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

1 개요

宦官

고대 문명국가에서 이어져 온 궁정직업종(?) 중의 하나. 요약하면 고환이 없는 궁정인. 다만 고환과 음경이 둘 다 없거나, 음경만 불구인 경우도 있었다.

왕정이 확립되고 일부다처제가 뿌리깊은 국가에서 운용된 제도이다. 고자들을 왕의 궁정을 담당하는 신하로 고용하여 다른 남자들이 하렘에 침범해서 왕의 여자들을 건드리지 못 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또, 일반 사회와 단절된 존재이기 때문에 외부인에 비해서는 충성심이 높다고 판단되었으므로 여러 왕정 국가에서 환관 제도는 널리 사용되었다.

환관은 고자니까 기본적으로 왕비나 후궁들의 정조를 위협할 수 없었고, 설령 왕비나 후궁들의 침실에 불려간다 해도 씨앗이 생길 일은 없으며[1] 설령 왕의 여자가 환관과 관계한다 해도 여자의 몸에서 다른 남자의 자식이 태어나는 것을 막기만 하면 후사를 NTR당하는 최악의 사태는 막을 수 있으므로 생식능력만 제거되면 고자로 인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환관도 부위를 절제하는 정도에 따라서 종류가 여러가지였다.

반대급부로 환관들의 권력은 정말 대단했다. 왜냐 하면 문무백관들은 출퇴근을 하기 때문에 밤이 되면 자신의 집에 거처하여 황제를 알현하지 않지만 환관들은 황제와 24시간 붙어다니며 밥도 같이 먹고[2] 잠도 같이 자기[3] 때문이다. 황제와 사이가 가까워지는 것은 당연했고 그 때문에 환관들이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일도 종종 일어났으며 특히 한나라의 십상시와 당나라 황제들을 갈아치운 환관들이었다.

굳이 고자들을 써야 했던 이유는 궁중의 일 중에서 남자가 힘을 써야 하는 부분이 많았을 뿐 아니라, 가부장제 사회에서 뿌리깊은 여성에 대한 편견으로 여자가 여자를 통제하기 어렵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환관들은 궁 밖에 나가면 가족 관계도 끊어져 고자라고 평생 손가락질당하고 시달리며 살아야 하는 만큼 왕이나 황제의 권력에 철저히 의존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군주의 입장에서도 자신과 한 배를 탄 존재라고 느껴져 나름 신용이 갔을 것으로 여겨진다.

2 명칭

한자의 환(宦)과 엄(閹)은 고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환宦은 원래 신을 섬기는 노예-고대에는 왕을 신으로 숭배했다-였으나 시대가 흘러 왕의 궁묘 관리인이 되었고, 엄은 신체적인 특징에서 기인한 것이다. 엄(閹)은 고대에는 奄으로만 쓰였으며,『주례』,『예기』등에는 이런 명칭으로 등장한다.

중국에서는 환(宦)은 환자(宦者), 환수(宦竪), 폐환(嬖宦), 중환(中宦), 내환(內宦) 등으로 불렀고, 그들의 신체적 특징에서 기인하여 엄인(閹人), 엄자(閹者), 엄수(閹竪), 엄시(閹侍) 등으로 불리웠다. 엄과 환을 합쳐서 엄환(閹宦)이라고도 불렀다. 또한 궐문을 지켰기 때문에 '문지기'라는 의미에서 혼관(閽官), 혼시(閽侍)라고 부르기도 했다.

화자(火者)라는 말도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어원이 있는데, 환관이 남중국의 광동성에서 많이 나왔기 때문에 피부가 불에 그을린 것처럼 검다고 해서 화자라고 부르게 되었다던가, 인도에서 수입해온 환관들이 피부가 검어서 역시 이렇게 불리웠다던가, 火라는 글자가 사람 인(人) 변에 좌우에 두 개의 점이 찍혀 있기 때문에 이 점 두개를 불알로 봐서 이런 의미가 붙었다던가, 환관을 수술로 만들어내기 전에는 불로 자지를 지져서 만드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붙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다.

정신(淨身)이라는 용어도 있다. 이것은 '깨끗한 몸'이라는 의미로 여자와 성교하지 않은 동정이라는 의미지만, 이 역시 남성으로서 능력을 상실한 놈이라는 으로 쓰였다.

태감(太監)은 본래 환관들이 맡고 있는 기관의 우두머리를 칭하는 말이었지만, 환관 전체를 칭하는 말로 쓰이기도 했으며 덕분에 환관들도 이렇게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

내재(內宰)는 궁궐 안의 재상이라는 의미인데, 환관을 한껏 높여주는 이름이다. 사실 중국 역사 속에서는 환관이 재상이 된 경우가 많았고, 우리나라에서도 환관이 재상에 해당하는 높은 벼슬을 받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이 용어가 전혀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다.

