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무제

명의 역대 황제
저양왕 곽자흥초대 태조 홍무제 주원장2대 혜종 건문제 주윤문
Hongwu1.jpg
묘호태조(太祖)
시호개천행도조기입극대성지신인문의무준덕성공고황제
(開天行道施拔立極大聖至神仁文義武俊德成功高皇帝)
연호홍무(洪武)
주(朱)
원장(元璋)[1]
국서(國瑞)
생몰기간음력1328년 9월 18일 ~ 1398년 5월 10일
양력1328년 10월 21일 ~ 1398년 6월 24일 (70세)
재위기간음력1368년 ~ 1398년 5월 10일
양력1368년 ~ 1398년 6월 24일 (30년)
역대제왕묘 배향자

의 건국자. 묘호는 태조 고황제. 연호를 붙여서 홍무제라고도 불린다.
중국 역사 속 대표적인 숙청과 의심의 아이콘이자 중국에서의 토사구팽과 전 세계 자수성가의 끝판왕.

1 명 건국 이전

그는 1328년 9월 18일 중국 난징 지방의 가난한 농부주세진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명은 중팔(重八)[2]이었다. 그러나 그의 탄생을 누구도 기뻐하지 않았다. 그의 부모는 배고픔과 영양실조로 얼굴이 누렇게 뜬 자식들을 보며 눈물지었고, 입이 하나 늘었다는 부담감에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태어난 시기가 나라 말기로 국가 사회 자체는 막장일로를 걷고 있고, 심한 기근에 각지에서 도적들이 들끓으면서 어릴 때 꽤나 고생하였다. 주원장은 어머니의 메마른 젖을 빨면서 배고픔과 가난을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그러나 사춘기의 아이들에게 배고픔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소년시절 지주를 치기도 했었는데, 너무 배고픈 나머지 친구들과 작당하여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먹고 꼬리만 남겨서 바위틈에 끼워 놓고는, 지주에게 송아지가 아무리 당겨도 나오지 않는다며 얼렁뚱땅 둘러댔다, 그러나 지주도 얼간이는 아닌지라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소년들, 특히 사건의 주동자였던 주원장을 엄청나게 때렸다고 한다.

물론 이 일로 인해 주원장은 목장 주인에게 매를 맞고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의 친구들의 허기를 채워주기 위해서 과감하게 송아지를 잡고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진 일은 친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훗날 명나라의 개국 공신이 되는 서달, 탕화, 주덕흥 등등이 당시 주원장과 함께 목동 노릇을 한 친구들이었다.

그러다가 17살이 되던 해에 심한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에, 전염병까지 돌아 마을은 줄줄이 초상집이 되었는데, 이러한 화는 주원장의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주원장은 부모와 큰 형을 잃고 고아가 되어버렸다.

일단 주원장은 죽은 사람들의 장례라도 치르려 했지만. 성대한 장례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고, 심지어 가족들을 묻을 땅조차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시체 썩는 냄새가 온 마을에 진동하자, 마을 사람인 유계조(劉繼祖)가 그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땅을 내놓아, 간신히 매장은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훗날 황제에 등극한 주원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짐이 옛날에 가랑이가 찢어지게 가난했을 때, 우리 가족 가운데 목숨을 부지한 자는 먹을 것과 입을 옷이 없어서 고통을 당했고 역병에 걸려서 죽은 자는 그 시체를 급히 매장할 땅조차 구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지. 아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던가."

의지할만한 친척도 없던 주원장은 에 가면 밥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다는 마을 사람들의 말을 듣고, 머리를 밀고 황각사에 들어갔다. 그는 절에서 마당을 쓸고, 종과 북을 치며, 밥을 짓고 빨래를 했다. 가장 힘들었던 일은 사천왕상의 다리 사이에 있는 먼지를 청소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주원장이 황제가 되고 난 후, 모든 절의 사천왕상은 청소하기 편하도록 반드시 한발을 들게 만들도록 명령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절도 형편이 개판이기는 마찬가지였기에 그는 할 수없이 탁발승[3]을 했다. 당시의 탁발승은 승려라기보다는 걸인 취급을 받았고, 주원장은 부잣집 대문 앞에서 목탁을 치며 염불을 외는 자신을 무척 초라하고 비굴하게 느꼈다. 그리고 이때 당한 굴욕감은 황제가 되고 나서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게 되었다.

그래도 탁발승으로 중국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비참한 실상을 직접 보고 체험하였으며, 산천, 지리, 풍속에 익숙해져 안목이 넓어졌고, 무엇보다도 튼튼한 체력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글도 익혀서 까막눈은 피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탁발승의 인생을 살다가 곽자흥 휘하의 홍건적에 가담[4]하였는데 그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하여튼 1352년 전후로 추정하고 있다.

처음에는 홍건적 내에서 일개병졸에 불과했지만, 공훈을 세우면서 승승장구하여 실력으로 곽자흥 군단의 2인자 위치까지 올랐다. 이 과정에서 곽자흥의 양녀(마씨)와 결혼을 하여 사위가 되었는데, 곽자흥이 주원장에게 상서로운 기운이 있어서 사위로 삼았다는 설과, 주원장의 능력을 질시하고 두려워하여 사위로 삼았다는 설이 있다.

1355년 곽자흥이 죽자 반란군의 지도자로 추대되었으며, 1356년에 난징을 점령하면서 사실상 남부지방에 할거하던 군벌의 한 세력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특히 여러 지역을 공격하면서 만난 지식인과 사대부들과 교류를 하면서 그들의 조언에 따라 세력을 운영하였으며, 이들을 기용하여 효과적인 행정정책을 수립하며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에게서 중국어와 중국역사, 각종 지식, 유교경전을 배우면서 사실상의 제왕수업을 받는다. 이 시기까지 주원장은 상당한 세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스스로를 오국공(吳國公)이라 칭했을 뿐이며, 홍건적의 우두머리이자 의 후계자를 자칭하고 있던 한림아의 신하에 머물러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주원장은 원나라와는 별로 많이 싸우지도 않았다. 오히려 주원장은 다른 한족 세력들과 다퉜을 뿐, 원나라와의 다툼은 다른 한족세력들에게 내버려뒀는데 이게 득이 되었다. 원나라를 뒤엎을 정도로 강력한 세를 가졌던 홍건군의 유복통이 차칸테무르에게 캐발린 뒤에, 주원장의 세력이 원나라의 사정거리 안에 들게 되었지만, 운 좋게도 차칸테무르가 원 내부의 내분에 휘말려 남하를 못하게 된 덕에, 주원장은 안심하고 진우량과의 결전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파양호 대전에서 승리한 후, 1364년 최대의 적이었던 진우량의 세력을 격파하고 그 영역을 흡수한 후에는 스스로 '오왕'임을 선포하였고, 1367년 몽골족의 위험에서 한림아를 보호하기 위해 난징으로 모시고 오던 중에, 주원장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는 침몰사고로 한림아가 익사하고, 또 다른 적수였던 장사성이 생포되면서, 사실상 남부 지방의 패권을 휘어잡게 되었다.

