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디 머큐리


멤버
프레디 머큐리존 디콘로저 테일러브라이언 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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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ddie Mercury

영국 락밴드 의 리드보컬.

장르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보컬리스트중 한 명

4옥타브를 넘나드는 불세출의 보컬리스트

I won't be a rock star. I will be a legend. (나는 락 스타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전설이 될 것이다)

ㅡFreddie Mercury

Did rock and roll ever have a better showman than Freddie Mercury?[1]

ㅡ빌보드, The 25 Best Rock Frontmen of All Time

프레디 머큐리
Freddie Mercury
본명Farrokh Bulsara
출생1946년 9월 5일
사망1991년 11월 24일
출신학교St. Peter's Boys School - St. Mary's School(뭄바이) - Isleworth Polytechnic College - Ealing Art College(잉글랜드)
고향잔지바르
포지션보컬-피아노
소속팀
디스코그래피Mr. Bad Guy / BARCELONA

1 유년기-대학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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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잔지바르[2] 출생[3]으로 총독부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8세기에 무슬림에 쫓겨 페르시아에서 인도의 구자라트로 피신해 정착한 조로아스터교도의 후손인 파르시이며, 본명은 파로크 불사라(Farrokh Bulsara, ફારોખ બલસારા바라버 어더레리)이다. 파로크란 이름이 영어로 발음하기 불편해서 프레디란 별명을 많이 썼다. 프레디는 파로크란 이름보다 프레디라는 이름을 마음에 들어했고, 퀸을 결성하면서 프레디란 이름으로 아예 개명하기에 이른다(영국 시민권을 얻으면서 과거 잔지바르 시절의 잔재를 완전히 지울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한다). 머큐리는 그리스신화의 신 도둑과 전령의 신 헤르메스에서 따왔다.음악의 전령사가 되겠다는 뜻이었다고 한다.[4]

정통 파르시 출신 답게 프레디 머큐리는 역시 인도 쪽 혈통이라고 한다. 프레디 머큐리의 아버지 Bomi bulsara는 8형제 중 하나로 태어났는데, 그의 고향은 인도 봄베이 북쪽에 있는 bulsa라는 마을이라고 한다. 불사라라는 성은 프레디의 아버지가 잔지바르로 건너오면서 고향 마을의 이름을 따서 그대로 붙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실제로 프레디의 아버지 뿐만 아니라 삼촌, 백부들도 모두 하나둘씩 잔지바르로 건너와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그렇다고 해서 정통 인도 혈통은 아니고 엄연히 독실한 파시족 집안에서 태어났고 자랐기 때문에 파시계 인도인 혈통이라고 할 수 있다. 프레디의 부모님들도 생전 자신들을 인도라는 출신 배경보다 파시족이라는 걸 훨씬 강조하며 살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엔 인도 뭄바이에서 기숙학교를 다녔는데 가족과 떨어져서 공부를 해야 했던 게 무척 괴로웠던 모양이다. 때문에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으로 자랐다. 음악에는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보였다. 학창 시절에 합창부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아마추어 밴드에서 건반을 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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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뭄바이 학창시절 프레디.> 치아가 신기하다. 거의 만화에서 나올법한 수준의 뻐드렁니...

인도에 유학까지 갈 정도로 집안 사정이 나쁘지 않았지만, 잔지바르에서 아랍왕조가 뒤엎어지고 공화정이 수립되고 아랍인들과 인도인, 페르시아인들이 대거 추방당하자, 프레디 머큐리도 가족들과 함께 영국으로 쫓겨나다시피 이주했는데 급하게 영국으로 가다보니 집안 사정이 많이 안 좋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프레디 머큐리도 아르바이트를 했어야만 했는데, 비행기 화물칸에서 짐을 옮기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동료들에게 자기는 알아주는 뮤지션이라고 뻥을 쳤다. 단순한 허세였지만, 프레디 머큐리 스스로가 뮤지션이 될 것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말한 첫 번째 발언이었다.


<평범한(?)일링예대 학생 프레디> 윤종신?

영국에서 일링 예술 대학(Ealing Art College)그래픽 디자이너 학사로 대학을 마쳤다. 아무래도 당시에 1970년대 초에 그럴듯한 대학에 다니고 있던 엘리트였고 음악을 하지 않았어도 먹고 살 길이 충분히 많았기 때문에 음악을 직업으로 삼을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퀸에 가입한 이후 직업 뮤지션으로 살아가기로 결단을 내렸고, 친한 친구에게 '아무래도 나는 음악을 해야 될까봐.'라고 말했었다고. 프레디 머큐리가 워낙 노는 것을 좋아했고, 당시 영국 대학생들도 술파티 같은 것을 빈번하게 했기 때문에 친구들과 모여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숙취에 쩔어 새벽에 집단으로 널브러져 있던 일도 자주 있었는데, 프레디가 기타를 들고 존 레논의 노래를 연주하며 불렀는데 그 목소리가 아주 끝내줬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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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기타를 연주하는 프레디> 조지 해리슨의 포스터가 보인다.

대학 친구들은 이때부터 프레디가 뭔가 될 법한 떡잎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

2

대학 재학 중에 아마추어 밴드 활동[5]을 하다가 로저 테일러브라이언 메이가 이끌던 스마일을 유심히 지켜보던 프레디는 보컬 팀 스타펠의 소개로 두사람과 만나게 된다.이후 팀 스타펠이 'Humpy Bong' 이라는 밴드에 가입하기 위해 스마일을 탈퇴하자 바로 그 빈 자리를 꿰찼다.[6] 그리고 팀의 베이스 오디션을 보았고 세번의 오디션끝에 베이시스트 존 디콘을 영입, 이 탄생하게 되었다. 후일 로저는 스마일 시절에 웬 이상한 녀석이 공연마다 와서 공연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잔소리를 했는데 그게 프레디였고 그 잔소리가 밉지 않은 녀석이었다고 밝혔다.

팀 스타펠은 프레디와 여러모로 죽이 맞는 친구였었다고 한다. 대학 강의실에서 프레디와 팀 스타펠이 책상을 두들기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동기들은 "재네 또 노래 부르면서 논다"식으로 웃어넘겼다는듯. 평전에 따르면 프레디는 내성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쾌활한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낯선 사람들이나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는 내성적으로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는 경우가 많았으나 친한 사람들 앞에서는 그렇게 노래도 부르고 장난도 치고 크게 떠들기도 했었다고.

로저와 브라이언은 프레디와 처음 만났을 때 서로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브라이언 메이는 이미 스마일 이전에도 <1984>라는 밴드를 만들어 근방에서 이름을 날렸던 적이 있었고, 로저 테일러는 대학에 오기 전 고향에서 아마추어 밴드 활동을 하면서 역시 이름을 날렸었다고 한다. 좋은 멤버를 구하지 못해 이리저리 아마추어 밴드를 옮겨다녔던 프레디에게는 실력 좋은 기타리스트와 드러머가 더더욱 눈에 들어왔을 것이라고. 프레디는 스마일의 공연에 매니저처럼 따라다니면서 팬을 자처하고 잔소리도 늘어놓았다.[7] 팀 스타펠이 탈퇴하고 스마일이 기획사에서도 버림받는 밴드가 되자, 로저와 브라이언은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프레디가 생각나서 그에게 연락을 취해 가입을 문의했다. 이런저런 아마추어 밴드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던 프레디는 고민도 없이 바로 OK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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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의 로고는 프레디가 디자인했으며, 위의 자켓도 프레디의 작품. 이 로고는 4,5집 이외의 앨범에도 자주 사용되었다. 로고에 들어가는 동물들은 멤버들의 생일 별자리를 나타낸다고.[8]

밴드 이름을 'Queen' 으로 제안한 것도 프레디 머큐리였다. 처음에 다른 멤버들은 퀸이란 밴드명에 반대했다고 한다. 퀸이라는 단어에는 속어로서 '동성애자'와 같은 의미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프레디 머큐리는 자기는 죽어도 밴드명을 퀸으로 하겠다고 고집을 피웠고, 다른 멤버들은 그 고집을 이기지 못해 결국 밴드 이름을 퀸으로 결정하게 된다.

