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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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자: VVVN, base on PhiLiP and Kanbun's 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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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 이름을 왜 죄다 영어로 직역해놨는지는 묻지 말자

中華思想, (영어)Sino-centrism

1 개념

중국인 특유의 민족적인 자문화 중심주의 사상. 단순히 중국 내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 퍼진 중국인들이 보유한 사상이다. 골자는 중국 문명이 세계의 중심이며, 그 문화적 역량이 어떠한 다른 문명보다도 우수하다고 믿기에, 다른 문명을 오랑캐 레벨로 낮잡아보는 사상을 지칭한다. 나라 이름부터가 中國이다(...) 다만 애국심을 보인다고 이를 비난하거나 너무 핏대를 올릴 필요까지는 없다. 편견의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는, 어느 나라ㆍ지역에도 있을 수 있는 수준의 자문화 애착이라면 굳이 특별한 시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는 일이다.[1]

2 내용

말 그대로 중화가 세계 중심에 위치하는 위대한 문명이라는 뜻이다. 한족은 전통적으로 중국 밖의 다른 나라나 민족은 자신들과 구별지어 오랑캐로 여기고 멸시해왔다. 동이, 남만, 북적, 서융 따위의 용어는 여기서 온 것이다. 특히 남만의 경우는 말 그대로 '남쪽 야만인'이라는 뜻이다.

명칭인 '중화(中華)'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화사상은 중앙[中]을 중심으로 미개한 주변부를 다스린다는 관념을 깔고 있으며, 따라서 중국이 '(동아시아) 세계 유일의 황제' 개념이 정립되며, 인도, 일본, 한국, 몽골, 태국, 베트남, 캄보디아, 미얀마, 중앙아시아 등 나머지 지역은, 혹은 제후 개념이 정립되어 발전한 중국의 역사 및 세계 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완전한 황제의 통치를 위해서는, '중심부[中]의 절대 권력자인 황제를 정점으로, 각지의 왕 혹은 제후'으로 이어지는 위계질서가 확립되어야 하는 것이며, 이를 정당화하는 것이 '하늘(天)으로부터 부여받은 권위'(천명) 및 압도적인 인구와 영역에서 기인하는 문화력이었다.

2.1 역사

역사적으로 '중국'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것은 상주 시대부터 확인할 수 있는 일로, 이(夷), 만(蠻), 융(戎), 적(狄) 등을 비롯해 수많은 이민족들이 존재했던 상황을 당시 문헌들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이후 춘추전국시대에 이민족과의 잦은 충돌을 빚으면서 '중국'과 '중화'의 정체성이 확립되다. 이 사상은 춘추전국시대부터 진(秦)ㆍ한(漢) 시대에 걸쳐 등장하기 시작했고, 특히 한나라 시대의 공양학(公羊學)에서 두드러지며 오행 사상 등과 결합하면서 이론적으로 정립되고 기본적인 외형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한나라가 주변 민족들을 동서남북 다 털어버리기 전까지는 내부에서도 흉노와 같은 유목민들이 더 남자답다고 여기고 가서 선우가 되어 한나라를 괴롭힌 사람들이나 조타처럼 다른 농경 이민족들의 왕이 되어 나름 부심을 부리고 산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리고 국제적 왕조인 이후부터는 주변국에도 본격적인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으며, 대 이후 발달한 성리학은 천자 중심의 질서를 더욱 크게 강요하였다.

3 통합성

흔히 중화사상을 '오래된 중국의 민족주의' 정도로 이해하고는 하나, 단순하게 볼 것은 아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 중의 하나는 혈통적으로 다른 공동체들을 많이 흡수하면서 중국이 성장해 나어갔기 때문이며, 중화사상을 정당화하는 중요한 근간 중의 하나가 '우월하게 세계의 중심에 선 화(華) 문화'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주족옹정제 같은 경우, 동이[2] 출신의 순 임금과, 서융 출신의 주문왕을 거론하며, 이들도 한족 질서에 편입될 수 있었음을 《대의각미록》에서 주장하여 의 정당성을 삼는 근거로 내세웠다. 한족 항목에서 볼 수 있듯, 실제로 남중국과 북중국은 혈통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제법 큰 차이가 있음에도, 역대 중국의 국가들은 '중화'의 범위로 이들을 묶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하지만 이는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인 면이 강한 주장으로, 정작 한족 신사[3] 계층이 청 황실을 오랑캐라고 보는 관점은 청 말기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이들 한족 신사층은 지방에 웅거하면서도, '멸만흥한(滅滿興漢; 만주족을 멸절시키고 한족을 부흥시킨다)'을 표방하며 언젠가 '오랑캐의 지배'를 뒤엎을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고, 그것이 대대적으로 폭발한 것이 이른바 태평천국의 난이다. 이는 외세에 의해 나라를 빼앗겼다고 인식하고 있다면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이념이기도 하다. 청나라가 안정된 뒤에도 한족에 대한 강경책과 탄압이 완전히 사그라진 건 아니었다. 문자의 옥 항목 참조.