이후 서달상우춘에게 25만 대군을 주어 북벌을 단행하고, 1368년 초 신하들의 권유를 받아 스스로 의 황제가 되었음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2 명 건국 이후

2.1 통치

치륭당송(治隆唐宋), 강희제 어필, 난징 효릉

1368년 여름에 원나라의 수도 대도(현재의 베이징)를 점령하고, 원나라를 만리장성 북쪽으로 밀어내면서 중국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그 뒤로도 계속해서 중국 각지에 남아 있는 몽골족의 잔여세력과 끊임없이 전쟁을 해온 까닭에, 실질적으로 중국 전 지역을 완전히 통일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중국 내 마지막 원나라 세력이던 윈난의 양왕을 섬멸한 1382년이 되고 나서였다.

수도도 지금의 북경이 아니라 남경에 있었는데, 명나라는 중국 역사에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강남에서 들고 일어나 전국을 장악한 왕조였다.[5] 중국 대부분을 장악한 것은 훨씬 전이지만, 1382년을 기점으로 잡는 이유는 이때부터 확장을 멈추고 수비로 돌아섰기 때문이다.[6]

하여튼 명나라 초기에는 몽골족과 싸우면서, 착실하게 원나라 말기 막장이 되었던 사회기강을 바로잡고, 행정체제를 정비하면서 명나라의 기틀을 닦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원나라 시기에 있었던 과거제도를 철저하게 시행 및 감독하여, 유능한 인재들을 관료로 등용하려 하였다.[7]

특히 어렸을 적 고생의 영향으로 탐관오리의 부정부패를 끔찍하게 싫어했기 때문에 관료들의 기강을 철저하게 단속하였다. 그리고 오랜 혼란으로 황폐화된 토지개간을 장려하여 농업생산력을 끌어올리며 사회를 안정시켰다. 훗날 청나라 강희제가 강남을 순행하면서 홍무제가 안장된 효릉에 참배한 후 홍무제를 기리는 의미에서, 그의 치세가 중국 역사에서 번영의 상징으로 꼽히는 당나라, 송나라와 같다는 의미의 '치륭당송(治隆唐宋)'이라는 네 글자를 친필로 써 비석을 세웠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명태조 주원장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황제다. 서민 신분의 사람이 통일왕조의 황제가 된 것은 전한유방에 이어서 두 번째였다.[8] 아무것도 없는데 허세만 부릴 줄 알았던 유방이나 돗자리를 팔던 유비와 마찬가지로 주원장도 하루하루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궁핍한 평민이었다. 그는 가장 밑바닥 계층 출신으로 시작하여 천하의 대권을 잡은 황제로, 성공을 거둔 인물이었다.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민중의 영웅이 될 수가 있었다.

이러한 출신성분과 이후의 치적으로 백성들 사이에서는 명군이란 평가를 받기도 하였지만, 신하들 사이에서는 폭군이란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이는 개국공신들을 쥐잡듯이 족쳤기 때문이다. 개국 3대 공신으로 추앙받는 서달, 유기, 이선장 등이 비참한 말로(末路)를 겪었으며, 그나마 살아남은 공신이 거의 없을 정도로 족쳤다.[9] 게다가 신하들의 사소한 잘못에도 노발대발하면서 두들겨 패는 일이 잦아서[10] 더더욱 심했다.

다만 백성들에겐 명군인데 신하들에겐 폭군이라고 엇갈린 평가를 받는 이유는, 아무래도 역사를 쓰는 사람들이 신하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도자의 권력 한계 상 백성과 신하 둘 중 하나만을 챙길 수밖에 없는데, 신하들은 자기들이 잘 살아야 태평성대라고 봤기 때문이다.[11]

특히 군주의 전제권을 최우선으로 삼았기 때문에 걸핏하면 공신들이 죽어나갔다. 숙청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인데, 명나라 건국 이후 죽어나간 공신과 그 가족들의 수는 수만 명에 이른다. 주로 초창기에는 공신들 중에서도 무장들이 많이 숙청되었으며, 말기로 가면서 행정체제가 점점 안정궤도에 접어들자 권신들을 숙청하기 시작하였다.

2.2 아내


위 사진의 여자는 주원장의 아내 효자고황후(孝慈高皇后) 마씨(1332~1382)였다. 이름은 수영(秀英). 회서 숙주 신풍리 출신이라고 하며 위에서 언급된 곽자흥의 양녀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인자한 국모로 꼽히는 사람이다. 마씨는 성품이 인자했으며, 지락과 통찰력이 있었고 경서를 가까이 했다. 주원장은 개인 서찰을 모두 마씨에게 관리하게 했으며, 주원장을 모함하는 말을 듣고 곽자흥이 그를 의심하게 되면, 언제나 마씨가 곽자흥의 부인을 잘 섬김으로써 남편이 누명을 벗게 도와주었다. 그녀는 수시로 병사들의 의복과 신발을 만들어 공급했으며, 주원장이 용만에서 진우량과 결전을 벌일 때는 궁중의 모든 금은보화와 비단을 털어 군사를 위로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가능한 한 사람을 죽이지 말고 천하를 평정해야 한다고 말했으며, 주원장은 마황후의 말을 명심했다.

