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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강영훈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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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7-09T03:42:43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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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년 1월 21일 (토) 13:39에 Maintenance script님의 편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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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1-21T13:39:2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 * [[동명이인/ㄱ]]. 동명의 제4대, 제5대 [[국회의원]]을 찾는다면 [[강영훈(1927)]] 문서로...&lt;br /&gt;
 * [[정치인/목록]], [[대한민국 국군/인물]], [[가톨릭/인물]], [[실향민/대한민국]], [[개종/인물]]&lt;br /&gt;
[include(틀:국내 정치인)]&lt;br /&gt;
&lt;br /&gt;
||||||||||&amp;lt;tablealign=right&amp;gt;&amp;lt;tablewidth=45%&amp;gt;&amp;lt;:&amp;gt; [[역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lt;br /&gt;
||||||||||||||&amp;lt;:&amp;gt;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a/ac/Emblem_of_the_Prime_Minister_of_the_Republic_of_Korea.svg/150px-Emblem_of_the_Prime_Minister_of_the_Republic_of_Korea.svg.png ||&lt;br /&gt;
||&amp;lt;width=30%&amp;gt;&amp;lt;:&amp;gt; 20대 [[이현재(1929)|이현재]] ||&amp;lt;:&amp;gt; {{{+1 ←}}} ||&amp;lt;width=30%&amp;gt;&amp;lt;:&amp;gt; '''21대 강영훈''' ||&amp;lt;:&amp;gt; {{{+1 →}}} ||&amp;lt;width=30%&amp;gt;&amp;lt;:&amp;gt; 22대 [[노재봉]] ||&lt;br /&gt;
http://tv03.search.naver.net/thm?size=120x150&amp;amp;quality=9&amp;amp;q=http://sstatic.naver.net/people/194/200804071558247151.jpg?width=150&lt;br /&gt;
&lt;br /&gt;
http://monthly.chosun.com/upload/1512/1512_326_10.jpg&lt;br /&gt;
젊은 시절 사진&lt;br /&gt;
&lt;br /&gt;
강영훈(姜英勳)&lt;br /&gt;
[[1922년]] [[5월 30일]] ~ [[2016년]] [[5월 10일]][* 실제로는 [[1921년]] 생이나 [[출생신고]]는 1922년에 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목차]&lt;br /&gt;
== 개요 ==&lt;br /&gt;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이다. [[아호]](雅號)는 청농(靑農),  [[종교]]는 원래는 [[불교]]였으나, 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여서 가톨릭이며, [[세례명]]은 요한이다.&lt;br /&gt;
&lt;br /&gt;
1922년 [[평안북도]] [[창성군]]에서 태어났다. 1936년 영변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1943년 [[만주]] 건국대학 경제과를 수료하였다. 1946년 3월 군사영어학교을 졸업했다.&lt;br /&gt;
&lt;br /&gt;
[[8.15 광복]] 후 1949년 [[대한민국 육군]] [[제1보병사단]] 제12연대장을 지냈다. [[6.25 전쟁]] 때는 국방부 관리국 국장, 육군 제3군단 부군단장을 지냈다. &lt;br /&gt;
&lt;br /&gt;
경기도 포천에 있는 [[제6군단]]장 시절 [[4.19 혁명]]을 맞았다. 당시 상부에서 “전차중대를 출동시키라”고 명령내려졌으나 강 전 총리는 “탱크로 학생들을 깔아뭉개버리겠다는 얘기냐”며 단호히 거부했다.&lt;br /&gt;
&lt;br /&gt;
1952년부터 1년간 주한 미국 대사관 부무관을 지냈다.&lt;br /&gt;
&lt;br /&gt;
1960년 제15대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에는 반대하였다. 당시 그는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혁명 지지 시위 동원에 반대하다 ‘반혁명 장성 1호’로 체포되어서, 서대문교도소에 100여 일간 수감되었고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lt;br /&gt;
