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중국

一个中国 / 一個中國 / One-China policy

파일:VdTM9us.jpg
중국측 사진 왼쪽의 안경 쓴 인물이 당시 외교부 부부장인 차오관화(喬冠華/乔冠华;교관화)이다.

파일:Its3Z2Q.jpg
대만측 사진 오른쪽의 안경 쓴 인물은 당시 외교부장 저우수카이(周書楷/周书楷;주서해)

파일:XMV01E2.jpg
1971년 10월 UN 총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대표권을 인정하는 UN총회 제2758호 결의안의 통과 순간.(상임이사국 자리도 뺏기게되었다.)

위 사진은 환호하는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인사들, 아래 사진은 침통한 표정의 중화민국(대만) 인사들.

1950년대에 이미 중국의 대표권 문제는 UN의 중대문제라서 ⅔ 이상의 동의가 없으면 중국 대표정부를 변경하지 못하게 결정해놓았고 1971년 결의안도 상임이사국 지위를 확보하던 중화민국이 거부권을 발동시키면 끝인 문제였지만 이미 대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고 판단했는지 자진탈퇴를 해버렸다. 하지만 이 탈퇴는 이후 대만의 국제외교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치고 만다.

1 개요

대만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신성한 영토의 일부분이다. 조국통일이라는 대업을 완성하는 것은 대만 동포를 포함한 전체 중국 인민의 신성한 책무이다.

-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서문의 일부

대만, 팽호, 금문, 마조의 동포뿐만이 아니라 대륙의 모든 동포들이 중화민국은 오늘도 존재하고 내일도 존재하고, 장래 대륙을 수복해야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 장징궈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이 주장하고 있는 원칙. 중국 대륙대만 섬, 홍콩, 마카오는 절대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이고[1], 합법적인 중국 정부는 오로지 하나라는 주장을 뜻한다.

마카오는 이미 청나라시절에 포르투갈에 양도된 상태였다가 협상을 통해 반환받았으므로 이 도시는 실질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실효지배가 미치는 영토이자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이다. 홍콩의 경우 발달한 민주주의 의식과 주민들의 반 중국 공산당 감정으로 하나의 중국 논리에 장애가 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2014년 들어서 비중이 커진 것이고 그 이전까지는 별다른 영향력이 없었으며 공산당의 처우에 반대해 홍콩 독립을 외치는 자는 소수이다. 소수민족들은 중화권에서 차지하는 비중 자체가 너무 없어서 고려 대상에 들어가기조차 힘들다. 그러므로 하나의 중국 관련 논제에서 가장 비중이 큰 것은 역시 타이완이다.

2 상세

시작은 1920년대 중국 국민당의 광동 정부와 베이징의 북양군벌이 정부 단일화를 위해 협상했던 것이다. 이것을 선후회의라고 한다. 그러나 국민당측과 북양군벌간의 회의 참여주체를 둘러싸고 대립하다 결국 무의미하게 종결되었으나 사실상 광동 정부만이 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인상을 주게되어 중국 통일에 대한 명분을 획득하였다. 이후 국민당은 북벌로 중국 전역을 공식적으로는 통일한다.[2]

이후 1945년경 국공 양당의 연합정부 결성과 상호간의 정통성 대립을 둘러싸는 논쟁에서 직접적으로 하나의 중국 원칙이 태동되었다. 이렇듯 하나의 중국 원칙은 수십년동안 중국내 모든 정치세력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3][4]

현재는 대륙을 지배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이나 대만으로 밀려난 중화민국 모두 하나의 중국 원칙은 포기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실질적으론 양국간에 상당한 온도 차이가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자신들이 하나의 중국의 주체이며 대만에 있는 중화민국은 그저 국민당 잔당세력이 이미 소멸한 중화민국을 참칭하는 지방정권에 불과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국내에서 이 관점에 반대하는 자를 처벌하며, 강대한 국력을 배경으로 국제사회에 중국과 대만 중에 양자택일하라는 식으로 초강경 태도를 보이고 있다.나야 저년이야?