퀸 초기에는 글램락의 영향을 받아[9] 긴 머리, 검은 매니큐어, 검은 눈화장, 나비 날개같은 옷, 몸에 딱 붙는 타이즈(발레복)를 주로 입었는데 손발이 오글거리는 의상이지만 의외로 또 소화를 잘 했다.[10] 강한 인상,큰 얼굴과는 달리 몸매, 특히 하체가 길고 가는 편이라 그럭저럭 소화를 했다. 날개 의상은 곧 자취를 감추지만 타이즈는 퀸 중반기(1976~1978)에도 종종 보인다.[11]

퀸 초기의 프레디는 유난히 무대조명과 의상에 집착했다고 한다. 공연 준비 금액의 절반 가까이를 의상과 조명에 쏟아부을 정도였다고. 게다가 도저히 남들이 이해를 하지 못하는 기괴한 의상을 멤버들에게 입으라고 강요해서 퀸이 공연 준비를 하는 대기실에서는 '으악! 도저히 이런 거 못 입겠어!'라는 소리가 자주 튀어나왔었다고. 특히 퀸에서 나이가 제일 어리고 성격이 수줍었던 멤버 존 디콘이 이상한 의상을 자주 강요받아서 난감했던 적이 많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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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에서 이런 옷 입고 무대를 뛰어다니는데 좀 민망하긴 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트럼프 쪼가리 같아 덕분에 수년 동안 세상에서 가장 옷을 못입는 팝 아티스트의 1등을 차지하는 영광(?)을 누렸다.

3집이 나오기 전까지의 퀸은 여타 무명 밴드가 그렇듯이 금전 사정이 안 좋았다. 이는 프레디도 마찬가지라서 퀸이 처음으로 방송 출연을 했을 때 가전제품가게에 진열된 TV로 방송에 나온 자신의 모습을 길거리에서 봐야만 했다고. 안습

데뷔 앨범인 <Queen>을 시작으로 점점 이름을 알리면서 명곡 <Bohemian Rhapsody>가 수록된 <A Night at the Opera>가 대박을 치면서 인기를 얻었으나 이상하게 평론가들한테는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듣기 좋은 육자배기도 한두 번인데 자기 까는 소리를 줄창 들으니 좋은 감정이 생길 리가 만무. 인터뷰도 잘 안 하고 평론가들에 대한 감정도 무척 좋지 않았다. 특히 성 정체성 때문에 더 그랬는데 프레디의 게이 의혹과 개인 사생활을 파헤치려는 찌라시를 생산해내는 언론의 행태로 그는 언론을 더욱 불신하게 되었다.[12]

무대를 휘젓고 다니는 거친 락뮤지션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게 클래식 음악이나 오페라, 발레 같은 장르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다. 그의 이런 음악 성향은 어릴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었다. 게다가 판타지 전설 같은 것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관심사 덕분에 퀸 초기 가사에는 '요정'이나 '괴물', '정의의 기사' 같은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프레디 머큐리는 70년대와 80년대 보컬이 차이가 크다. 70년대에는 아름다운 미성과 높은 음역이 특징이었다면(소위 레쩨로라고 부를정도이다.) 80년대에 들어서서는 파워풀하고 남자다운, 굵고 무거운 목소리를 보여준다. 참고로 콧수염을 처음 기른것도 1980년부터다. 즉, 이때부터 아예 노래 스타일이나 패션 스타일까지 바꿔버린 것. 때문에 콘서트에서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1970년대 공연엔 창법이 목에 무리가 가는 수준은 아니어서 컨디션 분배도 잘 됐는데, 1980년대 공연부턴 목소리가 굵어진 대신 목에 피로가 빨리 축적되어서 공연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딸린다. 이런 경향은 마지막 투어인 매직 투어에서 두드러진다.

1980년 이후 갑자기 목소리가 바뀌어 버린 이유에 대해서는 추측이 굉장히 많다. 1970년대에 소리를 과용하면서 만성적인 성대폴립이 생겨서 그렇게 되었다는 추측도 있고, 1980년대 이후 갑자기 목 관리를 하지 않으면서 목소리가 변해 버렸다는 추측도 있다. 실제로 프레디 머큐리가 콧수염을 기른 이후부터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언론에 공개되어서 그런 추측이 생겨났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허나 이렇게 많은 추측에도 불구하고 결국 프레디 본인은 목소리 변화의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퀸 말기, 1980년대 말에는 담배를 끊으면서 미성이 약간 살아나기도 하는데, 실제로 이때쯤 70년대의 창법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연도별 콘서트 영상 참조.

3 솔로 활동


퀸의 골수팬이 아니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프레디는 퀸 말고도 솔로 앨범도 두장이나 냈었다. 퀸 활동의 휴식기 였던 85년에 Mr. Bad Guy란 앨범[13]과 유명 소프라노인 스페인의 몽셰라 카바예와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기념해서 만든 '바르셀로나' 활동을 했었다.

Mr.Bad Guy 앨범에서는 기존 퀸에서 보여주었던 다양한 실험적인 락음악보다는 철저히 프레디 머큐리 본인의 취향이 담긴 음악들을 수록했다. 당시 유행했던 디스코,오페라, 팝, 모던락 등 퀸의 음악과는 확연히 다른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들을수 있다.

'바르셀로나' 앨범은 그가 좋아했던 성악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앨범으로 하나의 클래식 앨범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풍부하고 다양한 프레디의 고음역대의 발성을 마음껏 들을수있다. 다만 후에 그가 에이즈로 사망했다는 이유로 바르셀로나 올림픽 공식 응원가에서 탈락된 점은 안타까운 점이라 할 수 있겠다.하지만 BBC에서는 공식주제가 따윈 씹고 그냥 바르셀로나를 틀어줬다

4 말년, 그리고


말년에 에이즈로 고생하다 죽었는데, 1991년 11월 23일 에이즈 감염을 공식 인정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그 다음 날인 11월 24일에 사망했다. "당시 신문보도" 죽을 무렵엔 눈도 안 보이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멤버들은 이미 1988년부터 그의 에이즈 감염을 알았다고. [14] 그 즈음부터 프레디 머큐리는 급속히 초췌해지며 에이즈 감염설이 퍼지고 있었는데(당시 본인은 강력히 부인), 이 때 프레디는 멤버들에게 '너희들도 내 문제가 뭔지 알고 있겠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얘기하고 싶지 않아. 난 그냥 죽을 때까지 음악을 했으면 좋겠어'라는 식으로 고백을 했다. 나머지 멤버들도 그의 뜻에 따라 더 이상 그 문제를 논하지 않고 음악작업에만 몰두했다.

병색이 짙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프레디는 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로 약을 먹어가며 버티고 몸이 잠깐 좋아지면 그때 다시 작곡하고 노래하기를 반복했다. 프레디의 생전 마지막 퀸 정규앨범인 Innuendo는 프레디가 언제쯤 스튜디오에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멤버들에게 연락하면 나머지 세 멤버들이 데모 버전을 미리 만들어 놓고, 프레디는 컨디션이 좋을 때 스튜디오에 와서 보컬을 녹음하는 방식으로 앨범을 만들었다. 생전 마지막 싱글인 <The Show Must Go On>는 음이 높아서 브라이언 메이는 프레디가 이 곡을 부를 수 있을지 걱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프레디는 "I'll fuckin' do it, darling"[15]이라고 내뱉은 후, 투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독한 보드카를 쭉 들이키더니 삑사리 없이 한 큐에 녹음을 마쳤다고 한다.[16]

얼마나 마르고 초췌해졌는지 1991년 2월에 촬영한 <I'm Going Slightly Mad> 뮤직 비디오를 보면 두꺼운 화장으로도 병색을 감추기 힘들 정도. 콧수염이 없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움푹 패인 두 볼이 안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골 때릴정도로 유쾌한 분위기와 멤버들의 코믹한 표정연기가 인상적인 뮤비.

