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LKZ-TV

대한민국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이자 최초의 상업방송국. 1956년에 개국했다가 1961년국영 서울텔레비전방송국(KBS-TV)에 채널 9번을 회수함으로써 폐국됐다.

1 개요

한국RCA(KORCAD)에서 만든 방송사다. 텔레비전 방송은 NTSC식 방식을 채택했고, 세계에서는 15번째, 아시아에서 4번째로 개국했다. 서울을 가시청권으로 한 이 방송은 처음부터 경영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1957년 5월에 한국일보 사주에게 양도되어 DBS로 개편하고 미국식 상업방송에 충실한 종합편성을 했다. 그러나 1959년 2월 화재로 시설이 완전 소실되자 AFKN-TV의 도움을 받아 겨우 방송을 하다가 결국 1961년 개국하는 KBS-TV에 채널 9와 제작 요원들을 대부분 넘겨주고 문을 닫는다.

HLKZ-TV의 약사(略史)는 다음과 같다.

  • 1956년 5월 12일 한미 합작으로 설립, 개국식과 동시에 시험방송을 하였으며, 호출부호 HLKZ-TV, 영상 출력 100W, 채널 9로 방송을 시작하였다. 이는 세계에서 15번째의 TV 방송국이었으며 아시아에서는 일본, 태국, 필리핀에 이어 4번째였다. 이날 첫 TV광고는 영창산업의 '깨지지 않는 유니버샬 레코드'였다.
  • 1957년 5월 12일 운영난으로 5월 한국일보 산하의 대한방송주식회사(DBC)가 운영권을 인수하였다.
  • 1959년 2월 2일 새벽에 원인을 모를 화재로 사옥 내의 모든 방송 장비가 소실되었다. 이로 인해 방송이 중단되었다.[1]
  • 1959년 3월 1일 미군방송인 AFKN-TVUSIS의 지원으로, 매일밤 30분씩 AFKN-TV의 채널을 통해 방송이 송출되었다.
  • 1961년 10월 15일 한국 TV방송의 최초라는 명예만 지닌 채 방송을 중단하여 채널 9는 국영 서울텔레비전방송국(KBS-TV)으로 회수 조치되었다. 옛 HLKZ-TV 직원들은 그 대부분이 1961년 12월 31일에 개국한 국영 KBS-TV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인 텔레비전 시대 개막의 발판을 마련했고, 일부는 한국방송공사를 거쳐 민간 텔레비전 방송국인 동양텔레비전(TBC-TV,1964년 개국)이나 MBC-TV(1969년 개국된 문화방송 텔레비전)의 창설에 참여하기도 했다.

2 역사

2.1 개국 배경

한국인 앞에 최초로 TV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54년 초였다. 카메라가 잡은 시내 풍경을 TV 수상기를 통해 보여주었다곤 하지만, 당시엔 ‘진열대’에 디스플레이된 ‘전시품’ 수준에 그쳤을 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1956년 들어 경성방송국의 방송기술자였던 황태영이 주도하여 HLKZ-TV가 개국했다. 황태영은 경성방송국의 방송기술자였으나, 단파방송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이리방송국 기술과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후 통신기기 제작업을 운영하는 한편 미국 RCA 한국 총대리점도 경영하게 되었다(유병은, 1988).

한국방송이 한국 전쟁과 1·4 후퇴 때 부산에서의 피난생활을 끝내고 서울로 환도해 방송 시설의 복구와 방송 장비 현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황태영은 RCA 제품인 우수 방송 장비의 납품업자로 활약한 바 있었다. 황태영은 1954년 공보처의 의뢰를 받고 KBS의 기자재를 도입하러 미국에 갔다가 뉴욕의 한 호텔에서 TV를 처음 접했다. 그는 ‘TV의 마력’에 빠졌고, 한국에도 TV 방송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황태영은 RCA 사장과의 담판을 통해 RCA로부터 받을 예정이었던 커미션을 현금 대신 TV 기자재로 받아 HLKZ-TV를 설립했던 것이다. 이에 자신이 RCA 본사로부터 받을 수수료를 담보로 한국에 TV 방송국을 세울 방송 장비를 외상으로 달라고 RCA 사장에게 건의했다. RCA 사장은 TV 방송 장비를 팔면 TV 수상기의 판로도 자연히 개척하게 되는 일거양득의 재미를 보게 될 것이라고 판단해 TV 방송국 건설용 장비를 외상으로 주고 기술도 제공하기로 승낙했다. 이렇게 1955년 봄, 종로네거리 동일빌딩 RCA 한국 총대리점 쇼윈도는 24인치 대형 흑백 TV 수상기가 첫선을 보였다(유병은, 1988).

