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족

豪族

1 개요

흔히 '지방의 토착세력' 정도로 정의내리지만, 실상은 조금 더 복잡(?)한 존재. 국사 시간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기에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사람들로 종종 오해하기도 하지만, 중국이 그 원류다.

2 중국의 호족

상술한 바와 같이, 호족이라는 용어는 원래 중국사에서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단어다. 중국의 남부에서 주로 서식하는 특정 동물인 '호(豪)' 와, 친족집단을 뜻하는 족(族)이 합쳐져 생겨난 용어. 즉 호족이라 함은 지방에 세력 근거지를 둔 우수한 친족집단 이라는 뜻이 되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친족집단 이라는 부분이다. 즉 한국사에서 이야기하는 몰락한 중앙귀족이나 군진세력, 촌주 출신들과는 달리, 집성촌과 같이 한곳에 집단으로 몰려 사는 같은 가문 소속 사람들이라는 이야기. 이 때문에, 학계 일각에서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지방세력가들을 호족이라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주장[1]하기도 한다.

한나라 때부터 쓰이기 시작해,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르러 정착한 용어로, 대토지 소유자들이 대부분이었던 호족들은 소작을 주어 수입을 확보했다. 또한 망명 무사 무리를 거느리는 경우도 많아, 나름대로의 무력도 갖추고 있었던 존재들.[2]

3 한국의 호족

중앙의 귀족과는 달리 자신이 있는 지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널리 구축한 사람들. 역사 속에서도 국가가 건국할 때 지방에 나름대로 세력이 구축되었기 때문에 이들과 정략결혼을 하거나 이들을 중앙 관직에 기용하거나, 사성을 내리는 형태로 잘 구슬려서 세력에 편입시킨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호족들은 한 지방의 세력을 가질 정도로 강대하였고 호족들은 자신의 세력 기반이나 사병 집단을 강화시키는 일이 아니면 국가활동을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일도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왕권을 위협하기도 하였다.

고려의 시대별 사회지배계층 구분
호족연합문벌귀족무신정권권문세족신진사대부
한국에서 호족이 역사 전면에 나타나는 시기는 후삼국시대로, 공교육 과정에서는 크게 아래와 같이 5종류로 나눈다. 학술적으로 공인된 분류는 아니니까 주의.
  • 몰락귀족형 : 중앙의 왕위쟁탈전[3]이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귀족들이 자신의 고향이나 본향[4] 등으로 내려와 그곳에서 세력을 키워 호족화 한 경우. 대표적인 예로 명주 장군 김순식[5]과 궁예가 있다.
  • 군진세력형 : 신라의 지방군을 지휘하던 하급 지휘관이 인망을 얻어 군사력을 증강하여 자신의 관할구역을 넘어 인근 마을까지 통제권에 넣고 호족화 한 경우. 대표적인 예로 견훤이 있다.
  • 촌주성장형 : 기존 신라의 최하급 행정단위인 촌(村)의 지배자인 촌주가 세력을 키워 인근 마을까지 자신의 지배권에 넣고 호족화 한 경우. 이 유형이 호족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 대표적인 예로 아자개가 있다.[6]
  • 초적세력형 : 말 그대로 도적과 같이 질풍노도를 보내다가 시기를 잘 맞아서 큰 힘을 얻게 된다. 초적 양길에게 키워진 궁예 또한 이 쪽이다.
  • 해상세력형 : 쉽게 말해서 해적이라고 보면 된다. 장보고가 이 쪽이고,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 또한 엄청나게 유명한 해적이여서 당시 왕건이 할아버지의 이름만 대면 못 가는 곳이 없었다 김전일

이 시대의 호족은 사실상 지방 고을의 통치자였으며, 장보고의 경우처럼 중앙 정부의 일에 대해 간섭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장보고때까지는 중앙에서 어찌어찌해서 잘 통제한 듯하나 그 이후에는 그런거 없다. 아예 독립국의 형태로 자리잡게 되고 중앙 정부를 완전히 쌩깐다. 이런 성향은 태조 왕건고려를 건국한 이후에도 한동안 실세로 자리매김하는 원인이 되었다. 특히 왕건은 호족과의 화합을 위해 정략결혼을 많이 한 까닭에 공식적으로 기록된 부인만 29명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왕건 사후에 왕권다툼도 벌어지고 여기에 이권이 걸린 호족끼리 파워게임도 벌어졌다.

