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테레사

(테레사 수녀에서 넘어옴)
< 1979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
1978 - 안와르 사다트, 메나헴 베긴마더 테레사1980 - 아돌포 페레즈 에스키벨
저는 우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청빈[1]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배고프고, 벌거벗고, 집이 없으며, 신체에 장애가 있고, 눈이 멀고, 질병에 걸려서, 사회로부터 돌봄을 받지 못하고 거부당하며 사랑받지 못하며 사회에 짐이 되고 모든 이들이 외면하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이 상을 기쁘게 받습니다.

1979년 12월 10일,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며 남긴 말. 영상[2]

1 생애

빈자의 성인[3]

Saint Mother Teresa(성 테레사 수녀원장).[4] 1910년 8월 26일 ~ 1997년 9월 5일 (87세)

본명은 '아녜즈 곤제 보야지우(Anjezë Gonxhe Bojaxhiu)'로 알바니아계의 가톨릭 수녀이자 가톨릭 성인이다. 구 유고슬라비아, 현재의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수도 스코페에서 알바니아인인 니콜 보야지우(Nikollë Bojaxhiu)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가족관계로는 큰언니와 오빠가 있었다. 어릴 적부터 집안은 영국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을 믿고 있었으며, 특히 어머니가 열성적인 신자였다고 한다. 아버지 니콜 보야지우는 1919년 시의원으로 정치적 행사에 참석한 후 독살되었다. 1910년대의 세계 정세가 혼란했음을 보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 직후 가족은 더욱 서로를 아끼게 되었으며 결속력이 강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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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시절의 마더 테레사.

어릴 적부터 몸이 약했으나 우등생이었고, 가톨릭 성당에서 성가대원으로 활동한 후 성장한 후에는 가톨릭 청년 단체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1928년 아일랜드 공화국 더블린에 가서 성모 수녀회에 입회하고, 인도 제국으로 떠나 인도의 로게토 성모 수녀회에서 수녀가 되기 위해 수련을 받는다.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에 걸쳐 수도회에서 수련을 받고 사도직을 수행하며 이 때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고 청빈, 정결, 순명의 3가지 덕목을 지키겠다는 유기서원을 한다. 이를 지속적으로 갱신하며 일정 기간을 보내고서야 종신서원을 거치고 정식 수도자가 될 수 있다. 기한은 수도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한 10년 정도.</ref> 1937년 로게토 성모수녀회의 수녀로서 종신서원을 한다. 직후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성 마리아 학교에서 교사로 일한다. 1946년, 대피정을 떠나는 기차 안에서 약자들을 도우며 살라는 소명을 받는다. 직후 수도회 밖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기까지 2년의 세월이 지나간다. 1948년에 수도복을 벗고 흰 사리[5]를 입고 수녀회를 떠나 기초 간호학을 속성과정으로 수료한 후에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집안으로 불러와 먹을 것을 주고 돌보아주는 일을 시작한다.

마더 테레사의 봉사 방향성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혼자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었다. 그 해에 테레사 수녀는 인도 시민권을 요청하는데, 곧 평생 인도 시민권자로서 살 수 있게 된다. 1949년부터 성 마리아 학교의 제자들이 테레사 수녀를 따라 모여들어, ‘사랑의 선교회’라는 조직이 자연히 형성되었다. 1952년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임종자의 집’[6]을 연다. 이 집은 가톨릭 신자인 마이클 곰스가 제공한 셋집이었다.

사랑의 선교회는 점점 더 커져갔고, 모인 기부금으로 선교회 지부로 쓸 집을 살 수 있었다. 이 수도원은 사랑의 선교회 본원으로 쓰이게 되고, 같은 거리에 임종의 집에서 죽은 사람들의 아이들을 포함하는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도 설립한다. 이들의 활동은 나환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으나, 전염을 우려한 사람들의 반대로 이동병실을 우선적으로 만들었다가 후에 시 외곽에 나환자들의 자립을 위한 재활 센터를 설립한다.

15년간 활동한 이후 인도 공화국에서 활동하는 사랑의 선교회의 수도자들은 300명이 넘었다. 주교들이 청원을 올리자, 교황은 사랑의 선교회가 전 가톨릭 교회 내에서 일할 수 있도록 승인한다. 1965년부터 1971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사랑의 선교회'의 새로운 분원들이 문을 열어 활동하게 된다.

