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 덴노

(히로히토에서 넘어옴)

혹시 쇼와 시대을(를) 찾아오셨나요?

같은 이름을 가진 덴노에 대해서는 후시미 덴노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추축국 의 주요 지도자들
나치 독일이탈리아 왕국
아돌프 히틀러카를 되니츠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베니토 무솔리니피에트로 바돌리오
일본 제국
쇼와 덴노고노에 후미마로
(전쟁 이전)
도조 히데키고이소 구니아키스즈키 간타로
일본의 역대 덴노
123대124대125대
다이쇼 덴노쇼와 덴노아키히토 덴노[1]
왕호쇼와 덴노 (昭和天皇)
히로히토 (裕仁)
생몰년도1901년 4월 29일 ~ 1989년 1월 7일 (87세)
신체AB형(CIS)
출생지일본 도쿄 아카사카 구 동궁어소
사망지일본 도쿄 지요다 구 후키아게고쇼
왕조천황가
재위기간1926년 12월 25일 ~ 1989년 1월 7일 (62년 13일)
종교신토
배우자고준황후(나가코)
즉위식1928년 11월 10일
장례식1989년 2월 24일
무사시능 (武蔵野陵)
"국제 신의상 어떨는지 싶지만 뭐 괜찮겠지. (国際信義上ドウカト思フガマア宜イ)" (인도차이나 진격을 허용하는 히로히토의 반응(1941년 6월 25일). 스기야마 메모(杉山メモ) 상권 231쪽). 후지와라 아키라(藤原彰) 외, <천황의 쇼와사(天皇の昭和史)> 82쪽.[2]
"황국이 총력을 기울여 승리를 결정지을 계기는 바로 오늘날에 있으니, 공들은 기꺼이 백성들보다 앞장서서 분노를 새로히 하여 단결을 굳건히 하고 떨쳐 일어나서 적국의 야욕을 분쇄함으로써 황운을 무궁히 도울지어다...(皇國カ其ノ總力ヲ擧ケテ勝ヲ決スルノ機方ニ今日ニ在リ卿等宜シク衆ニ先ンシテ憤激ヲ新ニシ團結ヲ鞏クシ奮テ敵國ノ非望ヲ破碎シ以テ皇運ヲ無窮ニ扶翼スヘシ)" 제85회 제국의회 개원식 칙어(第85回帝国議会開院式の勅語), 1944년 9월 7일 [3]

1 소개

일본의 124대 덴노.

4월 29일생으로 이날이 전쟁 전에는 '덴노의 생일'이라는 의미에서 천장절이라는 휴일이었다. 그러던 것이 전후 식목일, 정확히는 '녹색(綠, 미도리)의 날'로 바뀌었다가 2007년 자민당, 공명당, 심지어 당시 야당인 일본 민주당의 합의로 '쇼와의 날'으로 재개정되어서 동북아 국가들에서 말이 좀 나왔다. 윤봉길이 1932년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의거를 일으킨 날도 바로 이 날이었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迪宮(미치노미야). 중국 황제들처럼 연호+(帝)같은 형식으로 표기를 만들면 '소화제(...)'가 된다.

2 생애

220px-Michi-no-miya_Hirohito_1902.jpg
1살 때의 히로히토 친왕. 욱일기를 들고 있다.

쇼와 히로히토 덴노는 일본의 제 124대 덴노이다. 어렸을 때 칭호[4]는 미치노미야(迪宮)미친놈이야였으며, 도장에 새겨진 인장명은 와카타케(若竹)였다. 역대 덴노들 가운데[5] 재위에 있던 기간이 가장 길며, 가장 장수한 덴노였다.

히로히토는 1901년(메이지 34년), 4월 29일 도쿄 아카사카 구 아오야마[6]의 도구고쇼(東宮御所)에서 메이지 덴노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훗날 다이쇼 덴노가 되는 요시히토 황태자, 어머니는 사다코 황태자비다. 오랫동안 정실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측실 소생으로 계승되어 오던 일본 황실의 관습을 깨고, 적장자(嫡長子)로서 대를 이었다.

태어났을 때 키는 51cm였고, 몸무게는 약 3kg 정도였다. 히로히토는 태어난 지 70일 밖에 안된 시기에 추밀원의 고문이었던 카와무라 스미요시 백작에게 맡겨져서 누마즈(沼津) 저택에서 자랐다. 1908년에 가쿠슈인 초등과에 입학한 히로히토는, 가쿠슈인 원장이던 노기 마레스케 육군대장의 밑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1912년 7월 30일에 할아버지 메이지 덴노가 사망하고 아버지 요시히토 황태자가 뒤를 이어 다이쇼 덴노로 즉위하자, 히로히토 친왕은 황태자로 지위가 올라가게 되었다. 다이쇼 덴노의 즉위 후, 가쿠슈인 초등과에 재학 중이던 그는 황족신립명에 의해서 육해군 소위로 가게 되었고 근위보병 제1연대에 배치되었다. 1914년 3월 가쿠슈인 초등과를 졸업한 히로히토는 1916년부터 정식으로 황태자 즉위식을 거쳤다. 1918년에는 방계 황족인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이 황태자비로 간택되었다. 1919년 만 18세가 되자, 히로히토는 성년식을 한 후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220px-Emperor_Hirohito_and_empress_Kojun_of_japan.JPG
1924년, 히로히토 황태자와 나가코 황태자비.

다이쇼 덴노의 병이 악화되고 있던 가운데, 히로히토는 1921년 3월 3일부터 9월 3일까지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을 순방했다. 20세가 되자 섭정에 취임했고 셋쇼노미야(攝政宮)라고 칭해졌다. 1921년 12월 27일에는 궁정 문밖에서 사회주의에 심취했던 난바 다이스케로부터 저격을 받았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재밌는 사실은 난바 다이스케에게 저격을 받았을 당시에 히로히토는 자동차 안에 있었는데 "누가 총을 쏘나 보다" 하면서 태연했다고 한다. 난바는 저격을 시도한 직후 붙잡혀 무자비하게 구타를 당한 후, 대역죄로 사형에 처해졌다. 그래도 난바가 처형되고 나자 히로히토는 난바의 가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2014111400047_1.jpg

1924년 히로히토는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과 결혼했다. 1926년 12월 25일에 아버지 다이쇼 덴노가 사망하자 그는 124대 덴노가 되었고 연호를 쇼와(昭和)로 바꿨다. 1928년 11월 교토 고쇼에서 즉위식을 올린 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국가 중대사에 깊이 관여했고 특히 군사나 외교 정책에 관심이 많았다.

