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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고준황후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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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7-04T19:13:56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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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년 1월 23일 (월) 01:16에 Maintenance script님의 편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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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1-23T01:16:5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 * 상위 항목 : [[일본 황실]], [[아키히토/가족관계]], [[왕비]], [[장녀]]&lt;br /&gt;
&lt;br /&gt;
http://akafkaesquelife.files.wordpress.com/2013/04/empress-nagako-kojun-japan-diamond-tiara.jpg?align=right&amp;amp;width=250&lt;br /&gt;
[목차]&lt;br /&gt;
== 개요 ==&lt;br /&gt;
香淳皇后, [[1903년]] [[3월 6일]] ~ [[2000년]] [[6월 16일]]&lt;br /&gt;
향년 만 97세&lt;br /&gt;
&lt;br /&gt;
'''[[쇼와 덴노]]의 황후. [[아키히토]] 덴노의 어머니'''. 방계 황족 출신으로 결혼 전의 이름은 구니노미야 나가코(久邇宮良子) [[여왕#s-4|여왕]].[* [[일본 황실]]에서 [[덴노]]의 [[딸]]과 [[손녀]]까지는 내친왕(內親王), 증손녀부터는 여왕이라 한다. 현행 황실전범이 제정된 1947년 이전에는, 고손녀까지를 내친왕이라 하고 5대째 손녀부터 여왕이라 했다고. 남자는 친왕/왕.] &lt;br /&gt;
&lt;br /&gt;
맏며느리 [[미치코 황후]]에게 '''악독한 [[시집살이]]'''를 시킨 것으로 '''악명이 높다.''' 정말 죽기 직전까지 [[미치코 황후]]를 괴롭혔고, 그 때문에 [[미치코 황후]]는 [[실어증]]까지 걸렸을 정도였다.&lt;br /&gt;
&lt;br /&gt;
== 어린 시절 ==&lt;br /&gt;
||&amp;lt;tablealign=right&amp;gt; [[파일:attachment/고준황후/n1.jpg|width=200]] ||&lt;br /&gt;
|| 1910년, 7살 때의 나가코 여왕. ||&lt;br /&gt;
아버지는 방계 황족인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 왕[* [[구니노미야 아사히코]](久邇宮朝彦) 친왕의 3남이다. [[이방자]] 비의 친정아버지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守正) 왕(4남),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8남),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9남) 등이 그의 [[남동생]]들이다. 쿠니요시 왕의 죽음에 관해서는 [[독립운동가]] [[조명하]] 의사 항목을 참조.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29&amp;amp;contents_id=6632|조명하 의사에 관한 네이버캐스트 게시물]]이다.][* 참고로 邦彦이란 이름을 쓰는 사람들은 보통 '쿠니히코'라고 읽는다.], 어머니는 시마즈 다다요시(島津忠義)[* 사츠마의 제12대 영주. 다다요시는 폐번치현과 [[화족]] 제도의 실시 후 [[공작]]의 작위를 받았다.]와 측실 야마자키 스마코(山崎壽滿子)의 8녀인 치카코(俔子)이다. &lt;br /&gt;
&lt;br /&gt;
나가코 여왕은 [[1903년]] [[3월 6일]] '''구니요시 왕과 치카코 비의 3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나, 1907년 [[가쿠슈인]] 여학부(女學部) [[유치원]]에 입학했다. [[가쿠슈인]]에서 황족의 자녀들은 따로 마련된 별실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나가코 여왕은 두 여동생 외에도, 훗날 남편이 된 [[미치노미야 히로히토]] 친왕과 그의 바로 아래 [[남동생]]인  [[야스히토|아츠노미야 야스히토]](淳宮雍仁) 친왕[* [[다이쇼]] 덴노의 [[차남]]. 훗날의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과도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lt;br /&gt;
