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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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짚신(볏짚)미투리. 삼베나 모시 등으로 삼은 것으로 일반 짚신보다 정교한 고급품이다.

1 개요

한국의 전통 샌들이자 으로 만든 신발. 마로 만들어진 신발은 따로 미투리라고 부른다.
짚신도 제 짝이 있다.는 속담으로 솔로들의 마음에 못을 박은 물건이기도 하다.[1]
짚신벌레라는 명칭은 길쭉하니 짚신의 모양과 닮아서 붙여진 것이다.

2 소개

볏짚으로 만들어진 신발이 대표적이지만, 사실 볏짚 뿐 아니라 왕골이나 부들. 모시, 삼베 등의 마. 면실을 꼬아 만드는 등 짚신의 재료는 그 종류가 아주 많다.

이라는 것 자체가 식물의 줄기를 뜻하기 때문에 볏짚만이 짚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됐다. 일례로 부들로 만들어진 것은 부들짚신. 왕골로 만들어진 것은 왕골짚신 등으로 부른다.

서민들의 대표적인 신발이었으며, 부들이나 왕골로 만들어진 정교한 짚신은 귀족들이 신었다고 한다. 의외로 내구도가 높지만 그래봤자 짚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사용하다 보면 못쓰게 되었으며, 먼 여행을 떠날 땐 예비 짚신을 챙기는 것이 상식이었다. 멀리 여행나가는 사람의 봇짐엽전 뭉치같은 모양으로 삼사십개의 무더기가 묶여 매다는 식으로 휴대하는데 가볍고 부피가 작기 때문에 가지고 다니기도 편하다. 그러나 실제 착용감은 영 좋지 못하며 특히 겨울이나 비오는 날에는 짚신을 신기가 참으로 난감하다. 그래도 나름대로 장점은 있다. 짚신 자체는 접지력이 매우 좋은데, 일례로 짚신을 신으면 빙판 위에서 거의 아이젠을 신은 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다. 발시린건 어쩔 수 없지만.

사실 튼튼한 갑피로 발등을 감싸고, 밑창과 중창으로 발바닥과 발가락을 잘 보호해주는 신발을 주로 신는 현대인이 짚신을 신기에는 부적절하다. 짚신만 신고 걸으면 발바닥에 짚으로 만든 얇은 돗자리를 붙이고 걷는 것과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사실상 맨발과 다를 바 없다. 구조상의 문제로 인해 충격흡수도 없고 발을 보호할 수도 없다. 자갈밭에서라도 걷는다면 맨발보다야 낫지만 땅바닥의 요철이 전부 느껴지는 수준이다. 조선시대에는 신바닥을 삼을 때 씨줄을 빼서 푹신하게 만든 짚신[2]도 있었지만, 동시기의 다른 나라나 고대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방식이다.

2.1 고대의 짚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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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짚신 유물백제 짚신 일러스트[3]

백제 시대의 짚신으로 부들로 만들어졌다. 밑판만 존재하고 끈을 감아 발을 고정하던 원시적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4] 사진에 보이는 끈은 도갱이(뒤축)와 뒤당감잇줄[5] 부분. (참조) 일본 짚신인 와라지(草鞋.초리[6])와 형태가 상당히 유사하다.

신라 이(異)형토기. 국립경주박물관 소장품(5세기)가야 이형토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5~6세기)

가야신라의 짚신은 백제의 것과는 달리 실제 유물로 전해지는 것은 매우 적으나 대신 죽은 이가 신고 가도록 무덤에 같이 묻었던 부장품인 짚신모양 토기에 줄을 엮은 방향이나 줄의 모양 등, 그 형태가 상당히 상세히 남아있다. 후술하겠지만, 돌기총의 형태나 높이로 보아 신라나 가야의 짚신이 조선을 위시한 후기형 짚신의 전신이 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이 존재한다. 고구려의 경우 짚신에 대한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고 그 연구 역시 정체 상태에 있다. 동시기 한반도나 중국과 비슷한 양상을 띄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만 존재할 뿐이다.[7]

한반도와 일본의 고대 짚신은 비슷비슷하긴 해도 국가마다 특징이 조금씩 다른데, 기본적으로 삼는 기법이나 방향에서부터 조금씩 차이를 보이며, 신라와 가야, 그리고 조선의 것은 돌기총[8]이 3~4cm 수준으로 길지만 백제와 일본의 것은 매우 짧다. 일본의 것은 끈을 샌들처럼 발목까지 올려 돌려감는데 반해 한반도의 짚신은 모두 돌기총에서 매듭을 지으며, 백제, 신라, 가야 짚신의 돌기총은 양 옆으로 3개씩 총 6개. 조선 짚신은 하나씩 총 2개. 와라지의 돌기총은 2개씩 총 4개라는 것과 백제짚신의 도갱이는 가늘고 긴 반면 신라짚신과 와라지의 도갱이는 짧고, 조선짚신은 길고 두껍고 일본의 것은 갱기[9]가 없는 등.. 깊이 따져보면 여러가지 있다.

