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탁주

韓侂胄
(1152~1207)

남송의 권신으로 북송의 명신 한기의 증손자이며 영종의 황후인 공숙황후(恭淑皇后)의 종조부이다.

생애

효종이 1189년 퇴위하여 상황이 되고, 조돈이 즉위하여 광종이 되었다. 광종은 아버지와는 다르게 우둔하였기에 황후 이씨의 말밖에는 듣지않았다. 황제에 불만을 품은 재상 조여우, 한탁주등에 의해 광종은 퇴위당했다. 한탁주는 이 공적으로 권력의 자리에 가까이 다가가게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한탁주의 인격을 좋아하지 않은 조여우들은 한탁주을 멀리했다.

이것에 원한을 품은 한탁주는 조여우들을 몰아내기 위한 운동을 시작해 1195년 조여우는 재상직에서 물러났고, 경원 3년에는 조여우편에 섰던 주필대, 유정, 왕난, 주희, 팽귀년등 59명이 금고에 처해졌다. 그 다음 해에는 주희의 주자학도 거짓 학문이라고 탄압받았다 이 일련의 사건을 경원의 당금이라 불렀다.

한탁주는 그 후 10년 동안 권력을 유지했으나, 뒤를 보호해 주던 황후와 황태후가 차례로 붕어하자, 권력이 서서히 줄어들게 되었다. 이때 금나라가 북쪽의 타타르 등의 침입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금나라는 약체화되었다고 본 한탁주는 남송의 비원인 금나라 타도를 성공시킨다면 권력을 확고부동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북벌을 감행했으나 실패했다. 실제 금나라는 곤란한 상황이었으나, 그 이상으로 남송군의 약체화가 현저하였던 것이다.

1207년 금나라는 조기 화평을 희망하고, 한탁주의 머리를 요구하자, 이것을 들은 예부시랑 사미원에 의해 한탁주는 살해되고 그의 머리는 소금에 절여져 금나라로 보내지는 것으로 금나라와 화의을 맺었다.

한탁주를 살해한 사미원이 이번에 권력을 장악하고 그 후 26년 동안 재상의 지위를 차지했다.

특히 남송의 대유학자 주자을 핍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