프레디는 건강이 허락할 수 있을 때까지 음악 작업을 했고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했다. 죽기 직전에 찍은 '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의 뮤직비디오도 원래 애니메이션으로 대체하려고 했는데, 프레디가 고집을 부려서 멤버들과 함께 출연하는 평범한 내용으로 바꿨다. 그래서 퀸의 80년대 후반 뮤직비디오들을 보면 시간이 지날 때마다 프레디가 점점 병색이 완연해지면서 초췌해지는 게 보인다. 프레디는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죽기 전날까지 인정하지 않았지만 되려 뮤직비디오 때문에 에이즈 감염설이 널리 퍼지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프레디 머큐리는 죽기 전 근 일 년 간 언론에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더 이상 치료가 의미 없음을 알게 되자 스스로 치료를 거부했다. 당시는 에이즈라는 병이 발견된 지 십여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생명을 연장하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이 전무했다. 프레디가 면역 결핍으로 죽어가고 있을 때 그의 곁에는 그의 애인이자 이발사였던 짐 허튼이 함께 있었고, 그는 프레디의 임종까지 곁에서 지켰다. 당시 짐도 1990년에 받았던 에이즈 검사에서 양성 판정을 받았지만 프레디에게 1년 간 그 사실을 숨겨왔다고(짐 허튼은 2010년에 죽었다). 프레디가 죽어가고 있을 때 그의 절친 엘튼 존이 자주 병문안을 왔었다고 한다.

또 재밌는 점은 프레디는 죽기 직전 그나마 몸이 괜찮을 때 그림을 상당수 그렸다고 한다. 저택에 틀어박혀 에이즈로 고통받고 있을 때 텔레비전에서 무슨무슨 그림이 비싼 가격에 팔렸다는 뉴스가 나오자 프레디는 씨바 저 정도는 나도 그리겠네 라면서 그 자리에서 그림을 몇 점 그렸다고. 그 이후에도 대학 시절 경험을 살려 그림을 몇 점 더 그렸고, 프레디는 자조 섞인 목소리로 애인인 짐 허튼에게 '이거 내가 죽고 나면 무지 비싸게 팔릴 거야.' 라고 농담처럼 말했었다고 한다. 프레디의 이름값을 생각하면 결국 비싸게 팔렸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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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가 찍힌 마지막 사진.

이렇게 긍정적으로 밝게 여생을 보내려 노력했지만 슬프게도 결국 1991년 11월 24일 프레디 머큐리는 일어날 힘도 잃어버린 채 그의 비서에게 에이즈를 인정하는 공식성명을 발표하게 하고 채 24시간이 안돼서 사망한다.
그의 사망속보는 전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고 세계 언론은 앞다투어 에이즈를 부각하며 프레디가 병에 걸렸다고 기사를 썼지만, 곧 그 내용은 다시 프레디의 사망기사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의 사망기사는 전세계 신문의 1면으로 다루어졌다.

세계를 흔들었던 보컬이 세상을 떠나자 멤버들은 에이즈 모금행사 겸 프레디 추모 공연을 개최하는데 이 콘서트에는 엘튼 존, 메탈리카, 데프 레퍼드, 액슬 로즈, 로버트 플랜트, 조지 마이클, 데이빗 보위 등 당대 슈퍼스타들이 총출동했다.
그리고 멤버들은 그의 유작을 모아 발매하고 죽음을 애도하며 'No one but you'를 작곡한다. 그리고 이 곡을 끝으로 그의 친구이자 멤버였던 존 디콘은 퀸의 탈퇴를 선언한다.

참고로 독실한 조로아스터교 신자였던 프레디의 부모님들은 프레디를 조장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현대 문명에 조장이라는 풍습은 거부감이 많이 들 수밖에 없었고, 또 프레디 또한 종교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삶을 살았기 때문에 지인들이 극심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결국 프레디는 화장되었고 재는 대중이 알지 못하는 곳에 뿌려졌기 때문에 그의 무덤은 없다.

5 재능

5.1 가수로서

터질듯한 화산

음악적 부분, 특히 가창력에서 최고의 보컬로 여겨지는 별칭.

보컬로서 역량이 드러나기 시작한 건 대학시절부터였다. 단 그때에는 천하의 프레디 머큐리도 실력이 다듬어지기 전이라, 목소리 기복이 심하고 거친 면을 보였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무척이나 예쁜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목소리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라고. 그 뒤로 혼자 엄청나게 연습을 했는지 퀸이 결성될 즈음에는 어느정도 안정된 보컬을 보여주게 된다.

프레디 머큐리는 어릴 적 합창부 시절을 제외하고 누군가에게 정식으로 노래를 배운 적이 없다. 그래서 보컬 부분에서 누구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 불분명하다. 가끔씩 성량이 풍부한 오페라적 창법을 보여주기도 한다.

프레디 머큐리는 젊을 적에 엄청난 미성이었다가, 나이가 들자 목소리를 굵게한 케이스다. 즉 70년대와 80년대 목소리가 다르다. 70년대 보컬은 성구전환을 정석적으로 조심스럽게 하되, 성대가 최대한 벌어지지 않게 노력한 상태에서 고음이 되면 후두가 크게 올라가는 형식의 벨팅창법을 주로 사용한 반면에 , 80년대에 들어서는 전체적으로 인골라에 빠져서 노래했고 성대가 벌어지고 갈라지는 탁성을 주로 썼다. 소리도 조심스럽게 가리던 취향에서 가성이든 쥐어짜는 탁성이든 되는대로 뽑아내는 스타일로 바뀌었다. 사실 프레디 머큐리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나 목소리는 다수가 80년대 스타일이다. 초창기 앨범, 퀸 1집을 들어보면 멜로디가 재미없어도 프레디의 미성 덕분에 들어볼 만한 곡이 몇 곡 있을 정도. 미성이었던 시절에는 그야말로 굉장히 중성적인, 야누스적인 미성이었다. 남성의 목소리와 여성의 목소리가 혼재된 듯한 그 마성의 목소리는 지금도 경탄의 대상.

전문적인 보컬 수업은 받은 적이 없지만 아름답고 매력적인 목소리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나이를 먹고 계속되는 투어로 80년대 중, 후반의 공연에서는 목을 좀 사리는 모습이 종종 보이지만 노래를 잘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디씨 락갤에서는 프레디가 낫냐 xx가 낫냐 떡밥이 심심치 않게 도는데 그런거에 현혹되지 말자. 컨디션이 좋았던 1985년 라이브 에이드에서는 2옥타브 후반대의 고음을 너무나도 편한 표정으로 내지른다...

원래 성부가 테너라고 많이 알려져 있었으나, 바리톤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프레디 머큐리의 진성 음역대는 0옥타브 파(F2)[17]에서 3옥타브 파(F5)[18], 가성 음역대는 4옥타브 파(F6)[19]까지 선보인 적이 있다. 곡 중에서는 아니지만 0옥타브 도#(C#2)까지 내린 적도 있다. 한 인터뷰에서 로저가 말하길, "난 프레디의 최고음을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뭐라구요...??

80년대에 낸 솔로 싱글에는 자신의 음역을 과시하는 Exercises In Free Love란 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노래에서는 그야말로 여성과 남성의 음역을 넘나드는 마성의 음역을 보여준다. 최고음은 3옥타브 파.
자세히 들어보면 가성이 아니다..

