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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고경명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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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7-06T00:37:46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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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년 1월 22일 (일) 14:51에 Maintenance script님의 편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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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1-22T14:51:1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髙敬命&lt;br /&gt;
(1533년 ~ 1592년)&lt;br /&gt;
http://www.iheadlinenews.co.kr/news/photo/201503/6839_7289_5019.jpg&lt;br /&gt;
[[조선]] [[임진왜란]]기의 의병장.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태헌(苔軒),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lt;br /&gt;
&lt;br /&gt;
1533년 [[광주광역시|광주]] 광산구 압보촌[* 現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에서 출생해 어릴 때부터 재주가 많아 칭송을 들었다. 20세에 사마시(司馬試)에 수석을 하고 26세에는 문과에 장원 급제했다. 그 뒤 호당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 뒤 교리·전적을 거쳐 울산군수로 임명됐다. 그러나 부임하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와 은거했다. 이때 [[무등산]]을 올라 산중의 수려한 경관을 읊어 ‘유서석록(遊瑞石錄)’이라는 기행문을 남겼다. 또 당대의 수많은 문인들과 교류하며 임억령ㆍ김성원ㆍ[[정철]]과 더불어 ‘식영정(息影亭) 4선(仙)’이란 칭송을 들었을 정도로 명망있는 시인이자 문장가였다. 이후 49세에 [[영암]]군수로 다시 관직에 나가 변무사 서장관을 거쳐 직강ㆍ지평ㆍ[[서산시|서산]]군수ㆍ동래부사를 지냈다.&lt;br /&gt;
&lt;br /&gt;
한편 정3품 통정대부 겸 동래부사를 지내던 중, 같은 서인인 [[정철]]이 일으킨 건저 문제와 엮이면서 파직되어서 낙향한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일본군]]의 진격 속도가 빨라 5월에 왕도 [[한성]]마저 함락당하고 [[선조]]는 북쪽으로 피란하는 등 최대의 위기 상황이었다.&lt;br /&gt;
&lt;br /&gt;
6월 1일 [[담양]]에서 출병한 고경명은 각 도의 수령과 민중에게 격문을 돌려 30일 만에 6,7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진용을 편성했는데, 이는 의병군 중 단일부대로는 가장 대규모의 부대이다. 당시는 [[용인 전투]]의 패전으로 관군들이 신망을 잃은 상황이었고, 이 때문에 오히려 중앙 유력자 였던 고경명이 오히려 신망을 얻으면서 의병들은 속속 고경명에게 모여들었기 때문에 고경명의 병력이 [[이치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운 관군보다 오히려 더 큰 규모가 될 수 있었다. 고경명은 원래 [[김천일]]과 함께 뜻을 모아서 한양 진격을 노리고 있었다[* 실제로 김천일의 병력은 웅치 전투 이전에 전라병사 최원의 병력과 함께 북상했다.]. 하지만 고경명 부대가 은진까지 진군했을 때 적이 금산을 넘어 전주까지 침략할 것이라는 소문이 들려왔다. 이에 “전주는 호남의 근본인데 먼저 흔들리면 적을 제압하기 어려우니 먼저 본도부터 구해야 옳다”고 판단한 고경명은 계획을 바꿔 호서 의병장 [[조헌]](趙憲)에게 서신을 보내 금산의 일본군을 공격할 것을 제의하고, 자신은 [[정읍시|태인]]과 [[전주시|전주]]를 거쳐 9일 [[금산군|금산]]으로 진격했다. 이곳에서 방어사 곽영이 이끄는 관군과 연합부대를 편성한 뒤 제1차 [[금산 전투]]를 도모했다.&lt;br /&gt;
&lt;br /&gt;
1592년 7월 9일, 고경명은 중앙에서 정예 기병 수백 명을 거느리고 성을 공격했는데, 방어사 곽영은 우익을 담당했다. 이 시기 일본군은 1차 웅치 전투를 치르고 급히 퇴각한 직후, 혹은 1차 웅치 전투에 참여한 병력들이 빠져나가고 남은 잔존병력들만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고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이끄는 일본군은 짧은 치고빠지기를 반복했고, 고경명은 선봉대를 앞세워 공격했다가 실패히고 저녁에는 오히려 결사대 30명을 파견해서 비격진천뢰 등을 사용한 공격을 하는 등의 방법으로 대치가 이뤄지면서 하루가 흘렀다. &lt;br /&gt;
&lt;br /&gt;
