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복원

洪福源
(1206 ~ 1258)

고려의 간신, 역신, 매국노

1 생애

원조 이완용 (실은 이완용보다 더 나쁜 *)

1218년(고종 5) 고종 때 강동성 전투 발발할 당시 몽고, 동진국이 개입하여 처음으로 몽고가 고려에 들어왔는데 당시 아버지 홍대순이 인주도령으로 재직중 몽고에 항복하면서 이때부터 홍씨 가문의 흑역사가 시작된다 .

아들인 홍복원은 또한 1231년(고종 18) 살리타이의 1차 침입시 몽고에 항복했고 1차침입이 있은 이후 다루가치가 [1]서경, 개경 등 2경과 북계주변에 곳곳에 설치되었는데 당시 다루가치가 무기를 휴대하고서 고려인을 겁박하고 피해를 끼치는 사례가 많자 서경의 고위층 내부에서 다루가치 살해음모를 꾸몄고 이 당시 서경낭장의 지위에 있으며 영향력을 행사한 홍복원은 서경주민들의 불안감[2]을 조성하면서 서경주민의 난을 조장시켰다.

이처럼 몽고의 철병이후 꾸준히 몽고와 연락을 취하며 몽고 재침이 있을것을 확신하고 각 주군의 고려사람들을 끌어모아 살라타이의 군대와 합세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등 주도면밀함까지 보였다. 종합하면 서경의 민심을 조장하여 항전 개입을 차단시켰고 유사시 바로 전투에 진입하도록 별동대를 조직한 것이다.

이 후 살라타이의 2차침입시 같이 세력을 합쳐 조국인 고려를 침탈하는 더러운 매국행위를 본격적으로 자행하기 시작했는데 길안내 역할을 하며 당시 고려의 지리를 잘 몰랐던 몽고의 침입을 도와준다. 헌데 이 때 살라타이가 김윤후에게 사살되며 2차침입이 막을 내렸는데 나머지 사후 처리[3] 문제를 전적으로 홍복원에게 일임하여 총책임자로 만들었고 홍복원은 서경을 아지트로 두면서 필현보 등과 합세하여 고려와 반목했다.

2 몽고의 하수인이 되다.

그러나 1233년 (고종20) 12월 마침내 고려로부터 퇴출되어 필현보는 죽고 본인은 교활하게 1,500호를 이끌고 몽고에 귀부하며 항복했는데[4] 이 공로를 인정받아 고려군민만호, 안무고려군민총관 직위를 제수 받고 대리고 온 1,500호의 관리 및 차후 몽고로 귀부하는 고려인에 대한 모든 관할권을 부여받아 옛 동경로의 首府가 위치했던 요양에 총관부를 설치하여 이민업무를 담당하고 요양-심양 등지의 고려민을 다스렸다. 그는 매양 고려를 침탈해야 한다는 등, 고려가 몽고를 얕보고 있다는 등 온갖 개같은 참소를 지껄이며 여-몽 관계를 이간질시키는데 한 몫을 했다.

이후 몽고는 고려를 침탈할때면 늘 홍복원과 영녕공 왕준을 대리고 길잡이 역할을 하게 하며 공격을 자행했고 고려는 홍복원의 이 같은 만행에 이를 갈다 못해 어떻게든 홍복원을 달래기 위하여 앞서 반역의 무리라며 구금된 애비인 홍대순을 대장군 직위에 동생 홍복순은 낭장 직위를 줬고 장위를 홍복원의 사위로 삼아 뇌물을 보내는 등 달래기 위해 애를 썻으나 홍복원의 악행은 그칠 줄을 몰랐다.

이 같이 사악하고 납득하기 어려운 그의 행적을 두고서 고려사에선 '주인을 무는 개' 라는 표현을 쓰는 등 깎아내렸고 실제로 반신열전에 포함되어있을 정도로 악랄한 자였다. 조국을 참소하면서 매양 조국을 침범하며 동족을 침탈했고 항복하거나 월경한 고려민을 지배하는 등 당시 불편한 여-몽 관계에서 중간이득을 취한 좀도둑 같은 인간이다.

