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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고쿠다카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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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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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년 1월 23일 (월) 01:23에 Maintenance script님의 편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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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 * 상위 항목 : [[일본/역사]]&lt;br /&gt;
http://livedoor.blogimg.jp/okomeyasan_hita/imgs/e/3/e34792b9-s.gif&lt;br /&gt;
1석 = 1두의 10배 = 1합의 백배(1합은 180ml. 우리가 아는 그 자판기 커피 종이컵으로 가득 채워서 한 컵)&lt;br /&gt;
[[1669년]]에 [[에도 막부]]가 정한  일본의 쌀 측량단위. 일본 메이지 정부의 조선 침략d으로 일제 식민지 지배를 겪은 우리나라에서는 익숙한 측량 단위다.&lt;br /&gt;
&lt;br /&gt;
다시 설명하면, 일반 성인이 하루 생쌀 한 컵으로 밥을 지어서 두 끼씩 먹으면 1년을 생활할 수 있다는 기준으로 1석으로 정했다. 일본인이 하루 세 끼씩 먹기 시작한 것은 [[겐로쿠]] 시대부터였다. 세 끼씩 먹게 돤 것은 농지를 개간해서 쌀 생산량을 늘리는 것 까지는 좋았지만  쌀이 남아 돌아 불경기를 초래한  '''쌀 쇼군'''이라고 불리우는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덕분이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lt;br /&gt;
&lt;br /&gt;
http://www.komenet.jp/faq/img/pages/ip_q01.jpg&lt;br /&gt;
지금처럼 쌀을 무게로 재는 대용량 계량기([[저울]])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무로 만든 측량기로 부피로 쟀는데, 현대의 기준으로 1합은 무게로 치면 150g이었고 따라서 1석은 그 1000배인 150000g 정도다. 쌀겨를 벗겨내고 도정한 1석의 하얀 생쌀의 무게는 135kg 정도였다. '''__즉, 1석이란 당시의 일본인 성인 남성이 하루 한 컵의 [[현미]]로 밥을 지어 먹는다고 가정하고 1년간 먹을 수 있는 단위__'''였다.&lt;br /&gt;
&lt;br /&gt;
고쿠다카(石高)[* 石을 세키가 아닌 코쿠로 읽는 것을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단어]]에서 [[한자]]가 다르게 읽힌 것으로 斛(휘 곡, 괵)이라는 글자의 대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휘란 '[[곡식]] 양을 측정하는 그릇', 또는 '말 들이'([[부피]]의 최댓값)을 의미한다. 또한 한자로 돌 석자에는 1섬(10말)이라는 뜻도 있다.]는 [[일본]] [[센고쿠 시대]] 직후 토지조사에 의해 정해진 단위이다. 구체적인 단위는 성인 남성이 1년간 먹는 쌀을 생산하는 만큼의 [[농토]]를 기준으로 이를 1고쿠다카라 했다. 이 단위는 각 [[영주]]들의 [[세력]]을 나타내는 데에 중요한 [[지표]]로서 활용되었으며 보통 100고쿠다카 당 병력 2.5명으로 계산했다. 이 말은 100석을 생산하고 일부를 세금으로 거두어 세금의 일부를 군비로 이용하여 2~3명을 [[징발]]할 수 있다는 말이다. 또한 고쿠다카가 1만 석이 넘으면 [[다이묘]](大名)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이 단위는 [[메이지 유신]] 이후의 지조개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사용되었다.&lt;br /&gt;
&lt;br /&gt;
일본의 tv 프로그램 '결착! 역사 미스테리'에 따르면 전국시대 당시 2000석의 영지는 현재 2억엔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1석을 생산하는 땅의 가치는 10만엔이라고 보면 된다.]&lt;br /&gt;
위를 바탕으로 계산하면 전국시대 총 생산량은 약 1700만석으로, 훗카이도를 제외한 당시 일본 열도의 땅값의 현가치 1조 7000만엔이다.&lt;br /&gt;
&lt;br /&gt;
고쿠다카는 쌀 생산량으로 그 단위를 정하기 때문에 땅의 실제 면적과는 상관없었고, 해당 면적에서 생산되는 쌀의 생산량만큼이 고쿠다카의 단위가 되었다. 일례로 경우 센다이 62만 석의 영지를 통치했던  [[다테 마사무네]]는 다른 가문과 같은 넓이에도 불구하고 이를 토지 개발을 통해  1년 생산량을 62만석에서 100만 석으로 만들었다. 게임개발 회사 [[코에이 테크모]]에 따르면 다테 [[가문]]의 실질 생산량은 200만석이었다고 한다. 또한 모리 가문의 쵸슈번은 세키가하라 전투 직후 연 36~37만석을 생산했으나 메이지 유신 당시 연 100만석에 가깝게 생산하였다.&lt;br /&gt;
.&lt;br /&gt;
[[홋카이도]] 남부에 있었던 [[마츠마에]] 번은 당시 기술로 벼농사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고쿠다카가 없었지만, [[에조]]([[아이누]])와의 무역을 통해 이익을 냈기 때문에 1만 석 격(格)의 [[다이묘]]로 인정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대마도]] 역시 벼농사를 할 수 있는 땅이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다름아닌 [[조선]]과의 무역이 쩔어줬으므로 대마도주 역시 [[다이묘]]로 인정받았다.&lt;br /&gt;
&lt;br /&gt;
1만석의 영지에서 거둬들이는 세금으로 약200~300명의 병사를 징발할 수 있다. 적으면 200명, 많으면 300명이고 웬만하면 250명 정도 징발하였다.&lt;br /&gt;
&lt;br /&gt;
[[분류:센고쿠 시대]]&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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