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설헌

許蘭雪軒
1563년 ~ 1589년 3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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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호는 난설헌, 또는 난설화라고도 알려져 있으며 현재 역사책 등지에서는 허난설헌으로 굳어진 상태이다.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본관은 양천(陽川). 허균누나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문집을 간행한 여성 시인이다. 8살 때에《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은 뒤 여신동이라고까지 불렸다. 그런데 이는 허균이 직접 기록한 내용이 아니라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온 기록이라서 중국에서 그녀의 천재성이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많다.

난설헌의 집안은 아버지와 자녀들이 모두 문장에 뛰어나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허씨 5문장(허엽, 허성, 허봉, 허난설헌, 허균)이라 불렀다. 당대 남성 중심 사회에서는 배척받아, 글빨 딸리는 남편 김성립에겐 외면당하고 힘든 부부생활을 보냈다. 참고로 남편 김성립은 임진왜란 직전에 있었던 선비들의 시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기도 했고, 임진왜란 시기에 의병 일으켰다가 전사해서 시체도 못 찾은 인물이다. 그냥 컴플렉스 가진 남편으로 몰아붙일 일은 아닌 듯. 물론 기방에 새 기생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집에 돌아오지 않는 등 허난설헌한테 한 짓을 보면 인간 이하지만...

우선 친정아버지 허엽이 1580년에 죽었고, 딸이 죽었고, 그 이듬해에 아들이 죽었다. 이 충격으로 뱃속에 있던 아이는 유산. 둘째 오빠 허봉마저 이이를 탄핵했다가 오히려 귀양을 갔고, 겨우 풀려난 지 얼마 안 된 1588년에 38세의 나이로 사망. 아버지가 죽은 이후로 자식 2+1과 오빠가 연이어 죽는데까지 8년밖에 안 걸렸다. 그리고 허난설헌은 오빠가 죽은 그 이듬해 사망. 그리고 사망 이후 남동생 허균마저 잘 알다시피 오체분시 당했다...

결국 난설헌은 시집살이 스트레스 및 친정 오빠들과 자식들까지 요절한 충격 등으로 27세를 일기로 죽고 말았다. 그녀의 불행은 허균이나 그녀를 키워낸 친정의 자유로운 분위기와는 달리 엄격한 시가와의 갈등, 그녀의 도교적인 취향 등을 인정할 수 없었던 시어머니와의 불화가 바탕이 되었을 것이라고 후인들은 추측한다. 그녀가 두 아이를 잃은 설움에 쓴 시인 <곡자>의 링크.

자기 인생이 불행하다는 것을 본인도 알고 있어서인지 그녀는 생전에 "소천지(조선)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는가"라고 신세 한탄을 하기도 했다.

자식으로는 아들과 딸이 하나씩 있었는데, 아이들이 엄마를 닮아서 연약했는지 둘 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딸이 죽은 바로 다음 해에 아들이 죽었고, 하필이면 그때 임신한 상태였어서 배 속의 아기마저 곧 유산됐다. 외삼촌인 허봉이 무덤 앞을 글을 하나 새겼는데 이 글에 남자 아이의 이름이 '희윤(喜胤)'이였다고 나와 있다.

유언으로 자신이 쓴 시를 전부 불태워서 없애달라는 말을 남겼다. 다행히 허균은 죽기 전에 한많은 일생을 산 누나의 시를 모아서 책으로 발간했다. 모두 태워버렸는데 허균이 발군의 기억력으로 누나의 시들을 거의 외우고 있어서 자신이 외운 걸 책으로 냈다는 이야기도 있고, 혹은 불 태울 때 허균이 급히 책 한질을 꺼냈다고 한다.

어쨌든 누나의 유언도 거스른 남동생[1] 허균이 아니었다면 허난설헌은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1598년 허균이 정유재란 때 원정 나온 명나라 오명제에게 난설헌의 시 200여편을 전해주어 이 시가 명나라에서 편찬한 《조선시선》, 《열조시선》 등에 실렸다. 그 후 1606년 허균이 명나라 사신 주지번, 양유년 등에게 난설헌의 시를 전해주어 《난설헌집》이 명나라에서 간행되었다. 그리고 200년뒤 일본에서도 간행되어 수많은 여인들의 눈물을 앗아갔다. 심지어 훗날 정조마저도 이를 읽고 감탄했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허균의 역모 때문에 애꿎은 허난설헌의 시집도 불태워졌기 때문에, 일본을 통해서 동래로 역수입 되는 얄궂은 상황이었다. 중국과 일본 찍고, 조선에서 다시 출판된 것이 1692년. 허난설헌이 죽은지 103년이나 지난 이후이다.

참고로 교과서에 허난설헌이 썼다고 하는 몇 가지 시들은 그렇게 추측되는 시들이다. 그런 말 없이 그냥 허난설헌이 썼다고 적혀져 있는 책들이 있는데, 시 수준이나 상황이 허난설헌이 썼을만 해서 썼다고 가정한다고 한다.

2 남편 김성립과의 관계

허난설헌의 남동생 허균은 자형(매형)인 김성립에 대해, "누나보다 못나고 과거시험 공부만 잘 할 뿐, 실제로는 경전이나 역사도 제대로 모른다"고 평가했다. 참고로 조선시대에는 문과 급제를 계속해야만 양반 지위가 유지되었기 때문에 3대 이상 낙방이 계속되면 양반으로 인정받기가 어려웠다. 실제로도 4대가 연속으로 급제를 한 집안은 많지 않은데, 김성립의 집안은 무려 6대 연속으로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던 엘리트 집안이었다.

