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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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봉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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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봉산의 대략적인 크기와 위치.

1 소개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에 있었던 조그만 .

50m의 높이에 3000평 정도의 크기였다고 한다. 높이가 50m면 언덕아닌가?

2 지명의 유래

조선 인조 2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와 왕비는 피난을 가게 되었고, 피난 중에 왕자를 얻었으나 어린 왕자는 잔병이 많아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근심 끝에 왕비가 백일 불공을 드리자 꿈에 도사가 나타나 "왕자의 태를 묻은 곳은 땅 기운이 불순하여 태를 괴롭혔기 때문이니 광주 고을 복판에 있는 여의주(如意珠) 모양의 둥글고 작은 산에 태를 옮기고 금을 태와 함께 묻으라."고 하여서 왕자의 태를 이곳에 이장하였더니 병이 나았고, 그래서 태봉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3 진짜 태가 묻혀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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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묻혀있었다![1] 왠지 이 것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1929년 7월, 광주에 가뭄이 심하게 들자 마을의 나이많은 어르신들은 태봉산에 남 몰래 쓴 무덤 때문에 가뭄이 들었을 것이라는 미신에 현혹되어 산 꼭대기를 파헤쳤는데, 이때 태를 담은 백자 항아리와 태실(胎室), 그리고 1돈 5푼의 금박(金箔)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태를 묻었다'는 뜻의 태봉이 사실로 확인[2]되었다고 한다. 출처

4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1967년1969년 광주시가지 정리계획에 따라서 경양방죽과 함께 사라졌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자세한 내용은 경양방죽 참조.

태봉산이 사라진다고 했을때 당시 광주의 어르신들은 '화룡승천'이란 풍수지리를 들먹이며 완강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여의주인 태봉산이 있어야만 용이 하늘에 오를 수 있어 광주가 재난을 받지 않고 발전할 수 있다." "만약 태봉산을 헐어 없애면 10여년내로 광주에는 큰 난리가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칠 것이다."는 극단적인 도참설까지 들고 나와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광주시민들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봉산과 경양방죽은 그렇게 사라지고 말았다.

경양방죽의 완전 매립이 광주의 앞날에 좋지 못한 일을 가져온다는 여론이 일자 1969년, 전남대 내에 용지(龍池)라는 이름의 인공연못을 만들었다.

그 후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수많은 무고한 광주시민들이 피를 흘릴 때, 어떤 이들은 여의주를 잃은 이무기의 저주라는 도참설을 주장했다 한다.
  1. 현재 이 태실은 광주시립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고 한다.
  2. 1624년 9월 3일 진시에 대군아지를 낳았고 그 태를 1625년 3월 25일 묻는다 (皇明天啓四年(1624) 九月初三日辰時 誕生王 王男大君阿只氏胎 天啓五年三月二十五日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