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드러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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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Ferdinand Drucker

1909년 11월 19일 ~ 2005년 11월 11일

1 개요

"마케팅의 목적은 소비자들의 충족되지 못한 욕구를 발견하고, 그것을 충족시킬 방법을 마련하여 판매를 불필요하게 하는 것.”

인문 경영학의 아버지

오스트리아 출생의 미국인으로, 작가이자 경영 컨설턴트, 교수였다.역시 믿고 쓰는 오스트리아 인재들 그리고 자기계발서에 자주 등장한다

스스로는 자신을 “사회생태학자 (social ecologist)”라고 불렀다.

20세기그 다음 세기의 기업 경영에 큰 영향을 준 인물로, 30권도 넘는 경영서적을 저술하였다. 새로운 지식경영의 패러다임을 연 선구자. 그러므로 경영학 공부를 하다보면 정말 지겹게 만나게 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저술하지 않은 분야가 없다.(...)[1]
민영화마케팅에 대한 화두를 던진건 매우 유명하다. 애초에 마케팅이란 단어를 창시한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1959년에는 지식 노동자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어제까지 유효했던 전제가 갑자기 의미가 없어지고 다른 것으로 대체되는 것이 오늘날 현실이다. 기업경영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 경영에 관한 연구가 시작된 이래 학자, 평론가, 그리고 기업가들은 70년이 지난 지금(2000년대)도 여전히 몇 가지 종류의 전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전제는 모두 낡은 것이 되어 버렸으며 더 이상 쓸모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21세기 지식경영 中

2 청년시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오스트리아의 수도 을 떠나 독일의 함부르크에 있는 면제품 수출 회사에 견습생으로 입사하여 장사를 배웠다. 그의 부친은 그가 회사에 들어간 것을 그다지 탐탁해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공무원, 교수, 변호사 그리고 의사들을 배출했기 때문에 그의 부친은 그 역시 그러한 직업을 갖기를 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학교 생활이 지겨웠고, 또 일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어쨌든 그는 부친의 심정을 헤아려 1927년 함부르크대학교 법과대학에 등록을 했고 법학 공부를 했다.

주말에는 다른 두 견습생과 함께 주로 함부르크 근처의 아름다운 시골길에서 자전거 하이킹을 즐겼다고 한다. 주중의 5일 동안은 함부르크의 유명한 시립 도서관에서 저녁 시간 대부분을 보냈는데, 그 도서관은 그가 근무하는 회사 바로 근처에 있었다. 거기서 그는 독일어와 영어 그리고 프랑스어로 된 책을 읽고 읽고 또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일주일에 한 번씩 오페라를 관람했는데,[2] 그는 견습생이었기 때문에 돈이 별로 없었지만, 다행히 대학생은 오페라를 무료로 관람할 수[3]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베르디의 오페라 팔스타프를 보고 완전히 매료되었다고 한다. 그때 베르디가 쓴 글[4]을 읽고, 그 말을 평생의 교훈으로 삼았다고 한다.[5]

그 후 그는 프랑크푸르트의 최대 신문사에 금융 및 외교 담당 기자로서 첫발을 내디뎠으며, 프랑크푸르트 법과대학의 칼 슈미트 밑에서 헌법으로 박사학위논문을 썼다. 그러다가 그의 글들이 나치들에 의해 불에 타 없어지는 봉변을 당한 후, 그는 1933년에 영국으로 이민을 갔으며, 그곳의 파이낸셜 타임즈에서 기자로 활약하였다. 1937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버몬트의 베닝턴 칼리지에서 철학 및 정치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동시에 기업에 경영컨설팅을 제공하는 일을 시작했다. 이때 '경제적 인간의 종말' '협동의 개념' 같은 몇 권의 주요한 책들을 출간하였는데, 그 책들이 그에게 오늘날의 엄청난 명성을 안겨 주었다.

3 평가

보수우파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숭배급의 인물. 이는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그렇다.

