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

고려의 문하시중
추가바람최영이성계
정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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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심 최대명 선생이 그린 국가표준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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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격화된 최영을 묘사한 그린 무신도. 왼쪽은 서울 국사당에 걸려 있다. 참조링크글 맨 마지막 무신도 사진 참조.

1 개요

나라를 빛내기에 평생을 바치니 奮威光國鬢星星

어린 아이까지도 그 이름 알고 學語街童盡識名
한 조각 장한 마음 죽지 않아서 一片壯心應不死
천년토록 태산과 함께 남으리라 千秋永與太山橫
ㅡ 변계량이 최영을 추모한 시

崔瑩
1316~1388
고려 말의 장수.

이성계와 함께 고려 말기에 이름을 떨쳤던 명장이었으며, 또한 왜적의 침략과 어지러운 국내 사정으로 인하여 무너져가는 고려 왕조의 대들보이자 수호신, 그리고 한국사 속 대표적인 충신이기도 하였다. 시호무민공(武愍公). 로마 제국스틸리코와 비슷하다.

2 일생

2.1 공민왕 집권

젊은 시절부터 양광도[1] 도순문사 휘하에서 당시 쳐들어오던 왜구를 종종 격파했고 공민왕 즉위 후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공민왕 재위 초반의 조일신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원나라에서 당시 일어난 반란 세력인 장사성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고려에 원군을 요청하자 공민왕의 지시를 받고 인당, 유탁, 염제신 등 40여명의 장수와 함께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원나라에 가서 원나라 재상 탈탈의 막하에서 맹활약을 펼치고 돌아왔다. 이후 서북면병마사 인당과 함께 서북지역으로 출진, 압록강 서쪽의 8참을 공격하여 옛 영토를 수복했다.

홍건적이 쳐들어왔을 때 분전했으나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이 안동까지 피난가는 사태가 발생했을 때, 개경 수복전에서 활약했다. 또한 그 외에도 자주 쳐들어온 왜구를 격파하여 왜구들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원나라에서 덕흥군을 왕위에 세우기 위해 최유에게 2만의 군대를 주고 고려에 파견했을 때에도 이를 격파했다. 이렇듯 고려 말 대전란의 시대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격파하여 지위도 높아졌으나 신돈이 권세를 쥐었을 때 모함을 받아 유배되기도 했다.

이후 복직되어 공민왕이 시해될 무렵에는 제주도에서 일어난 목호(원나라 목동)들의 반란을 평정하고 있었는데 야사에는 최영이 갈대씨를 연에 묶어 날려보내 심은 후 몇 개월을 기다렸다가 그 갈대가 무성히 자라자 이를 이용해 화공법을 써서 반란군을 토벌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실제로는 목호의 난은 1374년 8월 28일 제주에 도착해 9월 22일 평정을 완료하고 제주도를 떠났을 정도로 단기전이었으니 야사는 야사일 뿐.

2.2 우왕 집권

공민왕 사후 우왕이 즉위해서는 고려군의 대들보같은 존재로 활약했는데 1376년 왜구가 충청도 일대에서 기승을 부리자 노구를 이끌고 출전을 자원, 홍산(부여)에서 직접 선봉에 서서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이를 홍산대첩이라 하여 이성계의 황산대첩,박위의 대마도 정벌,최무선의 진포대첩, 정지의 관음포해전 등과 함께 이 시대의 중요한 전투로 꼽힌다. 이 때 최영은 총사령관임에도 불구하고 선두에서 노구를 이끌고 전투를 지휘했는데 왜구의 화살에 입술을 맞았다. 최영은 당황하지 않고 바로 그 화살을 뽑아서 자기를 쏜 왜구를 쏴 죽였다. 이 용맹한 모습은 고려군의 사기를 진작시킬 뿐 아니라 당시 왜구들의 두려움을 사 "고려에서 두려워할 것은 머리가 허옇게 샌 최 만호 뿐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고려의 하얀 사신[2]

