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린드버그

Charles Augustus Lindbergh. (정확히는 2세. 아버지는 스웨덴 출신으로 공화당 의원이었다.)
1902년 2월 4일~1974년 8월 26일

lindbergh-face(1).jpg
1927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남자
Time Man of the Year 1927
300px
올해의 인물
제정
찰스 린드버그
1927
월터 크라이슬러
1928

소형 비행기로 미국~프랑스를 착륙없이 단독으로 처음 비행한 사나이. 그리고 생리학자 A 카렐과 협력하여 장기를 몸밖에서 산채로 보존하는 카렐-린드버그 펌프를 만들기도 했다.

1 개요

HIS_007_1.jpg
텍사스의 육군비행학교 출신[1]으로 1925년 예비역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Charles_Lindbergh_1925.JPG

1925년 10월, 우편항공기 조종사로 일했다. 얼마 뒤 33시간동안 미국~프랑스 대서양 무착륙 단독비행을 해서 세계적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로 이주하여 생리학자 A 카렐과 함께 장기를 몸밖에서 산채로 보관하는 카렐-린드버그 펌프를 만들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장기 이식 자체가 발달못했다) 이렇게 육군 본부에 들어가기도 하고 미국에서 민간인으로써 살다가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전쟁에 참가하기도 하고, 미국 예비역 공군 준장이 되기도 하는 등 인생의 절반 이상을 비행에 쏟은 인물.

2 대서양 횡단

width=100%
1927년, 33시간 무수면 단독 비행을 마치고 파리에 도착한 뒤 린드버그의 비행기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 린드버그는 파리 시간으로 밤 10시에 도착했으므로 도착 순간은 아니다.

33시간 동안 미국~프랑스 대서양 무착륙 단독비행을 해서 세계적 영웅이 되었다. 린드버그가 최초로 대서양을 날아서 횡단했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실제 린드버그는 67번째로 대서양 비행에 성공한 사람이며, 정확히 표현하면 무착륙 단독으로써는 최초로 성공한 사람이었다. 단체 비행이라면 돈 있는 사람들이 진작에 성공했겠지 사실 도착지가 파리였던 덕[2]에 유명해져서 앞의 66명이 희미해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 탓에 린드버그의 횡단이 최초인 것처럼 알려져버린 탓이 크다. 참고로 도착지가 파리였던 것은 대서양 횡단에 25000달러의 상금을 건 대부호 레이몽 오티그(Raymond Orteig, 1870~1939년 6월 6일, 당시 뉴욕시티 호텔 소유주)가 목적지를 뉴욕-파리 코스로 지정했기 때문이다[3][4]. 웃긴 것은 리플리('믿거나 말거나(Believe it or not)'의 그 리플리 맞다)가 비행선을 포함해 당시 린드버그의 비행 이전 25명이 대서양을 날아 횡단했다고 하자 미국에서 애국심의 부재를 질타하는 편지 2만 5천통이 쏟아졌다는 것이다.

아무튼 대단한 모험이기는 한데, 린드버그가 탔던 "스피릿 오브 세인트루이스(Sprit of St.Louis)"[5]는 굉장히 작고 가벼운 비행기였기 때문에 2명 이상이 탑승할 크고 엔진이 여러 개 달린 비행기를 준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경쟁자들에 비해서 더욱 돋보였다.[6] 린드버그의 전기를 보면 그가 출발하기 전에 시도한 르네 퐁크가 4명이나 탑승할 수 있고 침대까지 탑재한 비행기를 사용했다가 중량이 너무 무거워 이륙하지 못하고 불길에 휩싸인 사례가 나오는데, 린드버그는 그래선 안 되고 1그램이라도 무게를 줄여야 한다고 계속 생각했다.

