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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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역사의 구분
선사 시대
동기 시대청동기 시대철기 시대

1 개요

靑銅器時代
Bronze Age

일반적으로는 신석기 시대와 철기 시대 사이에 있었던 시대로 인간이 청동으로 만든 도구를 주로 사용했던 시대를 말한다. 신석기와 청동기 사이에는 구리만 쓰던 동기 시대(copper age)도 있었지만 매우 짧은 기간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생략된다.

어떤 사회는 청동기 없이 바로 철기시대로 넘어갔기 때문에 '석기-청동기-철기'의 이른바 세 시대 체계에 논란이 있다. 현대 학계에서는 지양하는 분위기. 대표적으로 일본은 야요이 시대때 한반도 도래인으로부터 청동기와 원시적 철기를 동시에 받아왔기 때문에 사실상 초기 철기시대와 청동기 시대가 겹친다. 다만 일본에서 철의 소재를 자체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고분 시대가 끝난 아스카 시대의 일이다. 이러한 논쟁은 철기 시대 항목을 참조할 것.

2 청동과 동

청동 문서에서도 알 수 있지만, 청동(bronze)은 구리와 주석 등의 합금이다. 후에 산화하여 푸른색이 된 것 때문에 청동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리라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산화 여부와 무관하게 청동이며, 동(구리,copper)과는 명백히 다른 금속이다.[1]

아울러, 청동기 시대의 금속 유물 중에서 청동이 아닌 백동이나 기타 구리 합금으로 된 것도 종종 있음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하지만 청동이 압도적이라 굳이 따로 분류하지는 않는다.[2]

3 왜 청동을 사용했는가?

청동의 재료인 구리주석에 비해 매장량이 적고 강도도 떨어지는 편이지만, 용융점이 낮아 제련 및 주조가 철에 비해 수월하였다. 구리와 주석의 용융점은 약 1030도이며, 철의 용융점은 1560도로 500도 이상 높다. 이 온도를 당시에 얼마나 올리기 힘들었냐면, 최초의 철기는 중국이집트에서 만들어 진 것인데, 인공적으로 녹여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철로 이뤄진 운석을 깎아서 만든 것이었다. 참고로 잘 마른 장작을 태웠을 때의 온도가 1200도를 넘지 못 하는데, 바꿔 말 하면 청동이 아닌 철을 가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선해서 불꽃의 온도를 300도 이상 상승시킬 수 있는 여건[3]이 필요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 내내 철의 값이 금보다도 비쌌다. 기술부족으로 제련도 안되는걸 어디다쓸라고참고로 금의 용융점은 약 1060도다.

게다가 땅 깊숙히 매장되어 있거나 반응성이 높아 산화철 등의 화합물의 형태로 존재하는 철광석과는 달리, 구리와 주석은 순수한 결정의 형태로 원석이 채굴되는 경우가 있어서 좀 더 찾아내기가 쉬웠다.[4]

하지만 구하기 쉽고 제련하기 쉽다 해도 그때 그 기술로 이걸 만드는 것은 정말 토나올만큼 어려운 과정이었다.# 흔히 금이나 철같은 금속성 매장물이 덩어리로 있을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저렇게 불순물 투성이이거나 가루 형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저렇게 노가다 해서 얻는 양도 쥐꼬리만큼. 모래 한 바가지 걸러내서 사금 몇 톨 건지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의 청동과 돌을 서로 충돌시키면 청동이 부러지거나 휘어진다. 그만큼 청동은 단단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청동기는 무기를 제외하고서는 대부분 권력자의 장식용, 제식(祭式)용으로 사용되었다. 당장 교과서나 관련 책에서도 이 당시의 청동기는 실생활용이 아닌 의식용이라고 못박아놨다. 물론, 사유는 청동이 귀해서라는 이유 하나만 적었지만... 물론, 의식용이라고 해서 우습게 볼 것은 아니다. 그 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청동기가 전쟁 무기로써 사용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일단 한 번 만들면 돌보다 편하다는 것. 부서지거나 구부러진 청동기구는 대장장이가 다시 녹여서 가공하면 재사용할 수 있다. 물론 비싼 건 마찬가지라서 한 번 얻은 청동 갑주, 무기 등은 자자손손 전해서 사용했고 전쟁의 주요 전리품이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와는 달리 기원전 대부분의 문명에서 사용했던 청동기과 철기는 비슷비슷한 강도를 가졌었다. 철은 반응성이 높아서 채굴했을 때 섞여있는 불순물의 양도 많고 정련과정을 통해 그걸 제거하는 일도 굉장히 어려운데, 때문에 당시의 미개한 야금 기술로 만들어낸 철기구는 그렇게 튼튼하지 못하였고, 그에 비해 청동기는 무기로 활용하기 위해 끝없는 기술 연구가 지속되어 상당한 야금 기술이 개발되어 중국 전국시대의 잘 보존된 청동검은 지금도 살상에 쓸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고 한다. 월왕구천검이 대표적인 사례. 당시 철이 청동에 비해 우위에 있었던 점을 굳이 꼽자면 재료수급이 용이했다는 정도..[5]