중화민국 정부도 명목상으로 이 원칙을 견지하고 있으나, 아무래도 힘에서 밀리기 때문에 크게 내세우지는 않는다. 또한 국내에선 정당과 국민들마다 입장은 다르다. 그래서 이 원칙을 지지하는 사람도 있고 이 원칙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국민당범람연맹의 경우 이 입장을 지지한다. 단, 중화인민공화국이 말하는 '중국'은 당연히 '중화인민공화국'이고, 대만의 범람연맹이 말하는 '중국'은 '중화민국'이라는 차이는 있다. 다만 오늘날에는 현실이 현실인지라 범람연맹에 속하는 사람들이 모두 완고하게 중화민국에 의해 중국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주장보다는 양측이 동등한 입장에서 민주주의에 의한 통일을 이루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에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범록연맹 쪽에서는 당연히 하나의 중국 원칙에 대해 부정적이다. 하지만 범록연맹의 핵심인 민주진보당도 현실을 고려해서 공식적으로는 대만독립이나 하나의 중국 원칙 폐기를 주장하지는 않고, 대신 대만내에서 슬금슬금 중국, 중화의 색채를 빼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현재는 거의 원래대로 되돌아간 상태지만 2016년 총통 선거에서 당선된 민주진보당 소속의 차이잉원도 양안관계에선 현상유지에 가까운 상당히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현재는 대만에서 민주진보당 등 범록(泛綠) 진영의 위세가 과거에 비해 커지면서, 대만 독립론이 중요한 이슈로 급부상하게 되자 중국의 관심은 중화민국보다도 대만 독립론에 쏠리고 있다. 민주진보당의 천수이볜이 집권하고 있던 시기 이들이 중화민국에서 '중화'나 '중국' 색을 지우고 '대만' 색을 강화했다. 예를 들어 천수이볜 집권기에 다음과 같은 일들이 있었다.

  1. 여권이나 국영 웹사이트에 기재된 '中華民國'을 '中華民國(臺灣)' 또는 '中華民國(台灣)'으로, 'Republic of China'를 'Republic of China (Taiwan)'이라고 고쳤다.
  2. 국영기업인 중국석유는 대만중유(台灣中油; CPC Corporation, Taiwan)라는 어정쩡한 이름으로, 중화우정(中華郵政)은 대놓고 대만우정(臺灣郵政)으로 고쳤다. 중화민국 정부가 출자하는 중국강철(中國鋼鐵, China Steel)도 비슷하게 개명을 하려 하였으나 이미 국제적으로 인지도가 있기 때문에 함부로 고치기가 힘들어 결국 개명하지 못했다.
  3. 과거 국민당 집권기에 쓰였던 로마자 표기법들과 중화인민공화국의 한어병음에 맞서서 통용병음을 제정했다.

임기 말에는 아예 헌법을 개정해 중화민국을 대만화시킬려고했으나 중화인민공화국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포기할지언정 타이완 독립을 묵과하지는 않는다라는 사실상의 선전포고에 가까운 최후통첩을 보내 이를 백지화시켰다. 범록연맹에 더해서 대만 내의 현상유지를 지지하는 세력의 강한 반발도 무시할 수 없었던것도 컸지만.

이후 국민당의 마잉주가 집권한 뒤 이 조치들의 거의 전부를 취소하고 원래대로 복구했다.

  1. 여권이나 국영 웹사이트 등의 '中華民國(臺灣)' 또는 '中華民國(台灣)'은 '中華民國'로 되돌리되 영어판에서는 'Taiwan'을 삭제하지 않았다. 중국어권에서는 중화민국만 기재해도 중국 대륙과 혼동하지 않으므로 굳이 대만이라고 병기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삭제했지만, 중국어권 밖에서는 혼동하기 때문에 Taiwan의 병기가 불가피하다는 현실을 인정하여 이와 같이 조치한 것이다.
  2. 대만중유는 중국석유로 되돌리려 했으나 이미 교체 작업이 상당히 진척돼서 정체한 듯하다. 하지만 대만우정은 중화우정으로 원상 복구했다[5]
  3. 통용병음을 폐지하고 한어병음을 공식적인 로마자 발음 표기 수단으로 지정하였다.

한편 중화인민공화국의 시차가 어느 지역이든지 간에 중앙정부가 위치한 베이징 시간대인 UTC+8가 적용된 것도 하나의 중국 논리에서 온 것. 하지만 중화민국의 경우 대륙을 통치하던 시절 한 번도 전국적으로 동일한 시간대를 설정한 적이 없으니 이 쪽은 오히려 너무 정확하게 따져 5개 씩이나 되는 표준시를 설정해 현실성이 없었다.[6] 중화인민공화국의 조치는 과도하다고 볼 수 있다.[7]

3 양안관계

앞서 말했다시피 하나의 중국 원칙은 양측이 공통적으로 주창하며 특히 중화인민공화국은 이 관점을 전세계에 요구한다. 그러므로 대한민국, 미국, 일본 등의 국가들과 서방 국가에 대해 자국과 수교하려면 상대방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국가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정통으로 인정하지만 대만과도 대표부를 설치해 비공식 관계를 이어가고있다. 물론 중화민국 역시 공식적으로 하나의 중국 정책을 주장하지만 이건 중국 국민당친민당범람연맹의 입장이며, 민주진보당대만단결연맹범록연맹 쪽에서는 중화민국이라는 이름 자체를 버리고 대만민국대만 공화국으로 완전한 독립을 하자고 하고 있다.하나의 중국과 하나의 대만을 하자는 것.