이렇게 작은 비행기를 선택한 건 교대할 수 있는 예비 조종사가 타거나 엔진이 추가로 달려 비행기가 크면 클수록 연료 소비량이 오히려 더 커진다는 판단 때문. 실제로 린드버그는 육분의, 조명탄, 무전기, 전등, 심지어 위험에 대비한 낙하산조차 챙기지 않았다고 한다. 자기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짐을 모두 버리고 지도조차도 필요 없는 부분은 잘라내버리는 철두철미함을 보여줬다. 이렇게 해서 그 작은 비행기에 1703리터(2750갤런)의 연료를 실었고 항속거리는 7200km가 되었다. 필요한 비행거리는 5760km이므로 비행기의 능력은 충분했다.[7] 이 때 어찌나 연료를 많이 실었는지 연료통이 시야를 가려 잠망경을 개조해서 앞에 단 뒤 그것에 비행을 의존해야 했다고 한다[8].

린드버그의 비행에서 가장 큰 난관은 혼자 있으면서도 33시간 동안 을 자지 않아야 했던 것이다. 조종간 잡고 있는 사람이 린드버그 뿐이고 특별히 자동 조종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니, 깜빡 잠들기라도 하면 그 즉시 대서양으로 다이빙 하게 된다. 말 그대로 "잠자지마! 잠들면 죽어!" 무게를 줄이려고 음식물도 샌드위치 다섯 조각과 물 1리터밖에 싣지 않았기 때문에 배고픔과 갈증에도 시달려야 했다. 화장실변기도 없는 만큼 나올 게 있어서도 곤란했고.

비행 도중에 각성제를 좀 쓰기도 했는데 크게 도움은 안 되었던 듯.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비행장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인사만 하고 일단 호텔에 가서 잠부터 푹 자고 나왔다.지금 졸려 죽겠는데 파리가 문제냐 이래서 린드버그 위인전을 읽으면 "잠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3 아들 유괴사건

charles-lindbergh-son-kidnapped.jpg
...여기까지는 인터넷 백과사전만 봐도 충분히 알수있는 사실이지만 린드버그에게는 끔찍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1932년 그의 만 2살난 아들인 찰스 린드버그 주니어가 유괴되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었다.[9] 유모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들어오자 창문이 열려 있고 사다리 하나가 창문에 걸쳐진 채로 아이만 사리진 것. 아내인 앤 모로 린드버그(그녀는 나중에 린드버그와 같이 비행기로 대서양도 횡단했다)사이에 태어난 주니어가 유괴되자 전세계가 난리났다. 당시 린드버그는 레전드 인물이라서[10] 미국에서도 너도 나도 린드버그의 아기를 찾겠다고 나섰다. 유괴범은 처음에는 편지[11]5만 달러를 요구했으며 나중에는 10만 달러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린드버그는 조용히 거절하고 암흑가 인물과 접촉하는 등[12] 망신을 샀고 콘돈 박사[13]와 협력하여 수사를 했다. 어느 날 협박장이 날아와서 그에게 큰 돈을 요구했고, 돈을 주고싶으면 신문광고에 실으라는 대담한 범행을 했다.
Lindbergh_Kidnapping_Note.jpg
협박장 사진.

결국 범인의 요구대로 당시 거액인 5만 달러를 아내랑 린드버그와 단 둘이서 복면을 쓴 범인에게 돈을 건네주었지만 아들은 결국 린드버그 집주위에서 한 흑인에 의해 시체로 발견되었다.[14]

당연히 린드버그와 미국은 뒤집어졌고 다행히 지폐의 일련번호는 기록되어있었다.

몇년뒤 어느 주유소에서 이 일련번호의 지폐를 썼다는 제보가 왔고 차량번호를 기록해놔서 찾을수있었다.

200px-Hauptmannmugshot2.jpg
(범인으로 잡힌 하우프트만)

범인은 독일출신의 목수[15]인 리하르트 하우프트만(Richard Hauptmann/1899~1936)이였고(협박장에도 독일식 영어가 쓰였다고한다) 콘돈 박사가 들은 범인 목소리와 일치했으며 린드버그가 범인에게 준 지폐일련번호와 일치하는 돈다발이 발견되었다. 범인은 이게 자기에게는 독일로 이주한 이시도어 피슈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가 맡겼으며 지금은 죽었다고 말했다[16]. 그는 재판에서도 이 증언을 반복하는데 이 말도 안되는 증언은 배심원의 괘씸죄를 사기에 충분했다.