인도로 떠난 이후 수녀회의 사도직 활동에 전념하며 평생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7] 어머니가 임종할 때는 알바니아로 돌아가려 했으나 정부에서 입국 허가를 거절했다.[8]

말년에 심장병을 얻어 2번의 심장마비를 겪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받을 의료적 행위를 자신이 돌보는 가난한 이들은 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으나, 2번째 발작 이후에는 정부의 지속적인 요구와 교황의 요청으로 수술을 받게 된다. 1991년에는 걸프 전쟁 중지를 호소하고, 조지 부시사담 후세인은 요청을 받아들여 화해의 제스처를 취한다. 물론 테레사 수녀의 요청만으로 전쟁이 멈춘 것은 아니다.

2 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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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운구 행렬

1991년에서 1993년 사이 2번의 발작을 일으켰지만, 그녀는 계속하여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평화와 나눔을 호소한다. 자신의 임종이 가까워지자, 사랑의 선교회의 회원을 실제로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만으로 한정한다. 말년에는 말라리아에 감염되었는데, 까지 침범하였다. 선교회에서 죽고 싶다고 말해 일터로 되돌아왔고 1997년 9월 5일에 선종한다. 장례식은 9월 13일에 국장으로 거행되었는데 시신은 마하트마 간디자와할랄 네루의 시신을 운구했던 포가(砲架)로 운구되어 인도 정부가 나타낼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와 애도를 표했다. 유해는 생전에 가난한 이들과 함께 했던 테레사 수녀의 집에 안장되었으며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복음서 15장 12절)
마더 테레사
1910년 8월 26일 ~ 1997년 9월 5일
우리의 사랑하는 수녀원장
사랑의 선교회 설립자

평생 허리를 구부리고 고개를 숙인 자세로 일해왔기 때문에 고령이 된 후에는 허리가 펴지지 않았고, 세계를 돌아다닐 때는 한쪽 귀가 멀고 심장이 약해진 상태였다고 한다.

인도의 캘커타에서 헌신적인 빈민 구제 활동을 하여 살아있을 때부터 성인으로서 많은 존경을 받았다. 1979년에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는데, 수상축하연에 사용될 돈을 빈민구제기금으로 써달라고 요청한 일화가 있다. 자선가에게 주어지는 각종 상과 선량한 종교인이 받는 각종 상들을 수상했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다음해인 1980년에는 인도 공화국에서 가장 높은 등급의 시민 훈장인 바라트 라트나(Bharat Ratna)를 수여받았다.

3 시복시성

2003년 10월 19일 시복식2016년 9월 4일 시성식
성 베드로 대성당 강복의 발코니에 걸린 마더 테레사의 상본(像本)

선종 6년 뒤인 2003년 10월 1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복자로서의 명칭은 "캘커타의 복녀 테레사"이며 라틴어로는 "Beata Teresia Calcuttensis"라고 쓴다.[9] 축일은 9월 5일이다.

2015년 12월 18일, 교황청 시성성이 2008년 뇌종양을 앓던 브라질 남성이 치유된 것을 마더 테레사에게 청한 전구로 인한 기적으로 인정함에 따라 시성에 필요한 기적 사례 두 건이 충족되어 2016년 시성식이 거행될 것이라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마더 테레사의 축일인 9월 5일에 시성 미사가 열리는 게 원칙이지만, 주일인 9월 4일로 앞당겨 열린다. 시복식 때 30만 명에 가까운 인파가 운집한 것을 고려하면 마더 테레사의 시성식은 교황 프란치스코가 선포한 '자비의 희년'의 하이라이트가 될 것이라는 게 언론의 분석이다.

2016년 3월 15일 (한국시간) 프란치스코 교황이 시성을 승인했고, 동년 9월 4일 시성식이 거행되었다. 성인으로서의 명칭은 "Sancta Teresia de Calcutta", 즉 "캘커타의 성녀 테레사"이다.

당초 인도 가톨릭 주교회의는 교황이 인도를 방문해 시성식을 거행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교황청의 희년 행사 일정상 로마에서 거행하기로 했다. 4일 시성식과 그 다음 날로 예정된 자비 활동가들과 자원 봉사자들을 위한 희년 행사를 묶으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하느님 자비의 실천 메시지를 더 널리 전파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한편 교황은 시성식에서 가장 좋은 자리(제대 앞)를 가난한 이들에게 마련해 주었다. 이들 1,500명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사랑의 선교 수녀회가 운영하는 환대의 집에 머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시성식 뒤에는 바오로 6세 강당에서 이들에게 나폴리식 피자를 곁들인 점심을 사랑의 선교회 수녀들과 함께 직접 나눠 줬다.