사실 민주진보당이 본격적으로 약진하게 된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대만 독립론은 그다지 힘을 받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 와중이던 1978년 중화민국 총통에 오른 장징궈쌍중 승인이라는 카드를 꺼내는데, 한마디로 두 개의 중국 이론이었다. 즉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이 각각 대등한 중국 정부로서 공존하되 하나의 중국 원칙에 입각하여 통일을 계속 논의하자는 얘기였지만, 이미 국력으로나 국제적 위상으로나 대만을 압도하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은 이를 묵살하였다.

1992년 11월 홍콩에서 열린 중국 해협양안관계협회(해협회) - 대만 해협교류기금회(해기회) 간의 회담에서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기로 합의했다. 이를 '92공식'(九二共識. 1992 Concensus)라고 한다. 다만 양측의 해석은 조금 다른데, 대만의 경우 대륙(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중화민국) 양측이 각자의 해석에 따른 명칭을 사용(一中各表)하기로 했다는 해석까지 덧붙인다. 이 합의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은 "대만이 중국 주도의 통일을 인정했다"고, 중화민국은 "중화민국의 독자성을 인정했다"고 아전인수식 해석을 내세워 왔다. 그럼에도 양안관계의 궁극적 지향점이 통일이라는 점에 대해서만큼은 합의를 이끌어낸 것은 나름대로 의의룰 두어왔다.

하지만 그러다가 대만 본성인 출신으로 총통에 오른 리덩후이가 은근슬쩍 양국론을 꺼내면서 대만 독립 분위기를 고조시키고[8] 급기야 2000년에는 ' 독립주의자인 천수이볜이 집권하면서 사실상 대만 독립론이 하나의 중국 원칙과 격렬하게 맞서는 양상이 되고야 만다. 중화인민공화국 입장에서 볼 때 대만 독립론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깨부수는 재앙이나 다름없었기에, 그나마 하나의 중국 원칙을 놓고 기본적으로 의견이 일치하는 중국 국민당과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물론 국민당 역시 하나의 중국은 중화민국이라는 대원칙을 천명하고 있다는게 공산당입장에서는 문제지만 말이다.

2008년 중국 국민당마잉주가 총통에 오르면서 중국과의 협력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시진핑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 논의가 오가는 등의 나름대로 훈훈한 무드가 조성되고 되었고 2015년 11월 7일 전격적으로 열린 양안 정상회담에서 마잉주와 시진핑이 만나면서 사실상 하나의 중국 원칙에 변화가 생긴 것은 분명해졌다. 왜냐하면 마잉주는 당시 국민당의 평당원일뿐이므로 그 동안 대륙 정권이 원한대로 당대당 영수회담이 아니라 사실상 중화민국 총통과 중화인민공화국 주석간의 정상회담이 되어버렸기 때문으로 분단 60여 년만에 서로가 각기 다른 국가를 세웠음을 암묵적으로 묵인하였기 때문이었다.

중국은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를 놓고 일본과 영토 분쟁이 벌어질 때에도 하나의 중국을 주창한다. 홍콩인들과 대만인들이 오성홍기와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들고 댜오위다오에 상륙했을 때 중국 공산당 당국이 청천백일만지홍기를 검열삭제해버렸다(...) 그래서 청천백일이 사라지고 빨간색 깃발만 덩그러니(...) 아예 하는 김에 별도 그리지

앞서 간략히 설명한 쌍중 승인 이론은 사실 장징궈가 집권하기 전에도 어느 정도 논의가 있었다. 중국 대륙 대표권과 타이완 지역 대표권은 서로 별개이므로 중국 정부로서 인정이 안된다면 타이완 지역의 주권 국가로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다. 실제로 1971년 중화민국 정부가 국제연합에서 퇴출되기 직전 미국 역시 국제연합에 잔류하라고 설득했지만, 장제스 총통은 이것을 거절하였다. 결국 저우수카이 외교부장은 탈퇴를 선언하고 말았다.

그러나 탈퇴 직전에 중화민국 외교부 차장(차관) 양시쿤(楊西崑)이 장제스에게 놀라운 제안을 하기도 했었는데, 중화민국을 포기하고 중화대만공화국(中華台灣共和國, Chinese Republic of Taiwan)을 선포하자는 것이었다.[9] # # # 아마도 이는 대만이 중화민국이라는 국호와 정통 중국이라는 지위를 포기함과 동시에 UN 회원국 지위를 중화인민공화국에 승계시켜주는 굴욕을 감수하는 대신, 중화대만공화국이라는 신생 국가로서 UN에 잔류하는 형태를 취해 외교적 고립을 최소화시키자는 논지인 듯하다.

