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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고려삼은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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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7-05T18:05:12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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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년 1월 22일 (일) 15:13에 Maintenance script님의 편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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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1-22T15:13:1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여말삼은(麗末三隱)이라 하기도 한다.&lt;br /&gt;
&lt;br /&gt;
[[고려]] 말기에 절의를 지킨 아래 [[3대 요소|세 학자를 일컫는 말.]]&lt;br /&gt;
&lt;br /&gt;
목은(牧隱) [[이색]]&lt;br /&gt;
포은(圃隱) [[정몽주]]&lt;br /&gt;
야은(冶隱) [[길재]]&lt;br /&gt;
 &lt;br /&gt;
&lt;br /&gt;
근래에는 야은(冶隱) 길재 대신 도은(陶隱) [[이숭인]]을 넣기도 한다.&lt;br /&gt;
~~그냥 사(四)은이라 하면 될 것을~~[*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려육은(高麗六隱)이라 하여 이숭인을 포함해 농은(農隱) 민안부, 수은(樹隱) 김충한을 더해 이르기도 한다.]&lt;br /&gt;
&lt;br /&gt;
저 셋이 삼은으로 불리기 시작한 시기와 이유는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 &lt;br /&gt;
&lt;br /&gt;
다만 조선 중후기의 사림을 형성하는 성리학자들이 다름 아닌 야은 길재의 후학들이기 때문에, 이색-정몽주-길재로 이어지는[* 사실 길재는 정몽주보다는 양촌(陽村) [[권근]]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그래도 그냥 삼은이라 부르는 게 [[삼대장]] 같기도 하고 간지나긴 한다.~~] 동방 성리학의 [[거성]]들을 숭상하기 위해 여말삼은이라 칭했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lt;br /&gt;
&lt;br /&gt;
즉 이에 따르면, 이숭인이 삼은에 포함되지 못한 이유는 단순히 [[정도전]]의 모략에 의해 장살당해 제자를 못 남겼기 때문(...). [[안습]]도 이런 안습이 없다.[* 사망 당시 이숭인은 46세였다. 젊다고만 할 수 없는 나이인데도 그 이전에도 확실한 제자를 두지 못한 이유인 즉, 이 아저씨는 고려 정국이 변할 때마다 족족 귀양길에 오르는 [[동네북]](...)이었기 때문이다. 사대부가 탄압받을때는 사대부라 귀양가고 [[이인임]]이 몰락하자 이인임 친척이라 귀양가고 조선건국즘엔 고려유지파라 귀양가고 ~~그만 해 충분히 안습하다고~~]&lt;br /&gt;
&lt;br /&gt;
참고로 당시 고려에는 '은(隱)'자를 호에 쓰는 경향이 매우 많았다. 고려 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킨 사람들을 조사해보면 은자 돌림 호가 꽤 많이 나온다. 대표적 인물이 대은(大隱) [[변안열]]. 심지어 ~~정몽주, 이숭인 등을 그렇게 갈궜던~~ 권문세가의 수장 [[이인임]]도 초은(樵隱) 이인복이라는 멀쩡한 형을 두었다. 신진사대부에서 권문세가 쪽으로 변절한 동정 [[염흥방]]도 어은(漁隱)이라는 호도 썼었다. 이런 현상은 당대 [[헬게이트]]나 다름 없었던 고려의 상황을 사대부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말하자면 '은일(隱逸)' 의식이 당대 사대부들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이색은 이런 은일의식이 지배하는 당대의 지식인 풍조를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했는지 제자 이숭인이 '도은'이라는 호를 짓자 &amp;quot;나야 늙었으니 괜찮지만, 자안(이숭인의 자)은 앞길이 창창한 시기인데 은(隱)으로 이름하는 것이 옳겠는가?&amp;quot;라고 비판했으며, 정몽주에 대해서는 &amp;quot;달가(정몽주의 자)는 채소밭에 숨어 있으나 조정에 서서 유학의 부흥을 자임했고, 엄한 얼굴로 학자의 스승이 되었다. 그러니 그는 진정으로 숨은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amp;quot;고 평가했다.&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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