또한 왜구만이 아니라 타국에도 명성이 떨쳐져 최영이 죽으면 최영 개인이 죽는 수준이 아니라 국가의 위신 자체도 직결된다고 하였고 국가가 위태로워질수도 있다고 말하며 이때문에 전장에 함부로 나서는 것도 자제해야 할정도라고 하니...[3] 이쯤 되면 진정한 고려의 수호신.[4]

이후 조정에서 요직을 겸직하게 되고 우왕의 난행을 간언하기도 했다. 이 중엔 충혜왕충숙왕의 사례를 비교해서 심각성을 강조하는 간언도 있다. [5]

우왕이 장성하자 그를 도와 이성계와 함께 당시의 실권자이자 대표적 친원파로 권문세족의 대부였던 이인임 일파를 제거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재상직에 올랐으며 우왕이 최영에게 "따님을 제게 주세요!"라고 말해서 우왕과 최영의 딸은 결혼했다. 최영 본인은 본처 딸이 아니라는 이유로 난색을 표했지만 결국 혼인은 이루어졌다. 우왕으로써는 최영을 든든한 정치적 후견인으로 삼을 심산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난행을 간했던 이를 자신의 정치적인 후견인으로 삼고 걸림돌을 제거한 측면에서 보면 청년기의 우왕은 충동적이고 돌발적인 성향만 제외한다면 정치적인 안목이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렇게 임금의 장인이 되어 늘그막에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참혹한 말로를 불러올 전조였으니..

2.3 요동 정벌

이 무렵 중국에서 원나라가 북쪽으로 쫓겨가고 나라가 들어선 이후 고려와 명나라는 외교적 분쟁을 겪고 있었는데, 명나라 사신이 와서 "철령 이북은 명나라 땅이다"라고 북변을 명에 귀속시키려고 엄포를 놓자 이에 반발하여 우왕에게 대대적인 요동정벌을 진언, 결국 팔도도통사의 자격으로 원정을 총지휘했다. 이것이 이른바 '2차 요동 정벌'[6]이다.

이 정벌의 성공이 가능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북변의 사정이 안정되지 않았으니 가능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고 이 때 이성계가 '사불가론을 들어 반대한 것은 유명한데, 이것이 결과적으로 맞아떨어졌기에 불가능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여러 모로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지만, 당시 고려가 간신히 여러 전란에서 벗어난 상황이었던 것을 생각하면[7] 이 원정이 여러 가지로 무리한 면이 있었던 것은 사실. 또한 바로 이 해(1388년)에 명나라를 괴롭히던 요동의 군벌 나하추가 20만 병력을 이끌고 명에 항복했고 북원도 명나라 장군 남옥이 이끄는 15만 병력에 박살나는 바람에 크게 쇠약해져 있었다. 이렇게 북방에 단순 규모로만 봐도 명의 병력이 고려군의 3배 이상에 달했기에 고려군이 아무리 정예라도 사실상 어렵지 않았을까 하는 견해가 우세하다. 물론 5만이라는 건 실 병력 수다.[8] 그런데 당시 동아시아에서 호왈이 일반적인 관습인 걸 감안하면 명군과 나하추의 15만, 20만의 수치 또한 실병력으로 간주해야만 할 이유 역시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최영은 원래 후배 무장인 이성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그를 신뢰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사불가론으로 이성계와 정면으로 충돌한 계기로 관계가 멀어지게 되었다. 반대를 무릅쓰고 무리한 출정을 강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인은 출정하지 않고 우왕과 함께 고려에 남는 이율배반적인 결정을 내렸는데 이것이 결정적인 패착이 되고 만다.

2.4 최후

부대를 이끌고 북진하던 이성계는 위화도 근처까지 진군하였으나 비가 쏟아져 길이 막히게 되자 함께 출전하였던 조민수와 함께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고 말았다. 이 소식을 접한 최영은 도성에 몇 없는 병사를 추려서 반격에 나선다.

