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 멜버른 올림픽

역대 하계올림픽
(Citius, Altius, Fort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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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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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최날짜 : 1956년 11월 22일 ~ 12월 8일 (승마 경기는 동년 6월 10일 ~ 6월 17일)
개최장소 : 호주 멜버른, 스웨덴 스톡홀름(승마 경기만, 자세한 사항은 내용 참조)

사상 최초로 남반구에서 열렸던 올림픽으로, 남반구였기 때문에 상당히 늦은 날짜에 올림픽을 개최하였다.라기 보다는 계절을 생각하면 이게 당연한 것 아르헨티나부에노스아이레스를 한 표차로 제치고 올림픽 개최지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

동독서독이 단일팀으로 참가한 최초의 올림픽이었으며[1] 이후 1964 도쿄 올림픽 까지는 계속 단일팀으로 참가했고, 그 이후에는 각각 동독팀과 서독팀으로 나뉘어 참가했다.

인도축구에서 4위를 기록하면서 당시 아시안 게임에서 우승하기도 했을 정도인 아시아 최강급 축구 강호의 저력을 증명했고 아시아 나라 사상 처음으로 구기종목 4강에 드는 쾌거를 보여줬다.

오스트레일리아 총독이 아니라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인 필립 마운트배튼이 여왕을 대신해 개회사를 했다. 폐회식 때 최초로 각국 선수가 어울려서 입장하는 전통이 생겼으며, 이후 올림픽에서도 이 전통을 따르게 된다.

1956년 하계올림픽 유치과정
국가도시1차2차3차4차
호주멜버른14181921
아르헨티나부에노스 아이레스9121320
미국로스엔젤레스545-
미국디트로이트244-
멕시코멕시코시티93--
미국시카고1---
미국미니애폴리스1---
미국필라델피아1---
미국샌프란시스코0---

2 공동개최?

개최된 도시가 두개인 이유는 당시 호주의 검역 시스템이 상당히 엄격했기 때문에 검사를 다 마칠때 쯤이면 겨울이기 때문에... 결국 올림픽이 개최된 해에 먼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승마 경기만 먼저 개최하게 되었다. 전혀 상관없는 두 나라에서 진행되었지만 메인 이벤트는 멜버른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멜버른 올림픽으로 써야 정확하지만, 현재 IOC에서는 멜버른-스톡홀름 대회로 작성이 되어있다. 얼떨결에 공동개최

3 사건 사고

이전 대회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사건들 때문에 빚어진 말썽이 많았다. 영국프랑스수에즈 운하의 영유권 문제로 이집트전쟁을 일으키면서, 전쟁 피해국인 이집트와 이집트의 입장을 지지한 캄보디아가 불참했다. 중국중화민국이 '포르모사(formosa, 대만의 포르투갈어 명칭)'라는 이름으로 참가하는 것에 항의해 참가를 취소했다. 대회 직전에는 소련헝가리의 인민 봉기를 무력 진압한 것에 항의해 스페인네덜란드, 스위스가 불참했다. 다만 이 세 국가는 봉기 전에 개최된 승마 경기에는 참가했기 때문에, 참가국 등록은 되어 있다. 그런데 정작 헝가리와 소련은 모두 참가했다. 뭥미?

다만 헝가리는 소련군이 봉기 진압을 이유로 국토를 들쑤셔서 난장판이 돼있던 전시 상황이나 마찬가지였고, 이 때문에 전체 선수단이 조직적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각 종목 선수들이 각자 알아서 뿔뿔이 흩어져 입국해야 했다. 당연히 경기 용품도 전혀 준비가 안돼있었기 때문에, 대회 조직위원회와 타국 선수단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경기를 치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일부 헝가리 선수들이 여전히 소련의 무력 개입에 항의하는 뜻으로 선수촌에 게양되어 있던 헝가리 인민공화국 깃발을 내리고 공산당 문장이 없는 '자유 헝가리'의 깃발을 내걸어 문제가 되었고, 소련과 헝가리가 맞붙게된 수구 준결승전은 아예 혈전이라고 불릴 정도로 엄청나게 과격한 경기가 되었다.

실제로 경기 내내 두 팀은 서로에게 욕설과 폭력을 알게 모르게 가했고, 심지어 헝가리 선수였던 자도르 에르빈은 소련의 발렌틴 프로코포프가 휘두른 주먹에 얼굴을 정통으로 맞아 피를 철철 흘리며 교체되었다. 관중들도 소련팀에게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는 경기장에 난입해 소련 선수들을 공격하려고 할 정도로 경기 분위기가 개막장이 되었고, 경찰이 출동해 풀을 에워싼 가운데 경기가 속행되었다. 결국 헝가리가 승리를 거두었고, 이어 유고슬라비아와 가진 결승전에서도 이겨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4 한국팀

권투 밴텀급에서 송순천이 은메달을 받았는데, 한국팀의 첫 올림픽 은메달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결승에서 억울한 판정으로 인해 준우승에 머물렀고, 그 때문인지 송 선수도 역사상 첫 은메달을 목에 걸었음에도 시상식 때 다소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한국만 이렇게 주장하는 게 아니라 압도적인 경기를 벌였기에 당시 관중들도 저 듣보잡 아시아 선수가 잘하네, 이겼군...이렇게 여겼는데 난데없이 독일의 볼프강 베렌트[2]가 판정승을 거두자 야유를 보냈고 심지어 의자를 링에 집어던지며 화를 내는 사람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서독 언론도 구역질나는 금메달, 억울한 아시아 선수의 슬픔과 은메달이라고 보도했을 정도였으니... 또한 역도에서 김창희가 동메달을 추가로 목에 걸었다.

한국 레슬링 사상 최초로 이상균이 자유형 밴텀급에서 4위를 기록했다. 메달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언급하는 이유는 손가락이 일곱 개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왼손 엄지손가락을 포함한 세 개의 손가락을 잃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올림픽에 출전하여 4위까지 오른 것이다. 레슬링에서 공격을 하려면 상대를 붙잡아야 하고 붙잡는 손의 손가락이 온전히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게 얼마나 대단한 업적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 이전 대회에서는 서독만 단독으로 독일 팀을 구성해 참가했다.
  2. 이 선수는 동독 출신이며, 독일 통일 전 동독에서는 자국의 올림픽 최초의 금메달리스트로 예우했다. 한국에서 손기정을 대한 것과 비슷했는데, 손기정도 공식 기록은 일본으로 나와 있지만 베렌트 역시 동, 서독 단일 팀이기 때문에 공식 기록에는 동독이 아닌 독일로 나온다. 동독인들은 나름 억울하게 생각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