이 때 곽영은 웅치 전투를 통해서 일본군이 전주로 나가려는 의도가 막혔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후퇴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고경명은 꾸준한 공격만을 주장하였고, 더 많은 병력을 이끌었던 명사 고경명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면서 포위가 계속되었다. &lt;br /&gt;
&lt;br /&gt;
10일 새벽, 고경명은 관군과 연합해 재차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군세가 약한 관군이 일본군의 수차례 집중공격으로 무너져 패주하자 의병들의 사기도 점차 떨어져 전열이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막료들이 후퇴한 뒤 전열을 가다듬어 재공격하자고 했으나 고경명은 “패전장수로서 죽음이 있을 뿐이다”며 밀려오는 적과 맞서 분전하다가 아들 고인후, 유팽로ㆍ안영 등과 함께 최후를 맞았다.&lt;br /&gt;
&lt;br /&gt;
선조가 의주로 피난갔을 때 고경명의 거병 소식을 듣고 공조참의를 제수하고 교서를 내려 그를 위로하려 했으나, 교서가 도착했을 땐 이미 그가 전사한 후였다.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여러 서원들에 배향되었다.&lt;br /&gt;
&lt;br /&gt;
이 전투는 [[임진왜란]] 초기 관군이 연패를 거듭하던 상황에서 의병이 주축이 돼 일본군 주력을 상대로 싸운 최초의 전투였다. 비록 패했지만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군대에 역공을 가함으로써 일본군의 전주 공격을 저지했다는 점에서 그 전략적 의미가 존재한다. 또한 고경명이 순절한 이후 큰아들 고종후를 비롯해 휘하의 최경회, 임계영, 변사정 등이 계속 의병을 일으켰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lt;br /&gt;
문제는, 6천명 이상의 대군을 이끌었던 고경명의 군대가 단 이틀만의 전투로 완전히 붕괴되면서 이후에 일어난 의병들은 의병을 모으는데 엄청난 고생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경명 이후로 호남 지역 의병들은 단 1천의 병력도 제대로 이끌지 못했다. 고경명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던 조헌과 영규의 병력이 1천이 넘기는 하지만, 이들은 군량부족과 윤선각의 방해로 각각의 병력은 1천에 못 미치는 상황에서 2차 금산전투를 치뤄야 했고, 고경명의 패전 이후의 호남의병인 보성의 전라좌의병 [[임계영]]은 700, 광주의 전라우의병 최경희는 800명[* 그나마 이들중 일부는 고경명의 부하였던 문홍헌이 1차 금산전투의 패잔병을 수습한 이들이었다.] 만을 모을 수 있었을 뿐이다. 이들은 [[장흥군|장흥]]이나 [[남원시|남원]] 같은 상당히 큰 지역에서도 거의 병력을 모으지 못했고, 1천을 간신히 넘긴 이후에도 군량부족에 시달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경명의 6천 의병은 호남이 모을 수 있었던 최대규모 의병이었으나 이들을 고스란히 날려버렸다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특히 전주 성을 수비하기 위해서 [[이치 전투]]와 [[웅치 전투]]에서 사투를 벌인 관군과 협력하지 않고, 자의만으로 금산성으로 돌진한 것은 의기를 떠나서 군사적 역량부족이라는 비판을 받는다.&lt;br /&gt;
&lt;br /&gt;
[[광주광역시]] [[남구(광주)|남구]]에는 고경명과 그 아들들, 조카, 함께 전사한 노비 등을 기리는 사당인 [[포충사]]가 있다. 또한 [[광주역]]에서 [[남광주역]]을 잇는 도로인 제봉로는 고경명의 호를 따와 지은 것이다.&lt;br /&gt;
&lt;br /&gt;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이치전투 부분에서 일본군을 후퇴시키기 위해 금산성을 공격했다는 해설밖에 안나왔다. 또한 고경명 역할의 단역배우가 꽤 젊어서 역덕들이 벙쪘다는 후문이...[* 생년월일을 계산하면 알겠지만 고경명은 '''60세'''의 나이에 임진왜란에 참전했다. 그리고 불멸에서 또하나의 오류가 생기는데 이치전투에서 일본군이 후퇴하자 권율왈 ''' &amp;quot;고경명이 드디어 시간을 맞추었군!&amp;quot; ''' 이라 나오는데 엄연히 권율은 고경명보다 연하자이며 또한 '''같은 양반이었다!'''~~애초에 불멸에서 고증따위 바라는건 사치다...~~]&lt;br /&gt;
&lt;br /&gt;
[[징비록(드라마)|징비록]]에서는 다행히 중견배우인 유승봉씨가 맡았으며 권율이 연하자라 '''부사!'''라고 존칭까지 날리지만 결국 아들인 고인후와 함께 전사한다. 근데 문제는 이치전투로 추정되는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것...!!~~뭐라고!?~~ ~~아이고 징비록 마저...~~ 권율과 다른 전투를 치룬 것 때문인지 권율과 함께 싸우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문제는 싸우는 장소가 권율이 싸우는 이치와 같은 숲속이다.&lt;br /&gt;
&lt;br /&gt;
[[분류:광주광역시 출신 인물]] [[분류:임진왜란/군인]] [[분류:조선 의병장]]&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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