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민주당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
통일민주당평화민주당신민주연합당

1 1987년 창당한 정당

# 로고가 있는 전당대회 사진


1987년 김대중통일민주당 내 자신의 동교동계을 규합해 분당을 결행하여 만든 정당. 창당 이후 평화민주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재야민주화운동가들이 대대적으로 입당하여 세를 불렸다.[1]

창당 당시 민주당이란 이름을 김영삼 쪽이 먼저 사용해 평화당이란 이름을 사용하려 했는데 "우리도 통일민주당처럼 민주당 이름을 못 쓸 이유가 없으니 우리도 평화당이라고 하지 말고 평화민주당이라고 하면 되는게 아니냐?"라는 제안이 당무회의에서 받아들여져 평화민주당이란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풀네임이 길어 일반적으로는 축약어인 평민당으로 불렀고, 애초에 의도되었다. 반면 통일민주당은 통민당이란 약어 대신 민주당을 약으로 썼다.


"평민은 평민당 대중은 김대중"이라는 구호와 함께 의욕이 넘치던 출발에 비해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이 3위로 참패함에 따라 위기에 몰렸다. 당시 나름 전략도 있었다. 김대중은 자신이 호남, 노태우가 TK, 김영삼이 PK, 김종필이 충청을 나눠먹고 자신이 수도권에서 압승함으로서 도리어 양자대결이 아닌 4자 대결일 때 승산이 높다는 "4자 필승론"이다.[2] 하지만 KAL기 사건으로 PK와 충청의 지역주의가 옅어졌고, 군인 투표자들의 표가 대부분 노태우에게 날아가면서 결과는 3등으로 끝났다.

당시엔 여론조사가 시범적으로 시행된 정도라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하기가 불가능했다. 한국 갤럽에서도 여론조사를 진행했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독재정권 시절이다보니 제대로 된 표본을 잡을지 의문시 되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정권에서 야권 분열을 위해 일부러 김대중에게 유리해보이는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노력했다는 음모론도 존재한다. 심지어 앨빈 토플러의 책에도 등장하는 컴퓨터 선거 조작설도 호남에서의 지나친 몰표에 따라 큰 인기를 끌었으나 총선 결과를 보면 그다지... 다만 이전까지 호남은 여당 지지세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중대선거구기도 했지만... 이것이 단박에 뒤집어진 것은 김대중조차도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다음 해인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박영숙 총재권한대행이 선거를 운영하였는데 호남 출신 서울시민의 탄탄한 지지를 바탕으로 통일민주당을 제치고 제1야당까지 올라섰다. 당 상징색이 누렇게 익은 벼를 상징하는 노란색이여서 이른바 황색 폭풍이라 불렸다. (후에 15대 총선 자민련의 선전도 "녹색 바람"으로 불렸다) 그러나 1990년 3당 합당으로 여당과의 규모 차가 안드로메다로 나 버리고, 1991년 3월 재야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영입하면서 신민주연합당으로 명칭을 바꾸었지만 1991년 6월 광역 의원에서도 참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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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주연합당 당시의 로고

결국 김영삼은 김대중의 평민당 창당에 뒤지지 않는 치졸한 작전으로 복수에 성공했다. 두 사건으로 한국 정치는 정책과 이념 대결보다는 지역주의를 앞세운 저열한 이전투구로 크게 의미가 퇴색된다. 평민당의 창당이 김대중이 불복의 멍에를 쓰는 데 가장 일조한 사건이라면,[3] 김영삼 또한 그에 못지 않은 정략으로 보답한 셈. 정확히 말하면 3당합당은 김영삼과 김대중이 이미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 후의 일이긴 하지만, 명색 민주화와 진보를 기치로 내걸고 정치 인생을 걸어온 김영삼이 유신독재의 당사자제5공화국의 주인공과 손을 잡았다는 점을 볼 때 배신에 가까운 행위인 것은 틀림없지만 이후 김대중 또한 스스로 원조 쿠데타세력이라고 하던 김종필과 DJP연합으로 대선에서 승리를 위해 공동정권을 잡고 공동정권을 운영한 것을 볼 때 비판의 여지가 존재한다.


이후 1991년 9월 민주당(일명 꼬마민주당)과 합당하면서 민주당(1991년)이 된다. 합당 후에는 후자의 민주당과 구분하는 의미에서 통합민주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2 2010년 창당한 정당

평화민주당(2010년) 문서로.
  1. 당시 평민연 소속으로 입당한 재야인사들은 이해찬, 임채정, 박영숙, 문동환 등 총 98명으로 이들은 계속 민주당 계열에서 활동하면서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에서 국회의원, 장차관, 청와대 수석 비서관 등 고위직에 오른다.
  2. 후에 이것이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지역 등권론"으로 이어진다. 훗날 2번의 평화민주당을 창당하는 한화갑이 제기한 것이라고 한다.
  3. 이외에도 김대중은 제14대 대통령 선거 낙선의 정계 은퇴를 번복했고,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 후 의원 내각제 개헌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다. 그런데 김종필은 이전에도 이미 내각제 개헌에 낚여 표만 내준 흑역사가 있는데? 그리고 사실 후자의 경우에는 어느정도 근거가 있는 전자와 달리 헛소리일수밖에 없는게 1990-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직전의 민자당(총 의석의 70%에 달했다.)과는 달리 새정치국민회의자유민주연합을 합해서 과반을 넘긴했지만 개헌선에 한참 모자른 상태인데다가 개헌저지선은 확보한 한나라당에서 적극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에 내각제 개헌이 이루워질래야 이루워질 수가 없는 상태였다 거기에다가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공조가 제대로 안 이루워지는 바람에 개헌선 확보는 커녕 군소정당과 무소속을 끌여들여서 겨우 과반을 확보했으니 내각제 개헌이 물건너갈수밖에 없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