범인의 아내는 남편이 무죄라고 1994년 죽을때까지 주장했지만 결국 범인은 끝내 범행을 자백을 안 했어도 결정적인 증거가 충분해서[17] 사형당했다. 사실 증거 일부는 검찰에서도 조작했었다고 했지만 범행에 쓰인 사다리는 목수가 아니면 만들 수 없었는데 조잡하긴해도 충분히 사다리로써의 기능이 작동했다.

그리고 훗날 재감정했는데 사다리는 범인의 목재소의 목재[18]와 일치하고 필적도 일치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건이 린드버그가 장난으로 아기를 숨겼는데 그만 죽자 난처해서 자작극을 했니 어쩌니 하지만 증거는 너무 뚜렷했다... 라고는 하는데 현재 이 의견을 진지하게 믿는 주장도 있다.

이렇게 사건은 끝났지만 여러 수준낮은 기자들의 졸렬한 취재로 아내인 앤 모로우 린드버그(1906~2001)와 둘째 아들인 존(1932~ )까지 충격을 받은 것[19]에 분노한 린드버그는 프랑스로 이주하여 카렐-린드버그 펌프를 만들고 몇년뒤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4 그 뒤에

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태평양 전쟁에서 민간인 신분임에도 지원하여 300번이 넘는 폭격기 조종을 맡으며 종전 후 훈장 수여 및 예비역 공군 준장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1974년 하와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5 기타