물론 이민족이라는 이유로, 잘한 점은 덜 인정받고 정통왕조와 똑같은 병크를 저질러도 더 까이는 성향은 컸지만(…), 하여튼 청 말기의 혁명가들은 청조의 지배기간을 중국이 식민지배 당하는 것으로 해석하며, 신해혁명은 한족의 독립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삼합회(三合會)의 시초가 되었다는 말도 있는 홍문(洪門)은, 중국 명나라 말기 청나라 초기에 일어난 비밀결사(秘密結社)로, "반청복명"(反清復明, 청을 몰아내고 명을 부활시킨다)를 모토로 삼는다. 이후 홍문은 모든 산당(山堂)과 반청조직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 되었다.[4] 이러한 '멸만흥한' 이념이나 조선베트남 등에서 내세운 소중화 사상은, 소위 오랑캐로 일컬어지는 외래인 중심의 지배를 부정하는 기조에서 성립된 것으로, 뿌리 깊은 중화사상 하에서 정통 중화인이 아닌 오랑캐를 질서의 정점에 세우는 것을 잘 인정하지 않으려 들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즉 소위 '중화인'들이 중화사상을 정당화하는 이유는 중화 문화였지만, 그 기저에는 혈통이나 인적 공동체의 의미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고대 이래 황하 인근 집단이 주변의 이민족을 흡수하며, 지금의 한족으로 세를 불려 나아가는 과정에서 '중화'의 범위는 끊임없이 확장되었다. 이것은 중국의 중심 지역에서 인구가 팽창하는 범위 이상으로 이루어진 문화의 확장을 동반한 것이었고, '중화인'의 혈통적, 인적인 구성도 중화사상의 주장과는 다르게, 계속해서 유동하면서 넓어져 갔다. 시대가 지나면서 중국의 영토가 계속해서 확장된 것 또한 이렇게 당연하게 자신을 '중화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전국시대에 중국의 일원으로 취급받게 된 , , , , (秦) 등의 공동체는 본래 전혀 다른 정체성을 지닌 '다른 세계'였다는 사실이 상주 시대 기록의 분석을 통해 드러나고 있으나, 역사의 방향성은 이 모두가 '중국'에 편입되는 쪽으로 흘러갔다.[5] 오호십육국시대 중국에 진입했던 수많은 이민족과 , , , 의 정복왕조 역시도 막상 유목민 시절을 벗어나 정주민이 되면서부터는, 중국의 압도적인 문화와 인구 속으로 빨려 들어가 중화사상에 물들어 이 질서 안으로 편입되었다. 물론 이러한 이민족들이 중국에 미친 영향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단적으로 시절에, 중국인 전통의 상투가 사라지고 변발로 문화적 습속이 바뀌었으며, 이후 현대화를 거침에 따라 상투는 다시 부활하지 못했다. 문화란 일방적으로 한쪽이 다른 한쪽을 물들이는 게 아니다. 물론 이 경우는 어디까지나 정복자의 강요에 의한 것이지만. 하지만 결국에는 이민족들도 '중화사상'이라는 큰 흐름에 뭉뚱그려졌다.

이처럼 중화사상의 막대한 힘이 동아시아에 작용한 결과, 근대 이전까지의 2,000년간 중국이 방대한 면적과 수많은 인구를 하나의 틀 안에 묶고, 이를 제국의 형태로 실현할 수 있었던 중요한 통치 이데올로기로 기능할 수 있었다.