3 처참한 말로

나중에는 영녕공 왕준과 사이가 벌어져[5] 왕준을 모함하다가 원나라 황실 출신이었던 왕준의 아내에게 딱 걸려 몽고 조정에 고발되었다. 몽케 칸은 그 즉시 홍복원의 제거를 명했으며 이를 알고 기겁하며 도망치려다 그만 장사 수십명에게 몽둥이로 패죽음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6]

드라마 무신에서 홍복원이 나오는데 그야말로 비굴하고 악랄한 인물로 나왔다.

4 아들, 홍다구

한편 그는 홍다구, 홍군상 등의 아들을 두었지만 홍다구는 애비의 매국핏줄을 그대로 되물림받아 더 악랄한 인물이 되어 홍씨 가문과 고려의 악연은 3대째 이어진다.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으로 고려에 반감을 품던 아들 홍다구는 이후 관령고려군민총관이 되어 애비의 지위를 물려받고 1258년(고종45) 차랄태와 고려를 침공한 이후부터 원종 시기 삼별초의 난, 일본 정벌 등 역사적 사건에 깊게 관여했다.
한 가지 실례로 1차 일본정벌 이후 1278년 (충렬왕4) 정동원수의 자격으로 당시 삼별초의 난 진압으로 명망있던 김방경을 심문한건 유명하다. 그는 김방경이 삼별초의 난 진압 후 무기를 숨겨두어 반란을 꾀했다는 등 거짓자백을 받아내려 하였고 이를 빌미로 남부지역에 둔전군을 더 주둔시켜 개경정부를 견제해야 한다고 몽고 중서성에 건의를 올렸다. 실제 홍복원은 고려왕실에 강한 반발을 가지고있어 이 외에도 여러번 고려측을 참소하며 경계한 강경한 부원파세력이였다.

5 손자, 홍중희

홍다구의 아들 홍중희 역시 고려와 악연을 맺은 인물이다. (4대째... 징그럽다) 충선왕이 옹기라트 부 흥선태후(다기)와 협세하여 무종(카이산) 옹립에 공을 세워 심양왕에 봉해지자 홍중희와 여러차례 트러블을 빚었는데 그 이유는 요-심양 등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이미 토호세력으로 자리잡은 홍중희의 입장에서 볼 때 심양왕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입성책동을 주장하며 정동행성을 폐지하고 원의 내지화를 주장했고 고려국왕, 심양왕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은 옳지않다고 하여 충선왕을 여러차례 견제한다. 실제로 심양왕은 이름뿐인 명예직이 아니며 고려국왕 보다 지위가 높았다. 이처럼 충선왕의 지분이 올라가자 시기하는 세력은 주변의 한 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1. 살라타이가 철병조건으로 설치한 다루가치이다. 원사에는 72인이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고려 말 유학자 익재 이제현은 저서 역옹패설에서 72인은 지나치게 많으며 다루가치 설치는 믿을 수 없다며 반론했다. 수치는 믿을 수 없으나 당시 고려사 기록으로 볼 때 다루가치는 확실히 설치되었다.
  2. 다루가치 살해는 대몽외교에 치명타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당시 몽고 1차침입시 고려인을 잔인하게 살육하며 유린했는데 살라타이가 재침을 하기 위해 도강을 준비한다는 뜬소문이 돌자 대다수 주민이 아비규환에 빠질정도로 정신을 못차렸고 이때 최우는 강화도로 천도해 방어에 들어갔다. 헌데 개경의 이같은 자구책은 서경인들이 보기엔 그닥 안 좋았을 것이다.
  3. 몽고에 투항한 고려인, 내부한 성의 관리 등..
  4. 이후 서경 주민을 전부 해도로 입보시켜 서경은 황무지가 되었음
  5. 왕준에게 홍복원이 가지고 있던 몽골 영내의 고려인들에 대한 관리권을 주었다. 이 일로 사이가 멀어졌다.
  6. 그의 비참한 최후는 이후 아들 홍다구가 고려를 원망하여 악랄한 만행을 저지르는 배경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