백전노장 최영은 7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조민수의 부대를 패퇴시키는 등 최후의 활약을 펼쳤으나, 얼마되지 않는 병력으로 수만명의 군세를 상대할 수 없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머릿수에 밀려 중과부적으로 개경에 몰리게 되어 체포되고 만다. 이 때 최영을 잡은 이성계는 그에게 "제 본심은 아니었지만 나라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잘 가시오. 잘 가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9] 곧 믿었던 후배 무장 이성계에 의해 고봉현에 유배되었다가 곧 개경으로 압송되어 향년 73세의 나이에 처형되었으며 전권을 장악한지 반년도 되지 않은 때였다.

그는 유언으로 "만약 내가 평생동안 한 번이라도 사사로운 욕심을 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야사에는 실제로 최영의 묘에 풀이 나지 않아 그의 묘를 "적분(赤墳)"이라 불렀다고 한다[10]. 최영의 묘는 지금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에 있는데 후세에 풀을 심어놓아서 최영 : 이 후손 새끼들이!!! 지금은 풀이 잘 자라고 있다. 또한 최영의 묘 바로 뒤에 아버지 최원직의 묘가 있다.

재미있게도 최영 부자의 묘 주변은 조선 왕족들의 묘가 둘러싸고 있다. 최영의 묘와 같은 산에 태종의 4남 성녕대군의 묘와 소현세자의 아들 이석견의 묘가 위치하고 있으며 그 건너편 산에 경혜공주 내외의 묘와 성종의 서자 이성군의 묘가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날 백성들은 크게 슬퍼했다고 하며 개경의 상인들은 가게 문을 닫아 이성계 일파에 대한 무언의 항의를 표시했다고 한다. 무인으로써의 활약도 레전드급이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날 백성들의 행동만 봐도 단순한 명장이 아닌 고려의 수호신이자 대들보 같은 존재였다. 그의 사후 이성계는 본격적으로 왕위 찬탈을 향한 행보를 시작한다.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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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발행한 최영 우표. 윗동네에서도 꽤 높이 평가받는 듯 함) 왜 고려우표가 아닌지는 묻지말자

한국사 대표 충신중 하나.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말이 최영이 한 말으로 아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사실 이것은 최영의 부친이 사망하면서 최영에게 남긴 말이다. 물론 최영이 저 말을 인생의 지침으로 삼고 살았다는 점에서 유명해진 말인 것은 사실이다. 고려사에서도 청렴강직한 인물로 그를 평가하고 있지만 "편협하고 무식했다"는 악평도 남기고 있다. 전장에서의 활약을 서술함에 있어도 고려사나 실록은 단순무식한 무장으로 몰아가고 있는데, 막상 전투양상을 보면 작전수립이나 정보수집을 치밀하게 하고 복병이나 기습책도 자유롭게 구사했다. 대표적 전투인 홍산대첩 때의 과감한 돌격은 왜구의 수가 많지 않았음을 정확히 간파하고 감행한 돌격이었다. 단순무식한 맹장이 아니라 전술적 사고를 겸비한 명장이었다는 소리. 애시당초 돌격대장은 머리 나쁘면 오래 못한다. 금방 죽을테니까. 위의 폄하는 왕조 개창 이후 전 왕조의 버팀목이었던 최영을 깎아내리기 위한 서술일 가능성이 크다.

다만 정치군인이었던 이성계와 달리 순수한 군인에 가까운 인물이라 정치를 함에 있어선 거침이 없고 철저한 상명하복으로 움직이는 군대의 속성을 그대로 적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번개같이 진행된 이인임 축출건처럼 긍정적으로 작용할 때도 있었지만 일단 일을 시작하면 주변 사람이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지윤 제거 때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 한번 작정하면 이인임도 못말렸다. 요동 정벌을 추진함에 있어 많은 반대를 모두 무시한채 군사를 일으키고, 정벌에 반대하던 이성계를 기어이 혼자 보내고 퇴각 불가 방침을 내렸다.