주원장과 금슬이 매우 좋았던 듯하다, 주원장이 곽자흥의 미움을 받아 감금당했을 때, 그녀는 남편이 자주 굶는 모습을 보고 몰래 찐빵을 훔쳐 가슴에 화상을 입으면서까지 먹을 것을 품에 숨겨 남편에게 가져다주었다는 일화가 있으며, 그녀는 평소에 말린 고기를 충분히 준비하여 남편에게 제공했지만, 자신은 언제나 배부르게 먹지 않았다. 훗날 주원장이 마황후가 어질고 후덕한 황후라고 칭찬하고 자랑하자, 그녀는 자신은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면서 겸손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발이 매우 컸기 때문에[12] 민간에서는 '큰 발 마황후'라고도 불리었다고 한다. 주원장과 결혼 했을 때 첫날밤에는 주원장이 발이 크다고 이야기하자, "나도 당신의 못생긴 얼굴을 보고도 좋아하니, 당신도 나의 발을 좋아해주세요"라고 이야기한 일화도 있으며, 한번은 민간에서 마황후를 큰발이라며 비웃는 그림이 나붙었는데, 마침 암행 중이던 주원장이 이를 보고 그림 앞에서 낄낄거리던 백성들을 처형하려 하자, 황후가 "제가 발이 큰 건 사실이니 그런 일로 처형하지 마시라"고 간언하여 주원장도 그들을 살려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이런 일화에서 보듯 마황후는 매우 어질고 현숙하며,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큰 여장부였다. 평생 주원장의 옆을 지키며 주원장에게 정확하고도 옳은 헌책을 거듭하였고, 주원장은 그런 마황후의 이야기를 잘 따랐다고 한다.

신하들에게 가혹한 주원장이 신하들을 족치면, 신하들은 마황후에게 달려가 하소연을 했고, 마황후는 이들을 슬기롭게 두둔하고, 마황후가 두둔하면 주원장도 마음을 바꾸어 신하들을 용서했으며. 주원장이 숙청을 하려 하거나 숙청을 하면, 식음을 전폐하면서 숙청을 말렸다고 한다. 이러한 마황후 때문에 주요 공신과 많은 신하들이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다. 가장 유명한 예가 태자 주표의 스승이자 대학자였던 송렴이다. 그도 죽을 위기가 있었는데 마황후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는 호유용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죽을 날만 기다렸는데, 마황후는 그가 누명을 쓴 것을 알고 주원장에게 간곡히 화를 풀라고 부탁했으나, 웬만하면 마황후의 말을 듣던 주원장도 이번에는 마황후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마황후는 명태조의 수라상을 직접 들고 왔는데, 뜻밖에도 술과 고기가 올라오지 않았다, 명태조가 그 까닭을 묻자, 그녀는 "소첩이 얼마 안 있으면 죽을 송 선생을 위하여 재계(齋戒)하고자 주육(酒肉)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재계란 죽은 사람을 제사지내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의식인데, 난 당분간 채식할 것이므로 그때까지 우리 집에 고기 반찬이란 없다. 당신도 술과 고기를 당분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간접적인 경고였다. 그러자 명태조는 송렴이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어 젓가락을 던지고 나가버렸다. 다음날 그는 송렴을 사면하고 무주로 유배를 보내 목숨은 살려주었다. 그런데 결국 유배가던 중에 병으로 죽었으니 주원장에게 숙청된 것이 맞다.

또한 마황후는 백성들의 어려운 삶을 생각하여, 매우 검소하게 황궁의 살림을 꾸려간 것으로도 유명했다. 나라에 흉년이 들면, 자신은 푸성귀 반찬을 먹으며 하늘에 기도했고, 관리들에게 제공되는 음식의 질을 개선하는 등의 일을 앞장서서 한 훌륭한 황후였다. 이런 훌륭한 마황후는 주원장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임종에 즈음하여 그녀는 주원장이 보낸 어의도 만나지 않고 그들이 처방하는 약도 거부하고 죽었다. 이유는 점점 의심이 많아지던 주원장이 자신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어 어의들을 처형할까봐 걱정해서였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죽을 때에도 유언으로, "폐하께서는 널리 현자를 구하여 간언을 받아들이고, 국가를 처음 세웠을 때의 마음이 끝까지 변치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황실의 자손이 모두 현명하고 신하와 백성이 각기 자신에게 걸맞은 지위를 얻기를 바랍니다"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주원장은 마황후의 죽음을 매우 비통해 하였으며, 약 일주일 동안이나 식음을 전폐하며 마황후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주원장은 이후 더 이상 왕비를 들이지 않았으며, 마황후의 죽음 이후그 뒤에 강철의 야수가 남았다.폭주하여 온갖 공신을 때려잡는 황제가 되어버린다.역시 남자에게는 여자가 필요하다

2.3 토사구팽의 시간

뭐라고!! 원장님 녀석, 드디어 본성을 드러냈구나!! 사실 선양(禪讓)을 받는 게 아닌 여러 조력자들의 도움으로 건국한 왕조는, 그 태생적 특성상 정치적 안정을 위한 공신 숙청은 불가피한 조치이긴 하다. 하지만 너무 잔혹했다는 것이 문제. 주원장은 엄벌주의를 신봉했기 때문에, 고대의 잔인하고 엽기적인 형벌로 숙청 및 형사처벌을 단행하면 범죄율이 낮아질 거라고 생각해서 각종 사형방법을 적극 동원했는데[13] 그 예를 몇 가지 들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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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신들을 숙청할 때 곱게 죽으면 다행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고, 특히 반역죄로 처형했을 때에는 허리를 자르는 요참형,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 사람의 살을 포를 뜨듯 떠내서 죽이는 능지형은 물론이고, 부정부패를 저지른 관리에게는 특별히 박피형을 내렸다. 박피형이란 말 그대로 그대로 사람의 가죽을 벗기는 형벌이다. 주원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벗긴 가죽을 허수아비 위에 둘러씌워 관청 문 앞에 세워놓게 했다. 흠좀무.[14] 그는 직접 형벌을 고안해내기도 했는데, 돼지 털을 벗기는 것에서 착안하여 소세(梳洗)라는 형벌을 만들었다, 빗으로 씻긴다는 뜻인데, 그 방법이 소름끼칠 정도로 잔인했다. 벌거벗은 죄수의 몸에 펄펄 끓는 물을 여러 번 뿌린 뒤, 철로 만든 빗으로 쓸어서 피부를 벗겨내는 형벌이다. 이는 피부만 벗기는 것이 아니라 뼈가 드러날 때까지 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무릎 연골을 빼내는 알슬개(揠膝蓋), 내장을 꺼내서 죽이는 추장(抽腸)을 비롯하여, 전갈을 풀어서 물려 죽이기도 했다. 그 가운데 가장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운 형벌이 바로 장형(杖刑)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참고. 그러나 그는 이러한 끔찍한 형벌들을 즐겼는지, 아니면 죄인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는지, 이러한 형벌들을 집행하는 데 직접 나와서 자신이 이러한 형벌들을 주도했다. 특히 형벌을 가할 때에도 천천히 매우 고통스럽게 죽이게 했다 능지처참을 할 때에도 칼로 살살 피부를 그어가다가 중간 중간 쉬어가면서 최대한의 고통을 느끼고 죽게 하였으며, 박피형을 행할 때에도 살을 천천히 벗겨서 죽기 직전까지만 살을 벗긴 다음에 잔혹하게 죽였다. 그리고 만약 중간에 형벌을 당하는 사람이 죽게 되면, 그 형을 집행했던 망나니가 사형을 당하게 되기 때문에, 망나니 또한 죽지 않기 위해서 더욱 더 고통스럽게 죽였다고 한다. 이러한 잔혹한 형벌들로 인해 수많은 공신들과 신하들이 끔찍한 고문으로 고통 속에 죽어갔다. 시대를 감안해도, 이러한 일은 잔혹하다 할 수 있으니, 신하들이 명태조를 폭군이라고 평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온갖 잔혹한 형벌들은 조정을 공포 분위기에 휩싸이게 했다. 아침에 신하들이 등청하여 명태조를 배알할 때, 만약 옥대(玉帶)가 배꼽 위에 있으면 오늘은 사람을 죽이지 않거나 적게 죽이겠다는 뜻이어서 안심이었지만, 만약 그가 옥대를 배꼽 아래로 누르고 있으면 사람을 대량으로 죽이겠다는 신호였으므로, 문무백관들이 모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공포에 떨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현대인들의 생각으로는, 그렇게 두려우면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樂鄕)하거나 은거(隱居)하면 되지 않나 하겠지만. 주원장은 그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주원장이 신하들에게 내린 명령들 중 "모든 백성들과 신하들은 오직 황제를 위하여 행동하여야 한다'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이 명을 어긴 신하, 한마디로 일을 고의로 대충하거나 일을 그만두는 관리가 나오게 되면, 그 사람 뿐 아니라 그 집안까지도 말 그대로 쑥대밭을 만들었기 때문에, 관리들은 관직을 함부로 그만둘 수가 없었다.