나이 30살이었던 1932년이봉창 의사로부터 폭탄 투척(사쿠라다몬(桜田門) 의거)을 당했다. 하지만 폭탄 2개 중 하나는 잘못 던져져 말과 마부(근위병)에게만 부상을 입혔고, 하나는 불발이 되어 실패. 폭탄 투척 이후 경찰들이 들이닥쳤을 때, 경찰들은 이봉창 의사가 던진 줄 모르고 이봉창 의사 앞에 있던 일본인을 구타했으나 이에 죄책감을 느낀 이봉창 의사는 자수를 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이후 사형에 처해졌다. 이때 침착한 어조로 "숨지 않을 테니 점잖게 다뤄라."고 말했다고. 조선에서는 격렬하게 비난하는 어조로나마 의거를 전할 수 있었으며, 특히 중국 언론에서는 대놓고 "아쉽게도 불발되었다"는 기사로 보도했다.[7]

1933년 12월 23일, 장남이자 훗날 덴노가 되는 츠쿠노미야 아키히토 친왕이 태어났다. 그러나 도조 히데키삼대오물들의 걸출한(...) 전략으로 인해 결국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다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 2개가 떨어지고 난 후에 항복을 결정하고 1945년 8월 15일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는 라디오 항복연설을 했는데 이를 옥음방송이라고 한다. 놀라운 사실은, 일본 국민들이 덴노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이게 처음이었다는 것.

항복 후에 맥아더와 GHQ에 의해서 강요되어서 1946년 1월 1일에 인간선언을 발표하게 되었다. 인간선언 이후 덴노는 더 이상 신격화가 부정되었고, 한 명의 평범한 인간으로 격하되었으며, 정치 일선에서도 물러나게 되었다. 재산 역시 모두 몰수당해 거리로 내몰려도 할 말이 없는 상황. 다만 덴노 존치를 결정한 마당에 히로히토 본인과 그 직계에 한정해 생활비를 일정 수준으로 주기로 해서 이때부터 덴노 일가는 일본 의회에서 예산을 타서 쓰게 되었다.

더글러스 맥아더와 히로히토. 그야말로 1장으로 요약 가능한 태평양 전쟁 결과.

이 사진은 일본 언론이 알아서 보도하지 않았으나 미군정이 반드시 보도하도록 지시해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맥아더가 정복도 입지 않고 주머니에 손까지 찔러넣은 채 찍은 모습으로 "누가 대장인지" 깨닫게 해줘 사진을 보고 자살하는 사람까지 나올 정도였다. 에드워드 베르가 쓴 책 <히로히토 - 신화의 뒷편>에 의거하면 이는 맥아더의 의도된 행동이었다고 한다.

1947년 제정된 일본국 헌법에서 히로히토는 상징적인 존재로 전락했지만, 미군이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당시에 GHQ의 사령관이었던 맥아더에 의해 독자적인 정치적 영향력은 유지될 수 있었다. 1952년 4월 28일에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일본이 주권을 되찾자 그는 여러 신궁과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며[8] 다시 활동을 재개했지만, 더 이상은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상징으로 남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히로히토는 덴노라는 공적인 업무는 그냥 상징적인 수준으로만 수행했고, 대신 원래부터 관심이 많았던 생물학 연구에 관심을 쏟으며 이에 몰두했다. 1971년 자신의 아내와 함께 전쟁 후 처음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적국이었던 영국네덜란드를 방문하기도 했으며 여러 정상들과 회담을 가지기도 했다. 다만 아시아계 대학생들이 히로히토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기도 했다.

나는 옥좌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여러 가지 경험을 했습니다. 가장 인상에 남은 일은 천황비와 같이 유럽 여행을 갔을 때입니다. 또 미국 여행을 갈 예정입니다. 1964 도쿄 올림픽과 오사카 박람회도 인상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가장 후회스러웠던 일은 두말할 것 없이 제2차 세계대전이었지요.

— 1975년 인터뷰 중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일과 제일 후회스러운 일이 무엇이였냐는 기자의 질문에 한 답

1975년 10월에 히로히토 덴노와 그의 아내 나가코 황후는 미국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식 방문했다. 미국 방문을 앞두고 히로히토와 뉴스위크지의 기자 버나드 크리셔의 인터뷰가 있었는데, 버나드 크리셔는 "일본이 개전을 결단한 정책 결정 과정에도 폐하가 가담하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했고 히로히토는 "전쟁을 끝낼 때 나는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전쟁 개시 때에는 내각의 결정이 있었고, 나는 헌법에 따라 내각의 결정을 뒤집을 수 없었다"고 변명했다. 또한 9월 22일에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일본인들의 가치관은 변하지 않았다" "일본의 군부 지도자들이 일본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던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한다면 아직도 살아 있는 그들을 욕하는 셈이 된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몇 주일 후 히로히토 부부는 국빈 자격으로 워싱턴을 방문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깊은 슬픔의 뜻을 전하고, 미국 관광길에 올라 캘리포니아 주 애너하임의 디즈니랜드 등을 찾았다.[9] 영국이나 네덜란드에서 규탄집회가 일어난 것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별다른 일 없이 미국 방문을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외의 여러 정상들을 만나며 살다가 1989년 1월 7일 오전 6시 33분 십이지장에 생긴 종양 때문에 8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 후 1989년 2월 24일 무사시노에서 매장된 히로히토의 후계자로 그의 장남이던 아키히토가 덴노에 오르게 되었고, 연호를 헤이세이로 바꾸면서 헤이세이 시대가 막을 열게 되었다.