당연히 부하와 백성들에게도 엄격했다. 웬만한 장수들은 군령을 어기면 목이 달아났고, 공민왕 때 6도의 군사를 다스리며 배 2000척을 만드는 과정에서 70세 이상 된 자에게도 등급에 따라 곡식을 징발하는 바람에 집을 부수고 도망가는 백성이 50~60%에 이르렀으며 원성이 많았다고 한다. # [11] 그러나 그 이런 엄격함은 그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고 사욕을 추구하지 않았기에 백성들은 그를 두려워 하면서도 한편으론 국가의 수호신으로 존경해 마지 않았다.

이성계와 정적관계를 형성하며 대립하였고 조선에서 건국의 정당성을 위해 신돈의 혈육으로 주장하면서 반역열전에 기술하는등 철저히 폄하된 우왕의 충신이기도 했기에 조선 왕조 때 평가 절하를 당할 법도 한데 의외로 그렇지 않았다. 세종실록에 보면 최영에 대해서 비판적인 의견을 내놓는 신하에 대해서 세종대왕이 옹호한 기록이 있다. 왕씨가 아닌 우왕을 세워서 섬겼다면서 비판하는 신하에 대해서 세종대왕은 후에 태조가 왕이 될 수 있도록 미리 떡밥 깔아준게 아닐까 하는 어조의 반론을 한다. 물론 신하들은 "그땐 태조께서 왕위에 오르실 낌새도 없었는데요."라고 단칼에 잘라버리지만. 정몽주가 조선 왕조의 창립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충절은 조선왕 조에서 높이 숭상되었던 것과 비슷한 사례. 왕들은 최영, 정몽주를 통해 고려말의 부패와 망국의 상황을 더욱 극화하여 역으로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는 한편, 신하들이 최영과 정몽주가 고려에 충성했듯이 조선에 충성하길 바랐다.

덧붙여 말로만 지휘하는게 아니라 직접 최전선에 뛰어드는 지라 상처도 많이 입었다.그런 상처를 입으면서도 분투해서 승리를 거두었고 말만 있는게 아니라 실제로 강직하고 두려움 없는 무장이었다.홍산 대첩때도 그렇고 그전에 홍건적과 싸울때도 창으로 여러번 상처를 입었는데도 싸워 그 전투를 이겼다고 기록되어 있고 명성과 높은 평가는 자국에 한정된게 아니라 타국에도 적용되어 최영이 죽으면 무장하나 죽는게 아니라 고려 전체에 직결된다고 한적도 있었다고 한다. 최영 열전에서 최영의 명성과 용맹이 근방에도 알려져서 최영이 지금 죽으면 개인이 죽는 정도가 아니라 국가의 위신이 위태로워진다고 언급했다.즉,살아있는 것만으로 억제력 역할도 하고 있었는듯 하다.최영 본인이 이러 한 이유로 함부로 싸울수 없다고 불평한적 있다.근데 아무도 반박 못했고 농담아니고 진실이다.근데 결국 보다 못해 직접 전투에 나선다.

4 일화

매관매직이 성행할 무렵 어떤 사람이 벼슬자리 구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묻자 "몰라서 묻나? 상공(商工)을 배우면 간단하네!"라고 독설을 날렸다는 일화도 있지만 정작 본인은 권문세족의 대표였던 이인임과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다. 따지고 보면 보수적인 인물. 그럼에도 고려를 위해 친분이 있던 이인임 일파를 척살한 것을 생각하면 진정한 보수라고 봐도 좋을것이다.

사실 이인임과 어느정도 친분이 있었던 이유는 애당초 최영의 가문인 동주(철원) 최씨가 권문세족이었기 때문이다.[12] 다른 면에서 최영과 이인임의 공통점이 있는데, 이인임이 권신으로만 부각 되서 그렇지. 요동정벌 같은 군공을 세운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최영이 이인임과 친문은 단순 같은 권문세족이 아니라 이런 군사적 배경도 작용 했을 것 이다. 다시 말하면 최영도 권문세족이라는 이야기 사실 권문세족에 대해서는 몇가지 반론이 있다. 권문세족 항목 참조.