탁발승과 반란군 시절은 주원장의 대표적인 역린이었다. 주원장은 그 시절을 수치로 여겨 그 앞에서 일체 옛날 일을 꺼내지 못하게 하고, 승려생활 때 머리를 깎은 것 때문에 '빛날 광(光)', '대머리 독(禿)'자를 쓰거나 '승려 승(僧)'자와, 그것과 발음이 같은 '생(生)'자를 쓰는 행위, 반란군 출신이란 의미의 '적(賊)'과 발음이 비슷한 '측(則)'자를 쓰는 행위를 무조건 처벌했다. 피휘의 확장판이네. 아Q정전마프리카의 선조. 명태조는 이러한 자격지심 때문에 문자의 옥을 일으켰다. 이를 테면 항주의 유생 서일기가 올린 하표에서 "광(光)천지하 천생(生)성인 위세작측(則)"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이것은 '빛나는 하늘아래 하늘이 성인을 낳아 세상을 다스리는 법칙으로 삼았다'라는 뜻으로 명태조를 성인으로 추켜세운 극찬의 글이었다. 그러나 명태조는 이 문구를 읽고 대노했다. "이 썩어빠진 유생놈이 나를 능멸하려 들다니! 생(生)자는 승(僧)자와 발음이 비슷하니 내가 중노릇을 했다고 비난했고, 광(光)자는 독(禿)자와 의미가 통하므로 내가 대머리라고 비난했고, 측(則)자는 적(賊)자와 발음이 비슷하니 내가 도적 노릇을 했다고 비난한 것이다, 당장 그놈을 참수하라"고 명령했다. 물론 억지였지만, 황제의 명령이고 반발 잘못했다가는 공신숙청 대상자 명단에 같이 올라갈 판이니 그대로 집행되었다.

특히 어느 숙청 때는 10,000명이 넘게 죽어나가서, 황태손이 제발 사람 좀 죽이지 말아달라고 직접 간청했다고 한다. 그러자 주원장은 황위는 가시나무 몽둥이 같은 것이니, 자기 생전에 가시들을 다 제거해주려고 이런 짓을 한다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다.[15][16] 또 다른 버전에서 간청한 것은 건문제가 아닌, 황태자 주표로 나오며, 주원장이 가시드립을 치자 "위의 군주가 요순 같으면 백성들도 자연히 이와 같게 되는 법입니다."라고 받아쳤다고 전해진다. 열폭한 홍무제가 체어샷을 날린 건 덤.

가장 유명한 것으로 좌승상 호유용을 비롯한 3만여 명의 권신들과 그 일가족이 처형당한 사건인데, 이를 계기로 재상제도를 폐지하고, 중서성을 황제의 직속으로 두는 황제 친정체제를 구축하였다. 여기에다가 황자들을 번왕으로 책봉하여 각 지역에 보내서 모든 것을 황제의 밑에 두었다. 다만 번왕들은 백성을 직접적으로 통치하진 않았고, 그냥 국경관리만 맡았다. 당연히 자기들끼리 군사를 키워서 쳐들어오지 않을까 하여, 장수들을 버리고 친족들에게 맡긴 것. 그랬는데도 불구하고…[17]

역사적으로 번왕제도는 사후에 제위 계승권을 놓고 다툼이 벌어지게 한다면서, 일부 신하들이 거두어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주원장은 주청한 신하들을 족치고 그대로 강행하였다.[18] 대신에 아들들을 모아놓고 "늬들을 임명하는 것은 그만큼 신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하들의 이야기 역시 사실이니깐, 마음깊이 잘 새겨두고 나중에 형의 핏줄이 계승한 중앙정부와 협력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라"라면서 은근한 협박 기술을 시전하였지만, 그 중에 명나라판 수양대군이 있어서…