황태영 개인의 호기심과 집념에 의해 별다른 준비 없이 초스피드로 개국하다보니 HLKZ-TV는 개국부터 순탄치 않았다. 개국식을 거행하는 날까지도 TV 방송국 허가서가 교부되지 않았고, 결국 개국식 시작 직전에서야 교부되었을 만큼 이른바 ‘날림 개국’의 징후가 농후했다[2](유병은, 1998). 하지만 그런 날림 개국에도 불구하고 HLKZ-TV는 개국식 때 세종로 네거리를 비롯해 서울역, 파고다공원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공공장소에 30여 대의 대형 수상기를 설치해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모으는 데 성공했다.

2.2 개국

한국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은 1956년 5월 12일 선보인 KORCAD(Korean RCA Distributor)의 HLKZ-TV다. 이 텔레비전 방송은 NTSC식 방식(National Television System Committee method)을 택했으며, 세계에서는 15번째이며, 아시아에서 4번째로 개국한 것이다. 이 방송사는 속칭 '종로방송국'으로 불렸다.

영상출력 0.1㎾, 채널 9번이었다. 스튜디오는 50평짜리 단 1개였으며, RCA제(製) '이미지 · 올시콘' 카메라 2대, '비디콘' 카메라 1대, 슬라이드 영사기와 16mm영사기 각각 1대, 송신시설이 있었다. 실내조명은 40W 형광등 250개와 백열구 500W, 1000W 대형 전구 총 30개였으며, 동일빌딩 옥상에 높이 30미터의 TV 송신 안테나를 세웠다.

1956년 6월 1일부터 정규방송이 시작되었다. 격일 방송으로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2시간씩 방송되었다. 11월 1일부터 금요일만 빼고 매일 2시간씩 방송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시청시간대는 프라임 타임인 저녁 8시에서 10시까지였다. 하지만 TV 방송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노정팔, 1995).

HLKZ-TV의 가시청 거리는 반경 30킬로미터밖에 안 되었다. 개국을 앞두고 가장 큰 고민거리는 TV 수상기를 수입해 팔아야 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TV 수상기 사치품으로 분류, 180%의 높은 통관세를 부과한 고가 상품으로 서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이 될 수밖에 없었다. 24인치의 가장 큰 수상기는 47만 환, 21인치는 43만 환, 17인치는 39만 환, 14인치가 34만 환, 가장 작은 8.5인치가 19만 환이었는데, 당시 쌀 한 가마니에 18,000환 정도했으니 당시로서는 상당히 고가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서울 시내에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 즉 사직공원, 파고다공원, 명동 입구, 서울역광장, 광화문네거리, 동대문운동장 등 총 20여 곳에 24인치 대형 TV 수상기를 설치해 활동사진을 겸한 무료 방송을 보여 주었다(유병은, 1988).

당시 TV는 오늘날과는 달리 공용매체였다. 따라서 이른바 시청률 계산도 비교적 간편했다. 당시 시청률 조사는 시내 주요 번화가 40여 개 지점에 수상기를 설치한 후, 여기 모여드는 군중의 규모를 보고 가늠하는 수준이었다(강태영·윤태진, 2002). 한국 최초의 텔레비전 드라마 PD로 개국을 지휘한 최창봉은 “매일 밤 프로그램을 연출하는 도중에도 부조정실 창 너머로 넘겨다보이는 종각 옆 수상기 앞에 모여든 시민들의 머릿수를 헤아리며 많이 모였을 땐 신나게, 적게 모였을 땐 맥이 풀린 채 방송을 진행했다.”라고 말하며 당시 TV방송의 환경을 이야기했다.