또한 청동기는 철기에 비해서 굉장한 보존성을 가지고 있다. 철은 반응성이 높을 뿐더러 녹에 주변의 멀쩡한 조직의 산화를 가속하는 성질이 있어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물이 대부분 형태가 엉망진창인 반면[6], 청동을 비롯한 구리합금의 녹은 그 자체가 강력한 산화피막이기 때문에 부식이 더 이상 안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막아주기 때문.[7]

4 청동기로 인한 변화

농업 혁명에 이은 청동기의 개발로 고대 사회의 형태도 상당히 많이 변하였는데, 대략 주요한 점을 꼽자면 다음과 같다.

  • 청동 거울, 방울, 향로[8]등을 만들어 본격적인 제구로 사용했다. 가끔씩 '청동 거울 등 일상 용품을 제조하기도 했다. 라는 문구가 실려 있는 책들이 있다. 고고학이나 역사학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문구를 보고 웃음을 참을 수가 없을 것이다. 또한 청동기시대 관련 시험문제에 단골로 나오는 문구기도 하다. 오답으로. 청동기 시대는 동물의 뼈,가죽으로 일상용품을 만들면 만들었지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잘 보이지도 않고 강도도 부실한 청동으로 일상생활용품을 만들 여건도 이유도 없었다. 21c에 금이나 다이아몬드로 수저나 그릇을 만들어 쓰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해보자. 기름국에는 있다 무엇보다도 청동기 시대의 청동거울은 제사 의식을 위한 도구였지, 일상용품이 아니었다.
  • 동시에 오래전부터 있었던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이 보다 확실시되는 경향을 보인다. 즉, 종교가 싹트기 시작했다.
  • 지역 간의 장거리 교류가 활성화되었다. 구리는 그 자체로도 귀하며 특히 청동을 만들기 위해서는 주석과 혼합해야하는데, 주석의 산지는 매우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청동기 시대 가장 부유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청동기를 만들기 위해 브리튼 제도(!)에서 주석을 수입해왔다.
  • 계급사회가 확립 이라 쓰고 높으신 분들이 처음으로 생겨나버렸다 그리고 그정신을 이어가는 그 분 위에서도 누누히 말했듯 청동기는 매우 비쌌고, 청동무기로 인해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당연히 돈이 있는 이들이 군인이 되었고, 많은 재산과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다.
  • 한반도에서는 무늬가 없는 민무늬토기가 널리 사용 되었다.
  • 한국의 경우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 고인돌이 생겨났다. 고인돌 자체는 한반도에서 특징적으로 발견되는 유물이지만, 세계적으로 거석 문화가 이 시기에 발생했던 것은 맞다. 예를 들면 스톤헨지라거나. 거석 문화가 생겨났다는 것은 그만큼 큰 돌을 아무런 실용적인 이유도 없이 어떤 사람의 의도에 의해 옮겨야 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에 계급 사회가 발생했다는 증거로 본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그 이유는 고인돌의 경우 생각보다 너무 많이 만들어졌기 때문인데, 일례로 가장 많이 나온 전라남도에는 90년대까지 2만개가 확인되었다...전라도가 아니라 전라남도이다. 현재는 아마 전라남도에만 2만 5천개까지 확인되지 않았을까라는 말이 나오는데 규모도 엄청나게 크게, 흔히들 북방식이라고 불리는 탁자식과 비교해서 남방식이 볼품없다고 보는데 전체적인 묘역시설과 묘광 그리고 개석의 무게를 보면 북방식은 남방식에게 게임이 안된다. 심지어 진주에서 발견된 것은 개석 무게만 350톤이고 묘역시설은 가로 80m이상에 세로 10m 이상이었다. 헌데 당시 한반도 남부지역이 뚜렷한 계급사회였냐면 전체적인 맥락에서 그다지 손을 들어주기 힘들다[9].