조선에서는 '내시(內侍)'라고도 불렀다. 이는 조선시대에 내시부를 환관이 독점하게 되면서 시작된 것으로, 고려시대에는 일반 관료들이 내시직을 맡기도 했기 때문에 구분되어 있었다.

히브리어로는 '사리스(סריס)'어째 모양이 절묘..., 그리스어로는 '에우노코스(Ευνούχος)'라고 한다. 이 말에서 현대 영어고자를 뜻하는 eunuch가 유래했다. unique를 발음할 때 잘못하면 이 단어로 들리니 주의

3 세계의 환관

동양권에서는 중국에서 시작되어 고려조선, 베트남 등으로 전파되었다.

특이하게도 일본에는 마지막까지 전파되지 않았다. 게다가 전국시대가 끝난 뒤 일본을 장악한 에도 막부에서는 군주의 하렘 관리를 여급, 즉 여자들이 직접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오오쿠인데, 지금은 노인이라고 흔히 번역되는 お年寄(오토시요리)라는 단어는 사실 이 오오쿠에 있는 여성들을 선도하는 궁녀장을 의미하고 있었다. 굳이 환관을 쓸 이유가 없었을 듯 하다. 다만 제도적으로 정착되지 않았다 뿐 여러 이유로 성불구가 된 남성 개개인을 비슷한 용도로 고용하기는 했던 모양이다.

서양의 경우 오리엔트 지역에서 고대로부터 환관이 존재하였다.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의 기록에도 환관이 나오며, 이집트, 바빌로니아에도 존재했다고 한다.

헬레니즘 시대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집트클레오파트라의 근위대장 포티누스는 환관이었다.

기독교의 전파로 유럽에서는 환관이 줄어들었으나, 이탈리아에서는 특이하게 하렘이 아니라 카스트라토 때문에 환관이 생겨났다.

동로마 제국에는 환관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환관의 위상이 낮았던 중국에 비해 장군, 제독, 총대주교 등 국가고위직을 차지한 유명인사들이 많은 편이다. 나르세스가 환관 장군으로 유명하다. 이건 동로마의 특이한 사항이 적용된 것인데, 해당 제국에서는 황족들 간의 제위 다툼을 방지하기 위해 제위 계승에서 밀려난 황족은 타국에서는 후환을 제거하려고 죽이지만, 기독교 정신을 적용(...)한다는 의미에서 죽이지는 않지만 제위를 잇지 못하도록 신체훼손형을 가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4] 이런 경우 비록 거세당했지만 고귀한 신분은 그대로 유지되므로 고위직을 맡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다만 황족이 아니라 일반적인 신분에서 환관이 되는 경우는, 검열삭제를 통째로 제거하거나 일부분 제거하는 대신 정관만을 끊어내어서 환관으로 만드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당연히 발기도 가능해서 이런 환관들이 권력자들의 아내들이나 들을 NTR(...)하는 경우도 잦았는데, 어떤 시인은 '여자들은 연애의 꽃만을 누리기를 원한다. 열매를 가지는 부담 대신에'라는 기록을 남길 정도였다.

이슬람권 역시 환관을 많이 사용했다. 대부분 흑인이었고(혹은 백인), 동로마와는 달리 성기를 통째로 잘라냈는데, 이는 환관들의 주된 용도가 하렘이나 여자의 경호원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세 이전부터 흑인 노예를 광범위하게 사용해온 아랍권에 흑인 인구가 별로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는 족족 거세당했기 때문이다.(...) 뭐요?! 이보시오, 이보시오, 주인양반! 아유.....

페르시아사파비 왕조때는 특히 환관의 세력이 강했으며, 오스만 투르크 에서는 백인 및 흑인 환관을 널리 사용했다.

3.1 중국

중국에서는 은나라 시대의 갑골문에 이미 강羌족의 전쟁 포로들을 환관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이미 요순 시대에 궁형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환관의 영향이 매우 커서, 명나라에 이르러서는 무려 10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수의 환관이 존재했다.

사실 권력을 독점하여 악행을 행한 환관들이 많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명나라의 왕진, 유근, 위충현 등이다.

