와 닛폰햄 파이터즈가 당시 고교투수 최대어라고 평가 받던 다카하시 준페이(현립 기후상고, 현 소프트뱅크)를 동시에 지명했다가 추첨끝에 사이좋게 탈락한 후 두번째 시도에서도 또 두 팀의 지명선수가 겹쳐서 재차 추첨 끝에 지명했다.
  10. 2013 드래프트 1위
  11. 2014 드래프트 1위
  12. 이들 한국인 선수 세 명이 활약하던 시절 주니치의 인기는 박찬호가 있던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 맞먹었을 정도.
  13. 장훈이 첫번째가 될 수 있었으나 석연치않게 실패했고, 우치카와 세이이치가 2011년 두번째 양대리그 수위타자가 된다.
  14. 홈런 2위는 동갑인 터피 로즈였다. 42홈런
  15. 센트럴리그 최고령 MVP 기록이다. 일본 기록은 1988년 만 40세의 나이로 44홈런을 때리며 퍼시픽리그 MVP가 된 난카이 호크스카도타 히로미츠.
  16. 그럴만도 한게 저 두 선수가 활약한 시기가 1940~1950년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