이후 광종이 공포정치를 펼치면서 호족들을 가루로 만들어버리고, 과거 제도를 기반으로 인재를 등용하기 시작하면서 호족세력은 점점 밀려나기 시작했고 중앙집권이 강화되면서 기존의 호족세력은 하급 귀족층을 이루게 되었다.[7]

고려의 지방 행정조직은 크게 5도 양계 경기 체제였는데 이 가운데 군사적 성향이 강한 양계와 중앙에서 직접 지휘하는 경기를 제외한 5도 지역[8]은 인구나 규모가 큰 고을인 주현에만 지방관을 파견하고, 부근의 작은 고을인 속현에는 파견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현의 지방관이 간접통치하고 실질적 지배는 기존의 호족층인 '향리층'이 맡았다.

이후 조선이 건국된 후에는 태종을 시작으로 향리 '계급'의 세력을 급속도로 약화시키기 위한 정책이 시작되었고, 엄밀히 말해 하급귀족이었던 향리층은 양반과 상민 가운데의 중인층으로 탈락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위의 '중국의 호족' 항목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신라 말 고려 초의 지방세력가들을 '호족' 이라 불러서는 안된다는 주장도 학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의 호족은 중국의 호족과는 달리 '친족집단' 이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 게다가 신라 말 고려 초의 지방세력가들을 호족이라 부르는 것은 현대에 들어와서 용어를 끌어다 쓴 것이다. 삼국사기나 고려사 등의 옛 사서에서 지방세력가들을 '성주', '장군' 이라 부르는 예는 허다해도 '호족' 이라 부르는 경우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9]

4 일본의 호족

일본의 경우 전통적으로 호족 세력이 강하여서 중앙 정부와 호족들과의 대립이 줄곧 이어졌다. 후에 에도시대에 에도 막부가 들어선 이후로 중앙 정부의 힘이 강해지긴 했지 여전히 지방 세력인 다이묘들은 어느정도 힘을 유지했고 이는 현대로도 계속 이어져서 여전히 지방의 세력가들이 각 지역에서 강한 세력을 갖고 있다.

5 여담

호족은 현대에도 군벌이나 지방 유지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중동지역등 유목민들은 아무래도 유목의 특성항 중앙 행정이 미비하고 치안 체계가 불안하였기에 호족세력 사회가 꽤 유지되었다. 지금도 중동 지역 유목민들에게 있어선 어느가문의 누구 라는 소속감이 대단히 크며, 가문의 일원이 모욕이나 공격을 받으면 가문 전체의 모욕이나 공격으로 보고 반드시 보복한다고 한다.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등 중동지역의 토후국들의 왕실은 대체로 이런 호족들이 기원인데 덕분에 중앙집권화를 통한 왕권강화를 위해 종법제를 통해 방계를 등한시 하던 다른 나라의 왕실과 달리 왕좌를 형제끼리 돌려 먹으며 국가의 모든 요직과 중요 이권을 이런 가문 하나가 독차지 하고 있다.

참고: 고려시대의 호족들
  1. 한국사에서의 '호족' 은 친족집단이 아니었으므로. 개념이 서로 다르므로 용어도 서로 달라야 한다는 논리. 다만 이렇게 따지면 봉건제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2. 무협소설에 나오는 무림세가들도 일종의 호족이라 볼수 있다.
  3. 신라 후기의 국왕 재위 기간을 봐도 알겠지만, 이때 엄청나게 싸워댔다.
  4. 가문의 본거지
  5. 추후에 왕건으로부터 왕씨 성을 하사받아 왕순식이 된다.
  6. 아자개는 기록상 농민 출신이지만, 기록에 나타난 여러 가지 정황상 평범한 농부 출신이라기보다는 촌주나 그에 준하는 정도의 부농으로 비정할 수 있으므로.
  7. 신라의 진골 귀족들 또한 대부분 경주 일대의 향리로 몰락하여 고려에 대해 불만이 많있고 이 불만이 이어져 무신정권 시기 신라부흥운동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8. 경상, 전라, 양광, 서해, 교주
  9. 비슷한 경우로 일본 전국시대, 에도시대의 번이라는 단어 같은 경우도 역사용어로서 당대에는 쓰이지 않았고 메이지 유신 이후에나 가서 붙여진 경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