5.2 프런트맨으로서

퀸이 역사상 최고의 라이브 밴드 가운데 하나라는 평을 받는데는 머큐리의 무대 장악력이 가장 큰 기여를 했다. 그는 특유의 연극적이고 화려한 동작들과 관객 선동스킬을 바탕으로 퀸이 수만의 관객을 아우르는 스태디엄 공연을 해나가는 데에 매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프레디 머큐리의 무대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연은 1985년 라이브 에이드로, 그는 전세계의 내로라하는 뮤지션들이 총출동한 자리에서 밥 겔도프[20]엘튼 존이 '그들이 쇼를 훔쳤다'고 평할 만한 퍼포먼스를 보여줌으로써 당시 U2듀란 듀란과 같은 신진 세력들에 밀려 슬슬 동력이 떨어진 듯 보이던 노땅 취급받던 퀸을 다시금 정상으로 올려놓았다.

<퀸의 건재함을 보여준 라이브 에이드>

한편 프레디의 트레이드마크 중 하나인 받침대 없는 마이크[21]는 무대 위에서 지휘봉이나 에어 기타(...) 등등 다양한 용도로 쓰이며 퍼포먼스에 볼거리를 더해주었다.

오늘날 그를 존경하는 많은 후배 뮤지션들은 그 열정적인 무대 매너를 존경의 요인으로 뽑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라이브 에이드 공연은 그 임팩트 때문에 대형 공연의 교과서처럼 여러 뮤지션들에게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고, 커트 코베인은 유서에서 자신은 프레디 머큐리처럼 음악과 공연을 즐길 수 없다며 한탄 비슷하게 적어 놓기도 하였다.

공연 중간에 목을 풀겸 독특한 소리[22]를 내며 관중들과 호흡하는 것으로 유명하다.(위 영상의 4:11~4:49 부분 참조) 프레디 머큐리의 노래 교실 이 관중 조련은 그가 죽은 이후에도 계속돼, 추모공연이나 2012 런던 올림픽 폐막식 등에서 스크린에 나온 그의 생전 공연 음성을 관객들이 따라부르는 장면을 연출했다. 사족이지만 맨 마지막에 "fuck you!"는 생략되었다

5.3 작곡가로서

프레디 머큐리의 음악적 재능이 엿보이는 다른 부분이 바로 작곡 능력이다. 퀸 결성 때부터 브라이언 메이와 더불어 많은 곡을 작곡했으며, <Bohemian Rhapsody>나 <Don't Stop Me Now>,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23], <We Are the Champions>, <Somebody to Love>, <Killer Queen>[24] 등 퀸의 수많은 대표곡들이 프레디의 작품이다. 위 노래들은 2011년 한국에서도 아직까지 광고 음악이나 예능 프로그램 배경 음악으로 잘 쓰이고 있다. 노래 제목은 몰라도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은 프레디 머큐리가 작곡한 음악 최소 한두 곡은 알고 있을 정도. 음만 들려주면 "아~ 그거~" 하면서.

다양한 장르의 시도 및 혼합이 송라이터로서의 프레디 머큐리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로, 퀸 초창기(1, 2집)에는 보통 알려진 퀸과 프레디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헤비락 작곡에 치중했고, 그 이후 각종 발라드를 통해 피아노 발라드 스페셜리스트로도 자리매김했다. 그 외에도 프로그레시브 락, 가스펠, 팝, 디스코, 로커빌리, 오페라 등 다양한 음악을 시도했다. 디스코 쪽은 기존의 퀸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었던 <Hot Space>나 본인의 솔로앨범(<Mr. Bad Guy>)에서 두드러진다.

대중적이고 기억하기 쉬운 멜로디를 뽑아내는 솜씨 또한 아주 일품이며, 그러면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대중음악에 비해 특이한 전개, 수 차례의 조바꿈 등 복잡한 구성을 음악에 녹여내곤 했다(대표적으로 Bohemian Rhapsody, Bicycle Race와 Queen II에 수록된 곡들). 반면 그 자신은 악보를 거의 볼 줄 모른다고 말했다. 퀸 멤버 및 관계자들의 말에 의하면 프레디는 자신이 만든 곡을 일반적인 악보 형식이 아닌 그만이 알아볼 수 있을 법한 이상한 기호로 종이 여러 장에 적어 스튜디오에 가져왔다고 한다.

대부분의 노래는 피아노로 작곡했는데[25], 작곡하는 것도 좀 특이한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피아노 앞에 앉아 머리를 싸매거나 고뇌하는 게 아니라, 멜로디가 떠오르면 녹음하지 않고 머릿속에 넣어둔 후 나중에도 그 선율이 남아있으면 그제야 녹음하고 작곡을 시작한다고. 선율이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는 건 그 선율이 허접해서 기억할 가치가 없어서라고(...).

작곡가로선 70년대 중후반기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80년대엔 밤놀이에 빠져서 음악 작업에 매우 소홀해졌고, 게이클럽의 음악에 영향받은 가벼운 댄스음악으로 일관하다 보니 70년대 곡들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가 많았다. 하지만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80년대 후반기부터 다시 창작열을 불태워 <Barcelona>나 <Innuendo> 같은 명곡들을 써낸 거 보면 마지막까지 재능은 어디 가지 않은 모양.

5.4 연주자로서

퀸에서 보컬 포지션 외에 피아니스트로도 활약했는데, 정확한 리듬감이 그의 연주에서 보여지는 차별적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브라이언 메이에 따르면 프레디 머큐리가 작곡 후 녹음을 할 때 피아노 연주를 처음 깔고 시작하는데 메트로놈이 없이 그냥 자기 맘대로 한큐에 녹음하는데 그 박자가 메트로놈을 놓고 친 듯이 한 치도 틀리지 않고 정확해서 마치 드러머가 피아노를 치는 듯했다고 설명하였다.[26]

그랜드 피아노는 건반악기로 신디사이저를 주로 활용하는 락밴드에선 그다지 흔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프레디는 그랜드 피아노의 사운드를 선호해서 스타인웨이앤드선스를 스튜디오나 공연에서 활용했다. 존 디콘이 You're My Best Friend를 작곡했을 때 프레디에게 일렉트릭 피아노의 연주를 부탁했지만 프레디는 그랜드 피아노 놔두고 왜 그런 허접싸구려 악기를 쓰냐고 거절해서 결국 디콘이 직접 연주해 녹음하기도 했다.

하지만 머큐리 본인은 스스로의 연주 실력은 그다지 맘에 들어하지 않았고[27] 때문에 80년대 들어서부턴 본인이 직접 연주하는 대신 프레드 멘델, 마이크 모란과 같은 세션 뮤지션들을 적극 활용하게 되었다. 또한 후기 라이브에서도 피아노에 앉아있는 대신 무대를 돌아다니며 관객을 이끌어가는 방침을 택함에 따라 공연에서의 건반 연주도 거의 세션에게 떠넘겨지다시피 하게 되었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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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는 주로 피아노를 다뤘지만 기타도 쳤다.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때만 연주하는데 공연 때 코드는 3개밖에 칠 줄 모른다고 했지만 실제론 6개를 친다.[29] 참고로 82년 Hot Space 투어까진 통기타로 연주했으나, 84년 The Works 투어부터 펜더 텔레캐스터로 변경했다. 기타 실력은 본인 스스로 밝혔듯이 수준급과는 아주 거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브라이언 메이의 말에 따르면, 프레디가 머릿속에서 떠오른 기타 아이디어를 그에게 설명할 때 기타를 붙잡고 안되는 연주를 시도하다가 피아노로 뛰어가곤 했다고 전해진다.