또한 지금까지도 중국이 그 거대한 세력을 유지 가능하면서, 다른 국가들에 비해 꾸준히 정치적-통치적 폐쇄성을 띄는 근간이 되기도 하였다. 이는 중화사상으로 인해, 동아시아의 문화적 다양성이 사라졌다는 말도 되어, 빛과 그림자나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신화가 한국의 세계관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된 것도, 개별적인 정체성보다 중화사상적인 세계 체제를 지향했던 중화 문화권의 과거사를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4 배타성

중화사상은 자문화 중심주의 사상이기 때문에, 그 특성상 당연히 강한 배타성을 깔고 있다. 사실, 현재의 중국인들 일부꼰대도 은연중에 아시아의 다른 민족들을 깔보면서 오만하게 행동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전근대 중국이 동아시아권에서 막대한 문화적인 영향력을 행사함에 따라, 중국 바깥 권역은 자연히 오랑캐라고 멸시되었으며, 이를 방위와 결합해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이라 호칭하며 깔보았다. 이는 중국의 문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조선 역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례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국왕 선조를 만난 나라 사신 송응창은 "조선왕이 고집이 세어 내 말을 듣지 않으려 하니 한심하다. 오랑캐를 설득시키는 일이 이와 같다" 라고 말한 바 있다. 또한, 처음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 조선의 지원 요청에, 북경에서 황제에게, 오랑캐들끼리 싸우는 것이니 도울 필요도 없다는 자국 내 의견도 있었다. 중국인들에게는 조선도 오랑캐였던 셈이다.

4.1 다른 문화권과의 비교

과거 중화사상의 유래가 된 서적들의 내용을 살피면, 과거 히틀러의 게르만 우월주의나 라틴 우월주의, 슬라브 우월주의와 크게 다른 점은 없다. 슬라브를 예를 들어서 설명하면, 현재 우크라이나 민족과 러시아 민족의 사이가 좋지 않으나, 슬라브 우월주의는 그것과 상관없이 양쪽에게 호소할 수 있는 사상이다. 중화사상도 이와 비슷하게, 중화권 지역이 가장 우월하다는 사상으로, 과거 중화사상은 현재 서구식 민족주의와는 비슷한 점이 별로 없어 민족적 거부감이 적었다. 또 하나의 다른 예로, 초기 로마가 팽창하던 시절, 라틴 문화권이 가장 우월하다는 사상도 있었다. 현실은 로마와 라틴 연합이 싸우게 되었지만, 결국 승리한 로마가 점령한 라틴 도시국가들을 대한 것만 봐도, 로마 역시 이런 생각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로마는 이들에게 완전한 자치를 주고, 투표권을 제외한 모든 로마 시민과 동등한 권리가 보장된 라틴 시민권을 주었다. 연공도 요구하지 않았고, 단지 요구한 것은 전쟁이 났을 때 로마에게 보조병을 보냄으로써 협력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점을 보면, 로마의 민족 역시 라틴 민족들을 자신들과 동일하게 여기지는 않았지만, 같은 라틴 문화권으로서 상당한 특혜를 베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 역시 중화권의 영향이 크진 않은 편인 원나라 같은 이민족 왕조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중화권에 속한 나라들에 상당한 특혜를 베풀어 주었다. 간혹 같은 문화권을 오랑캐로 비하하는 것 때문에 민족주의적 관점으로 볼 수도 있으나, 자기들끼리도 오랑캐라고 비하하는 기록이 있고, 그리스, 로마, 페르시아 역시 같은 문화권에 속한 다른 민족을 비하하기도 했으며, 세상사 돌아가는 것만 봐도 법칙이 있거나 법률로 막지 않는 한, 그런 일들이 발생하는 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예컨대, 오랑캐 취급을 당했던 일본도 여진족을 오랑캐라고 비하했다.

