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금보

洪金寶
1952년 1월 7일 ~

20150830071739689.jpg
2015년 아들 부부, 손자들과 함께. 할머니인 줄

1 개요

영문 예명 Sammo Hung. 홍콩 액션배우, 감독, 프로듀서.

2 약력

어릴적 이름은 삼모(三毛)로, 중국의 유명한 만화 캐릭터 이름에서 따왔다. 부모가 맞벌이였기 때문에 유년기를 조부모 밑에서 보냈다. 할머니 전사앵(錢似鶯)은 여성 액션배우였고, 부모도 모두 영화계 일을 했다. 여담으로 현재 부인은 영화배우 고려홍(高麗虹), 큰아들 홍천명(洪天明)은 홍콩 TVB MC겸 배우, 둘째 홍천상(洪天祥)은 가수, 셋째 홍천조(洪天照)는 배우다. 장녀 홍후유(洪煦愉)도 연예계 진출설이 돈다. 한마디로 예능 패밀리. 원래 부인은 한국인 조은옥 씨지만 이혼했고, 1986년, 《동방독응(東方禿鷹)》에서 만난 고려홍과 재혼했다. 3남1녀가 모두 전처 소생으로 한중(韓中) 혼혈아.

열 살 때 할머니가 우점원(于占元) 중국희극연구학교(경극학교)에 입학시켰고, 8년 동안 훈련을 받는다. 이때 받은 예명이 원룡(元龍)이다. 칠소복(七小福)[1]의 큰형으로 활약하며 무대에 섰고, 영화에도 출연한다. 당시 동기 가운데 원루(元樓 성룡), 원표(元彪)는 훗날 홍금보와 함께 그 유명한 가화삼보(嘉禾三寶)로 명성을 떨친다. 그밖에 국내 팬에게 친숙한 인물로는 영화 《쿵푸 허슬》에서 돼지촌 주인 부부를 연기한 원화, 원추가 있다. 영화 《트랜스포터》를 감독한 원규와 《매트릭스》를 감독한 원화평도 멤버였다. 흠좀무.

아홉 살 때, 《애적교육(愛的教育)》(1961) 귀여워라 으로 영화 데뷔했다.[2] 이후 아역으로 몇 작품 더 출연했다. 본격적으로 영화계에 뛰어든 때는 희극학교를 졸업한 뒤였으며, 처음엔 배우가 아닌 스턴트맨으로 활동하며 무술지도를 연구했다. 1970년, 무술감독으로 신생 골든하베스트(嘉禾電影有限公司)와 계약했고, 1971년, 《탈명금검(奪命金劍)》으로 금마장 무술감독상을 수상했다. 이후 호금전 감독의 《영춘각지풍파(迎春閣之風波)》(1973)와 《충열도(忠烈圖)》(1975) 무술 감독을 맡았으며, 이소룡의 《정무문》과 《용쟁호투》에 참여했다. 또한 이 무렵 허씨 3형제의 《미스터 부》 1, 2탄에도 참여했다. 홍콩 영화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굵직굵직한 작품들의 무술 감독을 모두 맡은 것.

이후, 1977년, 《삼덕화상과 용미육(三德和尚與舂米六)》으로, 주연, 감독으로 데뷔했고, 1978년부터 가보영화사, 보상영화사, 보화영화사 등을 차례로 설립하며 자신의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홍금보는 기존의 쿵푸 영화 스타일을 탈피하고자 다양한 시도 끝에, 영춘권에 주목, 영춘권을 소재로 《찬선생과 조전화(先生與找錢華)》(1978), 《패가자(敗家仔)》(1981)[3] 등을 감독했다. 영춘권에 대한 사랑은, 먼 훗날 드라마 《영춘(詠春)》(2006)과 영화 《엽문(葉問)》(2008)으로 이어진다.