  • 타임지가 선정하는 올해의 인물의 초대 선정자다. 1927년 타임지에서 한가한 주에 뉴스거리가 될만한 이야기를 선정하려고 했었는데 마침 그 해에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 비행을 커버 스토리로 싣지 않기로 결정했던 상황이었고 이러한 편집국장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 연말에 린드버그를 올해의 인물로 수상한 것이 그 시초였다.
  • ~버그라는 성 때문에 유태인으로 아는 경우가 있다. 이 항목 이전 글만 해도 이 성씨를 이야기하며 유태인이라고 적혀 있었을 정도이며 국내에 나온 유태인 관련 책자에서도 그도 유태인이라고 엉터리로 나왔는데 이 책자가 성씨만 보고 무작정 유태인이라고 소개한 게 허다했다. 덕분에 글래드스턴이나 찰톤 헤스톤,그리고 스티븐 소더버그도 유태인이라고 엉터리로 나왔었다. 그렇다. 소더버그처럼 성씨를 보면 알겠지만 유태인들이 많이 쓰는 성씨인 Berg가 아니다. 북유럽계들이 많이 쓰는 성씨인 Bergh처럼 유태인이 아닌 성씨로 린드버그 또한 북유럽 이민자 후손이다. 참고로 린드버그는 1956년 중동전쟁 당시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을 전쟁 도발국가로 비난하여 반유태인주의자라는 비난을 듣었고 그는 격분하여 이스라엘을 비난하면 무조건 히틀러의 졸개냐! 라고 반론하기도 했다. ... 그러나 실제로 2차대전 직전, 정확하게는 미국이 참전하기 직전까지 나치 독일에 대해서 호의적인 발언을 많이 했었고 나치즘의 한뿌리가 되는 우생학 지지자이기도했다.
  • 린드버그의 장인은 부자에 외교관이자 미국 상원의원을 지낸 고위 정치인 드와이트 모로 (1873~1931).
1927년 모로의 딸인 앤 모로와 결혼하면서 정치적으로 꽤 유명인이 되었다. 다행인지 몰라도 (?) 장인 모로는 손자인 주니어가 죽기 1년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 손자의 비참한 죽음을 못보게 되었다.
  • 린드버그의 가족 역시 나름 탄탄한 집안이었는데 아버지는 미국의 1차대전 참전을 반대한 하원의원 찰스 린드버그(1859~1924)다.
좀 웃긴 일화가 있는데 원래 아들이 조종사가 되는 걸 반대했지만 아들이 조종하는 비행기를 생전 처음 타보곤 이렇게 기분 좋은 적이 없었다며 이후로도 아들에게 비행기 태워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그나마 일가족이 비참하게 무너진 소설에 비하면 린드버그 일가는 나름 추스리고 산 듯.
  • 아내 앤과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두었는데 2003년에 그가 1950년대 후반부터 유럽에서 3개의 비밀가정을 꾸리고 있었단 사실이 밝혀졌다!!! 모자제작자 브리짓(Brigitte Hesshaimer)와의 사이에서 2남(데이비드David, 더크Dyrk) 1녀(아스트리드Astrid), 그녀의 여동생인 화가 마리에트에게서 바고(Vago)와 크리스토프(Christoph) 2남, 개인비서 발레스카(Valeska)에게서 이름 불명인 1남 1녀를 두었던 것. 심지어 그가 죽기 열흘 전에 세 여성에게 편지로 자신이 죽은 후에도 자신들의 관계를 비밀로 하라고 했다. 이 아이들은 2년에 한 번이나 며칠 정도만 아버지를 만났다고 하며 한동안 자신들의 아버지의 이름이 린드버그가 쓰던 가명인 Careau Kent라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몰랐다. 막내딸 리브가 이들을 만나기도 했다.
독일 함부르크의 어떤 생쥐[20]가 인간들의 쥐덫을 피해 미국뉴욕으로 도망간 다른 생쥐 친구들을 찾기 위해 배를 타려다가 고양이 때문에 실패한다. 이후 하수도에 숨은 생쥐는 어둠 속에서 나타난 박쥐를 보고 영감을 얻어 글라이더를 만들고, 글라이더가 실패하자 수제 증기 엔진을 단 글라이더를 만들고, 너무 무거운 증기 글라이더를 개량해서 가볍게 날아갈 수 있는 비행기를 만들어서 함부르크를 탈출해 대서양을 횡단해 뉴욕에 착륙한다는 놀라운 이야기.
  1. 당시에는 공군이 따로 없었다.
  2. 1919년에 정말 최초로 대서양을 무착륙 횡단한 2명의 영국인은 뉴펀들랜드를 출발하여 아일랜드에 도착했고, 이들 역시 데일리 메일지가 건 1만 파운드의 현상금을 노리고 참가했었다.
  3. 오티그 상은 1919년에 선언됐으며, 무착륙으로 뉴욕과 파리를 연결하기만 하면 그 외에는 어떤 제한도 두지 않았다. 그래서 린드버그 1인승 비행기를 준비하고 다른 사람들은 대형기를 준비한 것이다.
  4. 여담으로 린드버그가 오티그 상에 도전하려고 한 동기는 큰 비행기를 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 비행기가 매우 비쌌으므로.. 헌데 사실 스피릿 오브 세인트루이스 호도 그 대형기에 비해 싸다 뿐이지 엔진과 부분품 없이 1만 달러 견적이 나오는 비행기였다. 딱 소형기에 걸맞은 가격인 셈.
  5. 린드버그의 비행을 후원하고 비용을 대 준 사람들이 세인트루이스의 기업가들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했다. 린드버그는 본래 당대의 최고 비행기 제작사였던 드라이모터나 베란카의 후원을 받으려고 했지만 이름도 없는 놈이 지원은 무슨이라는 냉대만 받았다고 한다. 린드버그가 이 상에 도전한 이유도 베란카의 항공기를 살 돈이 필요해서였는데. 이 비행기의 값은 무려 2만 9천 달러였다. 결과적으로는 그보다 훨씬 많은 이득을 보았지만.. 린드버그의 경쟁자였던 버드 중령은 백화점 재벌 워너메이커의 지원을 받아 린드버그가 갖고 싶어했던 바로 그 비행기를 이용해 도전하려고 했는데, 린드버그가 출발하기 전까지 비행기가 준비되지 않아 출발도 못하고 패했다(..)
