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후영

1 전한의 개국공신

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 후제(侯第)
7위 노후(魯侯) 해연8위 여음후(汝陰侯) 하후영9위 영음후(潁陰侯) 관영

夏侯嬰(? ~ 기원전 172년)

한나라의 개국공신이자, 이후의 네임드 하후씨(하후돈 등)의 조상.

공신서열 8번째. 여음후(汝陰候)에 봉해지고 식읍 6900호를 하사받았다. 사기에는 '번역등관열전(樊酈滕灌列傳)'에 열전이 실려 있는데 여기서 등(滕)이 하후영을 가리킨다. 하후영은 등(滕)현의 현령을 지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등공(滕公)'이라고 불렸다.

본시 관아의 마부였는데, 그는 명을 받들어 사람을 보내기 위해 사수(泗水)를 지나다니다, 종종 마차를 세워놓고 유방과 이야기를 나누며 관계가 매우 가까웠다.

유방과는 신분, 나이를 초월한 우정을 쌓아 서로 놀러다니다가 어느날 둘은 칼을 가지고 서로 칼싸움 놀이를 하며 똥폼을 재고 있었는데 이 때 유방이 실수로 하후영 몸에 상처를 입혔다. 하후영은 개의치 않았는데 공교롭게도 평소 유방을 시기하던 인물이 유방을 상해죄로 고소했다. 하지만 하후영은 끝끝내 유방이 저지른 짓이 아니라고 해서 무죄방면 되었으나 얼마 후 이 일이 밝혀져 하후영은 거짓증언을 한 죄로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기록을 보면 거의 수백대를 맞았다고 했지만 그는 끝끝내 유방을 고발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자면 갑이 을을 때렸는데 둘 다 감옥에 가야 하는 이상한 사건이다. 진나라의 법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알 수 있는 일화이다.[1]

유방이 궐기하자 수하로 편입되어 번쾌, 관영 등과 최전선에서 활약한다. 주로 그 뛰어난 기마술로 전차를 몰며 전장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마부였을때 배운 기마술이 엄청 뛰어나 핀치에 몰린 유방을 여러 번 구출하기도 했다.

인물 보는 식견이 있어 유방이 항우에게 푸시받아 파촉으로 쫓겨났을때 유방의 명을 받아 재야에 숨어있는 인사들을 탐색했으며 장량의 추천으로 왔으나 유방에게 갖은 무시와 모욕을 받던 한신의 진면목을 알아보고 승상 소하와 더불어 "이 사람은 진정 대원수감임. 만약 중용안하면 당장 옷 벗겠음!"이라고 협박설득을 해 우여곡절 끝에 한신은 대원수에 임명되어 항우를 무찌르는 데 큰 공을 세운다. 또한 뒷날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 이후 항우 휘하의 명장이었던 계포를 구해준 사람도 바로 하후영이다.

하후영의 최대 활약은 어마어마한 대군을 거느린 유방이 팽성 전투에서 캐사기 항우의 적은 정예 병사에 패퇴할 때로, 당시 하후영이 모는 전차를 타고 달아나는 유방은 마차에 탄 자식들 때문에 속도가 느려진다고 말하면서 발로 차서 버리고 도망가려하나 그때마다 하후영은 목숨걸고 유방의 아이들을 받아서 다시 수레에 태웠다.

한 마디로 수레를 몰면서 동시에 아이들을 받은 것이다. 그의 탁월한 기마술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계속 유방이 아이들을 버리라고 성에 받쳐 칼까지 뽑아들고, 하후영을 열번 넘게 찌르려 하며 [2] 길길이 날뜀에도 하후영은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목에 안으면서 꿋꿋이 수레를 몰았다. 이같은 일이 수십차례 반복되자 하후영은 꼭지끝까지 대노하여 유방을 꾸짖었다.

"아무리 하찮은 짐승도 자기새끼 귀한 줄 아는데 주군께서는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하후영에게 이 호통을 들은 유방은 쫄아서더 이상 아이들을 수레밖으로 내던지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유방의 이런 비인륜적인 행동은 위급한 상황에서 자기 자식들을 버리고 대신 그만큼 부하들을 챙긴다는 이미지를 부하들의 머리에 각인시킴으로서 충성도를 높이려는 술수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런 해석이 보이는 작품중 하나가 적룡왕(여기선 술수가 아닌걸로 나오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삼국지연의에서 유비조운앞에서 유선을 내팽겨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또한 하후영은 이후 성고에서도 옥문을 통해 달아날 때 유방을 태우고 도망친다.