주원장은 관료들을 황제의 통치를 위한 것, 현대식으로 따지면 컴퓨터 작업을 위해 필요한 CPU나 메모리 정도로 봤기 때문에, 사대부나 권신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CPU는 고장 나면 바꾸면 되니까. 하지만 반발했던 권신들은 죄다 찍어 눌렀고, 그럴만한 가능성이 있는 권신들도 죄다 죽어나갔기 때문에, 나머지는 그냥 황제의 지시대로 열심히 일을 했다. 그나마 주원장이 중요 관료가 아닌 실무자는 가급적 건드리지 않았고[19] 숙청의 목적은 언제까지나 황권 확보였기에, 황권을 침범할 가능성이나 그럴 야망이나 능력이 없는 자들은 가급적 손을 대지 않아서, 최소한의 신뢰성은 확보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숙청은 그의 후대 황제들이 신하들에게 권력을 빼앗겨서 좌지우지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고, 아예 황후를 중심으로 한 외척세력이나 환관들이 정치에는 얼씬도 못하게 만드는 것에는 성공했으므로, 필요악이라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국가 성립 초기부터 개천에서 용이 나올 길이 막히면 그 나라가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비디오라[20] 군주 입장에서는 필요하다면 인위적으로라도 기존 지배계층을 어느 정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후일 영락제와는 이 점에서 많이 다르다. 어쨌건 그 영향으로 홍무제의 황실 공식 어진은 위에 나온 것처럼 상당히 선하고 어진 임금의 인상이지만, 사대부 쪽에서 그린 어진은 아래에 나오는 것처럼 흉악한 폭군(…)이나 다름없다. 다만 이렇게까지 한 것에는 어렸을 때 그런 막장테크를 직접 체험한지라 벼슬아치(혹은 높으신 분들)에 대한 혐오감이 심했던 탓일 수도 있으며, 실제로 명 초기 부정부패나 계급 고착화가 사라진 데는 주원장의 역할이 상당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의 숙청으로 수많은 개국공신들이 죽었는데, 숙청 이전에 전사하거나 병사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목영, 탕화[21], 경병문, 곽영, 장룡, 고성만이 숙청을 피했고, 이들 중에 경병문, 곽영, 고성은 정난의 변에도 관련된 인물[22]이다. 여기에 지나치게 만연하게 늘어지던 문장을 일소하고 실용적이고 간소한 문장을 지향하며 관리들을 처벌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문자의 옥 마냥 여러 꼬투리를 잡아 문사들을 죽이거나 탄압하고, 죄 없는 사람들까지 여럿 희생시킨 점은 비난받는다.[23]

이러한 점은 외교관계에도 적용되어, 주원장 시절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는 험악해져 갔다. 조선의 왕 이성계는 상당한 무공을 세운 명장이었고, 명 건국 이후 철령위 설치 등의 문제로 인해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 여기에 정도전이 사병 혁파를 위해 군제 개혁을 벌이는 것이 주원장을 자극해 매우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었고, 정도전 파 사신들이 명에서 모욕을 받거나 사사당하면서[24] 급기야 양국 간 무력충돌로 발전될 기미까지 보이기 시작한다. 물론 주원장과 정도전이 죽으면서 명과 조선의 관계는 우호적으로 변한다.

지나친 숙청으로 명대부터 황제의 권한을 견제할 수 있는 신권(臣權)의 위력이 송대에 비해 줄어들었고, 이는 암군과 환관들의 발호 등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다만 환관이 날뛰는 것은 명나라판 세조인 아들 영락제의 중용 때문이고, 홍무제는 태종처럼 환관들도 찍어 누르며 관직 임용에 제한을 가했으며, 후대에는 자신과 같은 가혹한 형벌을 관리들에게 가하지 않게끔 조치하기도 하였다.[25][26]

2.4 사후 후계자 다툼

원래 장남인 주표황태자로 책봉되어 후계자로 공인되어 있었으나, 주원장은 넷째 아들인 주체에 대한 호감을 은근히 비추고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주원장은 "공신들은 닥치고 버로우!"로 일관하고 있었고, 그에 대한 반발 심리였는지 태자는 공신들을 옹호하는 입장이었으며, 상당히 유약한 성격이었다고 언급되고 있다. 그래도 후계자를 갈아버리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장자계승 원칙을 지키기 위함으로 추정된다.

결국 의문태자는 아버지보다 일찍 죽었는데, 아버지의 막나가는 숙청으로 인해 마음고생이 심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이에 따라 4남 주체가 태자로 책봉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대두되었지만, 장자계승 원칙을 지켜 장손인 주윤문을 황태손으로 지명하였다. 이로 인해 연왕으로 책봉되어 베이징에 머무르고 있던 주체가 상당히 격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주원장은 1398년 사망하였는데 죽기 전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동안 모든 것을 혼자서 담당해왔으나, 돌이켜 보면 이는 너무나도 괴로운 일이었다. 다음 대를 잇는 이는 신하를 믿고 일해야 한다."

공신들 : ㅅㅂ 다 죽여 놓고 무슨 소리야?

1398년 주원장이 숨을 거두면서 손자 주윤문이 건문제에 올랐지만, 1402년 연왕 주체가 조카를 쫓아내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이 사람이 바로 영락제로, 정화의 해외원정과 몽골원정, 북경 천도 등을 단행한 황제다.

2.5 외모

어진이 서로 다른 두 가지 얼굴로 그려졌다는 특징이 있다. 왼쪽처럼 조작된 혹은 황제에게 아부하려고 훈훈하게 후덕하게 조춘처럼 잘생긴 초상화도 있는 반면 오른쪽같이 이말년 화법의 얼굴형이 스크루지 맥덕이나 다크윙 덕 처럼 턱과 입이 길게 나온데다 곰보자국 투성이인 못생긴 도날드 상 초상화도 있다.[27] 그러나 기록[28]을 볼 때는 오른쪽처럼 곰보가 많은 얼굴이긴 했던 것 같다. 반면에, 요즘 기준으로 못생기게 보이는 초상화가 오히려 당시 기준에는 귀와 코가 크고 턱이 튀어나온 것은 오악과 같고, 얼굴의 곰보자국은 하늘의 72 별자리와 같아 천하영웅의 상에 부합하는 것이라 하여, 잘생긴 초상화가 사실에 가깝고, 오리처럼 턱과 입이 나온 못생긴 초상화가 프로파간다용이라는 주장도 있다.[29]

여담으로 이 두 초상화는 언뜻 보면 굉장히 달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목구비와 수염의 형태는 거의 똑같다. 정형화된 형식이 다를 뿐, 같은 얼굴을 묘사한 것이 맞는 듯하다. 사실 똑같은 얼굴인데, 그림체 때문에 벌어진 논란이라고 한다 카더라 당장 중국의 역사인물들 문서에 실린 초상화들은 오른쪽처럼 단순화되어 비슷한 그림체가 많은데 실제 얼굴은 세밀하게 묘사된 좌측의 어진이 더 실제와 가깝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2.6 그 외