3 전쟁 책임

패전 후 각지의 피해상황을 보고받을 때 시큰둥하게 "아 그래?" 혹은 "아 그렇습니까?" 이 말만 반복해서 빈축을 샀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 후 인간선언을 통해 자신이 신이 아닌 평범한 인간임을 선언하였다. 이후에는 입헌군주제로 전환된 일본의 국내 정치에 간여하는 일 없이 해양생물학을 연구하며 살았다. 주 연구분야는 말뚝망둥어. 쇼와의 장녀 히가시쿠니 시게코도 어려서부터 과학 과목을 좋아하고 생물학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일단 직접적으로 전범재판에 회부되지는 않았고 형벌도 받지 않았다.

3.1 방관자였는가?

도조 히데키는 전범재판 중 "천황의 의사에 반하여 개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한 일이 있다. 하지만 극동재판소는 천황을 기소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진행된 재판이어서, 피고들은 천황의 전쟁 책임을 언급 조차할 수 없었다. 도조 히데키 역시 해당 발언 직후 연합군 측에 해당 발언이 천황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음을 경고받고, 다음 번 재판에서 이 발언을 철회했다. 도조는 천황의 충성스러운 신하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천황 폐하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이 재판으로 천황폐하께 폐를 끼치지 않게 될 것이 명백해져서 안심했습니다.” 형 집행 한달여 전 도쿄 전범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도조는 미국의 방조로 히로히토 천황이 전쟁의 법적 책임에서 벗어난 것을 누구보다 만족스러워했다.[10] 또 천황의 측근 기도 고이치는 자신의 일기를 제출하며 진주만 공습이 천황의 재가를 받고 이루어졌다고 증언했으나, 이는 재판 중에 묵살됐고 본인 역시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요시다 유타카 교수가 쓴 일본 근현대사 시리즈 6권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 따르면 덴노메이지 유신부터 최종승인을 할 수 있는 능동적 권한을 가졌고, 히로히토 자신도 전쟁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자리였고 실제로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일례로 전시(戰時) 국정에도 직접 참여한 건 물론, 작전 수립이나 시행에도 직접 참여했고 작전을 수정하게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일본에선 누구보다 전시상황을 자세히 파악했으며, 실제로 일본 육해군은 서로에게조차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사람, 히로히토에게만큼은 그대로 보고했다.

한마디로 히로히토야말로 누구보다 전시상황과 일본군 전체의 막장실태를 자세히 알고 있었다는 소리이며 당연히 태평양 전쟁, 중일전쟁, 난징대학살, 731 부대, 일본군 위안부 등 각종 전쟁 범죄에 대해서도 전부 파악했던 게 분명하다. 아닌 게 아니라 일단 731 부대부터가 천황의 재가를 통해 창설된 부대였다.

혹자는 히로히토도 731부대의 실체를 몰랐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일본군 부대 중 천황의 재가로 창설된 부대는 731 부대가 유일하다. 더군다나 천황의 막내 동생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731 부대에 근무했는데, 이 부대의 실상을 히로히토가 파악하지 못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또 731 부대가 특별 허가없이 접근 불가능할 만큼의 보안을 유지했던 것, 그리고 군수뇌부가 생체 실험에 참관한 명백한 증거가 다수 남아있는 걸 고려하면, 히로히토는 731 부대의 존재와 그 목적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미드웨이 해전 결과는 물론 모든 전황을 파악하던 사람이 731 부대의 실상만 유독 쏙 빼놓고 몰랐을까? 천황이 731 부대을 알고 있었을 법한 정황은 수두룩하게 많지만, 몰랐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도조 히데키조차 전체적인 실태를 파악하지 못했다.[11] 하지만 그 모든 만행과 병신짓을 막거나 이후로는 하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놔뒀다. 히로히토 본인 역시 더글라스 맥아더와의 회담에서 "전쟁에 대한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으니 어떤 처벌이라도 받겠소."라는 뜻을 맥아더에게 전했다는 일화가 맥아더의 회고록을 통해 알려져 있었으나, 회담 기록이 공개됐지만 그런 내용은 없었다. 오히려 "나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지만 전쟁이 일어나서 유감"이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오히려 전쟁 책임을 통감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 책임을 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덴노를 전범으로 처리하여 제재를 실행에 옮길 경우 일본인들의 역린을 건드려 엄청난 저항이 발생할 것이 우려된 데다[12], 덴노를 꼭두각시로 남겨두는 편이 일본을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미국 정부의 암묵적인 뜻으로 인해 전범이 되지는 않았다.

맥아더가 히로히토와 함께 사진을 찍은 의도 역시 '나는 히로히토를 지지한다'는 뜻이 담겨있다는 해석이 있으며, 실제로 맥아더는 히로히토를 보호하는 데 있어 가장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맥아더의 회고록에도 히로히토에 대한 악담은 단 한 줄도 적혀 있지 않고 오히려 '그는 일본 최고의 젠틀맨'이라는 식으로 치켜세우는 문장까지 있기도 하다.

결국 맥아더 사령부의 황족 전범재판 불기소 방침에 의해 전쟁에 대한 어떤 책임도 지지는 않았지만, 대신 국가 운영에 관한 모든 권한 박탈과 전 재산 몰수 등의 조치를 받았고 '일본의 상징적인 국가통합의 상징' 지위만 남게 된다.[13] 일본 헌법학계에서는 대체로 상징덴노제라 하여 현실적으로 일본 덴노가 국가원수로서의 특징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해도, 국정에 관한 권한이 없고 국가원수로서의 덴노의 지위에 대한 규정이 없으며 그저 일본국 헌법 제4조에 '국가통합의 상징'이라고만 명시되어 있으므로 덴노를 국가원수로 보지 않는다. 일본 역사에서 덴노는 오랫동안 허수아비에 불과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유신 이전으로 원상 복귀된 셈이다.