또한 교황은 이날 루터교에서 개종한 후 브리짓다 수도회를 설립한 스웨덴의 마리아 엘리자벳타 헤셀블랏, 아르헨티나에서 ‘가우초 (남미의 카우보이) 신부’로 공경받는 가브리엘 브로케로 신부에 대해서도 같이 시성하였다.

4 시복 절차

마더 테레사의 결점 문제가 대두된 것은 그녀의 시복 절차가 시작되면서부터이다.

시복 절차가 시작되면 교황청은 조사자들을 두 무리로 나눈다. 이들은 현대 재판검사변호사의 역할을 맡는데, 각자 자신들의 주장[10]을 뒷받침하는 방대한 양의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해야 한다. 쉽게 말하면 한쪽은 비난만 하고 한쪽은 칭찬만 해야 하는 것인데, 이 주장을 뒷받침할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은 현지조사의 기간은 기본적으로 3~4년이며, 서류상의 검토는 대개 11~13년 정도의 기간을 들인다.

양쪽이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교황청은 해당 인물이 "생전의 부정적인 면모보다 긍정적인 면모가 뛰어나기에 성인으로 지정할 가치가 있다."라는 결론을 내려야만 성인으로 인정할 수 있다.

5 비판

다 좋은데 시사와 정치물정이 어두웠다. 그것도 엄청
사망 후 시복 절차를 밟으면서 대두된 문제이나 살아 생전에도 몇 가지 이유로 비난받았다. 이는 그녀의 문제라기보단 수도자 혹은 가톨릭 신자로서 취하게 되는 근본적인 입장, 또는 반종교적인 시선을 가진 이들이 주장하는 것도 있지만, 사회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의혹을 던져주는 몇몇 사건도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극렬 반종교/반신론주의자인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테레사 수녀가 활동하고 있던 80년대에 <자비를 팔다>라는 책을 통해 그러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의문을 던졌다. 이 책에서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가차없는 공격을 펼친 히친스의 공격력(?)을 높이 사, 교황청에서는 테레사 수녀의 시성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반대측 증인 중 하나로 히친스를 초청해 테레사 수녀에 대한 히친스의 의문과 비판을 경청했다.

이러한 검증을 가톨릭에선 악마의 대변인이라고 부른다. 히친스의 회고에 따르면 이 증언 작업에는 소수의 담당 성직자만이 동석했으며,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하고 싶은 말은 무조건 다 하게 해 줬다고 한다.

5.1 의료기관 운영, 고급병원 입원에 대하여

'자비의 집' 봉사활동을 했던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테레사 수녀는 자비의 집을 현대적인 의료시설로 바꾸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으며, 단지 죽어가는 이들을 방치하는 수준의 원시적인 시설관리만을 했다고 한다. 현대의 노인요양원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시대도 시대이거니와 그 당시 기준으로도 열악한 시설이었다. 즉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수용소 수준. 일부 흠좀무한 증언에 따르면 주사바늘 여러 개를 끓는 물도 아니고 찬물 아래 비벼 씻는 것으로 소독(…)을 마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고(주삿바늘은 1회 사용후 폐기가 원칙이다). 진통제 같은 기본적인 약들도 구비가 어려워 꼭 필요할 때에만 주곤 했다고 한다.

또한 적절한 처방만 하면 살 수 있을 어린아이 등을 똑같이 빈약한 치료만으로 죽게 만든 점에 대해서도 비판의 여지가 있다. 그녀가 받았을 기부금의 액수를 생각해보면, 빈민 모두를 최상의 시설과 인력으로 치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쳐도, 기자재가 충분히 갖춰진 시설에서 치료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세계로부터 흘러오는 막대한 지원금 내역은 공개되지 않는 데 반해, 실제로 현지에 지어지는 의료 기관이 극도로 빈약하다는 사실로 공격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열악한 시설을 그냥 이곳저곳 늘리는 데에만 집중한 면모도 선교에만 치중한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그에 비해 본인이 병에 걸렸을 때는 인도 내에서 알아주는 최고의 요양시설에서 진료를 받았다.