하지만 이런 거랑 대조적으로 개별적으로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하기에는 위에 나온 사례를 봐도 그렇고 사적인 욕심이 없었던 건 사실인 듯 하다. 개별적으로 손님이 집에 오면 종일 밥을 주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아무래도 그의 집에 온 게 귀족들이라든지 높으신 분들인데 배고프다고 투덜거릴 수도 없으니 그냥 굶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채소와 간략한 반찬을 대령한 밥을 내줬는데 배가 고픈 손들이 허겁지겁 먹으면서 맛이 좋다고 하면 최영은 웃으면서 "이것도 병법이 아니겠소?" 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러한 맹활약과 면모 때문에 조선 건국의 걸림돌이란 위치에 있었음에도 조선시대에 와서도 "어쨌든 명장은 명장이었다"고 평가받았으며 지금까지도 고려 말을 대표하는 명장으로 손꼽히고 있다. 특히 백성들 사이에서는 마치 삼국지관우처럼 장군신으로 숭배되었다. 지금도 최영이 맹활약을 펼친 삼남 지방(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해안 지역에 가면 최영을 모신 사당이 많이 남아 있다.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무민이 아니다

또한 내려오는 전래 이야기로 말을 타고 장군의 묘 근처를 지나가면 갑자기 돌풍이 불어 지나가던 사람은 반드시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다고 한다. 참고로 왕릉 등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말에서 내려서 가야한다. 그런데 마침 그 근처를 지나던 숙종의 가마가 심한 비바람으로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이에 숙종"네놈이 똑똑했으면 왜 고려가 망했겠냐? 바보짓하지말고 꺼져!"라고 일갈하자 비바람이 잠잠해졌다는 말이 있다.龍言 수십 년 후 영조때에도 같은 일이 있어 영조가 소리치길, "고려도 500년이나 해먹었으면 됐지, 무엇이 부족해서 깽판이냐? 가버렷!!"이거 말고이라고 일갈해 되려 최영 귀신이 데꿀멍했다고 한다....부자가 쌍으로 한 성깔. 그 결과 비바람이 수그러들었다는 설화도 있다.조선도 500년만에 끝나긴 했지 귀신도 물러가는 아들잡는 전하의 패기

반면 조선조 말 고종때에는 좀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고종이 가마를 타고 지나가자 비바람이 불었고, 원래 허약했던 고종은 근처의 연못으로 빠져버렸다. 이때 이항의라는 선부관(호위무사)이 달려들어 고종을 구해냈는데, 하필이면 잡은곳이 상투였다(...)[13]설화에서도 까이는 이명복 지못미...
여기에 일화들이 소개되어있다.

왜구정벌을 위한 항해 도중 폭풍우를 만나 제주도와 한반도의 중간에 위치한 추자도에 한동안 정박한 일이 있다. 추자 올레길 코스 상에 최영장군 사당이 있고, 요즘도 매년 성대하게 제사를 올려 최영 장군의 은덕에 감사하는 한편 지역의 발전과 풍어를 기원하고 있다. 그런데 추자도의 경우 신격화 된 이유가 다른 지역과 달리 왜구의 노략질을 막아주어서가 아닌 고기잡는 법을 가르쳐 주어서. 이전까지 준 원시생활(…)을 하던 추자도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긴 최영 장군이 그물을 엮어 고기잡는 법을 알려주고 원시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했다. 실제로 추자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 최영장군 사당이며, 이 사당은 추자 주민들에게 중요한(혹은 신성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 여기서 허튼 짓 하다간 송장 치울지도 모른다. 교회도 있고 성당도 있지만 그런거랑 상관없이 최영 장군님은 완전소중하다(…) 2014년 2월 정도전(드라마)에서 이 사당이 소개되었다.

조선 초기의 명재상인 맹사성은 바로 최영의 손녀와 혼인했다. 즉 맹사성은 최영의 손녀사위. 최영이 맹사성의 고향인 아산 근교에서 산 적이 있었는데 최영의 이웃이 바로 맹사성 일가의 집이었다고 한다. 이 무렵에 최씨 가문과 맹씨 가문이 인연을 맺었다고 전해지며, 아산에 오늘날에도 맹사성 고택이 남아 있는데 이 집은 본래 최영이 살던 집이었다고 하며 최영이 죽은 후 아버지 맹희도에게 소유권이 넘어가서 맹사성의 집이 되었다고 전한다.