&lt;br /&gt;
이후 군사정권에 반대하다 투옥된 이한림, 장도영, 김응수 등과 미국 각 지역에 뿔뿔히 유학들 떠난다.1962년 뉴멕시코주립대학에서 공부하고 이듬해인 1963년 서던캘리포니아대(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고, 공산주의전략연구소 연구원으로 채용되었다. 미국에서 한국문제연구소를 설립하였다.&lt;br /&gt;
&lt;br /&gt;
1970년부터 [[박정희]] 정권 지지로 돌아섰다.&lt;br /&gt;
&lt;br /&gt;
1976년말 15년간의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그는 귀국했다. 당초에는 국민대 학장직을 제의받고 왔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다음해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장으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1년 후 외무부 외교안보연구원장으로 자리를 옮긴다&lt;br /&gt;
&lt;br /&gt;
1981년부터 주한 영국 대사 및 주한 아일랜드 대사, 주한 로마 교황청 대사, 외무부 본부 대사를 지냈다.&lt;br /&gt;
&lt;br /&gt;
1988년에는 제13대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부터 2년간 [[국무총리]]를 지냈다. &lt;br /&gt;
&lt;br /&gt;
국무총리에서 퇴임하고 난 뒤, 1991년 제18대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된 이후 7년간 민간의 대북 지원 사업을 주도했다. 또 북한 수재민 돕기(1955년) 등 대북 인도적 지원, 남북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제의(1997년) 등 남북 교류에 큰 업적을 남겼다.&lt;br /&gt;
&lt;br /&gt;
또한 [[성수대교 붕괴사고]](1994년), 서울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1994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1995년) 등 대형 재난 발생시 긴급구호 활동도 전개했다. 이어 사할린 거주 해외 동포 영주 귀국 사업 등 인도주의 발전을 위해 큰 발자취를 남겼다.&lt;br /&gt;
&lt;br /&gt;
1997년 이후 [[세종연구소]] [[이사장]]직을 맡았다. 청렴하고 강직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그는 유엔 환경계획 한국위원회 총재, 인촌상 운영위원회 위원장,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초대 회장 등을 맡아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후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반대 운동에 나서는 등 사회원로로서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저서로는 『한 외교관의 영국이야기』,『소련견제이론』,『한국통일문제』,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그는 총리에서 퇴임한 뒤 자주 대중교통을 이용했다고 한다. 가족들에게 “전직 총리가 버스를 타는 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진정한 민주사회”라고 말했다는 후문이다.&lt;br /&gt;
&lt;br /&gt;
2016년 5월 10일 95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lt;br /&gt;
== 총리 시절 ==&lt;br /&gt;
[[정두언]] 전 새누리당 의원이 국무총리실에 오랫동안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공직사회 비평서를 내서 반향을 일으켰던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 에서 최고의 총리로 꼽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이 책에서 ‘총리의 권한과 기능을 제대로 행사하고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한 사람’으로 강영훈 전 총리를 꼽았으며, 여러 인터뷰에서도 역대 총리 가운데 제대로 권한을 행사해서 자기 역할을 분명히 한 총리로 평가했다.&lt;br /&gt;
&lt;br /&gt;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 역시도 여소야대 정국에서 정부의 행동반경은 크지 못한 상황에서, 노태우 정부가 강영훈 총리와 같은 신망 높은 인물을 중용해서 북방외교를 트고 변화하는 대외통상환경에 대응해서 경제체질을 강화시키는데 성공했다고 평가했다.&lt;br /&gt;
&lt;br /&gt;
국무총리 시절 그는 서울과 수원을 시작으로 제주도와 마라도까지 전국 18곳을 순회하며 ‘국민과의 대화’ 를 가졌다.&lt;br /&gt;
&lt;br /&gt;
특히 1990년 9월 분단 45년 만에 최초로 남북 총리회담을 성사시켜서 남북 화해의 새 장을 열었다. 당시 3차례에 걸친 남북고위급 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남북협력 증진의 실질적인 기초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았다.&lt;br /&gt;
&lt;br /&gt;
http://monthly.chosun.com/upload/1512/1512_326_11.jpg&lt;br /&gt;