1980년대 홍금보는 《프로젝트A(A計劃)》(1983), 《쾌찬차(快餐車)》(1984), 《비룡맹장(飛龍猛將)》(1988) 등의 영화를 제작, 감독하여 명실상부한 가화삼보의 시대를 여는 한편, 1980년에 《귀타귀(鬼打鬼)》를 주연, 감독하여 홍콩식 코믹 호러물의 전형을 제시하면서, 《강시선생(殭屍先生)》(1985)[4]을 제작, 뒤이어 《강시가족》[5] 등을 제작하여 흥행에도 연이어 성공하면서 강시 붐을 일으켰다. 제작, 감독, 주연까지 도맡아 했던 《오복성(奇謀妙計五福星)》(1983)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이후 복성 시리즈가 나왔다. 80년대 후반을 풍미한 이른바 '마담물'의 원조인 《예스 마담(皇家師姐)》(1985)도 홍금보가 제작했다. 이러한 홍금보의 활약으로 쿵푸 영화는 시대극에서 현대물로 변화할 수 있었다.

80년대 중, 후반에 대두한 홍콩 뉴웨이브 물결은 시간이 흐를수록 뻗어 나아가, 90년대 홍콩 영화계는 뚜렷한 세대교체를 이룬다. 이 시기 홍금보는 골든 하베스트와 결별하고, 한발 뒤로 물러나 후진을 양성하고 새로운 조류를 시험한다.

1997년, 영화 《나이스 가이》를 감독해 미국 시장에 데뷔했으며, 1998년, 미국 드라마동양특급 로형사(Martial Law)》에 출연했다. 이 작품은 높은 인기를 끌었으나 무슨 이유인지 2시즌 44화로 종결했다.

2000년대 들어서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으며, 《메달리온》(2003), 《삼국지 용의 부활》(2007)의 제작, 《엽문》을 감독했다. 《살파랑(殺破狼)》(2005)에선 악역으로 등장해 견자단을 상대로 기존의 쿵푸 액션이 아닌, 이종격투기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액션을 선보이기도 했으며, 《엽문2》에서는 홍가권을 선보이기도 했다.