패전 직후 일본 국민들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무조건 항복으로 일본인 전멸을 막은 평화주의자'로 인식되고 있었다. 덴노는 1945년 8월까지 일반인은 절대로 볼 수 없는 현인신이었기 때문에 그냥 존재감이 없었다. 실제로 19~20세기의 각국 황제나 국왕이나 대통령 등과 달리 덴노는 언론에 거의 노출되지 않았다.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던 신이 갑자기 '인간 선언'을 하며 전쟁을 중지시키고 평화적인 관계를 회복했다는 사실만이 일본 국민에게 보여진 현상이기 때문에 이 이벤트는 덴노에게 인간을 위해 지상으로 내려와 대신 희생한 신과 같은 이미지를 부여했고 결국 덴노는 실권과 재산을 잃은 대신 중대한 상징성을 획득해버렸다.[14] 실제로 히로히토가 GHQ의 전후 수습 작업에 협조하면서 군부에 의해 경직된 사회에서 살다가 전쟁까지 겪고 무기력해져버린 국민들을 다시 일으켜세우는 일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미국 역시 히로히토를 살려둔 효과가 나타나자 만족스러워했다.

그러나 히로히토가 죗값을 치르지 않고 여전히 황위를 지키고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은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을 언급하며 비판했고, 히로히토의 평화적 상징성을 지켜야 했던 GHQ와 일본의 몇몇 보수파 정치인들은 히로히토를 두둔했으며, 심지어 여전히 히로히토를 숭배하던 극우파들은 히로히토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히로히토가 사망하자 일본 내에서는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을 따지는 움직임이 늘어났고, 수많은 지식인들과 학자들에 의해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을 증명하는 자료들이 계속 공개되었다. 결국 일본 내에서도 히로히토를 평화주의자로 보는 경향은 점점 약해지고, '히로히토에게도 책임이 있다' 혹은 '히로히토의 전쟁 관여에 대한 좀더 심도있는 조사를 통하여 국민들이 모든 진실을 알아차릴 필요가 있다' 등의 의견이 늘어났다. 그리고 이러한 재평가의 결과 덕분인지 2000년에는 도쿄에서 열린 순수 민간 단체의 사설 법정에서 결국 히로히토에게 유죄가 선고되었다. 가장 최근에 행한 설문 조사에서도 역시 일본 국민 과반수가 '쇼와 덴노에게도 전쟁 책임이 있다'고 인식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15]

3.2 꼭두각시였는가?

상술했듯이 꼭두각시였다는 설도 존재한다. 꼭두각시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내세우는 근거는 분명 히로히토는 전쟁을 수차례 반대했음에도 도조 히데키는 전쟁 준비를 멈추지 않으며 히로히토를 계속 설득했다는 점, 그리고 전쟁을 도조가 주도적으로 이끄는 과정에서 히로히토가 도조에게 반감을 상당히 품었고 의견 충돌도 있었으나 결국 바뀐건 딱히 없었다는 점 등이 있는데, 사실 이러한 근거들로 도출해낼 수 있는 결론은 '도조가 정말 엄청나게 전쟁에 미친놈이었다'에 가깝지, 히로히토가 도조의 꼭두각시였다고 보긴 힘들다.

어쨌든 전쟁의 주도권은 도조에게 있었고, 도조가 워낙 막 나가다보니 히로히토와도 그리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고는 하나 어쨌든 국가원수로서의 권한은 도조가 아닌 히로히토에게 있었으므로 히로히토는 전쟁을 멈출 힘이 없었던 게 아니라 이미 진행중인 전쟁을 군부와의 전면적인 충돌을 각오하면서 멈출 생각이 딱히 없었던 것이라고 보는게 더 그럴듯하다. 도조 조차도 히로히토와 의견 충돌이 있다고 해서 대놓고 히로히토를 쌩까는 짓을 저지르진 않았으니 말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도조와 히로히토의 관계는 실권자와 꼭두각시의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대립 관계였다고 보는게 더 가깝다. 도조 히데키 항목을 참조하면 왜 역사학자들이 히로히토가 아닌 도조를 히틀러, 무솔리니와 동급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은지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도조야말로 일본 제국의 히틀러 같은 존재였으며, 전범으로서의 죄가 누구보다도 무겁다 = 히로히토는 무고한 꼭두각시일 뿐이었다 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자.

요약하자면 일본 제국의 전범 중에서 가장 죄가 무거운 인물은 전쟁을 일으키고 주도적으로 이끈 도조가 맞지만, 국가원수로서 전쟁을 허가하고 방관한 히로히토 역시 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이것은 히로히토 본인이 직접 인정한 사실이다).

4 죽음

NHK에서 히로히토 덴노 사망 2분후에 방송한 내용. 궁내청장이 사망 전인 오전 4시의 덴노 상태를 발표하는 내용과 임시뉴스.

NHK에서 히로히토 덴노가 사망한 지 1시간이 지난 후에 방송한 내용. 궁내청장이 히로히토 덴노가 사망한 것을 발표한 내용과 관련 임시뉴스. 덴노가 사망한 것을 알릴 때는 "천황폐하 붕어"(天皇陛下 崩御). 위 2개의 동영상에서 나오는 궁내청 장관은 후지모리 쇼이치.


히로히토 죽었을 때 당시 일본 국민 들의 반응인데, 대체 노인층은 아주 슬퍼하는 분위기지만, 젊은층이나 중장년층들은 그럭저럭 같은 반응인거 같다. 즉 제각각이라는 거....

히로히토 덴노 사망 당일과 헤이세이 시대로 넘어가기 전날부터 나온 MBC 뉴스데스크 관련보도. 당시 관방장관인 오부치 게이조가 헤이세이 연호를 처음으로 공개하는 장면도 나온다. 당시 한국과 일본의 방송 화질 차이를 느낄 수 있다[16]

심지어 1988년 가을부터 히로히토 덴노가 위독해지자 일본의 모든 행사와 콘서트, 총리의 해외일정이 취소되고 전 일본이 숙연해져야 한다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 해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한 세이부 라이온스는 3년 연속 우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축하연 없이 조용하게 묻혔다. 안습 또한 광고계에서는 '건강하세요', '멋진 인생', '드디어 그날이 온다' 등의 멘트가 사라졌다. 역시 덴노의 심기를 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언론에서는 이 분위기를 선도하여 모든 기사를 황실의 동향파악에 집중하고 덴노가 매일 어느 정도의 맥박을 유지하는지까지 일일히 기사화했다.