2.2.1 개국식

HLKZ-TV는 1956년 5월 12일 저녁, 아악(雅樂)[3]인 '만파정식지곡(萬波停息之曲)'[4]으로 개국식을 치렀다. 미술담당인 민병욱이 밤새 만든 궁전 뜰 모양의 세트에서 전통복장을 한 연주단이 '만파정식지곡'을 연주했다. 만파정식지곡에 이어서 민속무용단의 승무가 방송되었고, 뒤를 이어 박시춘이 지휘하는 악단 연주에 맞추어 현인, 남인수, 백설희 등이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저녁 7시 30분부터 9시 30분까지 2시간 동안 한국 최초의 TV방송이 계속되었다.
이날 방송계 통틀어 첫 광고가 나갔는데, 영창피아노의 유니버셜 레코드 광고였고 슬라이드 형식이었다.

2.3 KORCAD-TV의 경영난과 한국일보의 인수

서울을 가시청권으로 한 이 방송은 처음부터 경영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HLKZ-TV는 민영방송으로 주 수입원이 광고가 되어야 했는데, 당시 한국 경제 사정은 매우 열악해 광고에 의존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5]

광고 수입에만 의존하는 순수 민간 상업방송인 HLKZ-TV는 OB맥주, 크라운맥주, 경성전기회사, 청도제약, 수도피아노 등 극히 소수의 광고주에게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막대한 적자에 허덕이다가 1957년 5월 6일 자로 대한방송주식회사 장기영(당시 한국일보 사장)에게 넘겨주게 되어 'DTV'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바뀌면서 KORCAD-TV는 사라지게 되었다.

장기영은 KORCAD를 DBC 대한방송으로 이름을 바꾸고 DBC의 광고를 늘리기 위하여 자매기관인 한국일보 광고국에서 광고를 지원함에 따라 스포츠 경기 중계나 3·1절 혹은 광복절 중계, 시청자 참여 공개 방송 등도 하게 되어 방송국의 기틀이 잡히게 됐다.

3 편성

개국 당시 편성은 매일 저녁 8시에서 10시까지 2시간 방송으로 출발했으며, 두 달 후인 7월부터는 평일 3~4시간, 주말 5시간으로 확장되었다. 뉴스, 어린이 프로그램, 주부 시간, 교양 강좌, 스포츠, 퀴즈, 공개 오락쇼, 드라마 등이 당시에 편성된 프로그램들이다. 뉴스는 통신을 받아 아나운서가 읽어 주는 식이었으며, 모든 프로그램은 부문을 막론하고 생방송으로 진행되었으며, 광고 역시 생CM이었다(오명환, 1995).

KORCAD의 편성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박기성)

  • 첫째, 미국식 상업방송의 편성을 답습했다. 이것은 광고주로부터 재원을 확보하려는 미국 상업 TV의 편성 형태를 도입한 결과다.
  • 둘째, 법적 규제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편성이 이뤄졌다.[6]
  • 셋째, 프로그램은 자체 제작보다 외부 의존도가 높았다. 특히 뉴스, 영화 부문은 공보처, RCA, 주한미국공보원(USIS : 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 제공이 주류를 이루었다. 극영화는 국내 영화 작품에 의존했다.[7]
  • 넷째, 교육방송 프로그램을 제작 방송했다. 미국식 상업 TV방송의 비판에 대한 절충 보완을 시도한 것이다. 과목별 편성이 이뤄졌고 학과 프로그램이나 또는 수용자(학생층) 참여 프로그램이 많았다.
  • 다섯째, 교양 프로그램이 강화된 점이다. TV 매체가 갖는 신기성(神奇性)을 주지시키고자 했다.
  • 일곱째, 수용자 대상은 거의 상류층에 초점을 맞춰 형성했다. 당시 TV 수상기 자체가 희귀품, 사치품이었고 경제적 여유가 없는 서민에게는 접촉 기회가 적었다.
  • 여덟째, 편성과 운행 방법이 유동적이었다. 시청자 취향을 파악하지 못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 아홉째, 방송물도 자체 제작보다 기성품 또는 외부 조달품이 주종을 이뤘다.

