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원

韓國棋院 / Korea Baduk Association 또는 HanKuk Kiwon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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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바둑협회. 서울특별시 성동구 마장로 210 (舊 홍익동 315)에 위치하여있다.(상왕십리역에서 제일 가깝다) 2017년경기도 화성시 동탄신도시로 이전 예정이다.

한국기원과 대한바둑협회가 따로 존재하고 있으며, 한동안 이 두 단체가 반목이 극심했으나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한국기원 총재와 바둑협회 의장을 겸직하게 되면서 조금씩 반목이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2016년 8월, 새 대한바둑협회장에 신상철 일요신문 사장이 선출됐다. 홍 총재는 낙선. 이후 구도가 어떻게 바뀔지는 불명.

법률적으로 대한민국 바둑을 대표하는 곳은 대한바둑협회이다. 바둑이 본격적으로 법정 스포츠로 지정되자 아직 일반의 인식과는 괴리가 있다. 아시안 게임 정식종목 제외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대한체육회 밑에 대한XX협회 형식으로 협회를 만들어야 하다보니 이런 일이 생긴건데, 결국 이 두 단체가 통합하고 한국기원이라는 이름이 없어질 듯.

2 역사

재단법인 한국기원(韓國棋院)은 바둑문화의 창달과 보급, 전문기사의 기예 향상을 목적으로 1954년 1월 8일 사단법인체로 공식 출범했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한국 현대바둑의 역사가 시작됐다. 그렇지만 한국기원의 역사는 더 거슬러 올라가 1945년 11월이 원년이다. 실제적으로 한국기원의 원년은 한국바둑의 개척자 조남철(趙南哲)의 주도로 한성기원(漢城棋院)이 설립되면서 시작됐다.

한성기원이 설립되기 전에는 우리 고유의 순장바둑과 19세기 말 일본에서 들어온 근대바둑이 혼재 양상을 보였다. 이즈음 일본에 건너가 체계적인 바둑수업을 한 조남철이 1941년 初단 면장을 받고 1943년 귀국한다. 1945년 광복 이후 서울 남산동에 한성기원의 간판을 걸고 바둑보급의 첫발을 내디뎠다. 한성기원은 공동 조직으로 프로기사제도 모색, 대회창설 등 기초적인 제도를 마련하여 바둑보급에 전력, 오늘날 한국기원의 모태가 됐다. 이후 한성기원은 1948년 4월 조선기원으로 1949년 7월 대한기원으로 개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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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원은 1950년 6월 20일 최초의 단위결정시합을 개최, 조남철 三단과 함께 민중식(閔仲植), 이석홍(李錫泓), 유진하(柳鎭河), 김봉선(金鳳善) 등 13명의 初단이 탄생한다. 도중 한국전쟁이 터져 기사들은 뿔뿔이흩어지고 부산에서 피난기원을 운영하던 대한기원은 환도(還都)하여 1953년 12월 31일 명동에 터전을 잡는다. 마침내 1954년 1월 8일 사단법인 한국기원이 창립되고 초대총재에 윤호병씨, 초대이사장에 장경근(張暻根) 국회의원이 추대돼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바둑보급이 시작됐다. 한국기원은 프로기사제도를 확립하고 바둑인구의 저변 확대로 내실을 다지며 안정적이고 점진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한국기원은 1954년 4월 10일 제1회 승단대회를 개최하고 6월 20일 제1회 입단대회를 개최했다. 1955년 3월에는 최초의 국제공식시합인 제1회 한/중 위기교류전[2]을 열었다. 조남철, 김봉선, 민영현(閔永鉉), 장국원(張國園)이 출전하여 16대 8로 압승을 거뒀다. 1956년에는 동아일보 주최로 국내 최초의 프로기전인 국수 제1위전(국수전의 전신)을 창설했다.