6 잡다한 이야기

  •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과 친분이 있어서 여러 번 조우했다. 마이클이 프레디의 팬임을 자처해서 80~82년 퀸의 공연에 여러 차례 찾아오기도 했다. 참조 같이 세 곡을 작업하기도 했으나 스케줄 조정에 실패하여 생전에 완성곡이 발매되지는 않았다. 마이클 잭슨이 녹음 스튜디오에 애완 라마를 계속 데려와서라고 카더라 [30]이후 두 사람은 소원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프레디는 인터뷰를 통해 마이클 잭슨이 'Thriller'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이후 매우 바빠졌고 프레디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조금 소원해졌다고 말했다.
  • 밴드가 성공궤도에 오르면서 멤버들끼리 자잘한 트러블도 잦았는데, 그중에서 프레디는 브라이언 메이와 제일 마찰이 잦았다고 한다. 프레디와 브라이언이 싸우는 방식은 좀 웃겼다고 전해진다. 프레디와 브라이언이 사소한 말다툼으로 시작해서 점점 서로 목소리가 커지다가 브라이언이 냉소적으로 프레디가 상처받을만한 말을 하면 프레디는 빡쳐서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그러다가 몇시간 뒤에 다시 프레디가 돌아와서 어영부영 화해를 하고 다시 하던 일에 집중했다고 하는데, 그렇게 싸우고 있으면 주위 대부분의 반응이 '브라이언이 심한 말 할만 했네'였다고. 프레디가 주위 사람들이 납득하지 못하게 감정적으로 화냈던 적이 많았던 걸로 여겨진다. [31]
  • 시드 비셔스가 프레디에게 시비를 건 적이 있다고 한다. 불후의 펑크 록 밴드 섹스 피스톨즈에서 베이스라고 쓰고 핸드싱크라 읽는다를 담당했던 시드 비셔스에게 좋은 대학교를 나오고 뮤지션으로 대중적인 성공까지 이룬 프레디가 좋게 보일 리는 없었을듯. 어느날 음반작업실에서 프레디와 마주친 시드 비셔스는 "어이. 프레디 형님. 형님이 정말 관객들 앞에서 발레를 한 거유?" 라며 시비를 걸었는데,[32] 프레디는 "그럼. 우리는 최선을 다했지." 라고 말하며 유들유들하게 넘어갔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실제로 이런 말이 오갔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둘이 크게 충돌한 것은 사실이라고. 또 다른 이야기로 둘이 열받아서 서로 욕하다 프레디가 말하길 "크 존나 할퀴어 났네[33] 자해한거냐?[34] 병신아? 뭐 어쩔건데" 라는 식으로 말했다는데, 다큐등을 보면 알겠지만 성격이 절대 만만하진 않았던 듯하다. 오히려 강하다고 할 수 있다.
  • 세간엔 게이양성애자라고 알려져있지만 본인은 정확히 밝힌적이 없다.[35] 다수의 팬들이나 언론들은 그의 연애경력을 보아 그냥 양성애자라고 흔히들 보고 있는 듯. 프레디 머큐리는 대학의 명물이었고 그의 성정지향을 친구들 대부분이 알고 있었다고. 잔지바르에서 태어난 특이한 인종의 그가 화려한 옷과 장신구를 걸치고 다니며, 매일같이 깔깔거리며 웃고 '달링' 같은 말들을 남자들에게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다녔으니 눈치 못채는 사람이 이상했을지도. 대학에 다닐 때는 무척 화려하고 밝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 1970년대 알던 기타리스트의 소개로 알게된 여성 메리 오스틴과 사귀며 동거까지 하였으나 프레디가 다른 남성과 불륜을 가졌고 그사실을 1976년 메리에게 알리며 헤어졌다. 그렇지만 메리와는 헤어지고 나서도 좋은 사이를 유지했고 프레디가 본인의 유일한 '친구'라며 깊이 신뢰했다.[36] 프레디와 사귀던 애인들 중에 메리를 질투해서 그걸 항의하다가 프레디와 헤어진 사람들도 꽤 있을 정도. 프레디 역시 누구도 메리를 대신할 수 없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했고 가족 이상으로 신뢰하는 전 애인이자 친구였기 때문에 프레디가 죽고 나서 런던의 대저택을 상속받았다. A Night at the Opera에 실린 "Love of My Life"라는 유명한 발라드곡 역시 메리 오스틴에게 바치는 노래였다. 한 평전에 따르면[37] 후일 1980년대 중반에는 오스트리아 출신 여배우 바바라 발렌틴과 잠시 사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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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레디가 가장 오랫동안 애인 관계를 유지하며 동거했던 사람은 짐 허튼으로 1983년에 만나 사랑에 빠졌으며, 1985년부터 1991년 프레디가 죽을 때 까지 함께 했다.[38] 그들의 관계는 대중에서 숨겨졌기 때문에 종종 프레디의 정원사 내지 이발사로 소개되었으나 투어마다 같이 따라 간 것으로 보인다. 독일 방문 중엔 시장 한복판에서 짐 허튼 품으로 뛰어든 프레디 때문에 그는 잠시 주변을 살펴보며 식은 땀을 흘려야 했었다고. 짐은 1987년 프레디의 HIV 감염 사실을 알았으나 계속 함께했고 결국 그도 1990년에 HIV 감염사실을 알게되었지만 이미 투병생활로 피폐해진 프레디에게 그 사실을 숨겼다. 하지만 두번째 검사 결과는 프레디에게 알렸고 소파에 누워있던 프레디는 'The Bastards'(이 개자식들)라고 중얼거렸다고. 프레디는 짐 허튼에게 50만 달러의 상속을 남기고, 짐 허튼과 살고 있던 자신의 런던 대저택을 메리 오스틴에게 상속하며 짐 허튼이 집에 계속 머물 수 있도록 하였으나 그의 사망 이후 짐 허튼은 메리에 의해 강제로 집에서 쫓겨나야 했다. 짐 허튼은 2010년에 사망하였다. 참고로 짐 허튼은 1995년 자신과 프레디의 삶에 대한 회고록 <<Mercury and Me>>를 출판했다. 아무레도 프레디 머큐리를 우상화 하는 경향의 사람들이 읽기엔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면모가 들어나는 부분이기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는 모양.
  • 강렬한 콧수염과 독특한 무대 매너 때문에 굉장히 호쾌하고 터프했을 것처럼 보이지만 짐 허튼에 따르면 무척 수줍음이 많고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또한 굉장히 감성적이였다고. 한번은 크게 싸움을 하고 하루종일 침묵으로 일관하던 프레디에게 36개의 블루 문 장미를 가져다 주자 그제서야 마지못해 풀었다고 한다. 파파라치식으로 달려드는 언론을 피해 많은 연인들에게 의지하곤 했지만 배신도 많이 당하면서[39] 상처를 많이 받았던 모양.
  • 퀸의 드러머인 로저 테일러와 작은 옷, 장신구 가게를 하기도 했다. 어느 정도 생활비를 벌려고 여기저기 손을 써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프레디는 장사를 할 만한 타입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때의 일화가 있는데, 가게를 보던 도중 프레디 머큐리가 입던 재킷을 벽에 걸어놓았는데, 한 손님이 프레디의 재킷을 맘에 들어했다. 마침 프레디는 잠깐 외출 중이어서 로저만 있었는데 손님에 재킷을 맘에 들어하자 푼돈을 받고 그것을 팔아버렸다. 잠시 뒤에 돌아온 프레디는 로저가 자신의 재킷을 팔아버린 걸 알고 펄쩍 뛰면서 화를 냈고 직접 재킷을 되찾아왔다고 한다. 어쨌든 장사는 시원치 않았고, 오래 지나지 않아 가게를 접게 된다.