명나라는 환관을 충당하기 위해 조선에 이런 저런 이유로 남성으로서 생식기능을 상실한 12세에서 18세 사이의 남자 아이를 보낼 것을 강요했는데, 이를 화자(火者)[5]라고 한다. 그 중에서 1428년(세종 10년) 10월 3일자에 명나라에 들어간 황해도 신천 출신의 정동(鄭同)은 명나라 황궁 생활에 잘 적응한 결과 최고의 권세를 누리는 환관으로 성장했다. 정동이라는 이름이 다시 실록에 등장하는 것은 1469년(예종 1년) 1월 30일자에서다. 명나라 사신으로 최안[6], 정동, 심회 세 명이 곧 한양에 들어오게 될 것이라는 보고서였다. 41년 전에 화자로 갔던 바로 그 정동이 이제 명나라 환관들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인 태감(太監)이라는 벼슬을 갖고서 조국의 땅을 다시 밟게 된 것이다. 정동은 한양에 머무는 동안 별도의 집을 마련했고 중간에 고향 신천도 방문하고 왔으며 가까운 친척의 관직 청탁도 서슴지 않았다. 조선 조정은 정동의 청을 빠짐없이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4월 6일에는 그의 고향 신천을 현(縣)에서 군(郡)으로 승격하였다. 어쨌거나 정동의 입장에서는 금의환향(錦衣還鄕)이었다.

당시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들어오면 3~4개월 정도 머물며 온갖 향응과 유람을 즐기다가 더 이상 싣고 가기 힘들 정도의 각종 선물을 받고서 북경으로 돌아갔다. 정동도 5월 2일 돌아가는 길에 고향 신천을 방문하게 되는데 이때 호조판서 노사신이 황해도까지 안내를 맡았다. 화자가 명나라 태감이 되었다는 사실의 신분상승적 의미는 그만큼 컸다.

이후 명나라를 방문하는 조선의 사신은 무조건 북경에 있는 태감 정동의 집을 방문해 현안에 관한 입장 조정을 거쳐야 했다. 정동도 가능하면 고국의 문제들이 잘 풀릴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많은 애를 썼다. 어쩌면 세조부터 성종대의 대명외교를 연구하는 데 정동은 가장 중요한 인물인지 모른다.

1479년 1월 4일 성종과 한명회가 나누는 대화의 한 대목을 보면 이미 정동은 명나라 조정 내에서 핵심요직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동이 병사(兵事)를 맡은 지 이미 오래 되었고, 조정(朝廷)의 일을 많이 장악하고 있으니, 명의 대신이 모두 삼가고 반드시 그를 꺼릴 것이다. 내가 만약 정동에게 뇌물을 내렸다가 중국 조정에서 안다면 반드시 나를 비루하다고 할 것이니,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정동에게 뇌물을 줘야 한다고 했던 인물이 바로 한명회였다. 따라서 한명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답한다. 이 무렵 이미 한명회는 동시통역사인 장유화를 매개로 해서 정동과 깊은 유착관계를 형성해 놓고 있었다. 그것이 조선 조정 내에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3.2 한국

3.2.1 고대

환관에 관한 기록이 가장 처음 나타나는 것은. 삼국사기 신라 본기의 흥덕왕 원년(826)의 기사다. 여기에 흥덕왕은 왕비가 죽자 슬픔에 젖어 시녀들조차 가까이 하지 않고 오직 환수(宦竪)들만을 심부름꾼으로 부렸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초에 편찬된 내시의 사적을 기록한 내반원기에는, 신라 문무왕 때 수충(守忠)과 아진함(阿珍含)을 환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신라의 관직인 대감(大監)을 내시를 가리키는 태감(太監)과 혼동하여 생겨난 오류다.

3.2.2 고려

이후로 신라 말에서 고려 초까지는 환관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다가, 고려의 제11대 왕인 문종대에 다시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고려사에 부기된 이제현의 찬에 보면, 문종의 검소한 생활에 대하여, '환관과 급사를 10여명 밖에 두지 않았다'는 표현이 있다. 이는 뒤집어보면 이전에는 어느 정도 환관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뜻이 될 것이다. 고려의 내시는 환관과는 별개였다. 대표적인 내시로는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 척준경의 아들도 내시를 했고 고려 후기 지식인 안향도 내시였다. 이처럼 내시는 문벌귀족의 자재들이 기용될 정도로 엘리트 계층으로 환관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헌데 고려의 제18대 왕인 의종시기부터 환관의 힘이 막강해졌다. 본디 환관은 남반직에 속해서 7품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같은 제도가 의종시기부터 무너졌다. 의종은 자신을 젖 먹여 키워준 유모의 남편이요, 의종이 친동생에게 밀려 하마터면 왕위를 놓칠 뻔했을 때 보호자로 활약해준 환관 정함을 정7품 문관 벼슬인 합문지후에 임명하고, 왕광취, 백선연 등의 환관을 총애했다. 그러나 문신과 대간들은 전례 없는 일이라며 강력히 반대했고, 심지어 최숙청은 정함이 세를 믿고 권력을 남용한다면서 몰래 죽이려다가 발각되어 외딴 섬으로 귀양을 갔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의종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정함은 환관이 내시가 되는 데 물꼬를 텄다. 의종은 신하들과 거리를 두고 조정에도 잘 나가지 않았으며, 환관을 통해 조정에 필요한 일을 알리고 신하들의 말도 환관을 통해 전해들었다. 자연히 환관의 권력이 강대해졌고 정함이 죽은 뒤에는 백선연이 의종의 후궁 무비와 결탁하여 권력을 행사하였다.