여담으로 역사 과목 시험치다 보면 객관식 보기 중에 '청동기시대에는 청동으로 농기구를 만들었다'라는 항목에 혹해 체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면 틀린다. 교과서적으로 말하면 청동기는 귀하고 물러서 농기구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물론 청동제 농기구가 전혀 발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링크), 그 수가 많지도 않았던데다 일단 교과서에 그렇게 안 나오고, 금속제 농기구의 본격적인 도입은 철기시대가 맞다. 때문에 괜히 멋모르고 체크했다가 시험 망치지 말자. 어차피 배우는 곳에 따라 지식의 내용도 조금씩 달라지기 마련이다.

5 평가

현대 역사학에서는 그 역사적인 비중이 감소하고 있다. 청동은 이나 철에 비하여 그 매장량이 매우 적다. 애초에 청동의 재료인 주석구리의 매장량이 적은데다가 두 재료가 나오는 광산이 서로 매우 가깝게 붙어있지 않으면 당시의 열악한 수송능력으로는 청동기를 만들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명의 발전 정도와 관계 없이 사용할 수 있던 지역이 매우 한정된다. 심지어 일대에 청동을 제조할 금속이 나지않아 석기시대에서 바로 철기시대로 건너뛴 문명도 존재한다. 짐바브웨 문명이라든지..

거기다 발굴되는 대다수의 청동기는 제의 물품의 제작에 사용되었으며, 무기의 경우에도 무기 자체의 목적보다는 의례적인 의미가 더 큰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청동기는 그 강도가 좋지 못하여 실제 전쟁을 제외한 사회 전반에 있어 사용된 도구들은 신석기시대에서 사용되었던 여러 석기 도구들이 발전된 발전형 석기들이었다. 이는 중국춘추전국시대에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었을 때, 그 당시의 철제 농기구가 나무로 된 농기구에 날 부분만 철로 덧댄 형태였다는 것으로도 방증된다. 그 전까지는 금속으로 농기구를 만들어 본 경험 자체가 부족했다는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동기시대가 아직까지 유효한 이유는 인간에게 야금이라는 행위가 처음으로 이루어졌고, 보다 우월한 도구에 제의상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서 사회의 분화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청동기의 효용 자체는 낮지만 청동기를 갖고 있다는 기술 자체만으로도 인간 사회에 있어서 거대한 변화를 설명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향후 이 시기에 대한 논의가 어떻게 진행될지 기대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6 서남아시아의 청동기 시대의 종말

서남아시아, 동지중해, 메소포타미아 등으로 불리는 지역은 인류 문명이 제일 먼저 싹튼 곳이며, 그에 따라 청동기 기술과 철기 기술도 제일 먼저 발아한 곳이다.

최초로 철기를 인공적으로 만들었다고 여겨지는 곳은 아나톨리아 반도에 있었던 히타이트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철로 만든 무기를 사용하는 당시 오리엔트의 군사 강국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도 철기 주조 기술이 완전하지는 않아서 고원 지대에서 부는 강한 바람을 풀무 대용으로 사용해 용광로의 온도를 높였다고 한다.(...) 또 철의 강도도 그리 강하지만도 않아서 당시의 청동기와 비슷한 정도 수준의 유물만 발견되었다. 게다가 값도 청동기보다 훨씬 높았다고 한다. 다만 히타이트가 정신이 나가서 청동기보다 비싸면서 약한 무기를 썼는데 군사 강국이었을리도 없고, 히타이트의 기록을 보면 왕의 말을 "그 무엇으로도 깨뜨릴 수 없는 철의 말씀"이라고 표현하는 부분이 나오는 것을 보면 청동기보다 강한 철기도 주조할 능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지중해에서 청동기-철기의 전환은 천천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청동기로 대형 문명을 이루었던 대제국들이 기원 전 12세기, 반세기 남짓한 기간에 바다 민족의 침입으로 대표되는 불명확한 원인으로 순식간에 개발살 났다고 한다. #

이러한 문명의 파괴는 교역로가 당연히 끊기게 만들었고, 청동기를 반드시 만들기 위한 재료인 구리와 주석은 위에서 언급했듯 브리튼 제도까지 교역을 해야했을 정도로 먼 곳에서 수입해오다보니 결국 강제적으로 청동기의 사용은 중단되었다.