  • 명이 의 뒤를 이어 중원의 패자(覇者)가 되었고, 철령 이북 지방은 원나라의 땅이었으니 당연히 명나라의 땅이 되어야 된다고 외교질했다가, 고려하고 관계가 악화되어 요동 정벌 직전까지 가서 고려가 정벌군을 보내 전쟁이 날 뻔 했다. 이때 이성계가 회군을 하지 않았다면 중, 몽, 한의 삼국의 난세가 더 길어졌을지도 모른다.
  • 명실록에 따르면 조선이 20만 강병을 동원해서 요동 정벌을 시작하면 답이 안 나온다는 보고를 듣고 우려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는 명나라가 당시 조선 내부의 상황을 잘 몰라서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의 조선은 고려말부터 홍건적, 나하추, 여진족, 왜구 등의 침략으로 인하여 나라가 극심하게 혼란한 상황이었고, 주원장이 저 발언을 하기 고작 7년 전에 있었던 위화도 회군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 조선이 실제로 북벌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5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 물론 공민왕 때 요동정벌을 한 적이 있고 홍건적과의 전투에서 고려가 20만 병력을 동원한 적이 있으나 이후 고려는 내부에선 권문세족의 부패와 외부에서의 끊임없는 침략으로 국력이 심각한 수준으로 줄어들었고, 홍건적과의 전투는 국가 방위전이었기에 장거리 원정인 요동 정벌과 같게 보기엔 문제가 있다. 게다가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주원장이 저 발언을 하는 당시에 조선은 왜구의 침략을 받고 있었기에 요동 정벌은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었으며, 각종 기록에서 이 왜구를 막지 못한 군관들이 줄줄이 처벌당한 기록들을 매우 쉽게 찾을 수 있는데다 심지어 부산에서는 동래, 기장, 동평성이 함락당하는 등 한반도 남부가 왜구에게 말 그대로 탈탈 털리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은 커녕 당장 국가 방위에 급급한 것이 이 당시 조선의 현실이었다.
  • 이성계의 선조가 황해도 모처에 자손이 황제가 될 묏자리와 왕이 될 묏자리를 두고는 선친을 묻으려고 했더니, 주씨 성의 노비가 몰래 묏자리를 바꾸어서, 후손들이 각각 명 태조, 조선 태조로 뒤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30] 우연히 만난 스님과 장수가 훗날 각각 명 황제, 조선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압록강은 흐른다에도 나올 만큼 유명한 이야기다. 그것도 한두 군데가 아니라 여러 군데에서 이성계와 주원장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실제 명확한 역사적 근거는 없으나, 그만큼 원명, 여선 교체기의 군주들이 모두 한미한 집안 출신[31]이었다는 게 흥미로운 일이었다는 것.
  • 어느 날 주원장이 맹자를 읽다가 갑자기 미친 듯이 소리치며 신하들에게 명령했다. “이 늙은이가 지금 살아 있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당장 이 자의 신주를 사당에서 내치고 책을 불태워라.” 어떤 대목이 그를 그렇게 광분하게 했을까? 바로 “임금이 신하를 지푸라기처럼 여기면 신하는 임금을 원수처럼 여긴다〔君之視臣 如土芥 則臣視君 如寇?〕.”고 한 대목! 그가 보기엔 그런 말은 신하로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이다. 명령을 내린 뒤 그는 이 문제로 간하는 자가 있으면 대불경죄로 다스릴 것이라고 신하들에게 경고했다. 형벌에 ‘대’자가 붙으면 ‘죽인다’는 뜻이다. 하지만 당시 전당(錢唐)이라는 신하가 ‘죽음을 무릅쓰고’ 그에게 간했다. 주원장이 죽이겠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받아쳤다.“신이 맹자를 위해 죽는다면 죽어서 영예가 길이 빛날 것입니다.” 전당은 죽을 각오를 하고 맹자의 복권을 위해 간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어쩐 일인지 사람을 밥 먹듯이 죽이던 주원장도 전당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죽이지 않았다. 또 얼마 후 그의 간언을 따라 맹자를 공자의 사당에 함께 배향하도록 허락하였다. 목숨을 걸고 간했던 전당은 그가 바라던 대로 나중에 맹자의 사당에 배향되어 명조가 망할 때까지 제사를 받아먹었으니 죽지 않고도 영예를 길이 누렸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주원장은 끝내 맹자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당 같은 신하가 목숨을 걸고 간하는데 맹자를 불태우거나 하지는 못했다. 