하지만 이에 불만을 품은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의종을 몰락시키고 무신정권시대가 되자, 왕광취 등이 환관들은 반란 세력의 핵심 인사들을 궁궐로 끌어들여 살해하려다가 실패로 끝나 오히려 모두 죽음을 당하였고, 이후 무신정권 시대 동안에는 환관이 기를 펴지 못했다.

고려원나라에 복속된 뒤, 원나라는 고려에서 환관을 차출해갔으며 이 중에는 원사 환자편에 오를 만큼 출세한 박불화 같은 인물도 있었다. 원나라 조정에서 봉사한 환관들의 영향은 막강해서 충선왕 시기에 환관들이 대원군, 군에 피봉될 정도로 권세를 크게 누렸다. 환관이 각광받는 직업이 되자 스스로 성기를 거세해서 환관이 되는자가 많아져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다.[7]

고려 조정에서도 환관의 영향이 확대되었고, 공민왕 시대에는 환관들로 이루어진 내시부가 만들어지기에 이른다.

우왕 시절에는 환관의 폐단으로 내시부가 폐지되고 환관들은 노비 신분으로 전락했다가 공양왕대에 이르러서 내시부는 다시 부활했다. 그리하여 내시부 소속인 환관과 본래의 내시는 혼동되어 불리기 시작했으며, 어느덧 최고 엘리트 집단을 지칭했던 내시는 환관의 별칭이 되고, 본래의 내시는 이름은 물론이요 고유의 역할과 지위까지 잃어버렸으며 결국 내시는 환관의 동의어가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내시라는 이름으로 환관을 기억하는 까닭이다.

3.2.3 조선

조선 초기에는 환관을 모두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태조 이성계는 환관의 필요성을 깨닫고 이들을 존치하고 공민왕 대에 나라에서 환관으로 일하다가 고려로 돌아와 조선에서도 일하게 된 환관 김사행을 시켜서 내시부 전체를 환관 조직으로 만들고, 조직화 하는데 성공한다.

중국과는 달리 조선에서는 환관의 수가 적었고, 임무가 궁궐의 잡일로 한정되어 있어서 환관들의 권력 남용이나 월권의 폐혜가 적었다. 물론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내수사 소속이거나 왕명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은 내시 정도면 웬만한 관리 수준의 위세를 떨치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의 위세가 상당했을 뿐 국정에 관여할 길은 원천차단당해 중국의 예에 비하면 권력이 없다고 볼 수 있는 수준이다. 또 내시부에 대한 규찰은 승정원에서 맡고 있었다.

또한 왕실 이외에는 사적으로 환관을 부리는 것을 금지했다.

특이하게도 조선의 환관들은 공식적으로 결혼도 가능했고 양자를 들이는것도 가능했다. 또한 왕 곁에서 있는 사람들이 유학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이들은 유교 공부도 해야했다.

4 환관이 되는 법

10억을 받으면 된다 카더라
중국에서 초기의 환관들은 궁형을 받은 죄인들이었다. 하지만 환관들이 점차 막대한 권력을 누리게 되자, 부와 권력을 누리기 위해 스스로 거세를 선택하여 환관이 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고자만들기 기술자들도 성업하였다.

조선에서는 사사로이 거세하고 환관이 되는 것은 금지[8]되어 있었다. 다만 어린 시절 고자가 되어 환관의 양자로 들어간 사람이 나중에 환관이 되었다.[9] 환관이 양자를 고자로 만들 때는 반드시 관아에 알려야 했으며, 고자만들기 비용은 어린아이를 양자로 받아들이는 환관이 담당했다.

거세를 위한 수술방식은 고대에는 에게 물어뜯게 하는 등(…) 무식하기 짝이 없었으나, 시대가 흐름에 따라 수술방법도 발전, 고환과 음경까지 잘라도 안전해졌다고. 그러나 대에도 거세 수술을 하다가 사망한 사람들이 있었다 하니 쉬운 일은 아니었던 듯.

거세 방식은 크게 고환과 음경을 함께 절제하는 방식과 고환만 잘라내는 방식의 두가지이다. 중국의 환관은 전자, 우리나라의 환관은 후자의 방식으로 거세했다. 음경 절제시 잘라낸 자리에 대롱(…)을 끼워서 요도를 보존한 관계로 소변 조절에 큰 문제는 없었다고. 하지만 고환만 잘라내는 방식에 비하면 사망율이 높았다고 한다.