1957년 5월에 한국일보 사주 장기영에게 양도되여 DBS(대한방송주식회사)로 개편할 즈음 프로그램 편성에도 일대 변화가 있었다.(오명환)

  • ① 외국, 외부 프로그램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자체 제작에 역점을 두었다.
  • ② 학생 대상의 학교방송과 문화영화가 주종을 이루던 낮방송을 폐지해 프라임타임에 집약적 방송을 행했다.
  • 한국일보와의 협력으로 보도 기능을 강화했다.
  • ④ 현장중계를 강화했다.
  • ⑤ 1956~1957년에 약 3000대에 불과한 TV수상기 보급이 1958년 5월 3500대, 10월 7000대로 늘어남에 따라 후일 KBS-TV 편성, 제작에 기초를 마련했다.

4 AFKN과 HLKZ-TV

AFKN(American Forces Korean Network)의 텔레비전 방송은 이미 1년 전에 개국했지만 경험이 많지 않았던 HLKZ-TV의 제작진에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으며 많은 연구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한국방송공사, 1987). 게다가 AFKN의 대형 스튜디오 신설과 자체 생방송 제작이 이루어진 지 한 달이 지나 일어난 HLKZ-TV 방송국 화재는 한국의 텔레비전 초창기 역사에서 AFKN의 역할을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

AFKN은 불의의 화재로 방송 시설을 모두 잃어버린 HLKZ-TV 제작진에게 비록 하루에 30분간씩이나마 임시 방송을 할 수 있도록 채널과 스튜디오를 대여해 주었다. 만약 AFKN 생방송 체제가 이뤄지지 않았다면 HLKZ-TV는 화재와 동시에 그 방송의 명맥마저 영영 끊겨 버리는 상황에 직면할 뻔했다. 그런 점에서 AFKN은 주한미군들을 위한 방송 제작·송출이라는 본래의 목적에 추가하여 대한민국의 TV방송 초창기에 발전을 돕고, TV 수상기 보급에도 적지 않은 영향과 도움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한국방송공사, 1987).

5 HLKZ와 드라마

한국 최초의 TV 드라마 <천국의 문>

TV 수상기 보급 못지 않게 HLKZ-TV의 골머리를 썩힌 것은 프로그램 제작 여건이었다. 방송 장비가 제대로 구축되어 있을 리 만무했고, 스튜디오 역시 조악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약 40여 평에 불과했던 당시 스튜디오에서 제작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과연 얼마나 되었겠는가? 프로그램 제작 인력 역시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라디오와 TV는 문법이 달라 라디오 제작 인력이 TV 제작에 투입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TV 프로그램 제작 노하우 역시 일천하긴 마찬가지였다. 텔레비전 방송 제작을 위한 지침서도 미국에서 가져 온 몇 권이 전부였다. 최창봉은 이렇게 말한다. “당시 우리나라엔 TV 연출을 어떻게 하느냐를 제대로 아는 사람조차 드물었어요. 동료들과 '텔레비전 프로덕션'이라는 외국책을 공동으로 번역해가면서 연출이 뭔지 공부하던 시기였죠”.

그런 악조건속에서 매일 2시간씩(7시~9시) 생방송을 내보냈다는 게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런 상황에서도 TV 드라마 제작의 기운이 움트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마 드라마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장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 제작을 둘러싸고 방송국 내에서부터 찬반이 갈리는 등 적잖은 내홍을 겪어야 했다. 드라마 제작이 가져 올 적잖은 긍정적 효과에도 불구하고 당시 처지에서 드라마를 제작하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전 KBS 제작위원 이기하(1994)는 이렇게 말한다.