청동기의 공급이 끊기자 결국 대안으로 석기 시대로 완전히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당시 미미하게나마 싹트던 제철 기술을 이용해 철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7 한국의 청동기 시대

한국의 청동기 시대는 청동기 개발이 아닌 본격적인 농경사회와 무문토기의 제작, 간석기의 본격적 사용, 사회복합도의 증가로 정의된다. 청동기는 청동기 시대 후기쯤 돼서야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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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 암각화. 청동기와 석기가 같이 그려져 있다.*

현재 청동기시대 분기 편년안으로 가장 유력시 되는 것은 신3분기설이다. 이는 청동기시대를 아래와 같이 구분하는 것이다.

  • 초기
    • 하남시 미사리 유형 : 판석부위석식(바닥에 판돌 깔고 주위에 돌로 둘러친 형태) 또는 위석식 노지(화덕) 방형(정사각형) 또는 장방형(직사각형)의 주거지로 가끔 기둥자리에 초석이 설치되는 경우가 있으며, 각목돌대문토기라는 아가리쪽에 오돌토돌한 것들이 붙어 있는 토기로 대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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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목돌대문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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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석부위석식노지

  • 전기
    • 역삼동 유형 : 토광형 노지(즉 그냥 땅만 판 화덕)이 있는 장방형 주거지와 공렬문토기 흔히 박물관에는 구멍무늬라고 되어 있는 토기로 대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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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삼동 유형의 주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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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렬문토기, 구연부에 뚫린 구멍이 공렬문

  • 여주시 흔암리 유형 : 주거지는 역삼동과 같고 토기만 약간 다른데 공렬문 또는 이중구연 공렬문이다.
  • 가락동 유형 : 위석식 노지와 장방병 또는 세장방형(한쪽이 매우 긴 직사각형)주거지를 가지면 이중구연 또는 이중구연 단사선문(짧은 선이 여러개 그어진) 토기 박물관에는 겹아가리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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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동 주거지는 흔히 둔산식 주거리로 불린다. 노지에 돌이 둘러진게 보이는데 저게 위석식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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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구연 단사선문 토기, 이중구연은 아가리가 겹쳐졌다는 뜻이다. 즉 아가리가 토기벽보다 더 두꺼움

  • 다만 흔암리는 최근 들어 역삼동과 같은 유형으로 취급하고 있다.
  • 후기
    • 부여 송국리 유형 : 무시설식 노지의 원형 또는 방형의 돼지콧구멍 기둥 자리가 있는 주거지로 외반구연의 장란형 토기(쉽게 말해서 계란처럼 생겼는데 입구 부분이 벌어진 토기)로 대표된다. 참고로 이 유적의 집자리는 도무지 이전 청동기 문화양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화덕이 사라져버려서 한국 청동기 고고학 최고의 미스터리 문화로 관심이 집중된다. 현재 외래유입설과 자체발생설이 논쟁중인데 어느 쪽도 확실한 증거가 없어 논쟁만 계속되고 있다.
송국리 문화는 후기를 대표하지만 이 시기에 남한에는 북한강의 천전리식 주거지와 울산-포항-경주 지역이 검단리 유형이 나온다. 당연히 북한에는 송국리 유형이 현재까지는 발견 례가 없다. 게다가 미사리, 가락동, 역삼동-흔암리, 송국리 유형 등의 구분도 남한 기준이고 북한쪽은 공귀리, 서포항 등 그쪽 만의 다양한 유형이 있는데 남한과는 구분 방식이 다른 경우도 있어 전체적인 이해는 좀 복잡해진다.
그러나 송국리 문화는 본격적인 도작농경(쌀농사)을 시작한 문화로 보고 있는데 이들 문화의 파급력은 상당해서 춘천-홍천 등 북한강 일부 지역과 울산-경주 등 영남동부해안 지역 일부 제외하면 남한 전 지역과 제주도, 일본 큐슈까지 퍼진 문화다. 특히 이들은 일본 야요이 문화 형성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실제 큐슈지역에서는 송국리형 집자리가 발굴되었고, 일본 도작문화 전파 루트에 나타나는 옹가가와식 토기는 송국리식 호형 토기를 모태로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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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국리의 원형 집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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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국리식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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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야요이 전기의 옹가가와식 토기, 송국리 호형 토기의 영향을 받았지만 구연부가 단이 지면서 외반하고, 조몬 토기를 연상시키는 문양이 그려져 있어 약간은 변형된 모습을 보인다. 호형 토기는 도작농경이 발전하면서 도입된걸로 보인다.