이는 민진당을 비롯한 범록연맹이 주장하는 대만 독립론과 비슷해 보이긴 하지만, 문화적으로 중화권의 일원임을 표방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물론 당시 중화대만공화국을 선포했어도 중화인민공화국이 이를 국가로 인정했을 가능성은 적다.[10] 하지만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은 UN 입성에 겨우 성공한 상태였다. 따라서 만약 미국 등의 서방 국가들은 중화민국이 중화대만공화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UN 회원국 지위를 유지하도록 적극 지원했을 경우, 최소한 중화인민공화국은 이 조치를 말로만 규탄할뿐 실질적으로는 묵인했을지도 모른다. 1991년 대한민국과 북한이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진 않아도 상대방이 UN에 가입하는 걸 인정했던 것처럼.

아무튼 당시 양시쿤은 중화민국 주재 미국 대사였던 월터 P. 매카너기(Walter Patrick McConaughy, Jr.)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서 미국의 지지를 요청했다고 한다. 양시쿤이 매카너기에 했다는 말에 따르면 장제스가 처음에는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장제스의 아내인 쑹메이링이 반대하고 결국 아내에게 설득당한 장제스가 양시쿤의 제안을 따르지 않기로 결심한 듯. 쑹메이링은 당시 단순한 영부인이 아니라 대만 정계에서 남편 장제스에 버금가는 실세였고 장제스도 그녀의 조언에 많이 의존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마침 미국 또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중화인민공화국 방문을 준비 중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복잡해질까봐 결국 이 방안을 지지하지 않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이 일화는 미국과 중화민국의 기밀 사항이었으나 중화타이완공화국의 주장 자체는 당시에 많이 오갔던이야기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 민두기 교수의 논문에도 '중화타이완공화국'이 언급되기 때문.

결국 UN에서 형식상 자기 발로 나가긴 했어도 사실상 축출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중화민국은 앞서 말한 쌍중 승인 이론에 따라 UN 재가입을 비롯한 국제단체 가입을 시도하고 있다. 논리상으론 맞는 소리지만 상임이사국을 확보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워낙 요지부동인지라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리덩후이 정권까지의 시기와, 마잉주 정권 이래로 중화민국 명의로 가입하는 것도 무조건 안된다고 버티고 천수이볜 정권에서 대만(Taiwan) 명의로 가입을 시도했을 때는 전쟁 운운할 정도.

현재 두 '중국' 중에 중화민국하고만 정식 수교한 국가들 중 일부는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을 각각 별도의 국가로 승인해놓고 있어서 하나의 중국 원칙을 따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중화민국 정부가 이에 완강히 반대하여 해당국과 단교를 하진 않고 있고, 이 조치를 강하게 비난하는 범람 연맹 소속 인사도 많지 않다. 이것은 대한민국북한이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가 한반도의 유일 합법 정부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지만 외국이 남북한을 개별 국가로 승인하거나 더 나아가 동시 수교하는 것에 태클을 걸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에 자극받은 중화민국 정부도 탄성외교를 통해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한 정부와도 재수교를 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보였으나 한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를 한다는 사실에 빡쳐 단교를 선언해 사실상 중단되고 말았다.(...)[11]

중국 정계뿐만이 아니라 평범한 중국인들에게도 상당히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대만을 국가로 인정해야 한다는 발언을 하는 즉시 중국인들의 눈초리가 영 좋지 않다. 외국인이 중국인과 대화할 때 3대 금기사항[12] 중 하나다. 대한민국은 명목상 북한을 국가로 인정해주진 않고 있으나 국민들이 외국인들이 남북한을 별개의 나라로 취급하는 것에는 그다지 이의를 제기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이게 유별나게 보일 수는 있다. 하지만 각국 국민들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용납을 못하는 정치·외교적 이슈가 있기 마련이다.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독도일본 영토라는 표현이나 말을 들으면 발끈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중화인민공화국 인민들에게는 대만[13]을 중국과 다른 나라로 취급하는 것에 발끈할 수 밖에 없다. 나라마다 국민 정서상 용납 못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반대로 대만인 중 '대만 독립'이나 '현상 유지'를 바라는 성향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중화인민공화국과 같은 나라로 취급하는 것에 발끈한다.

3.1 남북관계의 경우는?

