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 정부

1 개요

기미 독립선언 이후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한성에 조직된 임시정부로, 1919년 4월 23일 24인의 국민대회 13도 대표자들이 인천 만국공원에서 회집하여 <국민대회 취지서>를 발표하고, <임시정부 선포문>을 선언함으로써 수립되었다.

전국 대표들은 선포문에서 “3 •1 민주혁명을 바탕으로 국민대회를 조직하고, 본 대회는 민의에 기(基)하여 임시정부를 조직, 약법(約法)을 제정하여 이를 선포한다”고 밝혔다. 당시 미국 최대 통신사인 UP통신(UPI통신의 전신)은 한성 정부 수립을 전 세계에 타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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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 정부에서 대내외적으로 내세운 국명은 대한공화국(Republic Of Korea).이었다. 민주공화제를 국체로 삼았으며, 국가원수는 집정관 총재(執政官總載)였다.

이후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통합하여 1919년 9월 11일 통합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되었으며, 법통은 한반도 내에 있던 유일한 정부였던 한성 정부를 계승하는 것으로 명문화되었다.

2 각료 목록

한성 정부는 민주공화제 정부로써 집정관 총재 제도를 채택했으며, 내각은 7부 1국제로 시행되었다.

집정관 총재 이승만(李承晩)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

내무총장 이동녕(李東寧)
군무총장 노백린(盧伯麟)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
법무총장 신규식(申圭植)
학무총장 김규식(金奎植)
교통총장 문창범(文昌範)
참모부총장 유동열(柳東說)
노동국총판 안창호(安昌浩)

3 의의

기미 독립선언 이후 수립된 임시정부 중 유일하게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점에서 가장 정통성이 높은 임시정부였다.

또한 1919년 9월 11일 통합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서도 한성 정부를 법통으로 함을 명문화했으며, 제헌 헌법에서도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는 문구를 넣어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한성 정부에 있음을 명확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