  • 오페라와 발레등 고전 예술 장르를 좋아했으며, 발레복을 입고 라이브할 정도니 성악에도 관심이 많았다. 파바로티도 좋아했었다. 이런 인연으로 프레디 사후 퀸 멤버들이 파바로티와 공연을 했었다(노래는 Too Much Love Will Kill You.브라이언 이 영어로 부르고 파바로티가 이탈리아어로 부름). 고음역대의 창법이 그냥 나온게 아니다! 이런 프레디의 취향은 그가 작곡한 노래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퀸 노래중 뭔가 요상한 멜로디의 노래들이 들린다면 십중팔구 프레디가 만든 노래라고 봐도 좋다.
  • 워낙 열정적이고 강렬한 이미지 때문에 왠지 덩치가 큰 걸로 기억되지만, 실제로는 175cm 가량으로 그냥저냥한 수준이다. 하지만 전신 사진을 보면 상체와 다리의 비율이 3:7로 보일 정도로 다리가 매우 길어서 신장이 커보였다고한다. 더군다나 트레이드마크 수준으로 유명한 복장인 나시와 하얀색 배바지를 입으면 기이해보일 정도로 다리가 더 길어보였다.솔직히 좀 심하다
  • 메가쑈킹이 알타리라는 개인 사이트에서 영화 패러디 만화를 그리다가 기사 윌리엄에서 프레디 머큐리 사진을 입힌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내용을 그려 퀸 팬들에게 쌍욕을 들은 적이 있다. 윌리엄을 등 뒤에서 안고 싶어하는 공주가 나오는데 어찌 공주가 쓴 마스크가 벗겨지더니 드러난 얼굴이 바로 프레디 머큐리 얼굴을 덧입힌 것이었고 윌리엄이 분노하면서 창으로 힘껏 두들겨 패주며 끝나는 줄거리였다. 당시에도 프레디의 팬들이 불쾌해하며 이 만화에 악플을 달기도 했다. 사실 영화 기사 윌리엄에 그의 노래가 나온 점 때문에 들어간 우스개이긴 하지만 어쨋든 고인드립이니... 메가쑈킹 항목참조.
  • 한국에서도 영챔프 기획으로 신인만화가들 단편형식의 시리즈물에 단편으로 나온 적이 있다. 요정과 관련해서 퀸의 그룹명이 퀸이 되었던 얘기를 다루고 있다.(퀸의 명곡들이 사실은 그 요정과 프레디와의 조우로 인해서 만들어 졌다는 식이다.) 참고로 등장한 마녀는 프레디와 연인이 되려다 딱지맞고 돌아서 막장 타는 역, 말년의 프레디가 죽기 직전에 다시 등장해서 그를 보살핀다......라고 쓰여져 있으나 덧붙이자면 써니라는 이름의 마녀는 마녀들의 세계에서 인간세상을 체험하는 일종의 성인식에 참석했고 마녀는 마녀세계에 있을때부터 아름다운 목소리를 듣고 반해 프레디의 집에 찾아가지만 불시착하는 바람에 프레디의 창문을 거의 깨부순다. 그로 인해 집안일을 해준다던지 작곡 공부를 배운다던지 하는 식으로 프레디의 집에 얹혀 살게 된고 때때로 퀸 멤버들도 만나고 하다가 마녀는 스스로 작곡을 하게 된다. 그 노래가 바로 Love Of My Life 라는 설정이다. 마녀는 프레디를 사랑하고 있었고 그에게 바치는 선물로 그 노래를 준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연주해보라는 마녀의 권유에 따라 프레디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연주를 하지만 마녀는 순간 프레디 마음속에 떠오른 사람을 보고 경악하게 된다.[40] 프레디가 연주를 끝내고 다른 멤버들은 명곡이라며 기뻐하고 프레디 역시 고맙다고 하지만 마녀는 혼자서 화난 듯한 표정으로 프레디를 쏘아보다가 "밴드 이름 아직 안정했다고 했죠? 이건 어때요? Queen." 이라고 추천해버린다(...) 물론 Queen 에는 동성애자의 뜻도 있기 때문인 것인 설정인 듯 하며 마녀가 밴드명으로 Queen을 추천하는 순간 프레디의 얼굴도 굳어지는 묘사가 나온다. 그날 밤에 써니는 프레디에게 화를 내다시피 하며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만 프레디는 받아들일 수 없었고 써니는 당신이 그럴리가(동성애자 일리가) 없잖아 라고 울부짖다 눈물을 흘리며 빗자루를 타고 작별인사를 하고 떠나간다. 그 후 오랜 시간이 흘렀고 프레디의 집, 병약한 프레디가 브라이언 메이에게 써니가 보고 싶다며 Love Of My Life의 연주를 부탁한다. 프레디는 곡을 감상하다가 눈앞에 빗자루를 타고 나타난 써니를 보며[41] 이름을 되뇌이며 끝.
  • 2011년 9월 5일에 탄생 65주년을 기념하는 구글 두들이 만들어졌다. 로고의 재생 버튼을 누르면 'Don't stop me now'의 1절이 영상과 함께 나오며 영문 자막으로 가사도 함께 볼 수 있다.
  • 튀어나온 입과 뻐드렁니에 대한 상당한 컴플렉스가 있어서[42] 웃을 때도 입을 가리고 웃고 수염도 그것을 가리기 위한 일환으로 길렀다고 한다. 80년대 말엔 면도를 했는데 그때의 수염들은 모두 가짜라고.
  • 2012 런던 올림픽 폐막식에서 당당히 한 부분을 차지했다. 그의 생전 영상을 따라 관중들이 가락을 따라하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프레디 머큐리는 성악가 몽셰라 카바예와 함께 'Barcelona'라는 곡을 부른 적 있는데, 이 곡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주제가가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올림픽 전에 프레디 머큐리가 에이즈로 사망하자 올림픽 측에서는 에이즈로 죽은 사람의 노래를 주제가로 쓸 수가 없다며 다른 노래로 바꾸는 병크를 저지른다. BBC는 꿋꿋이 'Barcelona'를 틀었다(...) [43] 이 점을 알고 폐막식의 장면을 보면 프레디 머큐리의 20년 묵은 한풀이 같다는 생각도 든다.
  • 퀸 평전에 따르면 진지바르 시절의 과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공연 직후 프레디의 동창들이 찾아왔는데 "죄송하지만 저는 귀하가 누군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잔지바르 시절이나 인도에서 유학하던 시절 이야기를 절대 스스로 입에 안담았을 뿐더러 본명도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퀸의 홍보담당으로 일했던 직원은 십 년 넘게 퀸의 멤버들과 같이 일했는데 프레디가 죽고 나서야 프레디의 본명이 파로크 불사라였다는 걸 알았다고. 상술했다시피 프레디는 퀸으로 데뷔하고 나서야 본인의 이름을 프레디 머큐리로 개명하는데, 대학시절에는 프레디 불사라라는 이름으로 그냥 썼다고 한다. 근데 동창들의 증언에 의하면 불사라라는 성을 밝히는 걸 매우 꺼려했다고 한다. 풀네임이 뭐냐고 물어보면 그냥 어물쩍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고.. 이쯤되면 본인이 고향에서 지내던 시절이나 인도에서 지내던 그 시절을 그냥 흑역사라고 생각했던듯. 인도야 그러다쳐도 잔지바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건 1964년에 잔지바르의 아랍왕조가 흑인에 의해 뒤엎어지면서 아랍인들과 인도인들이 대거 재산을 물수당하고 쫓겨났는데 프레디 머큐리의 가족들도 인도계였기 때문에 덩달아서 쫓겨났던 경험때문이었다는게 정설
  • 일본의 대전격투액션게임 길티기어 시리즈의 주인공 솔 배드가이의 모티브가 되었다. 캐릭터 이름부터 프레디의 별명이고 이 캐릭터의 보물이 시어 하트 어택앨범. 캐릭터 테마 ost는 퀸 1집의 수록곡 <keep your self alive>에서 제목을 따왔다.사실 락 음악 매니아인 프로듀서 영향탓에 이 게임에 등장하는 전 캐릭터가 락음악,뮤지션과 연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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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위스 몽트뢰에 있는 프레디 머큐리의 동상. 생전 프레디 머큐리는 몽트뢰를 자주 방문했다고 한다. 흔히 프레디 머큐리하면 생각나는 A Kind of Magic 투어의 모습을 담아냈다. Made in Heaven의 앨범 자켓이기도 하다.