김성립은 28살 때 아내 허난설헌이 죽은 바로 그 해에 과거에 급제해서 홍문관 저작(정9품)을 역임했고 이후 남양 홍씨와 재혼하였고, 임진왜란의병으로 나서 싸우다 1592년 사망하였다. 원래는 무덤에 비석 하나 없었는데 철종 때 7세손 김수돈이 세워주었다. 그런데 비문을 부탁받아서 써준 사람이 허 씨 집안의 후손인 허전(1797~1886)이다.

3 대표작

허난설헌의 대표작은 말할 것도 없이 규원가(閨怨歌)이다. 이는 원부사(怨夫詞)나 원부가(怨夫歌)로도 불린다. 규원가는 규방에서 원망하는 노래라는 이야기고, 원부사나 원부가는 좀 더 노골적으로 남편을 원망하는 노래라는 제목이다.

50행 100구로 이뤄진 이 장편 가사는 동시대인인 송강 정철사미인곡과 유사하면서도 좀 더 노골적인 원망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작품마저도 홍대용은 허균의 첩인 소쌍이 지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면 허균의 나쁜 남자 이미지는 더 커진다.

그 외에 염지봉선화가(染指鳳仙花歌), 야좌(野坐), 채련곡(採蓮曲), 결국 표절로 밝혀진 빈녀음(貧女音), 아이들의 죽음을 한탄한 곡자(哭子),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몽유광산산(夢遊廣桑山) 등이 유명하다. 여기서는 몽유광상산만 언급한다.

夢遊廣桑山 꿈속에서 광상산에서 노닐다.

碧海浸瑤海 창해는 요해로 스며들고,
靑鸞倚彩鸞 청란은 채란과 어울리는데.
芙蓉三九朶 연꽃 스물 일곱 떨기 늘어져,
紅墮月霜寒 달밤 찬서리에 붉게 지네.

해설: 100이면 100 허난설헌이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고 하는 시가 이 시이다. 허균도 '허봉이 자신의 꿈 이야기를 시로 짓고 죽더니, 허난설헌도 자신의 꿈을 시로 짓고 죽었다'고 애통해했단 말을 했을 정도이다.

내용을 보면 1연과 2연의 창해와 청란은 실존하는 사물이다. 창해는 북쪽에 있는 바다의 이름이고, 청란은 큰 푸른목도리꿩으로 지금도 남아 있는 종류이다. 하지만 요해는 신선들이 산다는 산해경에나 나오는 가상의 바다이고, 채란은 채란신조라고 해서 봉황의 일종이다. 부용은 당연히 허난설헌 자신이고 27은 당시의 나이, 마지막 연은 요절을 의미한다.

허난설헌의 이 시는 도교적 취향과, 절묘한 댓구와 요절의 안타까움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허난설헌의 묘에 시비로 남아 있다.

4 표절 의혹

허난설헌의 시에 대한 표절 시비는 중국의 여류 시인인 유여시(1616~1664)에게서 시작되었다. 유여시는 남편 전겸익이 쓴 열조시집에서 허난설헌의 시 대부분이 당나라 시의 표절이라고 주장했다.

조선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백과사전으로 평가받는 '지봉유설'을 지은 사람인 이수광부터 시작된다. 이수광은 '2,3편을 제외하면 전부 위작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는 김만중의 '서포만필', 홍만종의 '시화총림', 이덕무의 '청비록', 신흠, 김시양, 한치윤 등 끊임없이 이어진다.

현대에는 순천향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박현규 교수의 <허난설헌 한시의 표절 문제>라는 논문이 가장 대표적이다.

다만, 이 표절 문제에 있어서 유력한 후보는 유고를 불태우라고 했던 허난설헌이 아니라, 비상한 기억력으로 문장을 되살려서 문집을 간행했다라는 남동생 허균이다. 이는 조선시대부터 나오는 이야기이고, 현대에도 허균이 누이를 지나치게 높이기 위해서 노력한 결과라는 평이 많다.

관련링크 1, 2 3

5 그 외

팬텀 하록웹툰 포천에서는 아명인 초희로 등장해서 주인공 이시경과 지내다가 허엽의 가문에 양녀로 들어간 것으로 묘사된다. 물론 역사적으로 허난설헌은 허엽의 친 딸이 맞지만, 결국 맞이하게 될 안타까운 운명과 맞물려서 보는 사람들을 탄식하게 했다. 실제 역사와 달리 다시 이시경과 같이 임진왜란이 터지기전 안전한 장소로 이사가서 편안하게 사는 것으로 나온다. 나머지는 다들 허난설헌은 죽었다고 기록된다.

허난설헌의 생가는 강원도 강릉시에 있는데, 남동생은 임진왜란 때 강릉으로 피난 가 있으면서 학산초담(鶴山樵談)에 강릉은 산과 물이 아름답고 정기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정기를 받았던 누나의 재능이 뛰어났었던 거라고 생각한다고 썼다. 재미있게도 신사임당허난설헌의 작은 오빠의 정적이기도 한 이이모자도 허난설헌과 같은 강릉 출신이다. 실제로 오죽헌과 허난설헌 생가터는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다. 참고로 이곳은 나중에 다른 집안에서 건물을 헐고 새로 다시 집을 지었기 때문에 허난설헌 생가터라는 이름으로 문화재 등록이 되어있다.
  1. 물론 농담이고, 허균 입장에서는 제아무리 누나의 유언이어도 그냥 태워버리기에는 너무 안타까웠기에 그런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