&lt;br /&gt;
나가코 여왕은 상냥하고 확실한 성격이어서, 두 여동생 노부코(信子) 여왕과 사토코(智子) 여왕[* 특히 오오타니 사토코는 패전 후 전[[일본]][[불교]]부인연맹 회장으로서 [[이방자]] 비와 함께 활동했고, 이후에도 [[이방자]] 비의 자서전에 서문을 쓰는 등 [[이방자]] 비와 여러 차례 교류를 했다. 한편 사토코의 아들 오오타니 고쇼(大谷光紹)와 나가코 황후의 3녀 [[다카츠카사 카즈코|다카노미야 카즈코 공주]]는 훗날 약혼을 했지만 이는 곧 파기되었고, 카즈코 공주는 다카츠카사 도시미치(鷹司平通)에게 시집갔다.]은 큰언니의 행동을 보고 본받으려 했다고 한다. '''사촌 언니 [[이방자]] 비'''는 1984년 [[경향신문]]에 연재한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에서 어린 시절의 나가코 여왕을 가리켜 &amp;quot;'''여성으로서 우아하고, 마음씨가 곱고, 총명하며, [[노래]]를 잘 불렀다'''&amp;quot; 고 회고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51800329203006&amp;amp;editNo=2&amp;amp;printCount=1&amp;amp;publishDate=1984-05-18&amp;amp;officeId=00032&amp;amp;pageNo=3&amp;amp;printNo=11888&amp;amp;publishType=00020|《세월이여 왕조여》 제4회(1984.5.18)]] --근데 왜 시집살이는 시켰어. [[흑화]]했냐.--&lt;br /&gt;
&lt;br /&gt;
한편 나가코 여왕이 어린 시절을 보낸 구니노미야 저택 터에는 훗날 [[가톨릭]]계 여학교인 [[성심여자대학교|세이신 여학원]]이 들어섰고, 이 학교 출신인 [[쇼다 미치코]]가 나가코 황후의 큰며느리가 되었다. ~~이 이야기만 들으면 고부 간의 아름다운 인연이라는 착각에 빠진다.~~&lt;br /&gt;
== [[황태자비]] 내정 ==&lt;br /&gt;
[[파일:attachment/고준황후/n2.jpg]]&lt;br /&gt;
결혼 전, 미혼 여성의 예복인 [[후리소데]]를 입은 나가코 여왕의 모습.&lt;br /&gt;
&lt;br /&gt;
당시 [[일본 황실]]은 오랫동안 [[이치죠]](一條) 가문과 [[쿠죠]](九條) 가문에서 번갈아가며 국모를 맞이했다. [[고메이 덴노]]의 정실 에이쇼 황후(英昭皇后)[* 이름은 아사코(夙子). [[데이메이 황후]]에게는 [[고모]]이자 시할머니가 된다. 두 딸 요리코(順子) 내친왕과 후키노미야(富貴宮) 내친왕을 낳았으나 일찍 죽었고(각각 2살과 1살), [[고메이 덴노]]의 측실 나카야마 요시코(中山慶子)의 아들 [[메이지 덴노|사치노미야 무쓰히토 친왕]]을 [[양자]]로 [[입양]]했다.]는 [[쿠죠]] 가문, [[고메이 덴노]]의 아들 [[메이지 덴노]]의 정실 쇼켄황후(昭憲皇后)[* 본래 이름은 마사코(勝子)였으나, 결혼하면서 하루코(美子)로 개명했다. 자녀는 낳지 못했다.]는 [[이치죠]] 가문, [[다이쇼]] 덴노의 아내 [[데이메이 황후]](사다코)는 [[쿠죠]] 가문 출신이다. 그러니 이제까지의 관례를 보면 다음 차례는 [[이치죠]] 가문일 가능성이 높았다.&lt;br /&gt;
&lt;br /&gt;
문제는 [[황태자비]] 자리를 놓고 권력투쟁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다이쇼]] 덴노는 심신이 허약하여 나랏일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신하들은 황실과 덴노를 만만히 여기고 더욱 날뛰었다. '''[[육군]]을 장악하고 있던 조슈 파는 [[화족]] 이치죠 사네테루(一條實輝) 공작의 3녀 이치죠 도키코(一條朝子)를, [[해군]]을 장악하고 있던 사츠마 파는 방계 황족의 딸인 나가코 여왕을 지지'''했다. 또한 조슈 파의 원로이자 당시 [[일본]] 정치계의 거물이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도키코를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로 도키코에게 유리했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사다코 황후]]는 자신의 남편 [[다이쇼]] 덴노에게 함부로 굴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미워하고 있었기에, 그가 지지하는 후보를 [[황태자비]]로 삼고 싶지 않았다. 사츠마 파는 그 점을 알고 은밀하게 [[사다코 황후]]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1918년 2월 4일,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이 [[황태자비]]로 내정되었다는 공식 발표'''를 일제히 언론에 내보냈다. 