1988년 9월 21일자 영국황색언론 더 선에는 악마지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일본 전역은 자숙이라는 명분으로 엄숙한 분위기를 유지했으며, 연일 천여 명의 사람들(대부분 노년층)이 덴노가 머무는 도쿄 황거에 몰려들었다.

하지만 정작 이 위독 상태가 해를 넘겨서 오래 끌자, 덴노의 사망 당일에는 일본에서는 일부 극우 노친네들이 황거 앞에서 울어제낀 것을 제외하고는 차분했다. 오히려 정규방송이 안 나온다고TV 도쿄 빼고 방송국마다 전화통에 불이 나도록 항의 전화가 빗발칠 정도. 정규방송이 빠지고 추모방송이 주구장창 나오다보니 생긴 일인데, 당연히 재미있을 리가 없으니.(…) 그래서인지 비디오 가게의 매출이 상승했다고. 비디오 가게 주인: "아싸 개이득"

이 시기의 웃긴 일화 하나. 언제 쇼와 덴노가 죽는가 가장 빨리 알아내기 위해 황거 근처에서 거의 노숙을 하던 한 기자가 있었는데, 그 기간이 길어지면서 그야말로 노숙자 몰골이 되었다. 그런 꼴을 한 기자 옆을 지나던 한 어린이가 옆에 있던 어머니에게 "저 아저씨는 뭐야?"라고 물으니, 어머니가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되는거야."라고 대답하는 걸 들었다고. 지못미.

쇼와는 죽기 직전에 일본의 몇몇 역사학자들과 한국,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17]에게 전쟁 책임에 대한 사과를 남길 것을 요구받았다.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 일제강점기에 대한 사과의 뜻을 밝혔고, 중국의 덩샤오핑을 만나 중일전쟁 당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사과의 뜻을 밝혔으나, 양쪽 다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진 않아서 아는 사람은 많지 않고, 아는 사람들 중에서도 지극히 형식적인 사과 같았다며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꽤 있다.

일단 상술했듯이 패전 후에 자진출두하여 전쟁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으려 했던 것과, 나중에 인터뷰에서 여태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스러웠던 일로 전쟁을 허가했던 것을 꼽은 것, 그리고 야스쿠니 신사에 A급 전범들을 합사하는 것을 반대한 것 등을 보면 일단 일본 제국 시절에 대한 죄책감이나 후회는 어느정도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피해국들의 비난과 비판을 피할 수는 없었고, 쇼와 본인 역시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참고로 소설 13계단에 따르면 쇼와가 위독해지자 전 교정기관의 사형 업무가 중지되었던 적이 있다. 쇼와가 사망한 뒤 특별사면이 이뤄질 것을 고려한 결정이었는데, 이 와중 최고재판소에서 사형 여부를 다투던 일부 사형수들은 상고를 취하하여 사형을 확정시켜 버렸다. 최고재판소에서 감형될 가능성보다 특사로 감형될 확률이 높다고 보고 도박수를 던진 것이다. 그 이유는 판결이 확정된 피고인만이 특별사면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18] 결국 특사가 내려지긴 했는데 대상은 생계형 사범 등 애매한 경우만이 해당되었고. 그 결과 사형수들은 스스로 자신의 명을 단축시켜 버리는 비극이 발생했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이건 사실이 아니다. 사형수의 사면은 사실상 전무했고, 감형도 1975년 이후로 전혀 없었으며 사형을 면한 경우는 모두 2심에서 정상참작사유 발생 등을 이유로 무기로 감형된 자들이었다.

그리고, 죽은 시기가 해를 넘기고 겨우 일주일 지난 시점이라, 쇼와 연호를 박은 달력류들이 대거 폐기처분되고 헤이세이 연호가 찍힌 달력 등을 새로 구매하느라 일본 열도에서 종이 낭비가 극심해지고 재정 부담을 여러 곳에 안겨주기도 했다.

한편 쇼와 덴노의 둘째 손자 아야노미야 후미히토 친왕은, 할아버지가 사망한 지 얼마 안 되어 대학 후배 가와시마 키코와의 약혼 발표 기자회견을 했다(이듬해인 1990년에 결혼). 당시 사진을 보면 약혼 발표라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가 온통 검은 옷을 입고 있는데, 상중이었기 때문이다. 상중의 약혼 발표와 곧 이어진 결혼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으나, 황실에 시집와서 잘 적응해 열심히 사는 키코 비의 모습 덕분에 비판 여론이 수그러들었다고 한다.

5 다른 나라와의 관계

5.1 한국과의 관계

한국과는 사실상 악연이 깊을 대로 깊은 관계로 일제강점기의 폭정과 억압통치로 상처와 비극을 그리게 하였고, 일제강점기 말기 때 제2차 세계대전에도 개입하면서 무고한 조선 청년 및 처녀들을 학도병정신대, 일본군 위안부 등으로 징집시키면서 역사적으로 이들에게 생지옥으로 인도한 천하의 개쌍놈이자 대마왕으로 낙인찍혀 악평을 받아왔고 남북한 모두에게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러한 제도를 실시한 원흉은 당시 총독이었던 고이소 구니아키였지만, 쇼와 역시 이를 허가했으니 (피해자들 입장에서는) 원망스러울 수 밖에 없다.

1984년 전두환 대통령이 대한민국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방일(訪日)하여 쇼와를 만난 적이 한 번 있었지만, 정작 쇼와는 역대 덴노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을 방문한 사례나 경험이 없다. 그 이전에 일본의 식민지였던 때도 방한한 사례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이쇼 덴노가 황태자 시기에 방한한 적은 있다. 사실 본인이 방한하고 싶어도 한국 애국단체와 순국선열단체들이 강력히 반발했을 것이기 때문에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와 같이 일제강점기를 겪었던 대만에는 과거에 쇼와가 방문했던 적이 있으며, 타이베이 인근 신베이터우 온천에는 그가 이용했던 탕도 남아 있다.