거세한 고환과 음경은 손바닥만한 항아리에 넣고 그 항아리를 상선이 잘 보관해 뒀다가 해당 고자환관이 죽으면 원래 있던 자리에다 실로 꿰매서 장례를 치른다.

고환만 잘라내는 환관은 발기능력에는 문제가 없기 때문에 귀부인들의 장난감(…)으로 많이 활용되기도 했다.[10] 의외로 이런 식의 환관을 채용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왕이 공사다망할 경우 하렘에 있는 여자들을 만족시켜주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씨앗이 생기지 않아 왕의 2세를 잇는 데는 문제가 없으므로... 따라서 들키지만 않는다면 암묵적으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중국에서는 고환과 음경이 다 날아가야 환관으로 인정하므로 그런 환관은 발견 즉시 사형이었다.

자세한 수술법은 거세를 참조.

5 권력

직책상 핵심 권력층의 최측근으로 일하는 탓에 고대로부터 환관은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고, 중국에서는 이 환관들이 허수아비 황제를 조종하며 군림하는 일도 많았다. 중국 무협영화에서 악당으로 나오는 대표적인 사람들. 당고의 금을 일으키고 삼국지의 초반부에 나오는 십상시들도 환관들이다.

조선시대에 내시에게 가정을 갖게 하는 이유 중 하나도 내시의 관심사를 권력에서 돌리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가정도 없고 가족과도 떨어져 있는, 권력에 접근하기 쉬운 내시들이 권력에 관심을 가지고 맛들이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악랄한 관리가 되기 때문이었다.

동양에서는 환관이 될려면 일단 고자가 되어야 했고, 어느정도의 전문 지식을 요구했다. 궁내의 안방살림은 환관들이 도맡았기 때문이다. 조선의 경우 환관들은 그야말로 왕의 최측근이었기 때문에, 어릴때부터 선발하여 약 100여명 정도를 10년간 교육 시킨 후 최종적으로 환관을 뽑았으며, 중국도 명나라/청나라 시절에는 고등부터 하등까지 환관의 수는 2,000명을 가볍게 뛰어 넘었다.

또한 원래 중국에서는 내정에 간섭하고 권력에 물든다 하여 환관에게 교육을 시키지 않았으나, 최측근으로서의 지식이 중요해지면서 교육시설까지 설치하게 된다.

품계로 치면 정4품에 지나지 않았으나, 지도자의 최측근이며, 궁내의 살림을 도맡아 했기 때문에, 그 권력과 부는 엄청났다. 예를 들어서 환관의 권세가 낮았던 시절에도 99칸짜리의 거대한 집과 수개의 별채를 보유할 정도였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거냐면 조선시대엔 100칸 이상인 집은 궁궐외엔 지을수 없다라는 법이있다. 즉 99칸이면 왕다음인 엄청난 권세가라는 뜻이며, 돈 있다고 아무나 99칸집을 지을 수도 없다. 따라서 부와 권력이 엄청났을때는 그야말로 나라를 주물렀다고 한다.

고자라고 무시할 수 없다.

중국의 왕조에서는 주기적으로 환관의 횡포와 부정부패가 발호하였으며, 조선이나 청나라에서는 이를 경계하여 여러가지 대응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원래는 권력이라고 말할것도 없고, 단지 황제의 똥(...) 수발이나 들고, 음식상을 내오고 신하들의 접견요청을 황제에게 알리는등의 단순 노예에 지나지 않았으나, 수십년간 자신의 인격과 정체성을 버리고 황제를 그림자처럼 수행하다보니 황제에 대한 모든것을 자연히 알게되어 무시할수 없는 비공식적인 권력자가 되어버렸다.

황제의 성적 취향에서부터 정치 성향, 신체 리듬등을 모두 꿰고 있었기에, 가령 자신의 마음에 안드는 신하나, 뇌물을 안바치는 신하에게는 황제가 빡쳐있을때 기분이 나쁠때 "지금 황상폐하의 심기가 무척 좋으시니 들어가 정치를 논하시지요"(...)라고 말해 피박을 쓰게 하거나 아무일도 없는 황제를 아프거나, 바쁘다는 말로 둘러대면서 신하들의 접견을 거부하게 만드는 일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진(秦)나라의 환관 조고는 재상 이사를 제거하려고 2세 황제 호해가 신나게 놀고 있을때 이사보고 "지금 황제 폐하께서 정무를 보고 싶어하십니다. 어서 들어가 정사를 논하시지요"라고 말해 피박을 쓰게만든다음 황제에게 달려가 "이사가 황제 무시한데요(...)"라고 이간질을 해 이사를 제거했다.