언론 등에 공개된 것에 따르면 표면적인 이유는 나가코 여왕 본인의 성품이나 소질 뿐 아니라, 황족들 중에서는 비교적 가난한 편이었던 구니노미야 가문의 형편을 예전에 [[메이지 덴노]]가 걱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나가코 여왕은 [[가쿠슈인]] 여학부 중등과를 중퇴하고, 장래의 [[황태자비]]와 황후로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조슈 파와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분노하였다. 1920년, 한 의학 잡지에 &amp;quot;'''나가코 여왕의 외가인 [[시마즈]] 가문에 [[색맹]]의 형질이 유전되고 있다!!'''&amp;quot; 는 기사가 실렸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사이온지 긴모치]], [[하라 타카시]] 등과 연합하여 구니노미야 가문에 &amp;quot;황통의 안정을 위하여 황태자비 자리에서 사퇴하라!!&amp;quot; 고 요구했다. 그러나 구니노미야 가문 또한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고, 소란은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번져갔다. 당사자인 [[히로히토]] 황태자는 &amp;quot;나가코 여왕으로 좋다&amp;quot; 고 했으며, 시아버지 [[다이쇼]] 덴노도 &amp;quot;'''[[과학]]에도 틀리는 것이 있는 줄 안다'''&amp;quot; 고 말했다. 이 치열한 싸움의 끝은 황실의 뜻, 국민들의 여론, 일본도로 무장한 협객들의 응원까지 등에 업은 사츠마 파가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다. 결국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이후 정계에서 은퇴했다.&lt;br /&gt;
&lt;br /&gt;
그런데 정계에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그가 죽고 난 뒤인 '''[[1924년]] [[1월 26일]]에야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여담으로 도키코는 방계 황족 후시미노미야 히로요시(伏見宮博義) 왕에게 시집갔다고 한다.[* 1947년 [[신적강하]] 이후로, 황족의 신분을 잃고 평민이 되었다(이치죠 도키코 → 후시미노미야 도키코 왕비 → 후시미 도키코).]&lt;br /&gt;
== [[황태자비]] 시절 ==&lt;br /&gt;
[[파일:attachment/고준황후/n3.jpg|width=280]]&lt;br /&gt;
--일본 미인도-- --모델일세--&lt;br /&gt;
본래 1923년에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지만, [[히로히토]] 황태자는 '''[[관동 대지진]]의 참상을 보고서 결혼식을 미루었다'''. 나가코 여왕은 대지진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위로하는 [[와카]]를 짓기도 했다. 1924년 1월 26일 결혼식을 올린 후 나가코 황태자비는 아카사카(赤坂)의 동궁(東宮)에 거처하기 시작했다. 1925년 12월 6일에는 첫 아이인 [[장녀]] [[데루노미야 시게코]] 내친왕을 낳았다.&lt;br /&gt;
&lt;br /&gt;
== 황후 시절 ==&lt;br /&gt;
1926년 12월 25일 [[히로히토]] 황태자가 새 [[덴노]]로 즉위하자, 나가코 황태자비도 황후가 되었다. 1928년 11월 10일, [[교토]]에서 즉위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lt;br /&gt;
&lt;br /&gt;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일본 황실]]은 끝내 피난하지 않았는데''', 이는 황실의 가장 큰 어른인 [[사다코 태후]]가 피난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가코 황후도 남편 [[쇼와 덴노]]와 함께 [[도쿄]]에 머무르며, 걱정이 많은 남편을 내조했다. 전쟁으로 식량 사정이 좋지 않던 시절, [[쇼와 덴노]]와 나가코 황후는 식사할 때면 서로 의논하여 [[요리]] 한두 접시를 남겨 시종들에게 하사했다고 한다. 전쟁 말기에 나가코 황후는 [[채소]] 재배와 양계를 했고, 패전 후에는 철수하는 [[일본군]]들을 위해 이부자리와 옷가지를 만들었다.&lt;br /&gt;
&lt;br /&gt;