대한민국 역시 원칙상으로는 하나의 한국을 주장하고 있다. 북한도 나름대로 하나의 조선 원칙을 견지하고 있고. 물론 현대 국제사회에선 둘 다 잘 안 통하고, 남북간 대결 외교가 치열했던 1960~70년대에는 한국 역시 다른 나라에 이 원칙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단교를 한 나라의 대표적인 예가 콩고 공화국, 칠레 등 (물론 나중에 재수교했다.). 그러나 신생 비동맹 국가들이 잇달아 북한을 승인하고 우호국이던 태국, 스웨덴 등이 북한과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이 원칙은 사실상 무너지고 말았다. 심지어는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해서 북한과 전쟁을 한 나라들의 반 이상이 북한과 대사급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있다. 특히 북한은 태국과 외교관계를 맺을 때 한국전쟁 참전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여 사과를 받아내었다.

한국이나 북한은 전세계를 상대로 하나의 한국이나 하나의 조선 같은 스탠스를 강요할 처지는 되지 못한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남한은 인구 빼고는 대부분의 지표에서 북한에 열세를 보였고,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라는 정통성 주장도 미국을 위시한 서방 국가들만 지지했을 뿐, 공산권은 물론 1960년대부터 독립을 이룬 대다수의 제3세계 국가들도 남한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의 제3세계 국가들은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싸워 적어도 지지 않는 모습을 보였고, 전쟁의 폐허를 수습하여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건설했을 뿐더러, 소련을 일방적으로 추종하지 않고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펼치는 북한에 더 우호적이었다.

물론 현재의 남한과 북한의 격차가 안드로메다급으로 벌어져 있긴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의 넘사벽급 격차에 비하면 대한민국이 하나의 한국을 주장하기에는 북한의 존재감이 너무 크다. 반대로 북한도 당연히 하나의 조선을 주장할 처지가 못 되고. 게다가 중화인민공화국은 세계에서 손꼽아주는 강대국으로서 대만이 자국의 영토이고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 하나뿐이라는 입장을 다른 나라들이 공식 인정하도록 강제할 힘이 있다. 미국 같은 초강대국도 중화인민공화국과 외교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공식 인정하고 있을 정도니 말 다 했다.[14] 하지만 대한민국이나 북한은 외국에 그것을 요구할 수 있을 정도로 세계적인 강대국이 아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하나의 한국이나 북한의 하나의 조선 같은 원칙은 전 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킬 수가 없다. 그냥 각자 국내법에서만 그 원칙이 인정될 뿐(...).

한편, 중국과 북한의 관계가 껄끄러워진 상황에서 반대로 한국은 중국과 적절한 외교를 유지하는 가운데 중국의 승전 70주년 열병식에 한국은 참석하고 북한은 쫓겨나며 심지어 정부 통수권자를 표현하는 부분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하나의 중국" 같은 비슷한 일이 한반도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상황. # 물론 아직 공식적으로 북한과 중국은 동맹관계이므로 상황을 더 지켜볼 필요는 있다. 최소한 김씨일가가 나라 운영만 건실하게 잘 했어도 저런 대접은 안 받았을거다 5차 핵실험 이후 북한이 하는 짓을 보아하니 그다지 달라진 건 없었다

4 홍콩마카오

1997년 홍콩의 중국 반환 이후로 중국은 일국양제(같은 나라지만 다른 제도를 가진다는 뜻) 원칙을 내세우며 홍콩의 민주주의와 자치를 어느 정도 보장해주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실질적 체감은 차이가 있어서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홍콩에서 급증한 대륙인들이 홍콩 주민들과 마찰을 빚는 일도 많았고. 그래도 하나의 중국 원칙은 홍콩을 상대로는 크게 문제가 불거지진 않았다.[15] 적어도 2014년 중반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중국 시진핑 주석이 이끄는 중앙정부가 직선제를 내세우면서도 사실상 중국 대륙 지지자를 홍콩 지도자로 내세우겠다는 발표를 하면서 홍콩 시민들은 2014년 홍콩 우산 시위를 통해 반발한 바 있으며, 반환 시 약속한 일국양제를 제대로 지키라는 요구를 내세우고 있다. # 사실 일국양제 원칙에 대해 먼저 (훼손하여) 빌미를 제공한 것이 중국 대륙인 만큼[16] 중국으로서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방어하는 동시에 홍콩의 일국양제 훼손 논란을 잠재우는 숙제가 남았으며,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홍콩의 열기가 중국 본토나 소수민족에게 확산되어 잠재적인 위험 요소가 될 우려도 어느 정도 존재한다. 중국 국민당 당적의 마잉주 총통마저 홍콩 시민들을 지지하고 나서면서 # 하나의 중국 원칙은 홍콩에서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한편 역시 일국양제 하에 놓여 있는 마카오의 경우 옛 지배자인 포르투갈이 늦게까지 독재 국가였던 탓에,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이웃 홍콩과 달리 주민들이 중국의 통치에 강하게 반발하지 않고 있다.