민족적인 면보다 학문, 문화적 우월성이 강조된 사상이기 때문에 타민족들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으며, 이 사상의 영향으로, 이민족들이 중국을 정복하고 얼마 되지도 않아서 중국을 자처한 사례들이 많다. 한 예로 청나라는 40년 만에 중국을 자처했다. 이 경우 민족끼리 동화되었다고 보기보다는, 중국 지역을 먹음으로써 타민족, 타국들보다 우월한 문명을 갖게 되었다고 선전한 것이다. 중화권에 속하는 국가들이 중화사상을 받아들인 이면에는 우리는 이런 위대한 문명의 일원이라는 생각이 있었으며, 서구에서 근대적 민족주의가 들어온 최근의 시각이 아니라면, 딱히 민족적 자부심을 훼손하지 않는 사상이기 때문에, 실질적 창시자인 한족만이 아닌 타민족들에게도 빠르게 전파되었다.그리고 대부분이 죄다 한족으로 동화된건 신경쓰지 말자

5 민족주의(nationalism)와의 비교

중화사상은 민족주의 또는 국수주의와 일견 비슷한 듯하면서도 차이가 있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흔히 민족주의로 번역되어 쓰이고 있는 'nationalism'은 근대 영국에서 출발하여 유럽을 중심으로 퍼진 개념이라서, 그 이전부터 존재한 중화사상과는 태생이 다르다.

'nationalism'은 특정한 집단의 구성원 개개인이 하나의 공동체인 '민족'에 속한다는 자기의식을 지니고, 이를 대표하는 정체인 국가를 성립 및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상이다. 이를 통해 개별적인 국민 국가는 고유의 언어, 문화 등을 누리며 타 국가와 구분된다. 이 개념이 수입되는 과정에서 민족이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일단 '근대 민족주의의 수입 이전에도 중화민족이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근대 이후에나 등장한 개념화 작업이 근대 이전에 존재했다고 보는 점에서 무리한 해석이다.

유럽에서도 소위 '민족주의'로 지칭되는 'nationalism'이 18세기나 되어서야 등장했다고 이야기되는 이유는, 'nation'의 구성원들이 뚜렷한 독립적 공동체 속의 자기 정체성을 보유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국민 국가의 보통 교육과 같은 것인데, 유럽에서 이것이 태동한 것은 18세기 계몽주의 사상 전파 이후이며, 그것의 실현은 19세기에 들어서야 보편화되었다. 그런데 중국만이 이러한 'nation'의 개념을 근대 이전부터(그것도 기원을 찾자면 상주 시대부터) 갖고 있었다고 보는 데에는 무리가 많다. 때문에 최근 학계에서는 '민족'의 개념을 근대 이전으로 소급하는 데 조심스러운 편이며, '자국 의식' 정도의 용어로 대체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반면 '화(華)'라는 개념은, 물리적인 혈통보다는 정신적인 사상, 문화, 관념적인 성격이 강하며, 소위 소중화를 표방한 주변국들도 중화사상을 인정하고, 조공 체제와 사대로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또한 동아시아에서는 이러한 중화사상에 반드시 중국 중심의 세계 체제가 동반되었으므로, 화이관(華夷觀) 자체가 개별 국가의 이념을 덮는 보편적인 세계관의 역할을 크게 했다.

일단 중화사상은, 소국 혹은 속국이 중국이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평화적인 주종관계를 맺는다면, 중국은 이런 소국에게 문화-정치면에서 원조를 해준다는 것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중화사상이 팽창주의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국은 이런 중화질서 내에서 행해진 조공무역에서 다른 문화권에 비해 이익을 주면서 소국을 자신의 편으로 잡아놓으려고 했다.