그러나 병에 걸리자마자 입원한 것은 아니며, 첫 번째 심장마비가 왔을 때는 치료를 거부했다가 2번째 심장마비 이후, 저명인사의 죽음으로 인한 비난을 두려워한 인도 정부의 반강제적인 요청과 교황의 요청에 따라 마지못해 승낙한 것이다. 비슷한 일화로는 투옥 중인 간디가 주사제를 처방받은 일이 있다. 입원한 상황에서도 '나보다 어려운 사람이 많다' 고 말한 바가 있다.

5.2 강간피해 여성들에게 출산을 권장한 일

강간당한 피해 여성들에게 낙태하지 않고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종교적인 문제인데, 가톨릭은 생명존중을 기반으로 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모든 생명 훼손 행위에 반대한다. 가톨릭에서는 생명복제를 비롯한 모든 생명에 관여되는 인간 자의적인 행위를 부정적으로 보며, 아주 엄격하게 따지면 생리 주기법을 제외한 피임도 부정적으로 본다. 다만 낙태를 하지 않으면 산모가 죽게 된다거나 하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서만 인정한다. 더 엄격하게 들어가면 성(性)을 생명의 잉태가 아닌 쾌락적으로 사용하는 모든 행위(수음이라던가)가 크고 작은 차이만 있을 뿐 십계명에 어긋난다.

이러한 가톨릭 윤리 의식에서 낙태는 살인과 같은 행위이기 때문에 금지된다. 평생을 독실한 가톨릭 신앙인으로 살아온 테레사 수녀에게는 출산 권장이 올바르지만은 않다는 인식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 강간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피해자들은 육체적,정신적으로 크게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출산을 한다고 해도 제대로 아이를 돌보기가 힘들다.[11] 그런 피해자들을 도와주고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시설이 발달한 곳이면 모를까, 그렇지 못한 곳에서(주로 후진국) 아이를 낳게 되면 심한 경우 여성과 아이가 둘다 사망할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다. 즉 종교적으로만 봐서는 안될 사회적 문제라는 것이다.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되는 내용으로, 브라질의 수녀이자 해방신학자인 이본느 게바라가 낙태의 합법화를 지지했다가 라칭거 추기경이 장관으로 있던 신앙교리성에서 2년 침묵(강연/저술 등 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5.3 탄압받는 이들에게 인내를 요구한 점

거대 권력의 힘에 의해 탄압을 받는 사람들에게 "참으세요"라고 말하며 그들에게 인내를 권했다.

이 역시 가톨릭 신앙과 관계 있는데, 가난한 자들을 적극적으로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기보다는 규모를 확대하는 데에 신경 쓴 수도회의 방향성 또한 맥락을 같이 한다. 이 부분이 기부금을 쌓아두고 가난한 이를 돕지 않는다는 비판을 제기하게 만들기도 했는데, 가난한 이들의 재활을 돕기보다는 많은 피난처를 만드는 쪽에 무게를 둔 것뿐이지 테레사가 돈을 횡령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니 오인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테레사 수녀는 때로 지나친 특수 사적 목적성을 띈 정부 보조금을 거부하기도 했다.

이는 비단 테레사 수녀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 전반에 있는 문제로, 흑인 인권운동가였던 맬컴 엑스는 "종교의 가장 위대한 업적을 꼽으라면 착취와 차별로 얼룩진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양처럼 순하게 만들어 반항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라고 대놓고 비꼬기도 했다.[12] 하물며 테레사 수녀가 활동한 시기는 1940년대부터이니, 지금보다 훨씬 사상적으로 굳어있던 시기였다. 또한 정교 분리에 관한 천주교의 입장은 개신교 항목이나 정의구현사제단 항목을 참고해 보자. 당시 시대상황에 맞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어떤 외부로부터의 강제가 없었다면, 테레사가 그런 교리에 순종한 것도 결국 그것을 본인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옳지 못한 일임을 알았음에도 자기가 속한 단체의 주장이기 때문에 받아들였다고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5.4 독재자, 금융 사기자를 옹호한 일

아이티독재자들과 함께 웃으며 사진을 찍은 일이나, 탐욕스러운 영부인을 향해 '빈민들과 누구보다도 가까운 분'이라는 찬사를 하는 등, 정치적으로 생각할 때 상당히 경악스러운 행보를 보였다.