5 외부에서 본 하나의 중국의 미래

중화민국은 자신들이 중국을 대표할 정통국가라고 주장하지만 이를 승인한 국가보다 승인하지 않은 국가가 압도적으로 더 많다. 다만 미국대만관계법 등을 통해 대만과의 교류를 완전히 끊지 않고 있으며, 일본 역시 대만 정치인과의 교류를 완전히 끊지 않는 등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대한민국의 경우에도 한중수교 때 하나의 중국 원칙에 동의한다고 명시했지만, 한중 수교사에 대해서는 1992년 이전까지 중화민국과의 수교 사실을 별개로 치고 중국과의 수교는 1992년부터라고 서술했다[17]. 한마디로 대놓고 표현하지는 못하나, 아직까지는 세계가 암묵적으로 타이완에 소재한 중화민국을 국가에 준하는 존재로 간주하기는 한다. 물론 그것이 범록연맹이 바라는 '타이완 공화국'으로 인정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공식적으로는 대다수 국가의 정부가 대만을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로 인정하되, 현실적으로는 한 국가에 준하여 대우하는데, 이것이 중화민국이든 대만공화국이든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닌 외국의 입장에서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게다가 중국이 계속 대만을 없는 존재로 여기며 중화인민공화국 타이완 특별행정구를 강조하는 것에 반감을 느낀 민주진보당을 비롯한 대만 독립 세력과의 갈등도 있다. 홍콩 우산 시위 이후로 대만의 주권을 통일 이후에도 보장해주겠다는 일국양제가 제대로 보장될 수 있을지 국제적으로 시험대에 올라 그나마 하나의 중국 원칙에 동의하는 중국 국민당조차도 곱지 않은 입장을 보이는 것이 당장의 상황이다.

공산당과 국민당의 역사적인 관계와 배경으로 보건대 하나의 중국의 강조는 변하지 않을 것이며, 양안 정부가 하나의 중국을 스스로 포기하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다. (중화민국이 타이완 공화국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중국에 최악의 상황이 도래할 경우, 장징궈가 주창한 두 개의 중국론을 받아들일 가능성도 있다고는 하지만...

한편 중화민국이 그 정체성을 포기하고 대만 공화국으로 국가를 개편하기 어려운 것은 비단 중화인민공화국의 무력 침공뿐만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이 타이완의 합법적 주인이라는 입장에 대해서 반박할 여지가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이다. 대만 독립론자들의 주장과 달리 중화민국으로서의 역사가 소멸될 경우 타이완은 완전한 미승인국이 되어버리며 그나마 있는 22개 수교국마저도 없어질 가능성이 높아 고립을 더욱더 심화시킬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대만 독립파들도 '중화민국은 이미 소멸됐음'을 유엔 총회 결정 사항을 근거로 주장하지만, 그 결정 사항에 포함된 '대만은 중화인민공화국 영토임'은 무시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2015년 11월 마잉주시진핑이 사실상 중화민국 총통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간의 회담을 하면서 하나의 중국이라는 원칙의 세부적인 내용이 바뀔 여지가 커졌다. 그간 중국이 주장한 하나의 중국 원칙이 일국양제(하나의 중국 두 개의 체제)였다면, 앞으로는 대만이 주장해온 일국양부(하나의 중국 두 개의 정부)를 중국이 수용할 가능성이 열린 것. 현실적으로 일국양제를 대만쪽에서 받아들일 가능성도 없을뿐더러 아예 대만 공화국을 주장하는 대만 독립주의자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두 개의 정부가 대등하게 공존한다는 점을 인정하는 형태로 양보해서 하나의 중국 원칙을 유지하는 편이 낫기도 하다.

2016년 1월 당선된 차이잉원 대만 총통 당선자는, 무턱대고 대만 독립을 추구한 천수이볜과는 달리 현실을 인정하고 "하나의 중국"의 원칙을 이해하고 존중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는 대만의 경제가 중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독립논쟁으로 안그래도 나쁜 경제를 더욱 더 나락을 떨어뜨리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는 것로 보인다. 기사. 어차피 민진당이 집권해도 대만 독립같은 극단적인 수단을 취하는건 현실상 불가능하다. 중국의 군사력은 이미 대만을 압도하고 있는데다가, 군사력을 제외하고서라도 중국이 대만에 취할 수 있는 경제적 수단은 널려 있으며, 위에서 언급했듯 많은 대만인들은 급진적으로 독립을 선언해 나타나는 혼란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중국도 정말 싫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과 척졌을 때 생길 수 있는 파국도 싫다는 것이 대만인들의 정서다.

