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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강우규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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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7-09T03:34:41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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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년 1월 21일 (토) 13:40에 Maintenance script님의 편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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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1-21T13:40:2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파일:nKVWs2H.jpg|align=right]]&lt;br /&gt;
[include(틀:건국훈장 대한민국장)]&lt;br /&gt;
[목차]&lt;br /&gt;
&lt;br /&gt;
{{{+1 姜宇奎}}}&lt;br /&gt;
[[1855년]] [[7월 14일]]～[[1920년]] [[11월 29일]]&lt;br /&gt;
&lt;br /&gt;
== 개요 ==&lt;br /&gt;
[[한국]]의 [[독립운동가]], [[한의사]]. 1920년 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였던 [[사이토 마코토]]가 탑승한 마차에 폭탄을 투척하여 저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여 그 해 66세를 일기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되었다. [[평안남도]] [[덕천군]] 출신. &lt;br /&gt;
&lt;br /&gt;
== 초기 생애 ==&lt;br /&gt;
1855년 7월 14일(음 6월 1일) 평안남도 덕천군 무릉면 제남리에서 가난한 농가의 4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 호는 왈우(曰愚)이다.[* 간혹 일우(日愚)라고 표기되어 있는 곳도 있으나, 왈우가 맞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누님 집에서 성장하였고, 청소년기 친형에게 한학과 한방 의술을 익혀 생활의 방편으로 삼았다.&lt;br /&gt;
&lt;br /&gt;
하지만 전통적 학문으로는 개항 이후 점증하는 사회의 근대화 요구를 실현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점차 개화사상으로 기울어졌고 [[개신교]] [[장로교]]에도 입교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집안 어른들과의 갈등도 생겨 1883년에 [[함경남도]] 홍원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홍원에서 흥원 읍내 남문 앞 중심지에서 한약방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이를 기반으로  읍내에 사립학교와 교회를 세워 신학문을 전파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민족 계몽운동을 전개한다.[* 이는 &amp;quot;우리 집에서도 몇 차례 [[이동휘]] 선생을 모셨다.&amp;quot;고 하는 얘기를 들었다는 손녀의 기억에도 드러나듯이, 당시 관서·관북 지방민들의 존경을 받던 [[이동휘]]의 영향이 컸다.]&lt;br /&gt;
&lt;br /&gt;
== 독립운동 투신 ==&lt;br /&gt;
1910년 8월 [[경술국치]]로 인해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심한다. 1911년 봄 북간도 화룡현 두도구로 망명하였고, 이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순방하면서 박은식·이동휘·계봉우 등 애국지사들과 만나 독립운동 방도를 모색하여 갔다. &lt;br /&gt;
&lt;br /&gt;
1915년 우수리강 대안의 길림성 요하현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북만주에 위치한 이곳은 남만주와 연해주를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였다. 강우규는 이곳에 한인 동포들을 불러모아 새로운 마을을 만들어 신흥동(新興洞)이라고 명명하였다.[*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은 이곳에서 한민족을 새롭게 발흥시키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곳에 광동학교를 세워 청소년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려 노력하였다. &lt;br /&gt;
&lt;br /&gt;
== 투탄의거와 순국 ==&lt;br /&gt;
1919년 전국적인 [[3.1운동]]이 일어나고 강우규 역시 독립에 대한 희망을 갖지만, 세계열강으로부터 민족의 독립을 승인받지 못하고 그해 5월을 넘기며 점차 소강상태에 빠져들자 위기감을 느낀 강우규는 당시 일제가 [[무단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식민정책을 변경하고자 조선총독을 교체하는 것을 보고 새로 임명될 조선총독을 처단하기로 결심한다.&lt;br /&gt;