실제로 중화식 질서에서의 서열도 국력의 영향이 물론 있기는 했지만 딱 국력에 의해서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단, 팽창주의에 관해서는 중국 역사에 관해 잘 알게 되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는데, 중화사상과 별개로 한족이 팽창주의가 아닌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단지 사상과 문화의 차이로 흔히 소개되는 팽창 방식과 차이가 있어 느끼기 어려울 뿐이다. 동남아의 일부 지역, 중국 남방 지역이나 만주 등의 사례(고구려인, 베트남 민족 등등)를 보면 학살, 강제 이주 등으로 그 지역에서 타민족의 뿌리를 뽑은 후에서야 이주하는 방법이 한족의 팽창에 주로 이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도 옛날이라 정사 혹은 준정사로 취급받는 것들이 적어, 신뢰성의 문제가 있으나 춘추전국시대 같은 시대를 보면 이는 은근히 고대부터 중국에서 이용되던 방식으로 이민족 정복 기록 후에도 이주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고, 영토도 딱히 크게 늘어나지 않고 있다가 이민족이 그 지역에서 대규모 학살, 이주 혹은 한족 혈통결혼이나 족보 위조 등을 자처한 후에서야 영토와 그 지역에서 한족 인구가 빠르게 팽창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교과서에서 보면 중국 대륙의 촉한 지역, 남방 개척 등이 마치 한 번에 그냥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나 중국 대륙의 한족이나 이민족들의 역사를 교차검증하면 실제로는 위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딱히 혈연에 한정된 사상이 아니라 이로 인해, 소위 '중화민족'의 구성원이 아니어야 할 조선 등지에서 오히려 스스로가 중화임을 주장하는 소위 소중화 사례가 나타난다. 이들이 혈통적, 인적으로 중화를 주장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며, 문화적인 의미가 크게 작용한 것이다. 즉 민족주의라는 말로는 문화의 파급과 세계 체제라는 의미에서 중화사상의 외연을 포괄하지 못한다. 이는 근대 유럽의 민족주의와 달리, 독립적인 자기 정체성(이는 타자와의 명확한 구별을 동반한다. 즉 동아시아 세계 자체를 뭉뚱그려 파악하는 중화사상의 기저와는 큰 차이가 있다)을 가진 공동체의 성립과, 이것의 수호를 동반하지 않는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근대 민족주의와 중화사상은 그 근저를 특정한 인적 집단에 둔다는 점에서 많은 공통점을 지니지만, 근대 민족주의는 자기 민족(nation)과 타자와의 명확한 구분, 자기 공동체를 대표할 국가의 건립과 공동체의 정체성 유지에 굉장한 힘을 쏟는 반면에, 중화사상은 문화적 역량(그리고 그것을 통한 외부 세계의 '교화')과 세계 체제라는 의미가 더욱 강조되며, 그로 인해 동아시아 체제와 중국의 정체성을 떼어내서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차이로 들 수 있겠다.

다만 근대 이후 중국에 민족주의가 전파됨에 따라, 근대 민족주의와 중화사상 간에도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속성이 강해졌다. 이는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입을 겪으면서 대내적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했던 것이기도 하다. 청나라 시절까지의 중화사상이 동아시아 세계의 종주국으로서 일종의 자뻑이었다면, 현재의 중화사상은 '하나의 중화민족'을 주장하는 근거로서, 국민 국가의 구성을 위한 자국 통합의 중요한 도구로 작용하고 있다. 그 결과 중화사상은 티베트위구르 등의 소수민족 통치를 합리화하는 이념적 이데올로기로서도 기능하고 있다. 그렇기에 현대의 중화사상은, 19세기 이전의 것과 일정한 부분에서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6 중화사상으로 인한 패권주의

중국의 한족 정권이 한반도를 직접 손에 넣으려고 한 것은 한무제수양제, 당태종, 당고종 정도이다. 그 이후 수많은 외침은 북방의 유목민족이나 일본에 의한 것이었던 게 사실이다. 당고종 이후로 한족정권이 한반도를 손에 넣으려고 시도한 적도 없으며, 한반도 국가를 분명히 이민족 국가로 인식했고, 중국의 영역에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에 맞춰 한반도 정권들은, 외교관계의 한 형식인 사대의 예로 중국을 명목상의 상국으로 인정함으로써 중화질서에 편입하는 방식으로 평화를 얻었다.

더구나 보통 중국 대륙의 통일 왕조는, 먹을 영토도 얼마 없는 동쪽보다는 서쪽으로 팽창하는 것을 선택했다. [1] 동쪽은 침공할 곳이 없으면 침공하는 정도.[6] 역사적으로도 북서쪽과 남쪽에 비해서 생각보다 동쪽에는 큰 관심이 없었으며[7] 동쪽에 관심을 가질 때는 시비를 걸기도 하는 국가들이 나타날 때 정도였다. 유목민들은 모르겠지만 최소 한족 왕조들 때에는 옛날 기록들을 참고해도 동쪽 영토에 대한 인식은 생각보다 그리 좋지 않았다.[8]

그러나 19세기 이후에는 이야기가 달라져서, 중화사상은 서방의 패권주의와 다를 게 별로 없는 형태가 되었다. 현재 남중국해 등지에서 이뤄지는 분쟁이나 한반도에 대한 압박은 겉으로 보면 자원을 놓고 벌이는 충돌이지만, 실제로는 이들 나라를 장기적으로 장악하여[9] 최소한 제국 주변의 안정을 확보하고, 팽창이 목적이라면 이들 지역을 기반으로 더욱 뻗어 나아가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 증거 중 하나가 바로 도련선 전략이다.[10] 즉, 근현대의 중화사상은 민족주의, 패권주의라고 봐도 무방하다. 사실상 중국위협론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는 셈이다.