이런 식으로 역사에서도 '하나의 중국'의 틀을 지키려다 보니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영토 내에서 있던 모든 일들은 다 '중국인'의 역사이며 중국인은 민족이 같든 다르든 모두 '중국인'일 뿐이라는 견지를 내세우고 있다. 동북공정도 과거 고구려발해의 영토가 현재 중국의 영토 안에 있으므로 그들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라는 역사관의 일환으로 시행하는 국가적 프로젝트이다. 이런 역사관의 틀에서 과거 영웅이라 불렸던 인물들의 평가가 바뀌고 있다. 예를 들어 진시황을 암살하려 한 형가라거나 남송의 악비 등은 일부 극단론자 간에 '중국의 통일을 방해하려 한' 인물로 평가가 바뀌고 있다. 다만 이 역사관에 반대하는 중국인들도 만만치 않으며 반대로 이 판도 바깥에서 한족들이 한 일은 중국인의 역사에서 제외시킨다. 그렇기에 두 중국은 한족 중심 국가인 싱가포르를 엄연한 외국으로 보는 것. 물론 여기는 역사를 볼 때 상당히 다른 면도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6 독일의 경우

사실 이러한 정통성 다툼은 분단국가에서는 흔히 있는 일로, 동서독 분단 당시 서독의 외상이었던 발터 할슈타인(Walter Hallstein)은 이른바 할슈타인 원칙(Hallstein Doktrin)을 내세워, 동독을 승인한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맺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였다.[18]

7 매체

천하제일상 거상에서는 대만이 마치 독립국인 듯 나오기 때문에 중국 대륙판에서는 대만이 "봉래도"(蓬莱岛)라는 이름으로 나온다.[19] 반대로 중국을 "중국"이라고 하면 "봉래도"(대만)이 독립국으로 보일 가능성이 있었는지 "중국"이라 하지 않고 "중원"(中原)이라고 지었고 일본은 "동이"(东夷)(...)라고 지었으나 조선은 "조선"(朝鲜) 그대로 남겨두어 아예 국가라는 개념 자체를 없애고 지역이라는 개념으로 바꿔 넣었다.[20]

하츠 오브 아이언에서 대만일본에게 점령된 상태로 나와서 중국에서 심의가 거부되었다. 참고로 그 당시 역사에 부합하는 사실이다.

중국대륙판 언사이클로피디아에 하나의 중국을 어긴 문서들이 작성되어 중국 정부로부터 차단되었다.