한국과 관련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가 이룩한 성과 가운데 가장 놀라운 기적은 바로 박정희의 위대한 지도력으로 경제발전 이룩한 대한민국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마르크스인류를 가난하게 만드는데 가장 공헌한 학자라면, 피터 드러커는 그 반대의 사람."이라는 말도 있다.

다만 과연 과학적인 엄밀한 학문 체계를 갖추었는지 따져 봐야한다는 평도 있다. 아놀드 토인비처럼.

경영학의 초창기, 대부분의 경영자들이 기업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으로 '영리를 추구하는 조직'이라고 하는 반면 피터 드러커는 '영리를 추구한다'는 말이 '기업'에 대해 정의하는 데 적합하지 않으며, 기업의 존재 이유는 '고객'이며 목적은 '시장'이라고 주장했다. 피터 드러커의 경영관으로 기업의 경영의 중심에 고객을 두고, 근로자를 비용이 아닌 자산으로 인식시키려 했다는 점이 피터 드러커가 현대 경영학에 남긴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 받고 있다.

4 기타

  • 청년 시절 좌파 성향의 경제학자인 칼 폴라니(23세 연상, 당시 경제잡지 편집장)와 매우 절친했는데, 월급으로 번 돈을 모두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쓰고 나머지로 생계를 꾸리는, 아니 애초에 월급을 자기를 위해 쓴다라는 것을 생각하지도 않는 폴라니 집안 사람들에 대단히 의아해했다고. # [6] 이런 차이가 두 학자의 길을 갈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폴라니는 뒷날에야 사회학에서 주목 받고 있지만.
  • 만약 고교야구 여자 매니저가 피터 드러커를 읽는다면 - 제목 그대로 일본의 고교야구팀의 여자 매니져가 피터 드러커의 매니지먼트를 읽고 팀을 이끌어 나가는 소설이 히트한적이 있다. 물론 경영학은 소설의 양념 정도로 진지한 경영서적은 당연히 아니지만, 의외로 경영학과 스포츠라는 다른 주제를 재미있게 잘 섞었고, 입문서로도 나쁘지 않은 정도.
  • 근 아흔살 까지 정력적인 활동으로 건강한 몸을 유지했다. 1978년에 자서전(Adventures of a Bystander)을 썼는데, 20세기 초 동유럽부터 세계대전, 20세기 중후반 미국까지 서구 역사와 사회를 엿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그런데 이걸 쓰고 한 세대를 더 일했다. 인생 이모작, 아니 삼모작..
  1. 한 분야를 소소하게 주당 몇 시간씩 공부해 몇 년 누적하면 해당 분야의 전문가와 말이 통했다고. 그리고 다른 분야로 관심을 옮겨 또 공부..
  2. 그 당시 함부르크 오페라는, 지금도 그렇지만, 세계 최고 오페라 가운데 하나였다.
  3. 개막 한 시간 전까지 극장 앞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막이 오르기 10분 전까지도 팔리지 않은 제일 값싼 좌석은 대학생에게 무료로 제공되었다.
  4. "음악가로서 나는 일생동안 완벽을 추구해 왔다. 완벽하게 작곡하려고 애썼지만, 하나의 작품이 완성될 때마다 늘 아쉬움이 남았다. 때문에 나에게는 분명 한 번 더 도전해 볼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5. 나중에 세계적인 석학이 된 후 사람들로부터 "당신이 쓴 책 가운데 어느 책을 최고로 꼽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웃으며 "바로 다음에 나올 책이지요."라고 대답했는데, 그렇게 말한 이유도 베르디의 교훈을 상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베르디가 여든 살이라는 나이에도 늘 자신을 피해 달아나는 완벽을 추구하면서 오페라를 작곡했던 그 때 그 심정으로 대답한 것이다.
  6. 훗날 드러커는 폴라니 일가를 "자신이 알고 있는 한 가장 재능이 풍부한 사람들이고 가장 큰 업적을 올린 사람들이지만 그처럼 큰 실패를 겪은 사람들도 없다"고 회고했다. 폴라니 가문에 대해 나름의 큰 인상을 받았지만, 그 나름은 이상 대신 현실의 길을 고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