5 그 외에

전라남도 여수시의 영당에는 이순신과 함께 신으로 모셔지고 있으며 풍어를 기원하는 대상이 되고 있다.

충무공이순신급 6번함인 KDX-2 DDH-981은 최영의 이름을 따서 최영함으로 명명되었다. 참고로 해군은 구축함 이상급 전함이나 잠수함을 진수할 때 위용이 뛰어난 장수나 업적이 큰 제왕의 이름을 따서 함정의 이름을 명명하는데, 최영함은 있지만 이성계함은 없다는 데에서 우리는 두 장수에 대한 후대의 평가를 단편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다. KDX-1 광개토대왕, 을지문덕, 양만춘. KDX-2 충무공이순신, 문무왕, 대조영, 왕건, 강감찬, 최영. KDX-3 세종대왕, 율곡이이, 서애류성룡. 김유신이나 이성계 등은 무용이나 업적 면에서는 충분히 함정이름으로 붙을만 하지만 외세를 끌어들여 통일을 했다거나, 역성혁명을 통해 새 왕조를 열었다는 역사적 평가 때문에 함정명으로 쓰는 것은 보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배가 그 유명한 아덴만 여명 작전 당시 청해부대의 기함이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살아서도 외적을 벌벌 떨게 하시더니, 죽어서도 군함 이름으로 외적을 떨게 만드시는 백수최만호의 위엄

코에이원조비사 정발판에서 등장한다. 근데 연도가 많이 틀어져서 고려 중기인데도 등장한다. 주인공인 징기스칸, 라이벌인 이성계와 함께 전투A, 지휘A를 자랑하는 먼치킨 무장. 징기스칸 4 PK에서는 생존해 있을 시기인데도 이성계만 등장하고 최영은 등장하지 않는다.

80년대 KBS사극인 개국에서는 신구씨가 열연했다. 이성계를 빗댄 전두환 찬양인 주제가 주제인터라 약간 아둔하면서 우왕이 신돈의 씨임을 알고도 그냥 방치하는 병크를 저지르고 있다.그렇지만 나름대로 명연기를 보여주었다.

용의 눈물에서는 원로 배우 김성옥씨가 열연하여, 위화도 회군 크리로 대망의 첫화에서 붙잡히고, 2회에 참형을 당하여 사망... 김성옥씨는 손숙씨의 남편으로 연극배우출신으로 용의눈물 PD인 고 김재형피디가 각고의 설득끝에 데려온 특별출연자였다.1997년 방영당시 특별출연 1회만에 엄청난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다.특히 이성계 역할을 맡은 김무생과의 용의 눈물 장면은 명장면으로 꼽힌다.

그리고 급기야 퓨전사극 신의에서 주인공으로 로맨스를 펼치기도 한다! 29세 젊은 시절의 최영 장군을 꽃보다 남자(KBS)로 스타덤에 오른 이민호가 맡아 현대에서 과거로 떨어진 여성 외과의사 유은수[14](김희선)과 로맨스를 펼친다. 오오 진화하는 한국의 사극. 근데 내공을 쓰고 불도 쏘고 피리로 벌레도 잡는 본격 무협판타지사극 참고로 실제 최영 장군의 부인이 삼한국대부인 문화 유씨, 즉, 유씨 성이었다. 이 드라마 속에서의 모습은 최영(신의) 항목을 참고할 것.

퓨전사극 대풍수에도 등장한다. 이 드라마에서의 최영은 철저히 이성계편이다. 심지어 이성계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자신이 처형 당할 때에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괜찮다고 오히려 이성계를 위로한다.

참고: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5.1 신돈(드라마)에서의 최영

배우는 최상훈.

어디까지나 작품의 주연이 신돈인 만큼, 신돈의 정적이었던 최영은 비교적 악역으로 나온다.