샌들 형식이던 고대 짚신이 앞총이 촘촘한 후기형 짚신으로 변화한 과정은 밝혀지지 않았다. 유물들을 토대로 볼때 대략적인 변화 시기는 통일신라~고려 시대의 사이 정도로 추정할 수 있지만 변천과정 역시 유물, 자료 부족으로 연구는 거의 되지 않고 있다. 밝혀진 것은 한반도와 중국은 후기형 짚신을 받아들였고, 중국의 몇몇 소수민족들과 일본은 초기형 짚신의 형태를 비교적 많이 간직하고 있다는 것 정도.

2.2 와라지

일본의 짚신은 와라지라고 부르는데, 조리나 게다처럼 발가락 사이에 끈을 넣어 묶는 방식으로서. 블리치의 사신들이 신는 짚신을 생각하면 된다.

상술했듯이 돌기총은 좌 우 2개씩 총 4개이며, 한반도의 짚신과는 달리 갱기가 없고 끈을 교차해서 감아 착용한다. 끈이 발목까지 감겨 올라가는 것이 특징으로 묶는 법은 정석이 따로 없이 착용자의 취향대로 묶으면 되는 듯 하다.

참고로 이 와라지는 백제에서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참조 밑창에 끈으로 발을 고정시키는 원시적인 형태의 신발은 고대 국가에 널리 퍼져있는 것으로서, 게다의 예와 같이 초창기에는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서 와라지와 유사한 형태의 짚신을 신은 것으로 보인다.

3 기타

참고로 사극에 등장하는 짚신의 경우 절대로 그냥 신는 짚신이 아니다. 위에서 설명했지만 현대인의 발은 짚신을 그대로 신기에 부적절하기 때문에 짚신을 신게 될 경우 배우보조출연자 공통으로 짚신 속에 실내화를 신은 뒤 그 위에 버선을 신고 짚신을 신는다. 안그러면 발이 못견딘다. 이 때문에 연기자용 짚신이 개발되었는데 짚신에 고무밑창을 장착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극에서 인물들이 현대적인 밑창이 달린 개량형 목화#s-2를 신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된다.

의외로 고대를 다루는 사극에서 제대로 고증되지 않는 소품 중 하나. 조선이나 고려 시대를 다루는 작품에서 앞총이 촘촘한 후기형 짚신이 나오는 것까지는 좋은데, 삼국시대를 다루는 작품에서조차 시대를 초월해서 후기형 짚신을 사용한다. 명백히 유물이 전해지는데도 불구하고... 한국 사극 중에서 고증 좋기로는 손에 꼽는 근초고왕대왕의 꿈에서도 고대 짚신은 고증되지 않았다. 물론, 후기형 짚신이 구하기 쉽다는 점과 신발 고증은 외국의 사극들에서도 대충 넘기는 경향이 강하고 고대 짚신은 출연진의 발을 보호할만한 눈속임을 하기 애매하다는 것도 감안해야겠지만 분명 아쉬운 부분.

국립 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는 궁남지와 관북리 등 백제 유적에서 발굴한 64점의 짚신 유물을 토대로 짚신의 형태나 재료, 와라지와의 유사성 비교, 등을 분석하여 2003년에 <백제의 짚신>이라는 보고서를 출간한 적이 있다.

2010년대 한국에 스베누라는 쟁쟁한 경쟁자가 등장했는데, 솔직히 역사성으로 보나 실용성으로 보나 짚신의 압승이다 감히 조상님들의 국민신발을 그런 것과 비교하다니 다시는 짚신을 무시하지 마라.
  1. 근데 사실 짚신은 좌우 구분이 없기 때문에 짝이라고 할 게 없다. 조상님들이 당신을 낚았다 그 말이다
  2. 예를 들어 본 문서 상단의 왼쪽 이미지의 짚신이 그렇게 만들어진 물건이다. 잘 보면 신바닥이 복슬복슬하다.
  3. <백제의 짚신>논문에서 묘사한 백제 짚신의 모습과 현대에 만들어진 한국, 일본의 짚신의 형태를 참조하여 그린 상상화이므로 실제 백제 짚신과 완전히 동일하지 않을 수도 있다.
  4. 흔히 알고있는 조선 짚신은 후기형 짚신으로서 촘촘한 앞총이 발을 전체적으로 감싸준다.
  5. 신둘레에서 발을 잡아주는 끈
  6. 초리는 짚으로 만든 샌들을 뜻하는 단어로, 일본의 짚으로 만든 조리가 현대에 들어 여름에 신는 '조리' 혹은 '쪼리'라고 부르는 슬리퍼의 형태와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
  7. 오히려 고구려는 고분벽화에 간략하게나마 묘사되는 신발을 보면 갖신 쪽이 많이 보인다. 부여 역시 혁답(革鞜)이라는 갖신을 신었다고 중국 기록에 전해지고 있다. 둘 다 수렵문화가 많이 발달한 나라라는 공통점이 있다.
  8. 당감잇줄을 지지해주는 신날에 달린 기둥.
  9. 총을 고정하고 표면을 매끄럽게 정리하기 위해 당감잇줄 겉에 감아주는 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