참고로 가끔 후기에 초기 철기 시대를 넣는 경우가 있는데 그 이유는 초기 철기 시대 대표 유물이 세형동검다뉴세문경이기 때문이다. 또한 토기도 무문토기인 점토대토기여서 같은 시대 설정으로 넣어도 무리가 없다.

대한민국 선사시대 연구자들 중에서는 청동기 시대 전공자가 제일 많다고 한다. 연구할 수 있는 유물도 많고 유적도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무문토기시대라는 말로 사용하는 학자들이 늘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98년도까지 동검을 포함 청동기가 무려 100개나 나왔다고 하는게 한국 청동기 고고학의 상황이다. 이 정도면 서주시기에 남중국에 있었던 서주와는 다른 문화인 삼성퇴 유적의 구덩이 하나에서 나온 청동기 숫자보다 못하다. 그래서 한국 청동기 문화에 대해 설명할 때 그 문화 유형을 나누는 기준은 토기와 주거지지 청동기가 아니다. 심지어 기원전 15세기로 편년되는 미사리 유형은 청동기가 없다. 덕분에 실상 문화 유형 파악에서 가장 큰 도움을 주는 무문토기를 사용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다만 최근에는 요하 일대의 청동기 시대 유적이 발굴되면서 이 지역의 문화와 요서 지역,그리고 요동의 족 세력과의 관련성과 상호교류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으며, 국사책의 고조선건국 연대가 올라간 것도 이런 경향과 관련있다. 물론 아무런 근거없이 이런 주장 하기를 좋아하는 분들이 문제가 되긴 하지만,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최근 펴낸 연구서 <<요하문명의 확산과 중국 동북지역의 청동기문화>>, <<요하유역의 초기 청동기문화>>에서 보이듯이 주류 학계도 이쪽에 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분명 관련성이 있긴 한데, 연구는 좀 더 필요하다"는 게 정론으로 그 이상으로 확실하게 딱 결론내릴 만한 가시적인 연구나 결과물은 나오지 않았다.[10]

참조 링크 : #, #, #

한국 학계에서 기자조선이 부정되는 이유중의 하나가 이렇게 요하-만주-한반도 청동기와 황하유역의 청동기가 확실히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상나라의 기자가 정말로 조선왕에 봉해져 왔다면 한반도에서도 황하 계통의 청동기가 발굴되어야 하나, 현재 한반도에서 발굴된 청동기를 보면 황하유역 청동기는 발견된 바 없고, 오히려 만주-요하 지역의 청동기와 유사하다.

8 기타

여담으로 2010년 한국에서 청동기시대 화장을 했다는 것이 밝혀진 무덤이 발견되었다.

춘천 중도에서 대규모 청동기 유적지가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청동기 시대 유적지 중 가장 규모가 커서 청동기 시대 연구에 큰 진전이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으나 문제는 해당 지역이 레고랜드 등 대규모 레저관광시설이 들어설 예정이였는데 유적지 발굴로 취소되게 생겨서 사업에 큰 지장이 생길 예정이다. 게다가 현재 발견되는 수준으로 보면 중도 전체가 경주에 맞먹을 만큼 유적밀집지역이라고 한다(...).#

18~19세기의 유럽에서는 무기 기술이 발전하면서 화약의 위력이 매우 크게 발전하였는데, 주로 사용하던 철제 화약무기의 성능이 그 위력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 때문에 청동으로 만든 장비를 대량으로 주조한 적이 있었다. 화약무기는 밀폐가 잘돼야 성능이 오르고, 밀폐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정밀하게 제조해야 한다. 헌데 철의 경우 주조 난이도가 높다보니 당시 기술력으론 청동으로 만드는 것이 주조 난이도가 낮은 만큼 정밀하게 만들수 있었고, 그만큼 성능도 더 높았다. 그래서 청동을 달리 포금(砲金, gunmetal)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무기사(武機史)에서는 이 시기를 제 2의 청동기 시대로 부르기도 한다.

