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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경심명지류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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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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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Imported from text file&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 * 관련 문서 : [[격투기 무술 관련 정보]], [[일본 고류 무술]]&lt;br /&gt;
&lt;br /&gt;
[목차]&lt;br /&gt;
== 개요 ==&lt;br /&gt;
'''鏡心明智流'''&lt;br /&gt;
&lt;br /&gt;
[[에도 시대]] 중후기의 검호이자 야마토고리야마번(大和郡山藩 / 現 나라현 야마토고리야마시)의 무사인 모모노이 슌조(桃井春蔵)[* 본명은 모모노이 하치로자에몬 나오요시(桃井八郎左衛門直由). 이후 경심명지류 종가는 모두 슌조라는 별칭을 이어받아 1대 모모노이 슌조, 2대 모모노이 슌조 식으로 불린다.]가 그가 수련한 토다류(戸田流), [[일도류]](一刀流), [[야규신음류|야규신카게류]](柳生新陰流), 호리우치류(堀内流), 무헨류창술(無辺流槍術)을 합쳐 1773년 창시한 검술유파. &lt;br /&gt;
&lt;br /&gt;
유파명은 토다류 발도술의 카타(形) 중 하나인 경심(鏡心)에서 따와 경심명지류(鏡心明智流)라고 했고, 후일 경신명지류(鏡新明智流)라고 고쳤으나 이후에도 양쪽 이름을 모두 사용하였다. 일본어로는 둘다 쿄신메이치류(きょうしんめいちりゅう)라고 읽는다.&lt;br /&gt;
&lt;br /&gt;
죽도 대련에 중점을 두어 크게 융성하였고, 에도 막부 말기에는 본부도장인 사학관(士学館)이 [[신도무념류]](神道無念流) 연병관(練兵館), [[북진일도류]](北辰一刀流) 현무관(玄武館)과 함께 막말 [[에도 3대 도장]](幕末江戸三大道場)이라 불렸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계승이 끊겼다. 본래부터 죽도 대련 위주의 유파였던 탓에, 현대 [[검도]]의 성립 과정에서 흡수되어 유파의 형태를 소실한 것으로 보인다.&lt;br /&gt;
&lt;br /&gt;
== 역사 ==&lt;br /&gt;
모모노이 나오요시는 1773년, [[에도]] 니혼바시카야바쵸(日本橋南茅場町 / 現 [[도쿄]]도 [[주오]]구)에 사학관(士学館) 도장을 세우고, 자신이 익힌 여러 무술을 통합하여 경심명지류를 창시한다. 이때 유파를 창시하면서 시바다이 신궁(芝大神宮)에 액자를 봉납한 것이 타 유파를 자극하여, 계속해서 타류 시합을 요청받게 되었다. 그러나 슌조는 병을 이유로 거절하고, 양자 모모노이 나오카즈(桃井直一)가 시합에 나섰으나 패하는 경우가 많아, 경심명지류의 평판은 좋지 않았다.&lt;br /&gt;
&lt;br /&gt;
나오요시 사후 2대 나오카즈는, 사학관을 남핫쵸보리오오토미쵸아사리강변(南八丁堀大富町蜊河岸 / 現 도쿄도 주오구)로 이전했다. 여전히 타 유파의 적대적 행위는 계속되었지만, 오히려 이를 동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입문하고, 또 죽도 대련 위주의 수련이 호평을 받아, 문하생이 늘어나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나오요시 사후 3대 모모노이 나오타케(桃井直雄) 시절에 위기를 맞게 된다. 1831년, 신도무념류 연병관과 교류시합을 열게 되는데, 친선시합을 표명했으나 실상은 서로간의 문하생 쟁탈로 인한 분쟁이었다. 양 유파 간의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북진일도류 개조 [[치바 슈사쿠]](千葉周作)를 입회인으로 하여 시합을 개최한 것이다. 치바 슈사쿠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동생 치바 사다키치(千葉定吉) 등 [[면허개전]]을 받은 제자 10여 명을 데리고 입회했다고 한다. 이 시합에서 신도무념류 연병관에 패배했으나, 치바 슈사쿠의 중재로 시합은 없었던 것으로 합의한다.&lt;br /&gt;
&lt;br /&gt;
나오타케의 서양자(婿養子)[* 사위를 양자로 삼는 것을 말한다.]인 4대 모모노이 나오마사(桃井直正)시기에 이르러 사학관은 크게 융성하여 에도 3대 도장으로 불리게 된다. 토사(土佐)번의 유신지사인 타케치 즈이잔(武市瑞山)과 [[오카다 이조]](岡田以蔵)가 에도로 올라와 사학관에 입문한 것도 나오마사 때의 일이다. 타케치 즈이잔을 높이 평가한 나오마사는 곧 면허를 수여하고, 숙두(塾頭)[* 도장의 문하생을 아우르는 대표자.]를 맡기게 된다. 사학관의 명성은 이후로도 계속 높아져 나오마사는 에도 막부로부터 요리키격 200석(与力格二百俵)을 받고 막신(幕臣)으로 등용되어, 강무소(講武所)[* 에도 막부의 무술 교육기관] 검술사범역을 맡게 된다.&lt;br /&gt;
&lt;br /&gt;
이후에도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의 상락에 경호로서 동행하는 등 막부를 섬겼으나, [[무진전쟁]](戊辰戦争) 개전을 반대하여 이탈, 이후에는 유신측에 합류하여 사츠마, 조슈 등의 번병들에게 격검을 지도하였다.&lt;br /&gt;
&lt;br /&gt;
1879년 경시청에 격검담당계(警視庁 撃剣世話掛)가 설치되자, 나오마사의 제자인 우에다 우마노스케(上田馬之助), 카지카와 요시마사(梶川義正), 헨미 소스케(逸見宗助) 등이 채용되어, 경시청에서 제정한 경시청류(警視流木太刀形, 警視流立居合)에 경심명지류의 카타가 포함되었다.[* 대도형 10본 쿠라이즈메(位詰), 거합 4본 우측의 적(右の敵)]&lt;br /&gt;
&lt;br /&gt;
현재 경심명지류는 실전되었으나, 그 계파인 경심류(鏡心流)에 발도술 10본이 남아있고, 또다른 계파 직유심류(直猶心流)의 쿠미타치(組太刀) 역시 경심명지류와 공통된다고 한다.&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분류:격투기 무술]]&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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