이외에도 불알(...)이 없기에 불알이 달려 있는 신하들과는 달리 군사를 가지고 튀어버려 나라를 건국한다거나 총부리를 돌려 쿠데타를 일으킬 위험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환관들에게 군사권을 주는 사례도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나라가 있었다. 과연 당나라 군대. 그 유명한 당현종때부터 이런 현상이 나타났는데 나중에는 군사에 대한 전권을 가진 환관들이 황제를 뒷방으로 몰아내고 국정에 대한 전권을 휘두르는 일까지 발생했다. 심지어 당나라 중반기에는 경종이 환관에게 밉보였다가 화장실에서 칼빵(...)맞은 일도 있었다.

특히 명 왕조는 환관이 엄청나게 득세했던 시대인데[11] 황제들이 환관으로 이루어진 비밀경찰 조직을 만드는 등 환관에게 권력을 집중하는 정책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 환관의 수는 10만 명(!) 환관이 워낙 우대받던 시대다보니 못 먹고 못 사는 백성들 중 '차라리 환관 되고 팔자 펴자'는 생각을 하는 사람까지 나와 환관 1000명을 뽑는데 5000명이 몰리는 사태까지 일어났다고 한다(!)

단, 그렇다고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항상 환관이 권세를 누렸다고 생각하면 오산. 실제로는 당, 명 시절을 제외하면 잠깐 권세를 누린 경우는 있어도 우리가 갖고 있는 이미지 정도로 권세가 강하진 않았다.네놈은 단지 하루하루 내 똥수발이나 드는 기계에 불과하지. 단지 명 때는 국가 시스템 상 환관이 전권을 장악하기 쉬웠을 뿐이었다. 게다가 이런 명나라에조차 황제가 마음만 먹으면 아무리 권세가 강한 환관이라도 어렵지 않게 제거할 수 있었다. 역대 그 어느 왕조보다 강력한 황제독재체제를 구축한 명은 황제와 신하들의 거리가 무척이나 멀었고 상호견제수단도 미약했으며 국가의 모든 중요기구와 운용체계가 황제에게 몰려있다보니 황제의 최측근인 환관들의 권한이 덩달아 강해졌다.[12] 아무리 권세가 강해도 결국 강력한 황권의 비호 아래 탄생한 것 이었기에 황제의 신임을 잃으면 그걸로 끝이었다.[13] 하지만 명대의 환관의 위력이 상당히 강했던 것은 사실이며, 당나라등 다른 왕조에서 몇몇 환관이 권세를 누리던 시절과 그게 겹쳐져서 지금의 사실상의 흑막, 혹은 황제를 좌지우지하는 환관의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더불어 환관이 죄다 권력을 누린 게 절대 아니다. 권력을 누리는 환관 수가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며 대다수 환관은 그저 막일만 하다가 소리소문없이 죽는 경우도 허다했고 거세로 인하여 나이가 들면 요실금으로 고생하며 일찍 죽는 경우도 허다했다. 청나라 말기에 환관 몇몇이 서양 기자들과 인터뷰했는데 그들은 환관으로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건 극히 일부라는 하소연을 거리낌없이 말했다고 한다.

또 환관이라고 해서 무조건 권력을 휘둘러서 나라를 망친 것만은 아니고 진심으로 국가 또는 황제에 충성하거나 훌륭한 업적을 이룬 환관도 많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종이를 만든 채륜이라든가, 대원정으로 유명한 정화 같은 사람도 환관이었다. 또한 고력사의 경우, 이백과의 알륵으로 이미지가 나쁘고 권세도 막강했지만 황제에 대한 충성은 진심이었다. 숭정제의 최후를 곁에서 지키고 함께 자결한 왕승은 같은 인물도 있다.

6 가족

6.1 중국

중국은 원칙적으로 환관은 부부 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은밀히 불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환관들은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면 은밀히 궁녀들과 연분을 맺고 부부맹약을 맺었다. 이런 남녀 관계를 대식(代食)이라 했는데,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대개 한번 부부 맹약을 맺은 궁녀와 환관은 죽을 때까지 인연을 끊지 않았고, 한쪽이 죽어도 다른 사람과 연을 맺지 않고 나름대로 정절을 지키면서 살았다고 한다. 이러한 배우자를 중국 궁정에서는 숑메이(兄妹)라고 에둘러서 표현했으며 황제조차도 이런 관습을 알고 있어서 명나라 때의 황제는 측근 환관에게 "네 짝은 누구냐."라고 묻기도 했다고 한다.

공공연히 여자를 들여 아내로 삼은 환관도 있는데, 이런 여자들을 식모와 비슷한 뜻의 채호(采戶)라고 불렀다. 특히 명나라 환관들은 어느정도 재산을 얻으면 누구나 채호를 두고 지냈다.