그녀에게 거액의 기부금을 맡겨 가난한 이들을 돕도록 한 찰스 키팅이 법정에 서자, 그녀는 찰스 키팅이 보여준 사랑을 언급하면서 예수처럼 키팅의 잘못을 용서하길 청하는 편지를 보내 탄원했다. 담당 검사는 이에 대해서 “키팅은 가난한 서민들의 돈 또한 가리지 않고 빼앗았으며, 수녀에게 보낸 기부금에는 그런 서민들의 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 돈이 제 주인에게 돌아가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제게 연락드린다면 키팅에게가 아니라 사기당한 이들에게 돈을 돌려드릴 수 있도록 주선을 해드리겠습니다.”라고 답신했다. 이 편지에 대한 테레사 수녀의 답변은 오지 않았다.

이는 정치적 무지 또한 문제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 준다. 테레사 수녀는 이 행동으로 인한 파급력을 생각했어야 했다.

5.5 비판론에 대해

화제작 자비를 팔다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쓴 책인데, 테레사를 비방하기 위한 목적에서 쓰인 책이기 때문에 이 책만을 보고 그녀의 행적을 판단하는 것은 곤란하다. 아무리 누가 뭐래도 인류애를 위해 헌신한 선한 모습과 무조건적인 사랑은 모두에게 귀감이 될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가톨릭 신자라면 일반적으로 위인들에게 갖는 존경심 이상으로 성녀인 마더 테레사에 대해 신앙적 경의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톨릭 신자들의 관점은 세속의 인물 평론과는 그다지 맞아떨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실 간디와 함께 마더 테레사는 대표적으로 위인전에 등장하는 20세기 세계적인 위인이다. 그리고 좋게만 그려지곤 하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종교인일지라도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비슷한 이미지인 마하트마 간디가 여러 가지 면에서 비판을 받았고 점점 대중적으로도 부정적 재평가가 이루어지기도 하는 것처럼 마더 테레사도 여러가지 면에서 비판을 받아왔다. 일방적인 호평일색에서 벗어나서 비판적인 견해에도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6 여담