  • 라이브에서 고음을 조금씩 낮춰 부르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역대 최고를 다툴 음색과 목청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성대의 내구성을 약하게 타고난 데다 정석적인 트레이닝을 전혀 거치지 않은 프레디의 목소리는 투어 후반으로 갈수록, 또 커리어 후반으로 갈수록 쉽게 피로가 누적되고 빠르게 지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84년 전후로는 자기관리 역시 좋지 않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파티 꼐임 파티 꼐임 공연 파티 파티 때문에 좋은 컨디션을 투어나 공연 내내 유지하는 데 무리가 오면서 점차 스스로 목을 사리게 된 것이지, 고음을 부르는 것 자체를 즐기지 않았던 가수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실제로 고음에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던 78년의 News of the World 투어와 최전성기인 79년의 Crazy 투어, 80년부터 82년 여름까지의 투어를 보면 프레디가 원곡에도 없는(...) 고음 애드립들을 섞어가며 노래를 더 빡세게 불러대는 모습을 자주 관찰할 수 있다. Somebody to Love에서 진성으로 C#5를 부른다거나
  • 고음을 피하는 경향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곡은 발표 이후 대부분의 공연에서 마지막 곡으로 등장했던 We are the champions. 매 코러스마다 등장하는 "We are the champions, we are the champions(Bb4)!" 를 부를 때면 프레디는 한 옥타브 아래를, 드러머인 로저 테일러가 원음을 내는 경우가 많다. 코러스를 원음으로 부른 라이브는 현존하는 음원들 중에서는 85년 라이브 에이드 하나뿐이다. 목을 험하게 사용하는 프레디의 가창방식상 마지막에 부르는 곡에 가장 취약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노래의 하이라이트이니만큼 팬 입장에서 상당히 아쉬운 대목임은 분명하다. # 일례로 컨디션이 좋기로 유명한 1981년의 몬트리올 라이브에서도 1분 즈음에 등장하는 해당 파트를 저음으로 깔아부르고 있다. 아무래도 같은 곡에서 등장하는 같은 높이(Bb4)의 다른 고음들을 무난하게 처리할 만큼 상태가 좋은 공연들에서도 한결같이 낮춰 부르기를 고수하는 것을 보면 못한다기보다 일부러 사린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팬들 입장에서는 아쉬운 부분. # 이름높은 라이브 에이드 공연에서는 최전성기가 살짝 지난 시점이었음에도 짧은 공연시간과 투어 휴식기라는 이점을 살려 첫 코러스의 C5와 위에 언급한 3차례의 Bb4s 노트를 모두 불러낸 바 있다. 사실 마지막 두 차례의 코러스에서 약간의 음정 불안이 드러나긴 하는데, 이는 부틀렉의 사운드로 들을 때나 확연하지 방송에서는 로저테일러의 완벽한 고음 하모니에 거의 묻혀 버린다. 아예 Flash, The Hero 처럼 엄청나게 키를 낮추는 곡도 있기는 하다 물론 낮춘 만큼 스무스하게 잘 부르지만
  • 1984년부터 1986년까지의 투어생활 말년 동안에는 데미지의 누적과 약간 미흡한 자기관리로 인해 성부가 바리톤에 가깝게 내려갔고, 투어 초반이 지나면 고음이 점차 버거워져 로저 테일러의 도움을 자주 받곤 했다.[45] 거꾸로 이야기하면 낮아진 성부로도 고음역이 대부분 커버되는 투어 초반의 공연들은 정말 귀가 즐겁다는 뜻도 된다. 그러니까 투어 초반 공연들 위주로 찾아서 들으세요. 퀸 팬들 중에는 일부러 못 부른 라이브만 찾아서 듣는 변태(...)들도 많다 카더라 "으악, 하나도 안 올라가네!" 하면서 즐기다가 의문의 고음 하나 성공하면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어쨌거나 라이브 에이드 공연의 경우 위에 서술한 것처럼 20분 남짓한 짧은 공연 시간과 The Works 투어를 마치고 가진 2달 가량의 휴식 덕에 당시 공연들의 평균치를 아득하게 뛰어넘는 화려한 퍼포먼스를 들려주지만, 대체로 당시, 특히 1984년도 9월 즈음의 콘서트들 중에는 커리어 최악의 기량을 선보인 적도 적지 않다. 다행히도 1985년으로 접어들면서 조금씩 목소리 관리에 신경을 기울인 것인지 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하고[46], 1986년에 벌어진 A Kind of Magic 투어에서는 긴 셋리스트와 빡빡한 일정그리고 어느덧 40에 이른 나이이라는 난관에도 오히려 투어 막판에 상태가 반등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기대 이상의 공연을 여럿 남기기도 했다.
  • 다만 Live At Wembley 86' 라이브 앨범과 DVD 영상은 매직투어 중 가장 상태가 나빴던 7월 초중순의 공연을 담고 있다. 게다가이틀연속 진행된 웸블리 공연에서 이미 첫날 많은 힘을 쓴 상태에서 훨씬 지친 모습의 2일차 공연을 베이스로 사용하게 된 것 또한 악재.[47] 이 때문에 가끔씩 웸블리 공연에서 프레디가 의외의 파워풀한 고음을 내는 장면들은 대부분이 오버더빙의 힘을 빌어 연출된 것이다. 공연 후반에 보헤미안 랩소디를 부르고 나서는 목소리가 거의 나가버려서[48] 이후의 곡들 중에서는 오버더빙이 들어가지 않은 곡이 오히려 드물다.[이외에도 One Vision, A Kind of Magic, Who Wants to Live Forever 등에서 오버더빙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 오버더빙 이전의 웸블리 공연은 이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해당 영상이 올라와 있는 채널은 퀸의 공연에 입문하는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만한 유명 퀸 전문 채널.
  1. 프레디 머큐리를 최고의 락 프론트맨 2위로 선정하면서 남긴 코멘트. 록 역사상 최고의 프런트맨을 꼽을 때 절대로 순위권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다.
  2. 여기가 옆 나라였던 탕가니카랑 합쳐지면서 이름이 탄자니아로 바뀌었다.(세렝게티로 유명한 그 나라 맞다.) 탄자니아에서는 프레디 머큐리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지 잘 몰랐다.(사실 프레디 머큐리를 알릴만한 사람들이 죄다 오만이나 인도 등지로 쫓겨났기 때문인것도 컸다) 그러나 하도 외국인들, 팬들이 탄자니아와서 자꾸만 "프레디 머큐리가 태어난 집 어디에요?"라고 묻기에 결국 누군지 몰라도 하여튼 유명한 사람이라는 게 알려졌다. 그리고 서로들 자기 집이 그가 태어난 집이라고 광고하거나 가르쳐줘서 진짜 태어난 집을 찾기 어렵다고 한다. 하도 경쟁이 심해져서 프레디 머큐리 사진을 가득 붙이고 우리가 진짜 프레디가 태어난 집 원조 머큐리 하우스라고 붙이고 걸개를 내걸지 않나, 경쟁이 장난 아니라고 한다.
  3. 여담으로 탄자니아에 있어야할 프레디 머큐리 출생신고서는 옛날에 분실되었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가 훔쳐가서 수집가들에게 비싸게 팔았을 거라고.
  4. 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를 로마 신화에서 부르는 이름이 머큐리이다. 메르쿠리우스.