조일신의 난을 진압하면서 처음 등장하였으며, 계속되는 전쟁에서 승전하면서 고려 군부의 중축에 자리하게 된다. 신돈에게 호의를 가진 적도 있었으나, 신돈이 추구하는 정치 형태가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알자 방향을 선회해 버렸고, 신돈 또한 그런 최영을 견제하여 군권을 빼앗는 등 압박해온다.

꽤나 평이 안 좋은 이 드라마에서 최영의 캐릭터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다음부 분인데, 신돈이 처형된 후, 패닉상태에 빠진 공민왕과의 독대를 통해 군권을 반 강제적으로 얻어내는 장면을 통해 그제껏 역사에서 나온 충신 최영이 아닌 권력의 맛을 알게 된 정치군인 최영을 그려냈기 때문이다.[15] 워낙 유명한 인물인 만큼 최영은 각종 서브컬쳐에서 자주 등장하지만, 이렇게 최영을 묘사한 창작물은 이 드라마가 유일다.[16] [17]

특히 공민왕에게서 군권을 얻어낸 후 이성계와의 대화가 꽤나 인상적이다.

이성계 - 경하드립니다. 찬성사 대감! 이제야 고려군이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났습니다!

최영 - (웃으며) 잘해보세

훗날 두 사람의 결말을 생각해 본다면 꽤나 의미심장한 장면이다. 여담으로 최영 역의 최상훈과 이성게 역의 이진우는 신돈 바로 전에 방영된 제5공화국에서도 정치적 대립 관계(김동영-허화평)였다.

5.2 SBS 월화드라마 신의의 주인공

최영(신의) 항목 참조.

5.3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의 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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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임동진이 캐스팅되었으나 배우 본인의 고사로 태조 왕건에서 후백제견훤을 맡은 서인석씨가 캐스팅되었다. 연기력은 두말할 것도 없는 중견 배우이지만 왕건에서 맡은 견훤의 임팩트가 너무나 컸기에 그 뒤에도 여러 사극을 맡아서 호연을 펼쳤으나 견훤의 그림자가 쉽게 안지워지는 역효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과연 견훤의 그늘을 이번에야말로 벗어날 수 있을지가 나름 관건이었는데 오랜세월 전우로서 함께 해온 이성계와의 두터운 정리, 무인으로서 위기에 처한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정몽주와의 대담에서 보여준 신념과 신념의 충돌, 온 백성의 추앙을 받는 고려의 수호신다운 카리스마가 어우러져 평생을 외롭게 고려를 떠받들어온 늙은 무장의 모습을 완벽하게 그려내면서 역사 속 최영을 가장 잘 표현했다는 평이 많다.

자세한 설명은 최영(정도전) 참고.