“드라마만은 시간이 흘러가도 편성에서 빠져 있어 항상 마음이 불편하였다. 편성할 때마다 애원도, 싸움도, 그리고 아양도 부려봤지만 매번 허사였다. 그럴수록 방송직원들의 대다수는 꼭 드라마를 방송해야 한다고 우겨왔다. 그럴 때마다 아직도 방송하기에 어려움이 많으니 뒷날로 하자는 대답뿐이어서 드라마를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려니 생각하며 지나갔다. 하긴 좁은 스튜디오 안에 집을 짓고 방을 만들어낼 재간도 없을 뿐만 아니라 연출자 자신이 드라마를 연출한 능력 또한 없던 터이기도 했다. 그저 연극하던 사람들이 모여 라디오적 특성에 맞춰 카메라에 담아냈을 뿐인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보려고 모여들었다.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 거리에 걸린 몇 대의 수상기, 그 조그마한 통 속에서 사람이 나와 떠드는 것 자체가 구경거리일 수 밖에 더 있었겠는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의지가 컸던 것일까? 이로부터 몇 개월 후, 드라마 제작에 시동이 걸렸고, 한국 최초의 TV 드라마 <천국의 문>이 세상에 선을 보였다. 이 세상에서 도둑질을 하던 사람들이 죽어 저 세상에서 만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주요 줄거리로, 출연자가 달랑 2명에 불과한 15분짜리 드라마였다. 이기하는 <천국의 문>이 생방송으로 방영되던 날의 풍경과 감회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방송 날이 왔다. 그 날은 다른 프로그램은 눈밖이다. 스탭 전부가 열심히 자기 일을 찾아 연출자의 지시에 따랐다. 세트는 조각지 하나하나에 온 정성을 다해 그림을 그려 마련했고 카메라는 종일의 연습과 리허설을 보며 자기가 찾아야 할 그림을 위해 스튜디오 바닥에 블로킹 선을 그었다. 마이크는 카메라를 피해 움직일 장소를 찾았다. …나는 귀로 연출자의 제시를 받고, 방송을 진행하며 양 다리에 카메라 케이블을 감아 카메라가 이동하는 방향으로 케이블을 당겨 주어야 하는 1인 3역의 작업을 해야 했다. 모니터는 볼 수도 없었고 볼륨을 조절할 수도 없었다. 큐사인을 받으면 시작이 됐는데도 방송이 끝난 시간은 기억에 없다. 사람들이 눈 앞에 스쳐가는데, 어떤 이는 흥분했고 어떤 이는 웃음을 담았다.”

<천국의 문>은 TV 드라마 최초로 특수효과가 사용된 작품이기도 했다. 오명환(1994)은 “<천국의 문>이 선택된 것은 그나마 내용이 한국 정서에 들어맞았고 등장인물과 장면이 적어서 연출상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예술성을 지닌 작품 때문이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시 두 주인공의 천국 장면 등장장면에서 구름장면을 넣어 첨단(?)의 효과를 냈는데 이것이 TV 드라마의 최초의 특수효과(트릭)장면으로 기록된다. 최창봉은 연출계획을 짜는 데 무려 두 달 남짓 걸렸다고 한다. 대본을 계속 고치는 과정에서 종이를 이리저리 오려붙이기를 수십 번 계속하였는데 오늘날 연출가들의 최종 콘티를 둘러싼 고독한 연출작업의 첫 표본이 되었다.”

1956년 9월엔 <사형수>란 드라마도 방영됐다. 하지만 당시 드라마 제작 환경을 말해주듯 드라마 제작은 악전고투의 연속이었으며 <사형수>역시 조악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당시 TV드라마는 연극 작품을 TV카메라로 중계했다고 생각하면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실제로 <사형수>는 동인제 극단 ‘제작극회’가 무대에 올린 작품으로 TV카메라와 콘티만 곁들여 전파를 탔다. 세트도 사형수가 갇혀 있는 감방 하나면 족했다. 의상도 별게 없다. 감옥의 간수는 방송국 수위의 근무복을 빌려 입었고 신부는 양복에 흰 목띠만 두르면 그만이었다. 주인공인 죄수도 잠옷에 죄수번호를 그려 출연했다. 언감생심 에어컨 장치는 꿈도 못 꿔 스태프들은 섭씨 40℃를 오르내리는 스튜디오에서 백열전구 조명과 싸웠고 TV 카메라의 과열을 막기 위해 스튜디오 한 구석에 얼음덩이를 갖다 놓기도 했다.”