결국 그는 한림학사였던 유삼오(劉三吾)를 불러서 맹자 다이제스트, 곧 ‘맹자절문(孟子節文)’을 만들게 했다. 맹자에 있는 글 중 내용이 불온하다 싶은 부분을 삭제하고 검열판을 만든 것이다. 유삼오는 모두 260장인 맹자 중 무려 88개장을 삭제하고 172개장만 남겨두었는데 글자수만 따진다면 거의 절반을 삭제했다. 어떤 대목을 삭제했을까? 맹자가 폭군을 비난하는 대목은 모두 삭제했다. 물론 맹자가 백성이 존귀하다고 한 대목도 삭제했다. 인정을 말하는 대목, 왕도를 말하는 대목도 삭제하고, 혁명을 말하는 대목은 당연히 삭제되었다. 그렇게 만든 맹자절문을 과거시험 교과서로 지정했다. 하지만 맹자절문은 오래가지 못했다. 홍무 27년(1394)에 반포되어 과거시험 교재로 쓰이다가 영락 12년(1414) 성조의 명으로 호광(胡廣) 등이 찬한 사서대전의 맹자를 과거교재로 쓰면서 맹자절문은 세상에서 잊혀졌다. 주원장의 맹자 탄압은 고작 20여 년 만에 끝난 셈이다.
  • 서민 출신으로서 한 군세의 대장이 되었다가 제국을 개창했다는 점과 말년의 토사구팽 때문에 태조 고황제 유방과 이미지가 묘하게 겹친다. 비교도 자주 되는 편. 물론 유방의 토사구팽은 중앙집권에 방해가 되거나, 확실하게 반란을 일으킨 분봉왕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주원장의 무분별한 공신 살해와는 다르고, 또한 유방은 진나라가 망하기 전까지만 해도 별다른 문제 없이 동네 형님 취급받으며 잘 살았던 인물이므로, 부모가 병으로 죽고 굶으며 살아온 과거를 생생하게 기억하며 백성들을 다스린 주원장에 비해 심정적으로 여유로웠던 건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주원장 본인도 백성들에게는 매우 동정적이었고, 그래서 인기가 많은 군주였다.
  • 신하들을 견제하기 위해 무지막지하게 숙청해대고, 또 권력강화를 위해 어지간한 일은 직접 처리한지라 업무량이 엄청났다고 한다. 하루에 1천건은 가뿐히 넘겼다고 한다. 물론 이건 홍무제가 황제권을 강화하느라 재상을 폐지하면서 생긴 현상이니, 어떻게 보면 자업자득. 숙청으로 인해 도와줄 사람이 없는 것도 자업자득. 결국 일감이 너무 많아지자 황제를 보좌하는 기구가 생겼으니 바로 내각이다. 신권이 강해지는 걸 막기 위해 정5품짜리의 낮은 관리들을 채용했으며, 이들은 모든 상소문에 각자의 의견을 덧붙여서 황제의 업무를 도왔다. 허나 낮은 직급 출신이다 보니까 고위관료들의 미움꼬장을 받게 되었고, 결국 원활한 업무처리를 위해서 내각의 직품은 점점 높아져, 나중엔 고위관료들이 내각의 일을 겸하게 된다. 장거정은 명나라에 본래 없었던 재상 자리나 다름없는 내각대학사 수보에서 국정을 담당했을 정도. 그러나 어쨌든 직급이 낮았기에[32]황제가 태정을 하면 답이 없었다. 정말로.
  • 중국의 베이징커리 신문은 역대 황제 중에서 심리적 소양이 가장 떨어지는 황제로 명태조 주원장을 꼽았다고 한다. 하지만 주원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황제가 되었다고 해도 어차피 공신 숙청은 이뤄졌을 것이다. 나름 사람 좋은 유방도 중앙집권에 방해가 된다고 여기는 공신들은 가차 없이 숙청했고, 광무제 유수나 송태조 조광윤도 토사구팽을 피한다며 직접적인 처형은 가급적 피했지만, 공신들에게 명예직을 준 뒤 쫓아내기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주원장은 개천에서 나온 용이나 다름없기에, 확실하게 따를 수 있는 인맥과 세력이 전무했으므로, 분봉왕 숙청에 그친 유방보다 더 방대한 스케일의 공신숙청을 진행했다. 황제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 없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 빈민 출신이라 신하들에게는 가혹하고 백성들에게는 어진 군주라는 인상이 강하지만, 따지고 보면 사실 그의 민본주의도 빛 좋은 개살구 뿐이었다. 명나라 건국 이후, 자신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수도를 봉양에 옮기려 했는데, 결국 그 곳이 수도로는 적절치 않아서 포기하고 만다. 문제는 봉양을 수도로 건설하기 위해 다른 곳에서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킨 것인데, 수도 건설이 무마되었음에도 이곳 주민들이 다시 본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좁고 척박한 땅에 수많은 인구가 모여들다보니, 이 곳 경제는 결국 파탄이 나 버렸다. 또한 주원장은 자손들의 복지에도 힘썼는데, 황실 핏줄이기만 하면 최소 200석의 녹봉을 받을 수 있었다.[33] 물론 이것도 8대 이상까지 거리가 멀어진 방계의 경우[34]에 해당되는 최저 녹봉이고, 친왕 급으로 가면 더 높았다. 황실 자손들은 눈덩이 굴리듯 불어서 명나라 말기에는 무려 20만이라는 숫자를 자랑한다. 이 20만 인구를 전부 명나라 재정으로 먹여살려야 했으니, 결과적으로 그 부담이 누구한테 가는지 생각해보자. 이 두 사례 모두 전략적인 안목은 없이, 소박한 감정(고향사랑, 핏줄배려)으로 백성들에게 엄청난 민폐를 끼친 것이다.

