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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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길 교수의 생전 모습

1 개략적인 내용


1973년 10월 19일에 일어난 의문사 사건. 장준하의 의문사와 더불어 박정희 정권 치하 유신 체제의 대표적인 의문사 사건으로 꼽힌다.

2 투신자살한 교수?

서울대 최종길 법대 교수는 서울대 법학과(학·석사)를 졸업하고 독일(서독) 쾰른 대학교(박사)에 유학가서 독일의 대표적 민법과 국제사법 전문 법학자인 게르하르트 케겔 밑에서 수학했다. 또한 하버드 법학대 교수 제롬 코헨, 에드윈 라이샤워등의 세계적인 석학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수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1962년에 귀국한후 1965년에 모교인 서울대 법학과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랬던 최교수는 1973년 10월 16일, 소위 유럽 간첩단 사건의 혐의로 조사를 받아야 한다면서 중앙정보부 요원 최종선[1][2] 을 따라 남산의 중정 본부로 들어간뒤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런데 10월 19일, 최교수가 변사체로 발견된 것이다.

10월 26일, 중앙정보부는 최교수가 유럽 간첩단 소속 간첩인걸 고백하고 중정 본부 7층에서 투신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유가족들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스승인 게르하르트 케겔 교수와 친구 제롬 코헨 교수등이 최종길 교수는 고문을 받고 살해된것이라고 주장하며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신직수였다.

3 밝혀진 진상

이런 가운데 7-80년대에 최교수가 투신 자살 한게 아니라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고문을 받다가 요원들이 창밖으로 집어던져 살해된것이라는 충격적인 소문이 떠돌았다.

신경림 시인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고문을 받을때 중정 요원이 신경림 시인을 끌고 창가로 가서는 "야 이새끼야, 여기가 어딘지 알아? 여기가 최종길이가 떨어져 죽은데야"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결국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이 사건을 조사한 끝에 "최종길 교수는 중정의 고문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간첩이라는 자백 강요를 끝까지 거부했다"라고 인정한다고 밝혔다. 적극적으로 투쟁을 한것이 아니더라도 권력의 강요를 끝까지 거부한 소극적인 저항도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할수 있다는 취지의 발표였다.

이후 최종길 교수의 유족들은 국가권력의 고문과 가혹행위로 최교수가 사망했다고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2006년 대법원은 "국가권력이 나서서 서류를 조작하는 등의 방법으로 조직적으로 사실을 은폐하고 고문 피해자를 오히려 국가에 대한 범죄자로 만든 사건에서 국가가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라고 판결하여 국가는 최교수의 유족에게 18억 6천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대법원의 판결은 최교수가 살해된것을 법적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볼수있다.

최교수가 간첩으로 몰려 고문을 받고 사망한 이유에 대해서는 박정희 정권이 1972년 10월 유신을 단행하면서 서울대 학생들이 유신반대 데모를 하다가 붙잡히자 최교수가 서울대 총장을 보내 항의하고 박정희의 사과를 받아야 한다라고 발언한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아주 당연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유신 체제에선 당연한 말도 죽을 이유가 되는 시대였으니... 안타깝게도 최교수를 건물밖으로 집어던져 살해한것이 유력한 것으로 보이는 당시 중정요원들은 처벌받지도 않고 잘 사는 중이다.

중정 직원 김상원은 최종길 교수가 사망할 당시 함께 있었으나 침묵하고 캐나다로 이민을 갔으며, 이후 의문사위 조사관이 증언을 들으러 캐나다집으로 방문하자 주거침입으로 조서관을 경찰에 신고하여 회피하였으며 기자에게는 진실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다고 했단다. 자세한 내용은 기사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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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그가 졸업하고 교수로 재직했던 서울대학교에서는 근대법학교육 백주년 기념관 1층 강의실을 그를 추모하는 의미로 최종길 기념홀이라 명명하여 헌정하고 그의 부조를 세웠다. 원래는 최종길 홀 밖에 붙어있었으나 백주년 기념관이 리뉴얼되면서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3] 그런데 서울대는 이 사건의 원흉으로 의심받는 신직수와 사돈인 홍진기의 호를 딴 유민홀을 만들어버리는 병크를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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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인 최광준 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부자가 모두 민법학자로, 그는 최종길 교수의 사망으로 받은 보상금을 전액 서울대학교에 기부하였다. [4]
  1. 최종길 교수의 막내동생으로 당시 중앙정보부에 갓 들어온 신참이었다. 물론 형을 팔아넘긴 게 아니라 정보부 안의 동향을 알려주고 수사협조를 부탁한 뒤 안내해주었을 뿐이었다. 형의 죽음 이후로 직장으로부터 입막음을 당했다가 1988년 양심선언 뒤 재수사를 요구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섰다.
  2. 직장이 직장인지라(...) 형이 죽은 뒤에도 남산에서 '험한 일'을 했다고. 그렇게 살면서 독한 맘 먹고 각종 자료를 모으고 민주화 이후 형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했다. 재수사 요구 이후 자신을 의문사 사건 피고인으로 착각한 직원이 '뭐 대충 덮으면 되죠'라는 식으로 말해서 속이 뒤집힌 적도 있다고.
  3. 리모델링 과정에서 최종길 교수의 부조가 건물 바닥에 임시로 아무렇게나 놓여진채 보관되어 있는 사진이 퍼지면서 스누라이프를 중심으로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 혹시 철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었으나 다행히 번듯한 자리를 찾아갔다.
  4. 최광준 교수는 부친이 박사학위를 취득한 독일 쾰른대학교에서 학·석·박사를 취득하여 서울대학교와는 직접적인 연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