[[국가신토|신격화]]되어 왔던 [[일본 황실]]은 패전 후 '''[[인간선언]]'''을 하였고, 적극적으로 국민들을 가까이 하며 '''각종 활동'''을 활발하게 벌였다. 나가코 황후도 1947년 [[일본]] [[적십자]] 명예 총재 취임을 시작으로 1952년 이후의 전국 전몰자 추도식, [[1964 도쿄 올림픽]] 개회식, 1970년 일본만국박람회 개회식, [[1972 삿포로 동계올림픽]] 개회식 및 [[오키나와]] 복귀 기념식전 등에 출석했다. [[야스쿠니 신사]]와 고코쿠 신사 등에도 참배하였다.[* 단, 이때는 '''A급 [[전범]]'''들이 합사되기 전이라 지금 정도로 뜨거운 [[감자]]가 되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나중에 A급 전범들이 합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쇼와 덴노]]는 격노하여, 다시는 [[야스쿠니 신사]]를 찾지 않았다. 당시엔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일본은 여전히 전범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고 --지금도-- 미국의 영향력이 막강했다. 헌데 그 미국을 공격하고 아시아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A급 전범들을 옹호했었다가는 [[유엔]] 헌장 53조, 107조에 의거하여 미국이 일본을 재차 공격하여 없애버렸을지도 모른다. A급 전범 합사 이후 처음으로 참배했던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1985년 패전 40주년 기념으로 아무 생각 없이(…) [[야스쿠니 신사]]에 갔다가, [[아시아]] 전체가 격노하는 상황에 매우 기겁하였다. 그 후로 그는 다시는 [[야스쿠니 신사]]에 가지 않았고, 각료들에게도 &amp;quot;[[야스쿠니 신사]]에 가려거든 절대 개인 자격으로만 가라.&amp;quot;고 엄명을 내릴 정도였다.]&lt;br /&gt;
&lt;br /&gt;
||&amp;lt;tablealign=center&amp;gt; [[파일:attachment/고준황후/n7.jpg]] ||&lt;br /&gt;
|| 아직 손녀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가 없는 것으로 보아, 1969년 이전으로 추정되는 '''~~부자연스러운~~''' 가족사진. [* 뒤에 ~~부부가 함께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있는 [[마사히토]] 친왕의 양복 행커치프를 보면 뒤집힌 사진이다.]||&lt;br /&gt;
&lt;br /&gt;
'''1971년에는 [[쇼와 덴노]]와 함께 [[유럽]]을 순방'''했는데,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덴노 부부는 엄청난 적대를 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일본]]과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던 퇴역 군인들이, 덴노 부부에게 엄청난 분노를 퍼부은 것이다. 특히 [[네덜란드]]에 갔을 때는 욕설과 날[[달걀]]과 [[보온병]]에 [[벽돌]](!)등까지 날아왔고, 나가코 황후는 피골이 상접해서 귀국할 정도였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1977년 여름, 늙은 나가코 황후는 나스(那須)의 저택에서 넘어져 허리뼈가 골절되었다. 그러나 측근들이 사고를 숨기는 바람에 치료가 늦어져, 완전한 회복은 불가능해졌다. 나가코 황후는 큰 충격을 받았고, 이후로 '''노화가 더욱 현저'''해졌다. 공무에 출석할 때도 기타시라카와 사치코(北白川祥子)[* [[도쿠가와]] 가문 출신이며, [[시어머니]] 기타시라카와 후사코(北白川房子)는 [[메이지 덴노]]의 7녀이다. 딸 기타시라카와 하츠코(北白川肇子)는 출생 직후(1939년)부터 장래의 [[황태자비]]로 물망에 올랐으나 평민 [[쇼다 미치코]]에게 밀려 탈락, 나가코 황후의 외가인 [[시마즈]] 가문으로 시집갔다.] 등 시녀들이 부축했다. 1987년 12월 11일, 나가코 황후는 가족사진[* [[일본 황실]]에서는 매년 12월에 직계 가족들끼리 모여 가족사진을 찍는다.]을 촬영한 후 가벼운 심장 발작을 일으켰다. 다음해부터 그녀는 공무에 참가하지 못했다.&lt;br /&gt;
== 태후 시절 ==&lt;br /&gt;
1989년 1월 7일, 장남 [[아키히토]] 황태자가 새 [[덴노]]로 즉위하면서 나가코 황후는 태후가 되었다. 이 해에는 남편 [[쇼와 덴노]]뿐 아니라 사촌 언니 [[이방자]] 비, 여동생 오오타니 사토코(大谷智子), 3녀 [[다카츠카사 카즈코]]가 줄줄이 사망했다. &lt;br /&gt;
&lt;br /&gt;
1990년 [[6월 29일]]에는 [[가와시마 키코]]가 [[후미히토]] 친왕에게, 1993년 6월 9일에는 [[오와다 마사코]]가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시집왔다. 이로써 나가코 태후는 '''시할머니'''가 되었다. 손자며느리 [[키코 비]]가 1991년에 [[마코 공주]], 1994년에 [[카코 공주]]를 낳아, 나가코 태후는 '''증조할머니'''가 되었다.&lt;br /&gt;
&lt;br /&gt;