그 후 유방이 항우를 죽이고 통일의 대업을 이룩하자 그 공으로 제후에 봉해지고 유방이 죽자 예전 자신이 수레에서 구해준 혜제로부터 황궁 북면의 첫 번째 집을 하사 받는 영광을 누렸다. 특히 혜제와 노원공주의 어머니인 여후는 하후영이 아들과 딸을 구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서 혜제가 하후영에게 집을 내려주면서 "이웃처럼 가깝게 지냅시다"라고 말하며 항상 하후영을 존중했다고 한다. 표독한 이미지가 강한 여후지만 은혜를 잊지 않았다는 일면을 볼 수 있는 부분.

여후 집권기에도 태복 자리에 있으면서 계속 황실의 마차를 관장했으며 여후가 죽자 주발, 진평과 함께 여씨 일족을 숙청하는 데 일조했다. 이 때 하후영은 혜제의 아들로 여후에게 옹립되었던 소제 홍을 마차에 태워 궁 밖으로 내보내는 역을 맡았는데 소제 홍이 하후영에게 "어디로 데려가는 것이오?"라고 묻자 조용히 "이제부터 궁 밖에서 살게 됩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말년까지도 마차 드라이버.(…) 소제가 나간 후에 즉위한 문제 시절에도 태복으로 있다가 기원전 172년에 사망. 유방의 고참 공신 중에서는 상당히 오래 살았다.

삼국지조조하후돈, 하후연 등은 이 사람의 후손에 해당한다. 조조의 아버지 조숭은 원래 하후씨로 환관 조등의 집에 양육되어 조씨가 되었다. 조등의 가문인 조씨 집안도 개국공신 조참의 후손. 하후영과 조참은 유방의 공신들 중 사소한 의심도 받지 않고 말년까지 복을 누린 몇 안 되는 공신이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이들의 후손이 한나라를 갈아엎고 멸망시킨 것을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겠다.

적룡왕에서는 어쩐 일인지 애꾸눈으로 각색.하후돈? 마차에서 유방의 아이들을 구하면서 아예 대놓고 욕을 한다. "적룡의 자식이라구? 지나가던 개가 다 웃지! 넌 그냥 시궁창 쥐새끼야!" 물론 후에 유방이 눈물을 흘리며 "나 때문에 다 죽었어. 너라도 살려야지"라고 하니 자신도 눈물을 흘리며 유방을 용서하긴 한다.

2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夏候榮
(207 ~ 219)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자는 유권(幼權). 하후연의 5남.

어려서부터 총명해 7세일 때인 213년에 이미 문장을 지었으며, 날마다 천 개의 말씀을 가진 책을 암기해 며칠이 지나도 금방 기억했다. 조비가 소문을 듣고 초청해 백여 명의 빈객들에게 자신의 출신지, 성씨 등을 모두 기록한 작리자라는 명함을 하나씩 올리게 했는데, 하후영에게 한번 보여주고 나서 쭉 얘기하도록 하자 한 사람도 틀리지 않았다.

조비는 그를 매우 훌륭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으며, 219년에는 하후영이 이 때 13살이었다. 한중이 점령당하자 주위에서 도망가라고 권했지만 따르지 않으면서 "군주와 부모께서 어려운 지경에 처했는데, 죽음을 피한다고 어디로 도망간단 말이오?"라고 얘기했다가 이내 칼을 빼들고 적들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하후연의 전사 장면은 여러 2차 창작물에서 중요하게 등장하지만 함께 죽은 하후영이 등장하는 2차 장작물은 거의 없다. 시미즈 아키의 괴력난신 쿠완에 수록된 단편 황충전에서 황충에게 죽는 모습으로 등장한 것 정도가 전부다.[3]
  1. 그러나 대한민국 형법을 기준으로 보아도 유방은 폭처법위반(상해)죄가, 하후영은 위증죄가 성립하며 둘 다 징역형이 선고될 수 있다. 어느 국가의 법을 보든 거짓 증언을 벌하지 않는 법 체계는 없다. 물론 현실적으로 보자면 피해자가 굳이 자기가 피해를 입은 적 없다고 하는 사건을 위증으로 기소해서 처벌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겠지만, 처벌하자면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건 위증죄에만 해당하는것이지 친구 두명이서 서로 놀다가 한명이 다쳤는데 생판 다른놈이 가해자를 고소했다고 다친 친구가 극구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둘다 벌을 내리는 막장 국가는 현재 없다고 보면 된다.
  2. 과거 장난으로 할때는 실수로 진짜 찔러버려서 함께 콩밥을 먹었는데, 정작 진짜 찌르려 한 이때는 한번도 찌르지 못했다. 진짜 찔렀다가 수레는 누가 몰라고?
  3. 황충은 하후영을 베면서 어린 나이에 죽은 아들 황서를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