8 관련 문서

  1. 강경한 중화민국 정통론자라면 여기에 몽골 등도 추가된다. 다만 중화민국 정부는 1946년 중-소우호동맹조약을 통해 외몽골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다만 1953년 소련의 중화인민공화국 승인 및 후속조치에 반발해 단교 및 조약의 파기를 선언하면서 다시 외몽골을 자국 영토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후 1990년대가 되면서 회복대상을 중화인민공화국의 실효통치하는 영토로 한정지었고 이후 2012년 최종적으로 외몽골의 독립을 승인했다. 별것 아닌것처럼 보이지만 중화민국은 청 제국으로부터 통치권을 이양받은 국가이다. 당연히 청조의 고유영토를 포기하는 문제에 있어서 민감할수 밖에 없다.
  2. 실상은 중앙정부가 북양군벌에서 중국 국민당에게 넘어간 것에 불과해서 중앙정부의 통치권이 중국 본토 전역에 미치지 못했다. 일례로 상품에 붙이는 세금은 1935년, 토지세는 1941년(이마저도 중일전쟁 도중에 중앙정부의 재정이 극히 곤란해지자 투입한 임시방책이었다.)에야 중앙정부에 귀속될 정도였다. 이때문에 1928년 명목상의 통일 이후에도 반장전쟁 같은 내전이 계속되었다. 1940년대까지도 난징 국민정부의 통제력은 극히 일부지방(예를 들어 중국 18개성의 몇 개성에만 통제력이 미치는데, 그 성 안에서 몇개의 현만 통제하고, 그 몇개의 현의 일부만 통제하는(...) 불완전한 형식이었다.) 했고 이것이 중일전쟁국공내전 수행에 큰 지장을 안겨주엇다.
  3. 그러나 실제로는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오락가락하였다. 2차 국공내전 초기 본거지인 옌안까지 뺏길 정도였던 공산당은 자신들이 점령한 만주와 국민당이 우세한 본토의 동서분할을 제안했으나 전쟁에서 이기고 있던 중국국민당은 거부하였다. 반대로 전세가 뒤집혀서 중국 공산당이 만주와 화북을 휩쓸자, 이번에는 국민당 쪽에서 양쯔강을 경계로한 남북분할을 제안했으나 전쟁에서 이기고 있던 중국공산당에선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4. 연성자치론은 하나의 중국에 들어가는가를 따지기 상당히 애매한 개념인데 량치차오같이 강력한 중앙정부가 생성되기 이전까지의 임시론적론 개념도 있는가하면 아예 각 성이 떨어져서 공화국을 건립해야한다는 극단적인 해체론도 존재한다.
  5. 원래 중화우정에서 발행하는 우표에는 中華民國郵票 REPUBLIC OF CHINA라고 찍혀 있었다. 대만우정이 되면서 臺灣 TAIWAN이라 바뀌게 되었다. 중화우정으로 되돌아가면서中華民國郵票 REPUBLIC OF CHINA(TAIWAN)이 되었다. 영어표기는 결국 정-반-합.
  6. 사실 물리적으로는 부적절한 시간대이지만 인접 국가와의 교류를 위해 편의상 표준시를 통일하는 경우가 유럽 대륙 국가에 많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과거 중화민국이 중국 본토를 통치할 때 5개의 표준시를 썼던 건 편의성을 고려하지 않아 실용성이 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7. 그래서 티베트 자치구와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는 공식 표준시를 쓰면 너무 불편해서 비공식 시간대를 쓸 정도. 과거 중화민국의 사례와 반대 의미로 실용성이 떨어진다. 사실 영토가 큰 다른 나라의 사례로 비추어 봤을 때 중국은 2개~3개 정도의 표준시를 설정하는 게 실용적이다.
  8. 물론 리덩후이가 대놓고 대만 독립을 논한 건 아니었고, 단지 중화민국이라는 국가가 독립된 주권을 갖고 있음을 천명한 수준에 불과했으며 이는 국민당의 기본적인 노선과 일맥상통했다. 다만 그 동안에 국민당이 주창해온 것은 어디까지나 대륙 통일이었을뿐 중화민국이 직접적으로 독립된 국가라는 점을 명시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 입장에서는 하나의 중국 원칙이 깨지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었다.
  9. 여기서 '중화'와 'Chinese'는 중동의 '아랍 공화국'들처럼 문화적 개념을 나타낸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오늘날 대만이 국제 스포츠 대회에서 쓰는 이름인 중화 타이베이(Chinese Taipei)의 '중화' 및 'Chinese'와 유사성이 있다.
  10. 과거 청나라의 일부였던 몽골의 독립을 인정한 예가 있긴 하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수십 년 동안 영유권을 주장해 온 대만에 대해서는 몽골처럼 독립국으로 인정하는 쪽으로 방침을 바꾸긴 힘들었을 듯하다.
  11. 사실 탄성외교를 유지한다고 해도, G2로 뛰어오른 중국의 국력을 감안해 볼때 과연 중화민국과 수교할려는 나라가 있을런지는 의문이다. 미국 조차도 하나의 중국 원칙을 내세워서 대만과 단교해버렸는데.
  12. 나머지 둘은 소수민족 분리주의 독립 지지와 공산당 반대. 마오쩌둥 비판은 별 문제 없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개인차가 있긴 하니 적당히 삼갈 필요가 있다.
  13. 중화민국이 됐든 (민진당의 희망사항인) '대만공화국'이 됐든
  14. 다만 미국은 대만관계법을 제정해 대만의 안보를 간접적으로 책임져 주고는 있다.
  15. 다만 홍콩 내에서는 홍콩 독립론자나 중화민국을 지지하는 사람들, 혹은 중국은 좋아하나 중국 공산당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존재하는 상황이기는 했다. 물론 일국양제라 그런 주장을 해도 대륙에서처럼 코렁탕을 먹는 건 아니었지만...
  16. 비단 이번 직선제 문제만은 아니다. 오히려 직선제 문제는 간선제에서 바뀐 것이므로 일국양제를 이전보다 특별히 더 어겼다기보다는 어떻게 보면 조삼모사(?)에 가깝고(물론 기존의 간선제 역시 홍콩의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요소가 있는 만큼 일국양제에 어긋날 소지는 있지만.), 그 이전부터 2003년 홍콩판 국가보안법 제정 시도인 기본법 제23조 사건이나 2012년 국민교육 과목 필수지정 시도 등 일국양제와 관련한 논란이 이전부터 여러 차례 있어 왔다. 직선제 문제는 이렇게 쌓인 불만의 기폭제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17. 비교해보자면 중국의 국제연합 가입은 1971년이 아니라 국민정부가 가입한 1945년으로 간주되고 있다.
  18. 다만 소련에 대해서는 이 원칙을 적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련도 남한, 대만, 남베트남은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지만(남한은 자신들이 망하기 직전에 와서야 인정) 서독은 국가로 계속 인정하고 있었다.
  19. 蓬莱(봉래)는 대만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20. 애초에 중국에서는 한반도 지역 자체를 "차오시엔"(朝鲜)이라 하니 수정할 필요는 없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