1994년, 나가코 태후는 '''역대 최장수 황후'''로 등극했다. 말년에는 '''[[치매]]''' 증상까지 있었다고 하지만, 언론에서는 &amp;quot;노인 특유의 증상&amp;quot; 이라고만 보도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그렇게 몸이 불편한데도, [[나가코 태후]]는 꼬장꼬장 정정하게 살아서 계속 [[미치코 황후]]를 괴롭혔고, ~~[[김일성|원래 나쁜 놈은 오래 사는 법. 저승사자도 잡아가기를 꺼려할 정도로 악독하면 오래 산다고 한다.]]~~ [[나가코 태후]]와 함께 하는 세력들은 그 후로도 언론 등을 동원하여 미치코 황후를 향해 '''갖가지 말도 안 되는 비난들'''을 퍼부었다. &lt;br /&gt;
&lt;br /&gt;
&amp;quot;미치코 황후 때문에 [[쇼와 덴노]]가 생전에 아끼던 궁성의 숲이 파괴되었다.&amp;quot; &amp;quot;연회 등 각종 행사도 미치코 황후의 승낙이 없으면 진행되지 못한다.&amp;quot; &amp;quot;한밤중에도 [[과일]]을 깎으라거나 [[라면]]을 끓이라는 주문을 하기 때문에, 시종들이 쉴 틈이 없다.&amp;quot;는 등등. 결국 미치코 황후는 만 59세 생일인 1993년 [[10월 20일]]에 쓰러져 '''[[실어증]]'''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이듬해인 1994년에야 회복. '''2000년 [[6월 16일]]'''에 [[나가코 태후]]가 죽은 후에야 미치코 황후의 지옥 같은 시집살이는 끝났다. &lt;br /&gt;
== 자녀들 ==&lt;br /&gt;
||&amp;lt;tablealign=right&amp;gt; [[파일:attachment/고준황후/n5.jpg|width=300]] ||&lt;br /&gt;
|| 어렵게 얻은 아들, [[아키히토]] 친왕과 함께. ||&lt;br /&gt;
[[아키히토]] 덴노를 포함하여 2남 5녀를 낳았다. [[쇼와 덴노]]와 고준황후의 자녀들은 대부분 일찍 죽거나, 건강이 나쁘거나, [[과부]]가 되거나,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등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거나, 자녀를 낳지 못하는 등 '''불행한 삶'''을 살았다. &lt;br /&gt;
&lt;br /&gt;
나가코 황후는 결혼 후 '''[[공주]]만 내리 4명을 낳는 바람에''' 온나바라(女腹-딸만 낳는 여자)라며 무수한 비난을 당했고, '''측실 제도의 부활까지도 거론'''될 지경이었다.[* [[일본 황실]]에서 [[일부일처제]]가 확립되기 시작한 것은 [[다이쇼]] 덴노 때로([[데이메이 황후]]가 아들만 4명을 낳아서), 이게 법제화된 건 [[쇼와 덴노]] 때다. 그러니까 이 말이 나왔을 때는 아직 [[일부일처제]]가 확고하지는 않았을 때다.] 그러나 [[쇼와 덴노]]는 측실 제도에 대해 &amp;quot;인륜에 어긋나는 일&amp;quot;이라며 거부했고, 측실 후보로 선정된 [[화족]] 규수 3명의 [[사진]]이 제출되기까지 했으나 &amp;quot;훌륭한 숙녀들이니, 어울리는 곳에 시집가기를 바란다.&amp;quot;며 신하들에게 도로 돌려주었다고 한다. 드디어 1933년 12월 23일 나가코 황후는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아들, [[장남]] [[아키히토|츠구노미야 아키히토]] 친왕을 낳았다. 1935년 11월 28일에는 [[차남]] [[마사히토|요시노미야 마사히토]] 친왕을 낳았다.&lt;br /&gt;
&lt;br /&gt;
본래 황실의 자녀들은 태어나자마자 친부모의 곁에서 떨어져 신하들의 손에 자라는 것이 전통이었으나, [[쇼와 덴노]]와 나가코 황후는 '''전통을 깨고 자녀들을 곁에 두고 키웠다'''.[* [[유모]]를 두긴 하였으나 수유도 가능한 나가코 황후가 직접 하였다고.] 그러나 '''아주 어렸을 때의 잠깐 뿐'''으로, 자녀들은 조금 자란 후에는 부모와 떨어져 신하들에게 맡겨졌다. 이것은 양육계가 시중 들기 어렵다는 문제와 버릇이 없어진다는 문제 외에도, [[공주]]들의 경우는 장래 시집갈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온 가족이 모이는 때는 주말뿐이었다. [[쇼와 덴노]]는 직접 [[공주]]들의 공부를 도와주기도 했고, 나가코 황후는 [[아키히토]] 황태자가 좋아하는 [[두부]] [[요리]]를 손수 준비하기도 했지만 [[아키히토]] 황태자가 이 요리를 직접 먹은 일은 없다고 한다. ~~쿠킹 몬스터?~~&lt;br /&gt;
&lt;br /&gt;