3 기타

  • 영화에서 홍금보의 수(手)기술은 합기도의 동작을 바탕으로 하는데, 칠소복 멤버들 중 단연 최고다. 이는 한국의 합기도를 익혔기 때문인데, 우리나라 합기도 계의 원로이자 왼발의 달인, 황인식[6] 선생과의 인연으로 익혔다고 한다. 족(足)기술은 원표이며 공중제비 및 아크로바틱 모션은 원화가 으뜸이라고 한다.
  • 홍금보의 스턴트 팀인 '홍가반(洪家班)'은 성룡의 '성가반(成家班)'과 함께 홍콩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고난도 스턴트를 소화한다. 자세히 관찰해보면 각각의 특징이 있는데, 홍가반은 개개인의 특성을 살린 아크로바틱한 모션과 다이나믹하고 현실적인 액션을 중시한 반면, 성가반은 구성원이 똘똘 뭉쳐 치밀하게 합을 짜서,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위험한 장면을 연출하는 데 중점을 둔다. 여담으로, 《비룡맹장》 후반부 공장 격투 장면을 보면, 홍금보는 홍가반 멤버들과, 성룡은 성가반 멤버들과만 싸운다.
  • 10대 후반에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했다가 살이 엄청나게 불었고, 그 이후로 100kg 이하로 떨어져본 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보기와는 달리 매우 날렵하며, 괜히 날아다니는 돈까스가 아니다 육중한 몸을 이용하여, 타격감이 확실하게 전달되는 액션을 선보인다. 1987년, 《동방독응(東方禿鷹)》을 촬영할 때, 개인 트레이너를 고용해 몸무게를 무려 20kg을 감량했다. 여느 때보다 홀쭉하고 날렵한 모습을 볼 수 있다.
  • 가화삼보 가운데 원표는 꽤 오랫동안 홍가반 소속의 스턴트맨으로 활동하면서 홍금보와의 협력 관계를 계속 유지했으나, 성룡이 할리우드 진출을 시도한 후 부터는 성룡과는 비즈니스상으로만 친한 관계였다고 한다. 홍금보와 성룡 두 사람이 워낙 거물급이라 앞으로도 재결합은 어려우리란 전망이 많다. 그리고 성룡이 《무릎팍 도사》에서 분노의 디스를 했다 홍금보와 성룡은 둘 사이의 불화로 88년 《비룡맹장》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같이 작업하지는 않았는데, 나중에는 개인적으로는 풀었다고 한다.[7] [8] 홍금보는 후에 인터뷰에서 불화설을 부인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성룡, 원표와 광동어로 말했다가 보통화로 말했다가 왔다 갔다 하니까 그게 오해를 부른 것 같다고 언급한 바 있다. 또한 가화삼보의 재결합을 원하기는 하나, 성룡의 스케줄이 워낙 바빠서 쉽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성룡 역시 《런닝맨》에 게스트 출연했을 당시, 홍금보와의 사이에 대해 질문받자 지금도 잘 지내고 있다고 답변했다. 진실은 과연
  • 2007년 12월, 갑자기 사망 보도가 나와 전 세계 팬들에게 충격을 주었으나, 곧 루머로 밝혀졌다. 사망 기사가 터지고서 하루에 생존 확인 전화를 1,000통 가까이 받았다고 한다. 이때 성룡도 전화를 걸어, "어이, 홍형, 정말 죽었어?" 라고 장난스럽게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 입가에 큰 흉터가 있는데, 구순열(언청이) 수술을 받은 흔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언청이 수술을 받았다고 하기에는 뭔가 안 맞는다. 아역 출연한 《애적교육》의 장면 등을 보면, 언청이의 흔적이든 수술 흔적이든 아예 안 보이기 때문. 거리에서 싸움을 벌이다 깨진 병에 찔렸다는 설이 있다.
  • 희극학교 시절, 성룡은 큰 형 홍금보한테 혼난 적이 많았지만, 영화배우로 대성한 뒤 삼합회의 협박에 시달릴 때, 홍금보가 나서서 막아준 걸 고마워한다고 한다. 실제로 홍금보는 삼합회가 홍콩 영화계에 개입하는 것을 반대하며, 삼합회가 배우들을 협박할 때마다 직접 나서서 막았을 정도로 거세게 항의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에 홍콩 영화계에서는 홍금보를 큰형님(大哥大)으로 부르며 존경한다고 한다. 모두들 벌벌 떨던 삼합회에, 홍금보는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대들었기에, 홍금보가 삼합회에서 영향력이 상당한 간부급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물론 이는 헛소문으로 밝혀졌다.
  • 성룡과 마찬가지로 젊은 시절에 충무로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이때 한국인 부인 조은옥을 만난 것. 70년대 초에 한국에 왔을 때 아내가 변경된 호텔 수속을 대신 해줬는데, 아내가 호텔 방까지 안내해주려는데, 당시 사회 분위기가 보수적이었던 터라 프론트에서 신분증을 요구하며 막았다고 한다. 그러자 홍금보가 발끈하여, "이 여자는 내 아내요!" 하고 말했는데 둘은 다음날 영사관으로 가서 결혼 수속까지 쿨하게 밟았다고 한다. 그러나 홍금보가 인기를 얻고, 잦은 외박, 음주, 여자 문제로 시끌시끌해지자, 아내와 결혼생활 내내 다투고 14년 만에 이혼했다. 2012년, 큰 아들 홍천명의 결혼식 때는 전처도 가족으로 참석했다.
  • 한국부인과 결혼 생활을 하던 시절 한국 방송에 출연한 일이 있었는데, 그 당시 홍금보가 한국말을 할 줄 알았고, 이는 세간에도 알려진 사실이었다. 다만 홍금보가 한국말을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들어보니, "아내랑 생활하다보니 반말만 할 줄 알게 돼서" 그렇다고….[9]
  • 원표 주연의 《집법선봉(執法先鋒)》 촬영장에 놀러갔다가 즉석에서 무술지도를 맡았다. 후반부 치밀한 격납고 격투장면은 그가 연출했다.
  • 홍금보의 대표작들을 많이 제작한 보화(寶華)영화사는 홍금보의 개인 영화제작사였는데, 골든 하베스트의 추문희 회장이, 홍금보 주연의 영화가 지역 극장에서 2주일 넘게 상영되는 것을 보고 설립을 허락했다고 한다.
  • 2000년대 이후부턴 나이가 나이인만큼 중&노년의 캐릭터를 주로 연기하고 있다. 비슷한 연배의 성룡이 여전히 청&장년 연기를 주로 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