사유 재산과 잉여생산물이 생기면서, 샤냥꾼이나 가정 주부와 달리 전문 지식 또는 기술로 일정한 소득을 공급 받는, 인류 최초의 전문 직업이 생긴 시기이기도 하다. 식량의 유통과 축적이 가능하여 수렵, 채집, 농업, 살림 외의 인류의 활동이 전문적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대표적으로 기술자, 예술가, 광대, 상인, 사채업자, 매춘부, 정치인, 종교인, 군인, 건축가, 약탈꾼, 노예, 요리사 등이 존재한다.

청동기 시대의 미라들을 연구하면 종종 발견지역(매장지역)과 성장기를 보낸 지역이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나, 동서양 혼혈인인 경우가 발견된다. 일반적인 생각보다 장거리 교류가 빈번한 시대였으리라고 추정되며, 이는 사유 재산의 발달로 인해 매우 활발한 정복 활동과 무역 활동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정선에서 발굴된 청동기시대 인골의 유전자 조사결과 백인, 그것도 영국인 DNA가 나온 적이 있다.혹자는 영국 요리를 피해 동방으로 온 흔적이라 카더라
  1. 순수한 구리의 산화물도 발굴된 청동품의 녹과 마찬가지로 청녹색이다.
  2. 오죽 청동이 유명하면 청동을 구리합금의 대명사로 쓰기까지 하겠는가. 대표적인 예로 구리와 알루미늄의 합금을 따로 이름붙이지 않고 알루미늄청동이라 부른다.
  3. 훨씬 더 많은 고열량 땔감, 막대한 산소를 불어넣는 기구.
  4. 다만 구리와 달리 주석은 전세계적으로 매장지가 희소하기 때문에 청동기 시대가 완숙한 형태로 성장한 지역은 극히 제한적이다.
  5. 청동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데, 구리에 비해 주석의 산지는 제한적이기에 주석 산지가 아닌경우 청동기의 대량생산을 위해선 주석의 수입이 필수였다.
  6. 기원후의 것은 겉에 기름(또는 납, 흔히 왁스라 부른다), 혹은 도료를 바르거나, 담금질 과정에서 적당히 그을려 산화피막이 있는 상태로 두거나, 거울보다 빛나게 광을 내곤했는데, 그 이유는 미세조직을 매우 고르고 평탄하게 만들어서 산소가 침입할 틈을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표면 연마는 매우 고르기는 해도 여전히 철의 반응성은 무시할 수 없으며, 사용을 거치면서 흠집이 날수 있기때문에 주인의 관리가 요해진다. 그렇더라 하더라도 철 유물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수가 적지않고, 떼가 조금 탄 점 외에는 거의 멀쩡한 것도 상당히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하자면, 반응성으로 철을 매도하기만 할 문제는 아니다. 개중에는 겹쳐진 부분을 들춰내면, 아직까지도 거울처럼 빛나는 것도 있다. 단, 이 경우는 보통 철이 아니라 단련된 철이라는 점 역시 잊지말아야 할 것이다.
  7. 스테인레스강이 녹슬지 않는 이유도 이와 같다.
  8. 구정의 무게를 묻는다는 춘추시대의 에피소드에 나온 구정이 바로 청동으로 만든 솥인데, 쉽게 말해 향같은거 담고 불붙여서 연기 피우는 물건이다. 은상 (혹은 그 이전의 하나라)에서부터 하늘에 직접 제사지낼 수 있는 신분으로써의 왕권의 상징하는 신물로 전해졌다고 한다. 이를 통해 당시 청동기물의 하이테크적 위상과 제정일치 정치체제의 특성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구정은 난리통에 실전되었고, 그것을 대체하기 위해 개발된 '임금만의 물건'이 바로 옥새.
  9. 한반도 남부가 계급사회였느냐를 따지기 이전에, 고인돌이 너무 많다. 오늘날처럼 한반도 남부에만 4~5천만의 인구가 거주하면 모를까, 청동기 시대에. 그것도 전라남도에만 지배층이 2만 5천 명일 수는 없는 일.
  10. 이 부분은 사학계, 고고학계 모두 학자마다 엄청나게 이론이 분분한 상태다. <요하문명의 확산과 중국 동북지역의 청동기문화>만 봐도 다소 급진적인 경우는 하가점문화의 수축과 중국 연나라계 유적/유물의 요동 진출이 넓어진다는 것을 고조선이 연에 패해 연군현이 설치된 문헌기록과 연결시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유의미한 관련성 인정 이상으로는 최대한 나가려 하지 않는 경우 등 논문들의 내용과 연구 방향이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일단 관련성은 인정한다'를 뺀 나머지는 상당히 극과 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