강영훈 국무총리가 1990년 12월 11일 저녁 제3차 남북총리회담에 참석한 북측 대표단을 위해 쉐라톤 호텔에서 베푼 만찬회장에서 북한 연형묵 총리와 회담 성공을 기원하는 건배를 하고 있다.&lt;br /&gt;
&lt;br /&gt;
[[파일:/image/001/2016/05/10/PYH2016051010610001300_P2_99_20160510155811.jpg]]&lt;br /&gt;
1990년 10월 18일 남북총리 회담차 [[평양직할시|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회담한 장면. 뒤에 서있는 사람이 북한 연형묵 총리이다.&lt;br /&gt;
&lt;br /&gt;
여담으로 이 당시 국민 감정과 상호 존중을 고려하여 '주석님'으로 부르려 했으나 김일성이 '''총리 각하'''라는 호칭으로 대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주석 각하'''라고 부른 일화가 있다. 다만 이 부분은 신문 지상에서만 보도되었고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0/1839963_13421.html|뉴스데스크]] 등의 매스컴을 통해서는 해당 부분이 생략되었다.&lt;br /&gt;
&lt;br /&gt;
당시 면담에서 김일성이 “우리 민족이 6000만”이라고 하자 “6000만이 아니고 7000만 명입니다”고 오류를 바로잡았다고 한다. 그래서 김일성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는 일화도 있다.&lt;br /&gt;
&lt;br /&gt;
== 여담 ==&lt;br /&gt;
 *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벽창호’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 말은 평안북도 [[벽동군]]과 [[창성군]] 사람 중에서 고집 센 사람을 일컫는 말로, 강 전 총리의 고향이 바로 평북 창성군이다. 압록강과 접한 국경지역으로 교통의 중심지였다. 벽창호의 고향답게 창성군과 벽동군에서 기르는 한우도 예로부터 힘이 좋고 동시에 말 안 듣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회고록 제목에 나온 ‘벽창우’는 여기서 따온 것이다.&lt;br /&gt;
&lt;br /&gt;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동 주택가 골목에 살았다. 1953년 휴전 이후 평생을 이곳에서 살았다. 강남개발 등 부동산 광풍이 몇 차례 휩쓸었어도 꿈쩍 않고 동네를 지켰다. 그래서 ‘부동산의 대가’보다 한 수 위인 ‘부동의 대가’라고 불리기도 했다. 수십년간 찾는 단골 이발소가 있었는데, 이발사가 강 전 총리의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발사의 회고에 따르면 이발사가 강 전 총리에게 더 이상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해서 실랑이를 벌였다는 일화가 있다.&lt;br /&gt;
&lt;br /&gt;
 * [[바티칸]] 대사 시절 바티칸을 찾은 당시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최고위원에게 국정방향에 대해 쓴 소리를 했는데, [[노태우]]가 이때부터 그를 마음속으로 존경하게 돼 후일 총리로 기용했다고 한다.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고 처음에는 민정당 당대표직을 제안받았으나 초선 의원이 대표를 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고사했다. 그랬더니 [[노태우]] [[대통령]]은 [[국무총리]]직을 제안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 [[노태우]] 전 대통령의 [[별명]]인 [[물태우]]에 대해서는 “물은 세상의 근본이니 나쁜 뜻이 아니다&amp;quot;라고 했다. 노태우에 대해서는 전임 대통령과 비교해 유하게 정국을 이끌어서 그런 별명이 붙은 것 같은데 사실은 원칙주의자라고 평가했다. 총리에게 맡긴 일은 일절 간섭하지 않았고, 자신 역시도 언제든지 그만둘 각오로 소신껏 일했다고 회고했다.&lt;br /&gt;
&lt;br /&gt;
 * 총리 재임 시절 북한과의 회담에서 북한 측은 강영훈 총리가 자신들에게 의외로 강경하다고 느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강영훈 총리는 퇴임 후 인터뷰에서 북한은 정상국가 아니라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임 후 한 인터뷰에서 인도적인 대북지원은 최대한 이루어져야한다고 주장했다. &lt;br /&gt;
&lt;br /&gt;
 * 17대 대통령 후보를 지낸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사장]]이 인생의 사표라고 밝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amp;amp;mid=sec&amp;amp;sid1=102&amp;amp;oid=038&amp;amp;aid=0000191321|기사]] .1995년 UNEP 한국위원회의 총재로 활동하였으며, 문국현과 함께  “북한에 나무를 심는 ‘평화의 숲’ 운동을 전개했다.&lt;br /&gt;
[[분류:동명이인]] [[분류:대한민국 국무총리]] [[분류:한국군/군인]] [[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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