4 홍금보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

  1. 역대 멤버는 총 14인이라 한다. 때문에 말하는 팬마다 조금씩 멤버가 다르다. 가화삼보 외에 원규, 원화, 원덕, 원무, 원태, 원추, 원빈 등이 유명하다.
  2. 사족으로, 어린 홍금보를 대동한 여선생은 임취(林翠), 외팔이 무사로 유명했던 왕우(王羽)의 첫 번째 부인이다.
  3. 홍콩 액션영화 걸작선에 빠짐없이 꼽히는 작품. 홍금보는 한 인터뷰에서 가장 애착을 가진 작품으로 꼽았다.
  4. 일본의 개봉 제목 《영환도사》, 국내엔 《생과 사》라는 제목으로 비디오로 먼저 나오기도 했으나, 이후 개봉할 때는 《강시선생》으로 개봉했다.
  5. 일본의 개봉 제목 《영환도사2》를 국내 개봉에 활용, 《영환도사》로 개봉하여, 한국에서도 주연, 임정영은 영환도사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지기도 했다.
  6. 맹룡과강에도 출연했으며, 사망유희에도 출연 예정이었으나 이소룡의 사망으로 백지화되었다고 한다. 굉장한 속도와 위력의 발차기와 꺾기 기술로 무술가들 사이에서 명성이 높았고, 성룡은 황인식 선생의 무술에 반해 《사제출마》에 악역으로 초빙했다고 한다.
  7. 성룡이 서부극과 쿵푸를 혼합한 영화의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고, 홍금보에게 같이 영화를 만들자고 제안했는데, 홍금보가 그런 영화는 홍콩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대했다고 한다. 그런데 성룡이 1986년, 《용형호제》를 찍다가 부상으로 활동을 중지하고 있는 사이, 생각이 바뀐 홍금보가 원표를 데리고 《부귀열차》라는 서부극과 쿵푸를 섞은 영화를 찍어 개봉해버렸다. 그러자 화가 난 성룡이 《동방독응》의 출연제외를 거절했다. 《동방독응》에서 원표의 역할은 원래 성룡이 맡기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성룡은 가화삼보의 《프로젝트A2》를 단독 주연으로 찍기 시작하였고, 이후 둘의 사이는 완전히 틀어지게 된다. 《비룡맹장》에서 둘과 같이 작업한 성가반 스탄트맨에 따르면, 매 장면을 촬영할 때마다 서로 싸워서 굉장히 난감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장면에서 성룡은 미리 합을 짜두었던 쪽으로 하자고 주장했고, 홍금보는 거기서 좀 더 변형을 주자며 반박하는 식. 어떤 스턴트를 해야 할지 난감해진 성가반 소속 스턴트맨에게 성룡은, "너 어디 소속이야?" 홍금보는, "너 둘 중 누가 더 무서워?"라고 했다고 한다. 다만 아예 함께 안 나온 것은 아니고, 성룡이 2004년에 주연한 《80일간의 세계일주》에 단역으로 나오긴 했다.
  8. 홍금보와 성룡의 관계는 일종의 애증관계로 보인다. 칠소복이던 시절부터 큰 형 노릇을 하던 홍금보에게 가장 반항했던 게 성룡이였고, 당시 홍금보가 원표에게 돈을 빌린(?) 다음 갚지 않자 대신 나서서 싸우기도 했다고 한다. 홍금보가 칠소복을 영화로 만들자 "그는 어린 시절을 너무 미화했다. 그에게는 즐거운 추억이였겠지만, 우리는 끔찍했다."는 소감을 말하기도 했다. 하일복성 촬영도중 갈등이 심해져서 후반부부터는 아예 성룡이 나오지 않고, 이 영화는 가화삼보가 같이 찍은 마지막 복성시리즈가 되었다.
  9. 성룡 역시 배운 한국어가 죄다 반말이라, 장난삼아 가끔씩 던지는 한국어가 다소 무례해 보인다는 평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