양자를 들여 자식을 삼기도 했는데, 10세 이하의 어린 시절에 입양한 아이는 입양 즉시 고자가 되고, 환관 수업을 받으며 양부의 지도와 보호 아래 환관으로 성장한다.

때로는 유력자가 환관과 줄을 대기 위해서 양자를 자처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조 집안이 대표적인 케이스. 다만 조숭이 양자를 들인 것은 중국 수천년의 역사에서도 극히 예외적인 사례다.

6.2 조선

조선에서는 같은 시기의 나라와는 달리 공식적으로 환관에게 결혼할 권리와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제도적인 뒷받침을 했다. 이러한 정책은 환관들이 부와 권력 이외에 몰두할 것을 주어 환관의 폐단을 어느정도 줄일 수 있었고, 환관들도 지켜야 할 가정이 있고 가장으로서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에 행동을 조심스럽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그래봤자 명나라는 환관이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같은 사회였으므로 별 효과는 없었을 것 같지만 어느 정도의 효과는 있었을 듯... 사대부들은 고자인 환관들이 아내를 두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이를 금지해야 한다는 상소를 계속 올렸으나 왕실에서는 이를 계속해서 막았다.

조선의 환관들도 양자를 들여서 대를 이었는데, 양부와 성씨가 같은 경우도 있고 다른 경우도 있다. 양부와 성씨가 같은 아이와 양모와 성씨가 같은 아이가 자식으로 되어 있는 경우도 있는데, 양부와 같은 아이는 친가에서, 양모와 같은 아이는 처가에서 데려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환관의 양자들은 고자가 돼서 환관으로 일하게 된다. 환관은 아이를 관청에 데려가서 수술비를 주고 공식적으로 고자를 만들었는데 이런 식으로 환관을 지속적으로 수급했던 것이다. 물론 환관의 양자지만 고자가 아닌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양녀를 들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환만 잘라내는 방식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결혼해서도 성생활이 가능했다. 하지만 사정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인을 무는 등 괴롭혔다고 한다. 아무래도 내시의 아내들은 엄청난 성적 고통을 겪었던 듯. 이상의 내용은 한 향토사학자가 어렸을 적 자신의 옆집에 살았던 내시의 아내가 어머니에게 말하는 것을 들은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환처(환관의 아내)가 불륜을 요구할 때는 해주는 것이 도리다"란 말까지 있었다고 한다(…) [14]

어릴 때 거세를 한 환관은 남성 호르몬 작용이 안되기 때문에 변성기도 없어서 목소리가 여자와 비슷했다. 흔히 새된 목소리로 아첨하는 환관의 이미지는 이렇게 생긴 것인데 실제로는 이런 이미지와는 좀 달랐던 것 같다. 어떤 향토 사학자는 어릴 때 이웃집이 구한말에 궁중에서 일하다 은퇴한 고위직 환관이었는데 체격도 우람했지만 목소리도 남자답고 쩌렁쩌렁해서 산에서 고함을 치면 마을 전체에 다 울릴 정도였고 행동거지도 위엄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왕의 남자, 음란서생, 광해, 왕이 된 남자 등 2000년대 이후의 사극에서는 고위직 환관을 남자다운 이미지의 연기자가 맡는 경우가 늘어난 것도 이런 사실을 반영한 것. 실제로 건석, 고력사 등 환관임에도 건장한 체격을 가진 인물의 기록이 남아 있는데, 거세 이후에도 오히려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는 경우는 있는 듯 하다. 환관의 주 목적 중 하나가, 체력적으로 한계가 큰 여성들인 궁녀들만으로는 건물 보수 등 힘쓰는 일을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남자를 들일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이었음을 감안하면 놀라운 건 아니다.

정조 대의 내관 이윤목은, 『양세계보(養世系譜)』라는 환관 족보까지 만들었다. 그가 서문에서 밝히기를, 내시 집안은 양자를 통해 계통을 이었기 때문에 모두 성씨가 달라 미처 족보가 마련되지 못했다면서 비록 혈육은 아니지만 키워준 은혜에 보답하는 뜻에서 족보를 만들었다고 한다. 양세계보의 양세는 양자를 후세로 삼아 대를 이었다는 뜻이다.

그 후 그의 7대 손인 문건호가 중수작업을 했다. 양세계보는 세종 대까지 올라가며, 여기에 기록된 인물 중 일부는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민법 판례 중 '우리나라 구 관습상 내시 종중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대판 1977.6.7, 73다67)라는 사례가 있다. 내시는 자식이 없었을테니까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얘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시 종중이 양자로 대를 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문중의 혈연적인 의미에 치중해 '양자는 문중원이 될 수 없다'는 태도가 바탕에 깔려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내시 역시 일종의 성 소수자로 본다면 내시의 삶을 무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7 환관의 조직

중국명나라에는 24아문이나 동창 등 방대한 환관 조직이 있었다. 자세한 것은 중국의 환관조직을 참조.