7 관련 영상

(유튜브)30분 책 읽기,중화사상과 동아시아 - 이희진(이희진의 역사읽기)

8 관련 항목

  1. 문제는 중국 공산당의 교육과정 자체가 너무 지나치게 애국심을 강조하는 방향인데, 여기에 중화사상까지 곁들여 지니 필연적으로 중국 국민들의 과격화 혹은 국뽕 가 이루어 지게 된다는 점. 결국 중국 공산당은 자기들이 이 꼴을 만들어 놓고 뒤늦게서야 국민들에게 자제를 부탁하는 블랙 코미디스러운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물론 중국 공산당 역시 THAAD 배치 문제나 남중국해 문제에서 보여준 꼴도 가관이었다.
  2. 은나라 왕조 시절 그 지배권 동부에 해당하는 산둥 반도 부근. 한반도나 일본도 취급 자체는 동이라고 할 수 있으나, 춘추전국시대 이전에는 지리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3. 紳士 : 지방 유지, 명문가
  4. 여기서 주로 수련시킨 무술이 홍가권(洪家拳)으로 발전해 나아갔다고 하며, 무협소설, 무협영화의 좋은 소재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5. 연나라는 주나라의 전진 멀티로서, 주나라의 문화를 이 지역에 전파하는 선봉이었고, 초, 오, 월은 주나라와는 다른 정체성을 주장하면서도, 주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중국으로 편입됐다. 진나라는 전자인지 후자인지 좀 논란이 있는 편.
  6. 사실 지금도 딱히 자원도 없고 인구 밀도만 높은 지역들은 탐내지 않고 대체로 바다 혹은 북서 방향으로 팽창하기를 원하는 편이다.일대일로 같은 걸 보면 그렇다. 괜히 함께 미국에 맞서고 있는 러시아 혹은 인도에게 불신감을 주면서까지 1인당 자원량이 많은 지역들을 영토 교환(실제로 인도에게 아크사이친과 아루나찰프라데시의 교환을 제시하기도 했다.)을 하거나 돈을 주고 사려고 하는 게 아니다. 러시아하고도 영토 협상을 하고 있어서 국경이 조금씩 변하기도 하며 세계 곳곳에서도 이런 협상들을 하고 있다. 시세보다 약간 높은 가격(20% 정도)을 제시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모친출타한 값을 요구하면 그냥 무시하기는 한다.
  7. [2] 이런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비교해보면 그렇다.
  8. 한족들은 좋은 토지들을 찾아 돌아다녔는데, 일단 양은 많아도 물의 문제 같은 것들이 있는 곳들처럼 그리 좋지 않은 곳들이야 물론 중국 대륙에도 있었지만 동쪽은 한반도의 경우처럼 산이 많고 의외로 토착 인구도 많은데다가 토지의 질과 양이 모두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물론 북서쪽도 가까운 지역들은 토지가 질과 양이 모두 별로 좋지는 않았지만 사막을 넘으면 매우 좋은 토지들이 있다는 걸 중국인들은 이미 한나라 시대에 알고 있었으며 사막을 넘는 도박을 해볼만하다 생각해서 한무제 같은 제왕들도 시도를 하긴 했었다. 그러나 동쪽 진출은 광무제나 위징 같은 사람들도 경제나 국력 낭비 정도로 여겼다. 물론 결국 북서 방향에서는 유목민들과 사막에 넘는데 실패하고 남쪽 방향에서는 동남아 민족과 정글에 막혔다. 히말라야처럼 그냥 이유없이 장벽 역할을 하는 높은 산들도 방해물이었다.
  9. 단, 1인당 자원이 부족한 판국에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들을 직접 병합할 생각은 거의 없다. 세력권을 바꾸려고 하는 것뿐이다.
  10. 제1~3도련선으로 나뉘는데, 제1도련선은 한반도를 제외한 서태평양 연안 지역. 제2도련선은 한반도를 포함하고 일본 열도까지 영향권 하에 두는 서태평양 전역. 제3도련선은 미국의 하와이 외곽까지 뻗어나가 태평양을 반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