1957년 세계일보 주최 국수순위전, 1958년 경향신문 주최 왕좌전, 1959년 서울신문 주최 오강전(지금의 패왕전), 부산일보 주최 최고위전이 잇따라 창설되면서 이들 각종 바둑대회를 주관한 한국기원은 프로기전의 제도적인 기틀을 마련했다.

이후 한국기원은 1967년 8월 월간『기계』(棋界, 월간『바둑』의 전신)를 창간, 바둑출판사업을 통해 바둑문화 창달을 모색하고 1968년 8월 종로 관철동에 한국바둑의 터전인 회관을 건립한다. 1969년 3월에는 이후락(李厚洛) 총재가 취임하고 1970년 4월 재단법인체로 바꾸게 된다. 한국기원은 1974년 10월부터 1976년 12월까지 '기계파동'이라는 시련을 겪기도 했으나 이후 점진적인 발전을 이룩한다.

이러한 제도적 토대를 바탕으로 한국바둑은 초대국수에 오른 조남철에 이어 김인(金寅), 조훈현(曺薰鉉), 서봉수(徐奉洙), 이창호(李昌鎬), 이세돌(李世乭) 등 국수산맥이 이어지면서 실질적인 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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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9세의 서봉수 二단이 한국바둑의 대명사 조남철 八단을 꺾고 제4기 명인위를 쟁취, 한국바둑사에 첫 혁명을 일으킨 이래 전관 제패 3회라는 불멸의 금자탑을 쌓은 조훈현 九단이 1989년 제1회 응씨(應氏)배 세계프로바둑선수권대회에서 우승, 한국바둑은 세계를 제패하며 황금기를 맞이하게 됐다.

한편 1962년 일본으로 바둑유학을 떠난 조치훈(趙治勳) 九단은 일본바둑사상 초유의 그랜드슬램(7대기전을 한 차례씩 석권)을 달성하고 1996년에는 일본 3대 메이저타이틀인 기성(棋聖), 명인(名人), 본인방(本因坊)을 동시에 석권하는 '대삼관(大三冠)'의 위업을 달성하며 명실상부한 일본 일인자로 재도약했다.

또한 천재소년기사 이창호 九단의 등장은 세계바둑사의 혁명이었다. 1989년 제8기 바둑왕전 우승으로 세계 최연소 타이틀 획득, 연간 최다대국(111국) 신기록, 1990년 최다연승(41연승) 신기록, 1992년 제3회 동양증권배 우승으로 최연소 세계챔프 등극, 1994년 최다관왕(13관왕) 신기록, 연간 최다승(90승) 신기록, 사이클링히트(16개기전 한 차례씩 석권) 기록, 1996년 국제대회 5관왕 등 각종 바둑역사를 새로 쓰며 세계바둑 역사상 최강의 기사로 군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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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비약적인 발전을 토대로 한국바둑은 1993, 1994년 2년 연속 세계바둑천하통일의 찬란한 금자탑을 쌓았다. 제1회 진로배 우승을 시작으로 응씨배, 동양증권배, 후지쯔배 등 각종 세계대회를 석권, 8연속 세계대회 우승이라는 불멸의 금자탑을 쌓았다. 이와 함께 한국은 동양증권배, 진로배, LG배, 삼성화재배 등 세계대회를 창설, 세계 속에 위상을 드높히며 찬란한 바둑의 꽃을 피웠다.

2015년 09월 한국기원과 화성시가 명예의 전당을 설립하는 MOU를 체결함에 따라 홍익동에 위치한 본사도 화성시로 이전할 계획이 있어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건물을 기증해 1994년부터 시작된 홍익동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또한 2016년부터 CJ E&M으로 부터 바둑TV를 인수하여 바둑TV를 직접 운영하게 되었다.

월간바둑을 매달 발간하고 있는데 표지 디자인이 영 안구테러급이다.
  1. 한중일 내에서 표기할 때는 HanKuk Kiwon 표기, 즉 H.K.K로 표기하고, 그 외의 나라에 한국기원을 소개할 때는 KBA로 표기한다.
  2. 이때의 중국은 '대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