&lt;br /&gt;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난 러시아 군인으로부터 [[영국]]에서 제조하였다는 수입폭탄을 구입한 다음에 몰래 휴대하여[* 이를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산으로 오는 선편에서 폭탄을 기저귀처럼 다리 사이에 차고 들어왔다고 한다.] 입국한다. &lt;br /&gt;
&lt;br /&gt;
8월 초부터 서울 안국동 김종호에 머물면서 신임 총독의 부임 정보를 탐문하던 강우규는, 신문 보도를 통해 8월 12일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신임 총독에 임명되어 9월 2일 부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신문에 난 사이토의 사진을 오려 가지고 다니면서 그의 얼굴을 익혔다고 한다. 사이토 부임 전인 8월 28일부터 남대문역[* 현재의 [[서울역]]. 참고로 서울역의 이름은 경부선 철도가 개통될 때인 1900년 남대문역으로 출발하여 1923년 경성역이 되었다가 1947년 서울역으로 변경되어 지금에 이른다.] 부근의 여인숙으로 거처를 옮겨 매일같이 역전에 나아가 지형지물을 면밀히 답사ㆍ조사하면서 투탄 위치를 탐색하는 등 주도면밀 하게 거사를 준비하였다.&lt;br /&gt;
&lt;br /&gt;
거사 당일인 9월 2일, 남대문 밖 중국음식점에서 간단히 식사를 한 강우규는 남대문역에서 미리 보아둔 위치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오후 5시 부임식을 마치고 막 관저로 떠나는 사이토의 마차를 향해 폭탄을 투척한다. 그러나 폭탄이 빗나가 뒷 차를 맞히면서, 정무총감인 미즈노와 뉴욕 시장의 딸이었던 해리슨 부인, 그밖에 호위 군경, 취재기자, [[조선총독부]] 관리 등 37명에 중경상을 입혔고 정작 사이토는 옷이 약간 불에 탔을 뿐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한편 사이토는 조선총독 재임 후 1932년 일본 총리대신 자리에 오르지만, 1936년 [[2.26 사건]]으로 파시스트 청년장교들에게 살해되고 만다.][* 이때 [[일본 경찰]]들은 강우규를 체포했다가 '설마 이 노인이...'라는 생각에 풀어줬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여기서 혼비백산하는 군중들 사이로 빠져나온 강우규는 다시금 의거를 계획하나 9월 17일 자신의 [[가회동]] 하숙집에서 순사 [[김태석]]에 의해 붙잡히면서 1920년 2월 25일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사형]]을 언도 받는다.&lt;br /&gt;
&lt;br /&gt;
이후 자신의 폭탄에 휩쓸린 취재기자들에 대해 폭탄의 위력을 몰랐다고 항변한 강우규는 자신의 아들에게 &amp;quot;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amp;quot;라는 말을 남기고서 그해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다.&lt;br /&gt;
﻿ &lt;br /&gt;
한편 강우규는 사형집행 당시 감상이 어떠하냐는 일제 검사의 물음에 &amp;quot;단두대 위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겠는가(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amp;quot;라는 시를 남긴다.&lt;br /&gt;
&lt;br /&gt;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lt;br /&gt;
&lt;br /&gt;
== 서적 등 관련자료 ==&lt;br /&gt;
 *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59333905|강우규의사 평전 - 잊혀진 의열투쟁의 전설]], 박환, 선인, 2010&lt;br /&gt;
 *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91185134277|강우규 평전 - 항일 의열 투쟁의 서막을 연 한의사(1)]], 은예린, 책미래, 2015&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파일:statue.png|width=400height=600]]&lt;br /&gt;
2011년 9월에는 구(舊) [[서울역]] 광장에 강우규 의사 동상이 건립되었다. 이 때문에 강우규 의사가 구 서울역 역사를 배경으로 의거를 했을거라는 생각을 하기 쉽지만, 실제로 강우규 의사의 투탄의거 당시인 1919년 남대문 역사는 건평 15평 수준의 조악한 목재 가건물이었고, 구 서울역사는 의거 이후인 1922년 착공되어 1925년 준공된 건물이다.&lt;br /&gt;
&lt;br /&gt;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umorbest&amp;amp;no=935743&amp;amp;s_no=935743&amp;amp;page=8|참고]]&lt;br /&gt;
&lt;br /&gt;
[[박경리]]의 [[토지(소설)|토지]] 2부에서 등장한다. 의료활동을 했던 행적을 따라서 '강 의원'이라고 등장하며 토사곽란에 시달리는 주갑이를 치료해 주며, 주갑이는 강우규를 따라서 만주의 독립운동에 참가하게 된다. 작중 유일한 실존인물이기도 하다.&lt;br /&gt;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 [[분류:평안남도 출신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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