  • 사망 후 약 2개월 뒤, 뜬금없이 힌두교의 파괴신인 시바의 아내의 화신 중 하나로 힌두 신화에 편입되어 칼리신(시바)의 사원에 ‘테레사 어머니의 집’ 이라는 가난한 이들의 휴식처가 생겼다. 꼭 테레사 수녀같은 케이스가 아니라도 힌두교도들은 종종 유명인들에 대해 이런 짓을 하는데, 인도의 총리인 나렌드라 모디도 최근 일부 힌두교도들에게 신으로 추앙받으며 신전까지 세워졌다가 총리 자신이 크게 언짢아하며 자신을 숭배하지 말라고 지시해 신전도 사라지고 흐지부지된 케이스도 있다(...).
  • 교황청은 그녀가 기적을 일으켰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했다.[13]
  • 테레사 수녀의 임종 이후, 알바니아인도 공화국은 테레사 수녀의 시신을 어디에 안치할 것인지, 그 국적은 어디에 있는지를 놓고 대판 싸웠다.
  • 2003년에 그녀의 봉사를 다룬 전기 영화가 제작된 적이 있다. 제목은 이름과 같은 <마더 데레사>. <줄리엣>으로 유명한 올리비아 핫세가 노년의 테레사 수녀 역을 연기했다. 그녀의 인생과 신앙에 대한 태도들을 비교적 잘 묘사한 평작이다.
  • 남을 돕는 활동을 통하여 일어나는 정신적, 신체적, 사회적 변화를 마더 테레사 효과라고 부른다.
  •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 국제공항의 이름은 '마더 테레사 공항' (Aeroporti Nënë Tereza)이다. 2001년 개칭된 이름.
  • 2016년 9월 4일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세계청년대회, 사랑의 선교회의 수호성인이다.\
  • 연설 영상을 보면 영어를 잘 한다. 원어민 수준은 아니지만 알아듣게 또박또박 잘 한다. 아무래도 인도에서 오래 살다보니 공용어중 하나인 영어도 배운 것으로 보인다. 그외에도 벵갈어와 힌두어도 할 줄 알았다고 한다. 모국어인 알바니아어와 세르비아어는 당연히 유창하게 잘 했다.
  1. 정결, 순명과 함께, 가톨릭성직자수도자가 서약하는 덕목. 이 3가지를 '복음삼덕'이라 한다.
  2. 그리고 이 직후 세계평화의 적은 바로 낙태라고 선언하는데, 사실 연설 전문은 낙태는 살인으로써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는 낙태에 대해 비판적인 요지였다. 그리고 낙태에 대해 그리스도교에선 아주 큰 죄악으로 바라본다는 점을 감안하면 테레사 수녀의 이런 연설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3. 마더는 뜻이 모르는 이는 없지만 엄마라는 뜻인데 엄마라는 이름이 가지는 뜻과 느낌을 생각하면 세상 그 어떤 호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명예로운 호칭이라 할 수 있다. 명예로운 호칭은 맞지만, 사실 '마더'라는 호칭은 마더 테레사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붙여준 호칭이라기보다, 마더 테레사가 설립한 '사랑의 선교회' 회칙상 선교회 수장을 '마더'라고 부르기로 정한 데서 비롯한다. 회칙은 설립 시 마더 테레사가 직접 만들었으므로, 본인이 직접 붙인 칭호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지금은 모두 존경의 의미를 담아 '마더'라고 부른다.
  4. 호칭에 대해 "테레사 수녀"라고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고 실제 위키백과에는 그렇게 등록되어 있으나, 엄밀히 말하자면 "Mother"는 "수녀원장"의 뜻이므로 수녀를 뜻하는 "Sister"와는 뜻이 다르므로 "테레사 수녀원장"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고유명사화된 호칭으로서 "마더 테레사"라 하는 것이 더 옳다고 할 수 있다.
  5.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여인이 입는 복장.
  6. 일종의 호스피스 개념이다.
  7. 가톨릭에서 사제수도자는 인간으로서 죽고 하느님의 종으로서 임한다는 개념이기 때문에, 가족이라도 사제/수도자가 되고나면 부모자식으로 대하는 일이 드물다. 가령 도미니코라는 세례명을 가진 아들이 신부가 되었을 경우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도미니코 신부+존칭을 쓰는 것. 사제가 부모님을 부르는 것은 금지되지 않는다.
  8. 당시 알바니아는 공산국가였기 때문에 천주교를 포함한 종교에 대한 탄압이 강했다. 나중엔 입국은 허가하되 출국은 불허한다는 방침이 되어서 결국 포기했다.
  9. Beata Teresia a(혹은 de) Calcutta라고 쓸 수도 있다. 영어로는 Blessed Teresa of Calcutta라고 쓴다.
  10. 성인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쪽과 인정해선 안 된다는 쪽. 인정해선 안된다는 쪽의 별칭은 '악마의 변호사'이다.
  11. 애당초 여자든 남자든 모든 피해자들이 가해자로 인해 생긴 아이를 과연 책임져야 하는가는 의문이다. 결국에는 아이는 죄가 없다는 인도적인 결론이라면 제3자가 책임질 수 있다. 만약 피해자가 아이를 보고 그 날의 고통이 떠오른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아동학대 우려도 있고, 자신의 출생 경위를 알게 된다면 아이가 느낄 자존감과 자기혐오 문제도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 혼자서 돌보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며 대개 이런 피해자들은 사회적 약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서, 마른 하늘의 날벼락을 당한 피해자가 왜 자신이 당한 고통뿐만 아니라 가해자를 닮았을지 모르는 아이까지 책임져야 하느냐는 모순이 발생한다. 출산은 낙태의 문제로 거론될 수 있지만, 양육까지 가면 이는 다른 문제다. 이는 남자도 마찬가지다. 만약 남성이 여성에게 약물로 성폭행을 당해 여자가 아이를 임신했다면 남자는 가해자와 결혼해야 하는가? 이런 모순이 계속 발생한다.
  12. 참고로 맬컴 엑스는 후기에 수니파 이슬람교도가 된다. 말년에는 전투적인 태세를 누그러뜨리긴 하지만...
  13. 여기서 말한 "기적"은 마더 테레사가 사망한지 1년 후인 1998년 9월, 위에 거대한 종양이 있던 34세의 인도 여성 모니카 베스라(Monica Besra)가 테레사가 세운 "사랑의 선교회"에서 테레사의 환영을 본 후 완치되었다는 일화를 말한다. 한편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중병이 '자연스레' 완치된 것이 아니라고 해서 반드시 '초자연적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이로 인해 인도에서 돌팔이들과 종교적 사기꾼들이 신뢰를 잃어버리는 날이 늦춰졌다 (신은 위대하지 않다. 2007)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또한 그는 '모니카'라는 이름은 인도식이 아니라 세례명이라는 점, 그녀의 남편과 병원장들의 뚱한 반응 등이 심히 의심스럽다고 서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