고려에는 액정국이 있었고, 조선에는 내시부가 있다.

8 유명한 환관ㆍ내시

시대순으로 나열.

9 대중문화 속의 환관

가볍게 다루면 고자라는 점 때문에 중성적인 인물로 묘사되는 경우가 태반이고 웃음거리가 된다. 반면 사극 등에서는 특별히 환관다운 묘사는 보이지 않고, 병풍이 되거나 왕의 곁에서 간하는 정도다. 권신이라면 환관이라기 보다는 권력자의 포스가 강하다.

무협물에 자주 등장하는데, 남성성의 상실을 메우기 위해 극단적으로 무공을 탐하고 권력욕에 불타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덕분에 악역으로만 등장하며, 최강의 무공을 자랑하는 최종보스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게 다 규화보전때문이다.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환관 바리스는 각종 궁정 모략의 중심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무결병들은 고자들로만 이루어진 노예병이다.

레진코믹스에 환관제조일기 라는 여자도자장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작가는 여자 제갈량을 그린 김달이다.

  1. 실제로 환관들은 왕비, 후궁들의 노리개 역할로 쓰이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거세가 되지 않은 남성이 환관으로 위장 취업하여 후궁의 여인과 관계를 가지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 역사에 이름이 전하는 예로 노애.
  2. 실제로 황제의 식단에 독이 들었는지 검사하기 위해 먼저 먹어보는 일을 담당하는 환관도 있었다.
  3. 황제를 경호하기 위해서 황제와 같은 방에서 잠을 자는 환관도 존재했다.
  4. 제국 초기에만 해도 코를 자르는 선에서 정리되었지만, 코를 잘리고도 쿠데타로 집권한 황제가 나오면서 눈을 뽑거나 고자로 만들기 시작했다. (...) 죄인: "차라리 죽여라!"
  5. 말 그대로 사람(人)에서 고환을 상징하는 두 개의 점이 떨어져나간 사람을 뜻한다. 리가 흔히 이런 사람을 고자(鼓子)라고도 했는데 이는 북처럼 속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6. 정동과 마찬가지로 조선 사람으로 온양 출신이었다.
  7. 고려시기엔 궁형이 없어서 젖먹이 때 불알을 개에게 씹혀서 고자로 만들어 환자로 만들었다고한다.
  8. 세종때 시행한 법이다!
  9. 이를테면 변소에서 변을보다 고환에 묻은 변을 미친개가 달려들어와 뜯어먹어 고자가 되는 경우도으아아 있었다고 한다.
  10. 사실 삽입성교를 안하더라도 만족을 얻을 만한 방법은 많기(...)때문에 음경까지 잘라낸 환관도 비슷한 케이스가 왕왕 있었을 것이다.
  11. 대원정으로 유명한 정화도 명나라 때의 환관이었다.
  12. 주원장은 후한, 당의 사례를 들며 환관의 발호를 크게 경계했고 환관에게 많은 제약을 가해 철저하게 황실의 심부름꾼으로만 활용했다. 그러나 영락제 시기부터 이 원칙이 깨지기 시작해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13. 정덕제 시기 유근이나 천계제 시절 위충현 등 권세를 쥔 환관들은 많았지만 일단 황제의 눈밖에 나면 그걸로 끝이었다. 똑같이 환관의 전횡이 심했지만 명의 상황은 환관이 황권을 농단하던 후한, 당과는 차이가 컸다.
  14. 사실 이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고환을 절제했더라도 전립선이 있으면 사정이 가능하다. 또한 사정을 하지 않더라도 절정을 맞는 것은 가능하다. 예를 들어 2차 성징 이전의 남자아이는 전립선이 발달하지 않아서 성기를 자극하더라도 사정을 하지 않지만 오르가즘을 느끼는 것읔 가능하다. 다만 고환을 절제했을 경우 남성호르몬이 부족해서(고환에서만 남성호르몬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양이 줄어든다.)발기부전이나 성욕이 떨어져서 성적 문제를 겪을 가능성은 있다. 근데 어차피 거세 안 당한 남자도 이런 문제는 왕왕 겪잖아 '환처가 불륜을 요구할 때~' 류의 속담은 '여자는 성적으로 온전한 남자와 결혼해야 행복하다'는 식으로 남성성을 찬양하는 마초이즘적 편견에서 나온 말일 가능성이 높다.
  15. 심부름꾼, 안마사, 동성애 파트너라는 이야기도 있다.
  16. 궁궐에 24시간 있을 수 있는 남자는 군주, 태자가 아니면 환관이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