한편 전두환 대통령과 가진 만찬에서 쇼와는 '양국간 불행한 과거에 깊은 유감을 표하며, 다시는 되풀이 되어선 안 된다.'는 낭독사를 읽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최초로 덴노가 과거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사과한 것이었다. 더 나아가 “지난 6~7세기 일본의 국가 형성기에 귀국의 많은 지도를 받았다.”며 감사의 뜻을 표하기도 하였다.

5.2 미국과의 관계

지금이야 2차 세계대전에서 양국이 서로 치열하게 싸웠던 적대심이 사그라드는 추세이고 특히 중국의 견제를 위해서 미국과 일본이 서로 연합을 하는 구도가 나오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는 미국과 일본은 엄연히 태평양 전쟁을 하며 일본군미군 포로들을 지나치게 학대한 사실이 있어 미국의 중장년층 세대들은 반일감정이 꽤 남아있는 편이다. 일례로 자신이 미 해군 조종사였다가 치치지마 식인 사건의 희생양이 될 뻔했던[19] 조지 H.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히로히토 사망 이후에야 "이제야 겨우 일본을 용서할 마음이 들었다"라는 술회를 했다.

5.3 중국과의 관계

중국은 한국과 달리 일본의 식민 지배를 직접적으로 받지 않았지만, 중일전쟁난징대학살이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으로 인해 중국에게도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최근에도 히로히토를 비난하는 여론은 여전하며, 일본 덴노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음은 물론이다. 일단 지금의 아키히토 덴노는 개념 행보 덕분에 딱히 비난 받지 않는 편이지만 히로히토는 중국의 포털 사이트인 바이두알리바바 그룹 등에서 여전히 비난받는 것은 물론이고, 간혹 도조 히데키를 제치고 히틀러, 무솔리니와 함께 악마로 취급받는 경우까지 있다.

5.4 네덜란드와의 관계

예로부터 네덜란드와 일본은 에도 시대부터 활발한 교류를 하여 양국간의 적대심은 그닥 심하지 않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가 일본군에게 점령당하기도 했고 최근에 네덜란드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까지 밝혀지면서, 네덜란드인에게도(한국이나 중국만큼은 아니지만)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971년 히로히토가 아내 나가코 황후와 함께 네덜란드를 방문하자 격렬한 항의 시위가 있었다. 네덜란드 노병들과 전사자의 유족들이 "히로히토를 전범 재판에 회부해라!!", "히로히토가 죽인 내 아버지를 살려내라!!", "살인마는 네덜란드를 떠나라!!"라는 항의가 빗발쳤고 일장기 소각, 보온병과 돌팔매가 날아들어 수행원들이 거의 죽어나갔다.

5.5 러시아와의 관계

러시아와 일본은 메이지 덴노 시대부터 러일전쟁을 벌여왔고 러일전쟁 과정에서 러시아령이었던 사할린 섬 남부 지역을 일본에게 빼앗기고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본과 싸워 러일전쟁 당시 일본이 빼앗아간 사할린 남부 지역을 다시 차지하고 더 나아가 쿠릴열도까지 일본으로부터 뺏어먹는 등 그렇게 사이가 좋지만은 않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시대때 공산주의 국가였던 소련과 친미국, 자본주의 진영에 속해있던 일본과도 정치적, 이념적으로 대립하고 쿠릴 열도 분쟁으로도 갈등을 빚는 등 쇼와 시대 이전에도 양국은 상당히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게다가 1989년 히로히토가 죽고 아키히토가 새 덴노가 되고 1991년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도 두 나라의 사이는 러일전쟁등 역사적인 원한과 쿠릴열도를 둘러싼 러일간의 영토분쟁으로 여전히 사이가 좋지 않다.

6 기타

근대 이후 대영제국빅토리아 여왕(1819~190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1830~1916)와 함께 80세 이상을 살고 60년 이상을 즉위한 세 군주 가운데 하나. 재위기간은 프란츠 요제프 1세 68년(86세), 빅토리아 여왕 64년(82세), 쇼와 63년(88세). 그런데 사실 이보다 좀 더 앞선 시대에 1명 더 있는데, 청나라고종 건륭제(1711~1799)로, 무려 89세까지 60년(!)을 재위했다. 게다가 이것도 자신이 강희제보다 오래 재위하기 싫어서 자진 퇴위한 것이고, 상황 재위기간을 더하면 64년이다.

이 조건을 충족하는 현존 인물 가운데는 태국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이 있다. 2014년 기준으로 87세에 68년간 재위했다. 조만간 근대 이후 최장수 군주(빌헬름 1세, 만 91세)를 경신할지도 모른다. 엘리자베스 2세 역시 89세로 60년 기록을 넘겼으며 2014년 부로 쇼와보다 장수한 군주가 되었다.

일설에는 1945년 9월 27일, 더글러스 맥아더도쿄에 진주한 지 1달 동안 히로히토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없자 제발이 저린 히로히토가 직접 '출두'해 찍은 사진이 2장이며, 히로히토가 90도로 허리를 꺾어 맥아더에게 굽신거리는 사진이 있으나 일본 측의 방해 공작으로 찾기 힘들어 졌다는 떡밥이 있었다. 맥아더의 회고록이나 당시 함께 있었던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히로히토가 맥아더의 환영 인사에 '감사하다'고 말하며 고개를 숙여 답했다는데, 이 얘기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히로히토가 90도로 허리를 숙여가며 굽신거리는 사진이 찍혔다는 증언은 없었으며, 애초에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맥아더는 히로히토를 엄연히 한 나라의 군주로 대해주며 그에 걸맞는 예의도 갖췄다고 한다. 위에 나와있는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도 사실은 맥아더 특유의 허리 펴기(…) 자세 때문에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의 오해를 불러 일으켰지만, 맥아더의 회고록을 보나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을 보나 맥아더는 분명히 히로히토에게 충분한 예의를 갖췄다.

왜인지는 몰라도 극단적으로 사람과 접촉하는 것을 싫어하여 의회가 열릴 때나 군대를 사열하는 꼭 참가해야만 하는 행사 이외에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을 꺼렸다고 한다. 이봉창 의사가 거사에 실패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게다가 의전 절차에 따라서 어느 누구라도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자신의 신체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고, 이러한 습관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것이 할아버지 메이지 덴노처럼 히로히토 본인의 대인기피증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엄격한 황실 교육의 영향 탓이었는지는 불명이다.