5.4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의 최영

배우는 전국환

기존의 충신 이미지와는 다르게 정치군인으로서의 면모가 강조된 최영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이는 상기한 드라마 신돈에서의 모습과 상당히 유사하다. 그러나 역시 실존인물이 실존인물인 만큼 간신으로 묘사되지는 않고, 애민의 마음과 사사로운 욕심 없이 오로지 국가를 위한 충성심만으로 움직이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그 엇나간 충성심으로 인해서 결국 자멸하고 만다. 참고로 이 드라마에서 최영의 이미지는 영락없이 이 시대로부터 몇년전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동일배우가 맡았던 인물인 연철과 비슷하다......
  1. 지금의 경기도 남부, 강원도 일부, 충청도 일대를 이르던 고려시대의 행정구역 이름이다.
  2. 그러나 왜구는 "나머지는 두려울거 없ㅋ엉ㅋ"이라고 말했다. 즉 최영 말고는 두려울 것이 없다는 소리니 처음 왜구를 상대하던 고려의 상태가 어땠는지 알 수 있는 부분, 물론 그러다가 이성계한테 호되게 두들겨 맞고 뛰어난 외교관이기도 했던 정몽주와 화해를 맺어야 했으니 그 판단은 틀린 것이었지만... 사실 고려도 초반에야 쩔쩔 매었지 나중가면 화약무기 등의 발명으로 왜구를 때려잡듯이 했다. 창왕~공양왕 시기 대마도 원정은 후일 조선의 원정보다도 성공적이었다는 평을 받는 편.
  3. 출처 고려사 최영 열전
  4. 실제 이인임도 최영만은 이러한 이유로 절대 건들지 않았다.
  5. 고려사 최영 열전에 나오는 원문은 다음과 같다; “충혜왕께서는 여색을 좋아했으나 반드시 밤에만 즐김으로써 남들의 이목을 피했습니다. 충숙왕께서는 놀러 다니기를 좋아했으나 반드시 농사철을 피해 백성들에게 원망을 사지 않았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절도가 없이 노시다가 말에서 떨어져 몸을 상하였는데, 제가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제대로 바로잡지 못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남들을 대하겠습니까?”
  6. 1차 요동 정벌은 공민왕 때 이루어졌으며, 이 당시의 최영은 신돈에 의해 좌천된 상황이었기에 요동 정벌에 참전하지 못했다.
  7. 물론 몇년후인 공양왕대의 전답 등록수가 조선 후기보다도 많아 경제적으로는 어느정도 나아진것이 사실이나 왜구의 노략등 군사적 방비에 신경써야 할 부분이 많아 대규모로 군사력을 동원하는데는 사실상 고려 역시 무리가 많았다.
  8. 당시에는 호왈로 10만이라 했다. [1]
  9. 고려사절요에 보면 이러한 기록이 있다. 이인임(李仁任)이 일찍이 말하기를“이판삼사(李判三司)가 나라의 주인이 될 것이라." 하였는데 영이 듣고 매우 노하였으나 감히 말은 못하였다. 이때가 되어 탄식하기를“인임의 말이 참으로 옳다." 하였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자네, 이제 왕이 되려는가?"라고 말하고 나서 하늘을 보며 "이인임 대감, 당신이 옳았소이다!"하며 웃는 장면이 있다.
  10. 토성을 쌓을 때처럼 흙을 두들겨 단단하게 만드는 판축 공법으로 무덤을 만들면 풀이 잘 안 난다고 한다. 고인이 뱀을 싫어하면 무덤에 뱀꼬이지 말라고 이런 식으로 무덤을 조성하기도 했다고.
  11. 고려사 <병지> <船軍> 공민왕 23년 정월. 初六道都巡察使崔瑩造船二千欲以六道軍騎船捕倭百姓畏懼破家逃役者十常五六及
  12. 조준,민제등도 권문세족 출신이다.
  13. 조선 왕의 몸에는 쇠붙이도 대지 않는 것을 떠올려볼때, 이건 평상시라면 당연히 사형감이었다. 뭐 그래도 용서해주긴 했다(...) 유학에서는 위급 상황에서 예를 다 지키지 못했다고 까긴 힘들다. 《맹자》 〈이루 상〉 17장에서 맹자가 (당시 예법 기준으로) 남녀가 직접 손을 잡지 않는 것은 예(禮)이지만, 형수가 물에 빠져서 허우적 댈 때 손을 잡아서 구하는 것은 권(權: 이치에 맞게 잘 저울질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즉 마찬가지로 선부관이 왕을 구하다가 상투를 잡은 건 권도에 맞는 셈.
  14. 그런데 한때 캐릭터의 이름은 유은수가 아니라 전은수였는데, 어느 순간 바뀌었다.
  15. 그 이전에도 공민왕의 개혁을 반대하고 공민왕이 충신 정세운을 의심 때문에 죽였다고 불신하는등, 충신 면모와 거리가 있는 모습을 자주 드러낸다. 하지만 딱히 최영이 간신으로 그려지진 않는 것도 특징.
  16. 역으로 이성계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오로지 국왕에 대한 충성으로 움직이는 군인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이방인인 자신이 고려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이 길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
  17. 후에 SBS 육룡이 나르샤에서 정치군인으로서의 면모가 강조된 최영의 모습을 그려내면서 더 이상 유일한 작품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