[[히가시쿠니 시게코|첫째 공주]]는 맞선 한 번 없이 어른들이 정한 상대와 결혼하여, 한동안 [[결혼]]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 때문에 나머지 [[공주]]들은 중매결혼이지만 어느 정도 형식적으로나마 맞선, 데이트, 교제 등을 거쳤다. 나가코 황후는 딸들의 이런 과정을 적극 지지해 줄 정도로 깨인 모습을 보였으나, '''큰아들 [[아키히토]] 황태자와 평민 여성 [[쇼다 미치코]]의 연애결혼에 대해서는 대단히 분노'''~~모순~~했다[* 말이 평민이지, 닛신(日淸) 제분이라는 대기업 회장의 장녀이며 외가는 옛 [[화족]] 소에지마(副島) 가문이다.]. 작은아들 [[마사히토]] 친왕이 결혼할 때가 되자, 나가코 황후는 옛 [[화족]] 가문의 딸 츠가루 하나코(津輕華子)를 직접 작은며느리로 골랐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장녀 [[데루노미야 시게코]](照宮成子) 내친왕(1925.12.6-1961.7.23): 방계 황족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쇼와 덴노]]의 고모부이자, 나가코 황후의 숙부이다.] 왕의 장남인 히가시쿠니노미야 모리히로(東久邇宮盛厚) 왕과 결혼, 3남 2녀를 낳았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lt;br /&gt;
&lt;br /&gt;
 * 차녀 히사노미야 사치코(久宮祐子) 내친왕(1927.9.10-1928.3.8): '''병으로 요절.''' 나가코 황후는 직접 밤을 새워가며 사치코 공주를 간병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생후 6개월의 [[아기]]였던 사치코 공주의 장례는 간소하게 치러졌고, 슬픔에 잠긴 나가코 황후는 한동안 아기와 같은 크기의 [[인형]]을 안고 지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 3녀 [[다카츠카사 카즈코|다카노미야 카즈코]](孝宮和子) 내친왕(1929.9.30-1989.5.26): 다카츠카사 도시미치(鷹司平通)와 결혼. 자녀는 없다. &lt;br /&gt;
&lt;br /&gt;
 * 4녀 [[이케다 아츠코|요리노미야 아츠코]](順宮厚子) 내친왕(1931.3.7-): 이케다 다카마사(池田隆政)와 결혼. 자녀는 없다.&lt;br /&gt;
&lt;br /&gt;
 * 장남 [[아키히토|츠구노미야 아키히토]](繼宮明仁) 친왕(1933.12.23-): [[쇼다 미치코]]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낳았다.&lt;br /&gt;
&lt;br /&gt;
 * 차남 [[마사히토|요시노미야 마사히토]](義宮正仁) 친왕(1935.11.28-): 츠가루 하나코와 결혼한 후 히타치노미야(常陸宮)라는 궁호를 받았다.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친왕은 형제들 가운데 유일하게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기도 하다. '''자녀는 없다.'''&lt;br /&gt;
&lt;br /&gt;
 * 5녀 [[스가노미야 타카코]](淸宮貴子) 내친왕(1939.3.2-): 나가코 황후의 외사촌 남동생인 시마즈 히사나가(島津久永)와 결혼하여 '''1남'''을 낳았다. '''5명의 딸들 중 유일하게 행복'''하게 살아간 인물로, 바로 위의 언니 [[이케다 아츠코]]와 정반대로 '''활달'''하고 떠들썩하며 나서기 좋아하는 성품이라고.&lt;br /&gt;
&lt;br /&gt;
참고로 자녀들 중 평민과 결혼한 사람은 [[아키히토]] 덴노가 유일하다. 첫째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는 패전 이전에 방계 황족과 결혼했고, 나머지 공주들과 [[마사히토]] 친왕은 (패전 이후 [[신적강하]]를 당했지만) 옛 [[화족]] 가문의 자제와 결혼했다.&lt;br /&gt;
== 금슬 ==&lt;br /&gt;
[[쇼와 덴노]]와의 '''금슬은 참으로 좋았다'''고 전해진다. 결혼 전부터 [[히로히토]] 황태자는 약혼녀 나가코 여왕과 처제들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으며, 결혼 후에도 외출했다가 돌아올 때면 늘 아내를 위해 선물을 가져왔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결혼 초부터 당시의 남녀로서는 드물게 손을 잡고 산책하였고, 노후에도 나가코 황후가 거동이 불편해지자 [[쇼와 덴노]]가 부축하였다. 아침식사 때는 [[NHK]] 아침 [[드라마]]를 함께 시청하고, 궁성이나 황실의 별저를 함께 산책했다고. [[식물]]을 좋아하는 [[쇼와 덴노]]는 늘 나가코 황후에게 설명하면서 걸었고, 갈림길에서 [[쇼와 덴노]]가 &amp;quot;나가미야(良宮)[* 황족 가문의 딸로 태어난 여성을 부르는 이름. 이름 뒤에 &amp;quot;미야(宮)&amp;quot;을 붙이며, 높여 부를 때는 그 뒤에 &amp;quot;사마(樣)&amp;quot;를 붙인다. 예를 들어, 나가코 황후의 사촌 언니 [[이방자]](李方子) 비는 &amp;quot;마사미야(方宮)&amp;quot;, &amp;quot;마사미야사마(方宮樣)&amp;quot;라고 불렸다. 반면 [[화족]] 가문의 딸로 태어난 여성에게는 &amp;quot;기미(君)&amp;quot;를 붙인다. [[이방자]] 비의 친정어머니 나시모토 이츠코(梨本伊都子)는 &amp;quot;이츠기미(伊都君)&amp;quot;, &amp;quot;이츠기미사마(伊都君樣)&amp;quot;라고 불렸다.], 어느 쪽으로 갈까??