어렵사리 TV 드라마의 시대를 열긴 했지만, HLKZ-TV는 더 이상 TV 드라마를 제작하지 못했다. 1959년 2월 2일, 방송국이 화재로 인해 사라졌기 때문이다.

후담으로 그 때 드라마 촬영이 요즘보다 수십 배는 더 힘들었다(생방송이니까). 작은 실수가 대형사고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한 탤런트는 NG를 내고 그 여파를 감당하기 어렵다며 집으로 도망가버려서 현장에서 갑자기 대역을 찾느라 난리가 난 적도 있다. 마치 야구 경기에서 갑자기 대타를 찾는 것처럼 긴박했던 순간이었다. 대사뿐만 아니라 소품에 대한 관리도 철저해야 했다. 한 탤런트는 드라마에서 전화를 받는 장면을 촬영하면서 사고를 친 일도 있다. 전화기를 미처 준비하지 못했는데 전화벨이 울리자 당황하면서 손가락으로 전화기 모양을 흉내 내 촬영했던 것이다. 그 드라마는 특히 정부에서 반공 드라마로 심혈을 기울여 제작하던 작품이라 NG를 낸 탤런트가 나중에 큰 곤욕을 치렀다는 후문도 있다.

이순재가 이 방송국을 통해 데뷔했다.

6 폐국

그렇게 TV 수상기 보급도 나름 늘어나고[8] 광고도 많아지면서 경영에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이는가 싶었다.

그러나 1959년 2월 3일 오전 1시 방송국 건물 2층에서 난방기에서 불이나서 2~3층 전체를 불태웠다. 원인은 합선. 다행히 방송국이 보험에 들어서 부활(?)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으나 현실은 시궁창. 아무리 광고가 꽤 돼도 아직은 빚이 많은 DBC의 임원들이 그냥 보험금을 빚값는데 쓰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AFKN에서 7시부터 30분동안 임시방송하다가 1961년 10월 15일 DBC사장의 인사와 문화명화 '무궁화 새로히 피네'를 끝으로 방송을 중단했다.
  1. 원인은 전기과열이었는데, 당시 신고를 늦게 한 탓에 모두 소실 되었다. 퓨즈가 직접 탄 것으로 보아 그 옆에 있는 난로에 의해 탄 것으로 추정된다.
  2. 실제로 방송 주무기관인 공보처에서 방송국 설립 허가를 안 내주니까 이승만 대통령에게 영어로(!!) 청원을 해서 통과시켰다(!!). 역시 의지의 한국인
  3. 국악의 클래식 분야라 할 수 있는 정악.
  4. '만파정식지곡'은 '취타(吹打)'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져있다. '취타대'라고 하는 연주단이 걸어가면서 연주하는 것으로 주로 행진곡으로 많이 사용하는 곡이다.
  5. 참고로 당시에 일본이나 프랑스, 소련도 TV가 아직 일반화 되기 이전이었고, 미국은 이제 TV가 막 일반화되었을 시점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상황은...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6. 다만, 여기서 생각해야할 것이, 한국 전쟁이 종전된 지 겨우 3년 뒤에 생긴 방송사인데다가 애초에 대한민국 방송계가 걸음마 단계였던 때였으니 법적인 제반 규정이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7. 보도 부문도 어쩔 수 없는 것이, 그 미국도 1950년대에 들어서야 방송사가 독자적인 뉴스리포팅을 시작하던 단계였다. 여전히 신문사나 취재원(agent)의 도움이 있어야 뉴스를 진행할 수 있었다.
  8. 그래봤자 하루에 약 3~5대 정도 판매되는 정도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불과 10년이 지난 시절이었음을 감안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