워낙에 귀하게 자란 지라 황태자 시절 영국을 방문했을 때 런던 지하철을 처음으로 타보게 되었는데 이 때 차표를 역무원에게 건네주고 개찰구를 나가야 한다는 것을 몰라서(...) 그냥 차표를 소지한 채로 개찰구를 지나가려다 그가 덴노인지 모르는 역무원이 그를 제지하면서 실랑이가 있었다고 한다. "요즘 버스 요금이 70원인가요?"라는 사람도 있는데 뭐 그리고 이 때 실랑이를 벌이던 차표는 일본으로 가져와서 현재 궁정 기념관에 보관 중이라고 한다. 또 한번은 아돌프 히틀러가 당시에 최고의 차였던 메르세데스 벤츠 770K를 히로히토에게 선물로 주었지만 정작 히로히토는 승차감이 나빠서 별로 벤츠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히로히토는 술과 담배를 전혀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술과 담배가 맛과 냄새가 나쁘다는 것이 이유였다고 한다.[20] 게다가 선천적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서 할아버지인 메이지 덴노와 마찬가지로 걸어다닐 때 발을 질질 끄는 습관이 있었다고 하며, 태어날 때부터 척추가 굽어있었다고 한다. 또한 근시가 심해서 고생을 많이 했고, 안경을 써야만 앞이 보였을 정도로 안경은 필수품으로 가지고 다니면서 생활해야 했다.

[1]
일본 궁내청에선 전후 70주년을 맞이해 쇼와 덴노의 항복 녹음 전체를 전격 공개했다. 심지어는 디지털로 세세하게 복원했다. 아베 신조 정권의 우경화를 반대하는 아키히토 덴노 본인의 의견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7 가족관계

다이쇼 덴노와 데이메이 황후(사다코)의 4남 중 장남으로 출생, 아내 고준황후(나가코)와의 사이에서 2남 5녀를 낳았다.

7.1 자녀들

막내딸 다카코를 제외하고는 모두 건강이 나쁘거나, 아이를 낳지 못하거나, 부부관계가 원만치 못하거나, 일찍 과부가 되는 등 하나같이 불행한 삶을 살았다.

  • 장녀 데루노미야 시게코(照宮成子) 내친왕(1925.12.6-1961.7.23): 방계 황족 히가시쿠니노미야 모리히로(東久邇宮盛厚)[21] 왕과 결혼, 3남 2녀를 낳았다. 다이쇼 덴노가 생전에 본 유일한 손주이기도 하다. 패전 후 평민 신분으로 떨어졌고[22], 만 35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어 히로히토 덴노와 나가코 황후 내외는 큰 충격을 받았다.
  • 차녀 히사노미야 사치코(久宮祐子) 내친왕(1927.9.10-1928.3.8): 병으로 요절. 나가코 황후는 직접 밤을 새워가며 간병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기였던 사치코 공주의 장례는 간소하게 치러졌고, 슬픔에 잠긴 나가코 황후는 한동안 아기와 같은 크기의 베개를 끌어안고 지냈다고 한다.
  • 3녀 다카노미야 카즈코(孝宮和子) 내친왕(1929.9.30-1989.5.26): 옛 화족 다카츠카사 도시미치(鷹司平通)와 결혼. 자녀는 없다. 남편 도시미치의 불륜과 사망으로 과부가 되었고, 강도까지 당했다. 그후 친정인 황실에 돌아와 이세신궁의 제관을 맡아보며 살다가, 아버지 히로히토 덴노가 사망한 지 얼마 안 되어 뒤따르듯 죽었다.
  • 4녀 요리노미야 아츠코(順宮厚子) 내친왕(1931.3.7-): 옛 화족 이케다 다카마사(池田隆政)와 결혼. 자녀는 없다. 오랫동안 병으로 고생했고, 거의 말이 없고 과묵한 성품이라고 한다.
  • 차남 요시노미야 마사히토(義宮正仁) 친왕(1935.11.28-): 어머니 나가코 황후가 고른 옛 화족 가문의 딸 츠가루 하나코(津輕華子)와 결혼하였고, 결혼 후로 히타치노미야(常陸宮)라는 궁호를 받았다.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친왕은 형제들 가운데 유일하게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기도 하다. 자녀는 없다.
  • 5녀 스가노미야 타카코(淸宮貴子) 내친왕(1939.3.2-): 어머니 나가코 황후의 외사촌 남동생인, 옛 화족 시마즈 히사나가(島津久永)와 결혼하여 1남을 낳았다. 히로히토 덴노와 나가코 황후의 딸 5명 중에서 유일하게 행복한 삶을 살아간 인물로, 바로 위의 언니 이케다 아츠코와는 정반대로 활달하고 화려하며 떠들썩한 성품의 소유자라고 한다.

7.2 '악독한 시어머니'였던 어머니와 아내

아내 고준황후(나가코)는 일본 막장 드라마를 현실로 찍었다. 큰아들인 아키히토 황태자가 평민 쇼다 미치코와 결혼하려 할 때, 우익 단체까지 동원해가면서 반대했다. 미치코가 말이 평민이지 닛신(日淸) 제분이라는 대 재벌가의 장녀이며, 외가는 옛 화족 소에지마(副島) 가문이었는데도 말이다.