&amp;quot; 라고 물으면 나가코 황후는 &amp;quot;오카미(お上)가 좋아하는 쪽으로요.&amp;quot; 라며 대답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나가코 황후의 여러 [[취미]] 중 하나는 [[장미]]를 심고 기르는 것이었는데, 손수 가지를 치고 잡초를 뽑으며 장미 정원을 가꾸었다고 한다. [[쇼와 덴노]]는 &amp;quot;잡초라는 이름의 풀은 없다&amp;quot;며 황궁 정원의 이름 없는 풀들조차 함부로 뽑거나 솎지 못하게 했지만, 나가코 황후의 장미 정원만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lt;br /&gt;
== 악독한 [[시어머니]] ==&lt;br /&gt;
큰아들 [[아키히토]] 황태자가 평민 여성 [[쇼다 미치코]]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나가코 황후는 대노하였다. 그녀는 아랫동서 지치부노미야 세츠코(秩父宮勢津子) 비[* 아이즈 번의 다이묘 [[마츠다이라 카타모리]]의 손녀로, [[이방자]] 비의 이종사촌 여동생이다.]와 다카마츠노미야 키쿠코(高松宮喜久子) 비[*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손녀]]로, 외가는 방계 황족인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이다.], 세츠코 비의 친정어머니 마츠다이라 노부코(松平信子)[* [[이방자]] 비의 [[이모]]이다. [[가쿠슈인]] 동창회장을 지내며 옛 황족 및 [[화족]]들의 우두머리로 군림하였고, 궁정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노부코 또한 나가코 황후와 마찬가지로, 죽는 순간까지 [[미치코 황태자비]]를 미워했다.]와 노부코의 언니 나시모토 이츠코(梨本伊都子)[* [[이방자]] 비의 친정어머니. 이츠코는 거의 평생에 걸쳐 일기를 썼는데, 당시 일기에는 &amp;quot;이제 [[일본]]도 다 끝났구나!!&amp;quot;라고 썼다.], [[다이쇼]] 덴노의 외[[사촌]] 여동생 [[야나기하라 뱌쿠렌]] 등과 똘똘 뭉쳐 반대 운동을 펼쳤다. 심지어 [[우익]] 측과 연합, 쇼다 가문에 혼약 사퇴를 강요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결국 [[쇼다 미치코]]가 맏며느리로 시집오자, 나가코 황후는 그녀를 몹시 미워하여 '''호된 시집살이를 시켰다'''. 세츠코 비와 키쿠코 비는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감정이 누그러져 [[미치코 황태자비]]와 친하게 지냈고, 특히 자녀를 낳지 못한 그녀들은 [[미치코 황태자비]]의 아이들을 친[[손주]]처럼 귀여워했다.[* 키쿠코 비는 어린 시절 친정어머니 미에코(實枝子)로부터 배운 '아리스가와 류 [[서예|서도]]'를 [[미치코 황태자비]]의 자녀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그리고 나가코 황후의 장녀 [[히가시쿠니 시게코]]는 친정어머니와 달리, 평민 출신의 큰올케 [[미치코 황태자비]]를 지지해 주었다. 하지만 나가코 황후는 '''죽는 순간까지도 큰며느리를 그렇게 미워했다고 한다'''. 자세한 시집살이 이야기들은 [[미치코 황후/갖가지 시집살이 에피소드]] 항목을 참조.&lt;br /&gt;
&lt;br /&gt;
오죽하면 &amp;quot;일본은 가장 못난 사람을 일본의 황후로 삼고, 진짜 황후감인 사람들은 한국([[이방자]])과 중국([[사가 히로]])으로 시집보냈다&amp;quot;라는 말도 있다. 이방자와 사가 히로의 모범적인 행적이, 고준황후의 이런 악행과 참으로 대비되기 때문. &lt;br /&gt;
== [[가해자가 된 피해자]] ==&lt;br /&gt;
사실 '''나가코 황후도 [[며느리]]로서 호된 시집살이를 당했다'''. 그녀의 [[시어머니]] ~~[[링 시리즈|공포 소설에서 나올 것 같은]]~~ [[사다코 태후]]는 [[화족]]인 [[쿠죠]] 가문의 딸이지만 [[서자|서녀(庶女)]]였다. 이 때문에 황족 가문의 [[적자#s-2|적녀(嫡女)]]인 맏며느리 나가코 황후에게 열등감을 느꼈다는 말도 있다. 아마 나가코 황후가 결혼 후 줄줄이 [[공주]]만 4명을 낳았던 것도 시집살이의 구실이 되었을 것이며, 또한 성장환경이나 성격의 차이 등으로 인한 갈등도 있었다고 한다. [[사다코 태후]]의 시녀 다케야 츠네코(竹屋津根子)와 나가코 황후의 시녀 다케야 시게코(竹屋志計子)는 친자매였지만, 상전들의 고부 갈등으로 인해 서로 대화조차 나누기 어려울 지경이었다.&lt;br /&gt;
&lt;br /&gt;