  6. 당장 린드버그 바로 다음에 시도한 체임벌린도 엔진이 2개인 크고 아름다운 비행기를 사용했다. 전기 중에 언급되는 린드버그 바로 직전에 시도했다 실패한 프랑스 조종사들도 2인으로 시도했고.. 이들은 대서양을 건너는 데까지는 성공해 보스턴을 지나갔다는 보도까지는 나왔지만 끝내 뉴욕에 착륙하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었다. 린드버그 직전에 도전했던 샤를 난젯사는 '백조호'라 불리는 본인만의 비행기를 끌고 막 돌아오던 참이었으나 어딘가에서 행방불명되었다. 추측으로는 연료가 바닥나 추락했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앞의 4인승 비행기와 더불어 린드버그가 연료의 탑재량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계기가 되었다.
  7. 다만 린드버그보다 1주일 뒤에 시도한 2인승의 콜럼비아호도 성공했다. 이쪽은 조종사 1명에 승객 1명이었으므로 교대를 할 수 없었기에 사실상 이 조종사도 혼자 대서양을 건넌 셈이다.
  8. 훗날 알려진 사실이지만 비행 전날 정비공이 연료를 넣던 도중 실수로 호스를 놓쳐 연료관이 호스로 막혔고, 이에 정비공은 몰래 그 부분을 절단한 뒤 다시 납땜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납땜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 하마터면 비행 중에 비행기 연료가 샐 뻔했다.
  9. 범행이 정말 대담한 게 아기가 집안에 있었음에도 어른들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납치됐다는 점이다. 베컴 등 유명인들이 자기 자녀를 언론에 가급적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
  10. 린드버그가 도착한 날 미국 주식거래소는 상장을 중단했고, 심지어 인기가 절정을 달릴 때는 린드버그의 모친이 미용실에 간다는 이유로 밖에 나오자 경찰들이 교통 정리를 해야 할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 일화도 있다.
  11. 여러 차례 유괴범으로부터 온 편지는 good를 gut로 적는 등 외국인의 소행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12. 당시 경찰들이 하도 암흑가 쪽을 뒤지니까 빡친 암흑가 쪽 사람들이 먼저 수사에 협조를 제공했다. 심지어 당시 알카트라즈에서 수감 중이던 알 카포네마저 수사를 도와주겠다고 제의를 했으나 당시 이미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진 그의 제공은 묵살당했다.
  13.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던 동네 약사로 직접 신문에 광고를 보내 유괴범에게 이 사건을 해결하고 싶으면 자신을 거치라고 했고, 실제로 유괴범은 콘돈 박사와 접촉했다.
  14. 범인이 처음부터 죽일 작정이었는지 납치 과정에서 실수로 사망하게 한 건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15. 그가 살던 브롱크스는 당시 흑인들과 독일인들이 많이 살던 곳이었다.
  16. 혹은 독일로 돌아갔다고 증언했다는 기록도 있다
  17. 단 이에 대해서는 직접 증거가 없이 간접 증거로 인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이견도 존재한다. 심지어 사고로 린드버그 부부가 아이를 죽이고 죄를 피하기 위해 하우프트만에게 뒤집어 씌웠다는 의견도 현재 존재한다.
  18. 워싱턴 행정부 소속의 나무 전문가 아르투르 쾰러가 에드가 후버에게 법정에서 증언한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오늘날의 제재소에서는 긴 각목을 다듬는 데 칼날이 8개 장착된 회전 대패를 사용합니다. 이 대패는 1분에 대략 4000번 회전하며, 32개의 절단면을 남기는데, 눈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중략) 그러므로 이 나무는 가문비나무이며 사우스캐롤라이나 혹은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로써 그 나무를 생산했음직한 공장이 4만(당시 미국 제재소의 수)에서 1598개로 줄어듭니다. 공장주들에게 문의한 결과 25개의 공장만이 넓은 쪽 8날, 각쪽 6날 장착 대패를 사용합니다. (후략)" 이런 식으로 검사한 결과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돈 앤드 컴퍼니라는 곳에서 사다리가 생산되었으며 이는 브롱크스의 럼버 앤드 밀워크스 컴퍼니로 판매된 것을 알아냈다고 한다.
  19. 어느 정도냐면 아이를 태우고 차를 몰고가던 아내를 다른 차로 교통을 방해한 다음 기레기들이 몰려들어 닥치고 사진이나 찍고는 그걸 대문짝처럼 신문 1면으로 싣고 린드버그 부인 슬픔을 잊고자 한다~ 이런 투로 보도했다. 이 신문을 본 린드버그는 신문을 찢으면서 인터뷰고 뭐고 모조리 거부하며 미국을 떠난다고 일갈했다.
  20. 도서관에서 인간들의 책을 읽을 정도로 호기심이 많은 생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