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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경양방죽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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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7-06T08:52:30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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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년 1월 22일 (일) 13:13에 Maintenance script님의 편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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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 이 문서는 [[경양호]]로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lt;br /&gt;
&lt;br /&gt;
http://www.gwangjuin.com/news/photo/201105/67634_11940_515.jpg&lt;br /&gt;
[[1946년]] 만수위가 된 경양방죽의 풍경. 이때 이미 3분의 2가 매립된 상황임에도 이런 풍경을 보여주었을 정도니... [[http://www.gwangjuin.com/news/articleView.html?idxno=67634|#]] [[http://cfs12.blog.daum.net/image/11/blog/2008/08/07/12/20/489a69e61504a&amp;amp;filename=KwangJu6.jpg|# 흑백사진]]&lt;br /&gt;
&lt;br /&gt;
&amp;gt; '''&amp;quot;장차 광주가 대도시로 발전할 때를 대비해서 경관이 수려한 풍치지구로 보전되어야 한다. - [[1935년]], 경양방죽 매립반대투위의 반대 이유.&amp;quot;''' &lt;br /&gt;
&lt;br /&gt;
&lt;br /&gt;
[목차]&lt;br /&gt;
&lt;br /&gt;
== 소개 ==&lt;br /&gt;
1960년대까지 [[광주광역시]]에 위치했던 [[저수지]].&lt;br /&gt;
&lt;br /&gt;
== 역사 ==&lt;br /&gt;
1440년 [[조선]] [[세종대왕|세종]] 22년에 광주목사로 부임한 김방이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3년의 공사기간을 들여 완성한 [[저수지]]였다. 그 규모는 4만 6천여평, 수심은 10m에 달했고 규모로 볼때 호남지역 최대의 인공호수였다.&lt;br /&gt;
&lt;br /&gt;
경양방죽 안에는 두개의 작은 섬이 있었고 호수의 주변으로는 수백년된 팽나무, 왕[[버드나무]], 귀목나무 고목들이 즐비했다고 한다. [[1940년대]]~[[50년대]]까지만 해도 여름에는 더위를 피할수있는 시원한곳으로, 겨울에는 얼어붙은 경양방죽위에서 [[썰매]]와 [[스케이트]]를 타는 광주시민들의 사랑받는 명소였다.&lt;br /&gt;
&lt;br /&gt;
이런 경양방죽이 수난을 당하기 시작한것은 [[1940년]]이었다. 당시 [[전라남도]] [[도지사]]였던 야지마는 일본건국기념 사업을 벌인다면서 계림초등학교 뒤에 있던 경호대라는 산을 헐어버렸고 일본인들의 거주구역을 만든다는 이유로 경양방죽의 3분의 2를 매립하려 했다. 광주부민들은 이에 반대해 저명한 인사였던 최흥종 [[목사]]를 대표로 [[조선총독부]]에 매립을 반대하는 청원을 했지만 총독부는 이를 묵살하고 결국 매립은 강행되고 말았다. 매립에 필요한 토사는 헐어버린 경호대의 토사를 이용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8.15 광복]] 이후 광주의 인구는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불과 5년 사이 8만([[1944년]])에서 14만([[1949년]]) 가까이 증가하여 남한 5대 도시가 되었다.]. 이런 가운데 제대로 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1950년]]대에 경양방죽은 늘어난 광주 인구로 인해 쓰레기 불법투기가 난무해 저수지 기능을 상실하고 수질은 점점 악화되어갔다.&lt;br /&gt;
[[http://m.civilreport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8843|경양방죽 자세한 이야기]]&lt;br /&gt;
== 결국 사라지다 ==&lt;br /&gt;
이런 가운데 [[1966년]], 당시 광주시는 저수지 기능을 상실하고 수질이 악화되었다는 이유로 남은 경양방죽마저 매립을 결정했다. [[태봉산]]을 헐어 그 토사로 경양방죽을 매립했는데 여기에는 다른 이유가 숨어있었다. 광주시는 시내의 중심도로인 금남로를 당시로선 파격적인 8차선으로 확장하려고 했는데 정부는 '''광주같은 작은 도시에 왕복 8차선 도로가 가당키나 하나'''라면서 예산을 주지 않았다. 그 때문에 돈이 필요해진 광주시는 [[태봉산]]을 헐어 그 자리에 계림동 시가지를 조성하고 태봉산을 헐어서 나온 토사의 일부를 팔고 계림동 신시가지를 분양해 그 돈으로 금남로 확장공사를 했다(...) [[1968년]]의 일이다. &lt;br /&gt;
&lt;br /&gt;
=== 현재의 모습 ===&lt;br /&gt;
http://pds19.egloos.com/pds/201006/30/75/a0011675_4c2a9b435dae1.jpg&lt;br /&gt;
위치는 오늘날의 광주고등학교와 계림초등학교를 잇는 선에서 광주역 방향으로 남서쪽으로 부채꼴로 펼쳐진 모양이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경양방죽이 메워진 자리에는 시청을 지었는데 나중에 시청은 상무지구로 이전해 건물은 비어진 상태가 되었다가 철거되어 지금의 [[홈플러스]] 계림점이 되었고, 호수는 사라졌지만 '''경양방죽 둑방길'''[* 일명 '개미길' 이라고 불리운다.]이 생겨서 광주시민들의 산책 코스로 새롭게 탄생되었다. &lt;br /&gt;
&lt;br /&gt;
상당히 아쉬운 명소로 오늘날까지 남아있었다면 시내 중심부에 거대한 [[호수]]가 있는 도시로 널리 유명해졌을 테지만... 하지만 이제와서 복구하는것도 무리라서 결국 추억의 명소로만 남게 될것 같다.&lt;br /&gt;
&lt;br /&gt;
== 여담 ==&lt;br /&gt;
 * 계림동에 있었던 [[학교법인 유은학원]]에 속한 학교들의 교가에 경양호가 등장한다. --사실 4개 학교 모두 가사가 똑같고 중간에 광주동성, 광주여상, 동성여중으로 바꿔부른다--&lt;br /&gt;
&lt;br /&gt;
[[분류:호수]]&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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