  5. 일부 매니아들이 보관하고 있는 이 시절 음악을 들어보면 정말로 프레디 머큐리가 몸담았던 밴드가 맞나 싶을 정도로 음악이 아마추어틱하다. 아무래도 아마추어 밴드의 멤버들이 퀸의 멤버들과 갭이 있는데다가 프레디 머큐리도 어릴 적이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을 듯. 프레디는 이 시절에 서너 개의 밴드를 거치지만 모두 일이년을 있지 못하고 밴드가 해체했다. 음악 수준도 모두 고만고만했다.
  6. 팀 스타펠은 옮겨간 'Humpy Bong'이란 밴드의 결과가 좋지 못했고, 결국 음악을 그만두고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았다. 자신은 퀸이 잘될 것을 알고 있었고 음악을 그만둔 것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여담으로, 이 사람 평범한 직장인은 아니다. 토마스와 친구들의 모형과 디오라마를 만든 사람이다! 항목 참조.
  7. 공연이 맘에 들지 않는 날이면 "내가 너희들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좀더 너희들의 가능성을 끌어올려봐" 식으로 애정 어린 격려도 자주 했었다고 한다.
  8. 프레디 머큐리의 처녀자리를 상징하는 요정, 브라이언 메이를 상징하는 게자리, 존 디콘로저 테일러사자자리
  9. 이때문에 글램락의 잔재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10. 성악,오페라,클래식,발레등을 즐겨보는것이 취미였던 프레디의 영향이 컸다.
  11. 1985년 자신의 솔로 앨범 "Mr.Bad Guy"의 수록곡인 "Living On My Own"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할 때도 타이즈를 입었는데, 촬영장소는 다름아닌 본인의 생일파티(...)
  12. 보수적인 마인드가 강한 영국에서는 양성애자인 그의 퀴어적인 행동이 언론의 가쉽거리였다. 컴퓨터 공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동성애자앨런 튜링이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만 보아도...
  13. 세계 최대 음악 사이트인 allmusic.com에서 별4.5를 받았다!(5개 만점)
  14. 정확히는 그 즈음에 밑에 서술한 대로 프레디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말했는데 이미 에이즈 감염 소문이 파다할 때였기에 맴버들은 그 말을 하는 순간 알아챘을 것이다.
  15. '씨x 하지 뭐' 정도의 뉘앙스 마 함 해보입시더
  16. 시한부 인생의 막바지에서 자신의 삶을 얘기하는 듯한 가사의 이 곡을 프레디 역대 최고의 보컬 퍼포먼스로 뽑는 팬들도 많다.
  17. <All dead, all dead>, <Somebody to love>, <Don't try suicide>, <Bijou>
  18. <All god's people>
  19. <Under pressure>1984년 9월 5일 런던 라이브
  20. 라이브 에이드의 기획자
  21. 이 마이크의 유래는 다분히 우연적이었다. 프레디의 퀸 이전 소속 아마추어 밴드였던 Wreckage 공연에서 마이크를 스탠드에서 분리하던 중 스탠드가 무서지며 마이크에 막대기가 달린 채 분리되어 버렸고, 프레디는 이 새 유형의 마이크를 마음에 들어해 이후 공연들에서 계속 쓰게 된 것이다.
  22. 부틀렉 등에선 Day-oh로 표기가 되곤 한다. 암만 들어도 데이오보단 에롭에 아까운데
  23. 이 곡은 목욕하다가 악상이 떠올라서 만들었다고 한다
  24. 5여분 만에 만들었다한다(...).
  25. 후기에는 방식이 조금 달라져 80년대 한 인터뷰에서 피아노와 기타 중 무엇으로 작곡하냐는 질문에 '요즘은 머릿속으로 작곡한다'고 대답했다.
  26. Bohemian Rhapsody 메이킹필름 참조
  27. 머큐리의 절친이었던 엘튼 존은 자신과 머큐리를 비교하며, 공연에서 자신은 피아노 연주보다 노래 부르는데 집중해야 하지만 프레디는 피아노에만 집중하면 노래는 대충 불러도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즉 자신이 피아노는 더 잘 치고 노래는 프레디가 더 잘 한단 얘기.
  28. 가령, 70년대의 공연에선 거의 공연의 절반을 피아노에 앉아 보냈지만 마지막 투어였던 매직 투어의 경우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는 곡은 단 4곡뿐이었다.<In the Lap of the Gods...Revisited>, <Seven seas of Rhye>, <Bohemian rhapsody>, <We are the champions>
  29. 라이브에서 브라이언 메이가 아니라 프레디가 직접 친 이유는 스튜디오 버전의 해당 파트를 녹음한 사람이 자신이기 때문이다. 프레디 사후 공연들에선 브라이언이 프레디 파트까지 모두 연주한다.
  30. 2014년 발매된 Queen Forever 앨범에는 프레디 머큐리와 마이클 잭슨의 데모곡을 합친 there must be more to life than this를 담아 발매했다.
  31. Lesley-Ann Jones가 쓴 프레디 머큐리 바이오그래피 참조
  32. 뜬금없이 발레 이야기를 하는데, 프레디가 초기에 콘서트에서 입었던 발레같은 의상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33. 얼굴과 가슴에 손톱으로 할퀸 자국들을 의미한다.
  34. 시드 비셔스는 공연 도중 자해(..) 퍼포먼스로 유명했다.
  35. 언론들의 질문공세에 자기는 그냥 자신일 뿐이라고 일갈했었다.
  36. 메리 오스틴 역시 나중에 결혼을 했지만 이혼을 했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프레디가 대부가 되어주었다.
  37. 국내에 정식 출판되지는 않았다. 인터넷에 비공식적으로 번역된 평전이 있으니 흥미가 있는 사람은 읽어보는 것도 좋다.
  38. 짐 허튼은 아일랜드 계이다. 아일랜드에서 빵집을 운영하는 아버지 밑에서 일곱째로 태어났다. 그의 형재는 9명이다.
  39. 돈을 받고 사생활을 언론에 넘긴다든가 하는 식으로...
  40. 동성애자임을 알게 된 설정인 듯 하다.
  41. 정말 나타난건지 환상인지는 의문. 작가의 의도에 따라 달라질 듯 하다.
  42. 아직 수염을 기르지 않았을 때 동료 뮤지션이 프레디의 이를 보고 드라큐라 같다고 농담삼아 말했는데 프레디가 정색하면서 욕을 해서 주변 분위기가 싸해진 적도 있었다고 한다.
  43. 뭐 이 노래 대신 선정된 노래도 나쁘진 않았으나(...)
  44. 첫 번째 솔로 앨범도 자신의 애완 고양이에게 바쳤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 세계의 애묘인들까지 포함해서.
  45. 로저 테일러는 중년이 넘어갈 때까지도 괜찮은 목상태를 유지했고, 선천적으로 높은 성부에 창법 상의 이점이 더해져 고음에서는 불안한 느낌이 거의 없었다. 물론 목소리의 전체적인 완성도나 파워는 프레디에 비하면 조금 부족하지만.
  46. 1984년의 남아프리카 투어 당시 녹음되어 전해지고 있는 유일한 공연인 Sun City 에서의 공연은 몹시 유려한 가창을 들려준다!
  47. 투어 중반을 넘어가면서 피로도가 극에 달해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이지, 에이즈나 질병의 조짐이 보였다 판단할 만큼 극단적인 건강상태는 아니었다.
  48. 이때의 보헤미안 랩소디 라이브는 컨디션에 비하면 정말 잘 부른 편. 사실 흉성의 완성도와 활용도가 높아진 매직 투어의 프레디는 이 곡과 Tear It Up 등을 이전 투어에서보다 수월하게 소화해낸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