[[사다코 태후]]는 맏며느리를 꾸짖을 일이 있으면, 직접 꾸짖는 대신 시녀를 통하여 전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종들이 고부 간의 갈등을 직접 목격한 일도 있었다. [[다이쇼]] 덴노가 아직 살아있을 때였다. [[히로히토]] 황태자와 나가코 황태자비는 하야마(葉山)에서 요양 중인 [[다이쇼]] 덴노를 문병했다. 나가코 황태자비는 [[시어머니]] [[사다코 황후]]의 앞에서 긴장하여, [[장갑]]을 낀 채로 물수건을 짜는 실수를 저질렀다. [[사다코 황후]]는 '''&amp;quot;너는 무엇을 시켜도 못나게 구는구나!!&amp;quot;'''라며 시종들도 있는 자리에서 나가코 황태자비를 꾸짖었고, 나가코 황태자비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어 잠자코 있었다. 이는 시종들에게 고부의 사이가 나쁘다고 광고한 꼴이 되고 말았다.&lt;br /&gt;
&lt;br /&gt;
그러나 나가코 황후의 '''아랫동서 3명은 [[시어머니]]로부터 귀여움을 받았다'''. [[사다코 태후]]는 둘째 며느리 세츠코 비, 셋째 며느리 키쿠코 비, 막내 며느리 미카사노미야 유리코(三笠宮百合子) 비[*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아내. [[화족]] 다카기 마사나리(高木正得) 자작의 차녀. 자녀를 낳지 못한 둘째 형님 세츠코 비, 셋째 형님 키쿠코 비와 달리, 3남 2녀를 낳았다. 그러나 세 아들 모두 부모보다 먼저 죽고 말았다. 친정아버지 마사나리는 패전 후 [[화족]]의 지위와 재산을 잃고 어려움을 겪다 자살했다.][* 유리코 비의 외삼촌 이리에 스게마사(入江相政)는 문학가 [[야나기하라 뱌쿠렌]]의 언니인 이리에 노부코(入江信子)의 3남으로, [[쇼와 덴노]]의 시종장을 지냈다. 스게마사는 이때 보고 들은 궁중의 일들을 기록했는데, 이 궁중일기는 꽤 유명해졌다.]를 귀여워하여, 그녀들을 자주 초대해서 식사와 다과를 함께 했다. 특히 세츠코 비를 귀여워했는데, 세츠코 비는 매년 [[히나마츠리]] 때마다 시집올 적에 친정에서 가져온 히나 인형들을 장식해놓고 [[사다코 태후]]와 함께 감상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사다코 태후]]가 [[1951년]] [[5월 17일]] 협심증으로 급서하자, 나가코 황후의 '''30년 가까운 시집살이'''도 비로소 끝이 났다. 그리고 그 '''시집살이는 [[미치코 황후]]를 이어 [[마사코 황태자비]]에게 대물림되고 있다.''' --[[가해자가 된 피해자|그래서 시집살이 호되게 한 며느리가 시어머니 되면 무섭다는 거다]]-- --대물림되는 [[내리갈굼]]은 일반인이나 황족이나 다를 거 없는 거 같다-- ~~군대는 전역이라도 있고, 회사는 도저히 안 되면 깽판(…)치고 사표 쓰고 나오거나 하면 되지만, 이거는 죽을 때까지 평생이니(…) 왕족이라도 다 좋은 건 아닌가 보다~~ &lt;br /&gt;
== 사망 ==&lt;br /&gt;
http://news.bbc.co.uk/olmedia/790000/images/_793266_nagako300.jpg&lt;br /&gt;
말년의 모습.~~[[이상용]]?~~&lt;br /&gt;
&lt;br /&gt;
http://nihonrekishiken.com/koujun.jpg&lt;br /&gt;
[[고쿄]] 조와덴(長和殿) 외부에 걸린 영정 사진.&lt;br /&gt;
&lt;br /&gt;
[[파일:attachment/고준황후/n8.jpg]]&lt;br /&gt;
증조할머니 나가코 태후의 장례식에 참석한, [[가쿠슈인]] 초등과 3학년생 [[마코 공주]]와 가쿠슈인 유치원생 [[카코 공주]]. &lt;br /&gt;
&lt;br /&gt;
[[2000년]] [[6월 16일]], 나가코 태후는 노환에 의한 호흡부진으로 사망했다. 향년 97세. 신화시대를 제외하면 '''역대의 황후들 중 최장 재위이며 최장수''' 기록이다. 시호는 고준황후이며, [[나라 시대]]에 편찬된 한시집 &amp;lt;가이후소(懐風藻)&amp;gt;에 실린 시구에서 시호를 정했다.&lt;br /&gt;
&lt;br /&gt;
이 장례식 때 [[미치코 황후]]와 [[마사코 황태자비]] 사이에 고부 갈등이 있었다. [[미치코 황후]]는 [[상복]]이며 [[베일]]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했는데, 당시 [[유산]] 후유증이 남아있던 [[마사코 황태자비]]는 이에 대해 '[[시어머니]]가 황족들과 시종들의 앞에서 나를 질책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주치의와 상담할 때, 이 일로 몹시 상처받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마사코 황태자비]]는 [[유산]] 후유증 때문에 시할머니 나가코 태후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알려졌으나, 사실 고부갈등 탓도 있지 않느냐는 추측이 있다.&lt;br /&gt;
&lt;br /&gt;
[[분류:일본 황실]]&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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