미치코가 황태자비가 된 후로도, 나가코 황후악독한 시어머니의 교과서가 무엇인지 아주 제대로 보여주었다. 미치코 황후시월드에게 어찌나 시달렸는지 1993년 10월 20일 만 59세 되던 해에 실어증으로 쓰러지기까지 했으며, 나가코 태후는 그 자신이 사망하는 순간인 2000년까지 단 한순간도 빠짐없이 미치코 황후를 괴롭혔다. 고만해 이 미친년들아

아이러니한 것은 나가코 황후 역시 시어머니 사다코 태후에게 시집살이를 당했다는 것이다(...). 가해자가 된 피해자 사다코 태후의 시녀 다케야 츠네코(竹屋津根子)와 나가코 황후의 시녀 다케야 시게코(竹屋志計子)는 친자매였지만, 웃전들의 기싸움으로 인해 서로 대화조차 나누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다이쇼 덴노가 아직 살아있던 시절, 나가코 황태자비시어머니의 앞에서 너무 긴장하여 장갑을 낀 채로 젖은 수건을 짜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 때 사다코 황후는 "너는 무엇을 해도 서투르구나!!"라고 시종들도 있는 앞에서 나가코 황태자비를 꾸짖었다고 한다.[23] 나가코 황태자비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시어머니의 꾸중을 듣고만 있었다고.

한편 고준황후의 아버지 구니노미야 구니히코 왕은 일본 육군 대장으로, 1928년 대만 시찰 도중에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조명하 의사의 의거로 상해를 입어 다음 해에 사망했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쇼와 시대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1. 연호는 헤이세이지만 아직 사망하지 않았으므로 아키히토라고 부르는 게 옳다. 문서 참조.
  2. image.png
  3. Showa.png 이미지 출처는 여기.
  4. 덴노와 황태자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노미야"라는 식의 이름. 차남 이하의 아들들은 성년이 되거나 or 결혼하여 가장이 될 때, 칭호 대신 궁호를 새로 받는다. 딸들은 결혼하면 남편의 성씨를 따른다.
  5. 물론 신화 속에 있는 상상 속의 인물들을 제외하고서 그렇다는 것이다.
  6. 현재 위치는 도쿄도 미나토 구
  7. 한국인 이봉창이 일본 황제를 저격하였으나 불행하게도 맞지 않았다(韓人李奉昌 狙擊日皇 不幸不中). 이 기사가 일제를 자극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이 보도는 1차 상하이 사변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이어진다.
  8. 다만 A급 전범들이 합사된 것에 대해서는 '이웃 국가들에게 크게 실례가 되는 행동이다', '이곳은 국가를 위하여 희생한 이들을 모셔놓는 곳이다. 헌데 저자들이 이곳에 모셔질 자격이 있는가?'라며 지속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고 그 뒤로 다시는 야스쿠니에 접근도 하지 않았다.
  9. 그런데 이때 디즈니가 히로히토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히로히토는 왜인지 손을 피했다고 하며, 이로 인해 디즈니가 당황했다고 한다.
  10. <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 호사카 마사야스 지음, 정선태 옮김, 페이퍼로드
  11. 대표적인 게 미드웨이 해전. 왜냐하면 아무리 군부의 수장이라고는 하나 도조는 엄연히 육군 출신이었기 때문에, 해군 측에서는 도조에게 전시상황을 보고할때 사실과 다르게 보고하거나, 혹은 중요한 내용을 빼놓고 보고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다만 육군 측의 전시상황에 대해서는 히로히토보다도 디테일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12. 하지만 미군의 점령 초기 일본인들은 맥아더를 '외국인 천황'으로 받아들였다. 점령 당시 일본인들은 상당한 양의 선물과 편지를 맥아더에게 보냈고, 1946년 9월부터 1951년 5월까지 연합국 번역통역반(ATIS)에서 44만1161통의 편지와 엽서를 읽고 처리했다는 공식 기록이 남아 있다. 일본 성인 인구의 약 0.75%가 자발적으로 편지와 엽서를 보낸 셈. 거기에는 맥아더에 대한 존경심과 그의 관대함에 대한 감사의 말들로 가득했다. 편지의 발신인은 맥아더 장군의 '신령님 같은 자비'를 찬양하고, 그를 '살아있는 구세주'라 불렀다. 전쟁 관련 책임이 있는 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상관 혹은 천황의 명령 때문이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변명했다. 아오모리 현의 한 노인은 "예전에는 아침저녁으로 천왕 폐하의 초상을 신처럼 모셨습니다만 지금은 맥아더 장군님의 사진을 향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이처럼 맥아더가 천황을 처벌하고 심지어 사형을 시켰다고 한들 당시 일본에서 반발을 일으킬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존 다우어 <패배를 껴안고>최은석 옮김, 민음사 펴냄
  13. 그리고 히로히토와 그의 친형제 일가들을 뺀 나머지 황족들은 모조리 평민으로 떨어졌다(신적강하).
  14. 다만 덴노 일가가 그 상징의 중요성을 잊지 않고 현재도 과거사를 꾸준히 반성하고 있기는 하다. 당장 그 히로히토조차 A급 전범이 야스쿠니 신사에 들어가자 그날부로 신사 참배를 영원히 하지 않았다.
  15. 번역해보자면 책임이 없다는 의견은 17% 책임이 있다83%이다. 이 외에도 자료가 있다면 추가바람
  16. 한국에서 녹화한 영상은 VHS 규격으로 녹화한 것이고 일본에서 녹화한 영상은 베타맥스 규격으로 녹화하였기에 화질 차이가 나는 것이다.
  17. 심지어는 아메리카, 유럽 국가들에 대해서도.
  18. 사면에는 일반사면과 특별사면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일반사면같은 경우, 해당하는 범죄의 종류를 정하고 그 죄를 사면하는 경우이고, 특별사면은 이미 형이 확정된 특정한 범죄인에 대한 사면이기 때문에 형이 확정되지 않은 사람은 무죄추정의 원칙에 의하여 범죄인이 아니게 되므로 사면 대상이 될 수 없다.
  19. 아군 잠수함에 의해 구조되었다. 그리고 포로가 된 동료 조종사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살해당한 후 먹혔다.
  20. 이거에 대해선 자세한 조사가 필요한 게, 맥아더가 GHQ의 수장이 된 후 히로히토와의 만남을 주선하면서 히로히토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는데 거기서 히로히토는 애연가라 써 있었다.
  21. 어머니 나가코 황후의 숙부인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의 장남. 증조할아버지 메이지 덴노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개족보
  22. 신적강하
  23. 장갑에 대한 악몽은 며느리 미치코 황후와 손자며느리 키코 비에게도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