2.7 대중매체에서

  • 영화로도 나온 《비천무》 원작 만화책에 그에 대한 설명이 이렇게 나온다. "가난한 농민 태생이라는 점 때문에 황제가 되어 공신들을 무척 괴롭혔지만, 중국 역사에서 그만큼 백성들을 위한 군주도 좀처럼 없었다." 만화에서 그다지 비중은 없으나, 새로운 왕조를 건국하면 백성들을 위할 것이라는 뜻을 보였다.
  • 게임 《징기스칸 4》에서 시나리오 2와 4에서 등장. 정치는 90대에 전투, 지모는 70~80 이상의 무장. 시나리오 2는 미등장이지만, 시나리오 4는 명나라 군주다.
  • 김용의 장편 소설 《의천도룡기》에서는 떠돌이 중으로 등장하여 주인공 장무기를 따라 명교에 투신한 부하로 나온다. 후에 장무기를 속여 지존의 자리를 빼앗고, 국호를 명교에서 따서 으로 하는 나라를 세우고 황제로 등극한다.
  • 태규의 첫 무협 소설 《풍사전기》에서는 조연 백가흔(남궁검가 창천의혈문의 하부 세력인 제검장의 셋째 아들)으로 출현하며, 위에서 언급한 실제 역사의 인물들도 무림 고수로 출현한다.
  1. 초명은 중팔(重八), 흥종(興宗), 덕유(德裕).
  2. 주원장의 알려진 형제들 중에서는 넷째 아들.
  3. 사원의 비용을 유지하기 위한 기금을 동냥하는 승려를 말한다.
  4. 이때 생긴 게 첩자같이 생겼다고 가담은커녕 처음부터 체포되었다. 생긴 게 무슨 죄라고(...) 하지만 곽자흥이 그의 담력과 성품을 알아본 덕택에 무사히 합류했다.
  5. 왕조가 아닌 국가까지 포함하자면 540여년 뒤 장제스가 이끄는 중화민국에 의한 국민당의 통일이 있었다.
  6. 일단 그 곳을 점령하면, 안정과 정비를 위해 군사와 관리들을 보내야 하는데, 가만히 내버려두면 바로 주원장 자신이 그랬듯이 그들이 나중에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르고, 바깥지역은 교역할 것도 없고(어떻게 보면 중화사상), 지금 있는 땅으로도 농사 지어먹기 충분하니까 그랬다고.
  7. 제일 많이 신경을 쓴 것들 중 하나가 지역별 과거합격자 안배였다. (이 문제는 북송 때부터 주된 정치현안이었다.) 남송 멸망 후에도 반쯤 자치를 누리며 학맥을 이어온 강남인들이, 몽골의 지배하에 신음하던 화북인들을 제치고 합격을 독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다만 방법이 상당히 과격해서, 부정이라며 급제한 강남 출신 유생들을 죄다 죽여 버리는 것도 불사했다.
  8. 통일왕조와 상관없이 단순히 서민 출신 '황제'만을 따지자면 너무 많아진다. 촉한의 유비, 후량의 주전충, 후조의 석륵 등등.
  9. 탕화 등 살아남은 공신들도 있었지만 드물었다.
  10. 이러한 태형을 정장(廷杖)이라고 부른다. 이전 왕조에도 있었지만 홍무제 대에 이르러 유례(類例)없이 자주, 혹독하게 시행되었다.
  11. 고려최승로성종에게 시무28조를 바치면서 선왕들을 두고 자기중심적인 평가를 내린 것을 보자.
  12. 실제로 발이 컸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전족을 하지 않아서 큰 발로 여겨진 것으로 추측된다. 전족이란 성장기에 발을 천으로 강하게 매서 성장하지 못하게 하여 억지로 작은 발로 만드는 것이었는데, 상류층 여성들은 거의 반드시 이렇게 했다. 이런 작은 발은 미의 기준으로도 여겨졌기 때문에 딸들이 고통스러워해도 부모들이 억지로 시켰다고. 그러나 하류층 출신으로 추측되는 마황후는 전족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범한 발이었고, 그래서 상류층 여성에 비교해 큰 발로 여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13. 물론 효과는 전혀 없었다. 오죽하면 주원장 본인이 박피형(剝皮刑)을 내려도 그 다음 부임한 놈이 또 박피형을 당할 짓을 하고 있다고 했을까.
  14. 다만 부패를 막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중세 형벌 제도 대부분이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데 반해, 범죄율 감소에는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15. 다른 버전으로 황태손에게 가시 막대기를 들어보라고 했는데 당연히 못 들자, "내가 그 가시들을 전부 없애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도 한다.
  16.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는 두가지가 모두 실려 있다. 이래놓고 가장 큰 가시인 주체를 제거하지 않았다.
  17. 대비를 안 한 건 아니라서 나이도 많고 비교적 황위에 가장 가까운 둘째부터 넷째 아들의 봉지는 모두 붙어있어서, 한쪽이 딴 생각을 하면 다른 둘이 견제할 수 있게 했다. 문제는 둘째와 셋째 아들이 먼저 죽어버렸다. 그래도 넷째 아들이 황제에 올랐으니, 자신의 자손들이 황제에 오르는 체제는 확실히 구축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18. 결국 영락제에 의해 이 문제가 현실화 되면서, 나중에는 가까운 황족들에게는 봉토를 적게 주거나 아예 주지 않는 친왕제도로 바뀐다.
  19. 그래야 일을 하니까.
  20. 거의 대부분의 국가가 국가 막장 테크에 접어드는 시기가 개천에서 용이 나오지 못하게 된 시기와 일치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이게 극심해지면, 기존 지배계층의 수준까지도 떨어진다. 이게 최악까지 치달은 국가가 바로 여말선초 시기의 고려. 권문세족들이 다 해먹고 아예 외부 세력의 진입을 차단해 버렸는데, 결국 이성계를 위시한 군부가 신진 사대부와 손잡고 싹 정리한 뒤 왕조도 바꾸고 나서야 개선됐다.
  21. 탕화는 주원장의 성격을 어렸을 적부터 잘 알던 사이였고, 또한 일찍이 벼슬에서 물러나 귀향하였기 때문에, 숙청을 피할 수 있었다. 주원장은 숙청 대상자들에게 개인적인 원한은 없었기에, 알아서 물러나거나 해서 위협이 되지 않으면 해치지 않았다.
  22. 이들 중에 경병문은 정난의 변으로 처형되고, 곽영은 쫓겨나서 귀향했으며, 고성은 도중 붙잡힌 이후에 영락제를 도왔기 때문에 즉위 후에도 쫓겨나지 않았다.
  23. 문자옥만이 아니라 유학 경전 탄압해서 절대 왕권에 방해가 될 만한 요소들을 모두 제거했다. 그리하여 나온 것이 진심편 등을 대거 덜어낸 맹자절문.
  24. 이와는 반대로 정도전의 반대파인 이방원과 그의 측근들은 우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종의 '견제'를 벌인 것.
  25. 명 왕조에서 공식적으로 규정된 형벌은 태장도유사의 5형이었지만, 홍무제는 자주 임의적인 형벌을 가하곤 했는데, 대표적으로 능지처사(陵遲處死)가 있다. 이러한 정식형벌(5형)과 임의처벌(능지처사)가 공존하는 형태는 명대의 특징적인 모습으로, 한–당–송으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5형과, 요–금–원으로 이어지는 이민족 왕조의 유산이 결합된 결과다.
  26. 명 초기의 고문과 혹형은 전대의 왕조들보다 잔혹하기로 악명이 높았지만, 홍무제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왕조 초기에는 법이 엄해야 한다는 원칙과 더불어 기존 공신집단 숙청 등에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후에는 그럴 필요성이 없어졌기에 국가반역자나 연쇄살인범과 같은 중범죄자가 아닌 이상 혹형을 집행하지 않았으며, 초기를 제외하면 명대의 형벌이 지나치게 잔혹했다는 근거는 없다. 다만 황제 직속의 특무기관인 동창과 서창, 금의위의 고문이 가장 악명 높았는데, 이들은 황제의 명령만 있으면 정식 사법기관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 집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무고가 증명된다고 해도, 황제는 과실을 인정하여 사과와 손해배상만을 했을 뿐, 그 어떤 법적 책임도 직접 지지 않았다.
  27. 박시백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저 도날드 스러운 얼굴을 바탕으로 홍무제를 나타냈다.
  28. 귀와 코가 크고 턱이 이마보다 튀어 나왔다든지. 참고로 얼굴의 곰보는 전염병에 걸렸다가 살아남은 흔적이라고 한다.
  29. 조선미 저, '왕의 얼굴'에서 참조
  30. 비슷한 전설을 가진 곳이 전국에 꽤 있다. 경상남도 진해시의 천자봉이라든지.
  31. 다만 이성계는 한미한 집안이라고 하기는 좀 애매하다. 무신정권 이의방의 방계 후손이며, 조상 때부터 고려나 원나라 벼슬을 하기는 했다. 고려 개경의 중심 귀족은 아니고 잘해봐야 요즘 시골 군수정도지만, 그래도 이성계가 날 때부터 수천 정도의 사병을 부리는 수준은 됐다.
  32. 이것은 홍희제 때 편법으로 겸직 벼슬로(2,3품직)로 품계가 상승했고 이어서 고위급 명예직의 겸직(태자 태,소OO)으로 종1품, 정1품으로 상승시켰다. 이때쯤이면 사실상의 재상이었지만, 단지 재상(승상)이라는 직명을 쓰지 않을 뿐이었다.. 또한 명나라 특유의 황제 전제체제로 인해 황제가 허수아비가 되는일은 거의 없었다... 대학사들은 말그대로 재상급 비서(직설적으로 딸랑이?)로서 황제를 보좌했다.
  33. 참고로 당시 한 개 현을 관리하는 지현의 녹봉이 겨우 90석이다.
  34. 한나라로 치자면 유비 정도가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