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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광교산 전투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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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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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년 1월 23일 (월) 04:50에 Maintenance script님의 편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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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1-23T04:50:5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 * 상위항목 : [[전투 목록/한국사]], [[병자호란]]&lt;br /&gt;
&lt;br /&gt;
||||||&amp;lt;tablealign=right&amp;gt;&amp;lt;#C0C0FF&amp;gt;&amp;lt;:&amp;gt; {{{+1 '''전쟁/전투 공식 명칭'''}}} ||&lt;br /&gt;
||||||&amp;lt;:&amp;gt;  [[병자호란]]의 일부 ||&lt;br /&gt;
||||||&amp;lt;:&amp;gt; [* 1637년 1월 5일 ~ 6일. 지도의 오른쪽에 나와있는 정세규는 충청감사로, 광교산 전투 3일전에 벌어진 [[험천 전투]]를 뜻한다.] ||&lt;br /&gt;
||||||&amp;lt;:&amp;gt;&amp;lt;#C0C0FF&amp;gt;   '''날짜''' ||&lt;br /&gt;
||||||&amp;lt;:&amp;gt;  1637년 1월 30 ~ 31일 &lt;br /&gt;
(인조15년 1월 5일 ~ 6일) ||&lt;br /&gt;
||||||&amp;lt;:&amp;gt;&amp;lt;#C0C0FF&amp;gt;   '''장소''' ||&lt;br /&gt;
||||||&amp;lt;:&amp;gt;  [[경기도]] [[용인시]] [[광교산]] ||&lt;br /&gt;
||||||&amp;lt;:&amp;gt;&amp;lt;#C0C0FF&amp;gt;   '''이유''' ||&lt;br /&gt;
||||||&amp;lt;:&amp;gt;  [[남한산성]]에 포위된 [[인조]] 구출 ||&lt;br /&gt;
||&amp;lt;:&amp;gt;&amp;lt;#C0C0FF&amp;gt;   '''교전국'''||&amp;lt;^|1&amp;gt;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1/19/Flag_of_the_King_of_Joseon_%28Fringeless%29.svg/574px-Flag_of_the_King_of_Joseon_%28Fringeless%29.svg.png?width=23 [[조선]] ||&amp;lt;^|1&amp;gt;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d/dd/Flag_of_the_Qing_dynasty_%281889-1912%29.svg/150px-Flag_of_the_Qing_dynasty_%281889-1912%29.svg.png?width=23 [[청나라]] ||&lt;br /&gt;
||&amp;lt;:&amp;gt;&amp;lt;#C0C0FF&amp;gt;  '''지휘관''' ||&amp;lt;^|1&amp;gt;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1/19/Flag_of_the_King_of_Joseon_%28Fringeless%29.svg/574px-Flag_of_the_King_of_Joseon_%28Fringeless%29.svg.png?width=23 김준룡 ||&amp;lt;^|1&amp;gt;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d/dd/Flag_of_the_Qing_dynasty_%281889-1912%29.svg/150px-Flag_of_the_Qing_dynasty_%281889-1912%29.svg.png?width=23  양굴리† ||&lt;br /&gt;
||||||&amp;lt;:&amp;gt;&amp;lt;#C0C0FF&amp;gt;   '''결과''' ||&lt;br /&gt;
|||||| 조선군의 승리 ||&lt;br /&gt;
||&amp;lt;#C0C0FF&amp;gt;&amp;lt;:&amp;gt; '''병력''' || 2,000명 || 5,000명 ||&lt;br /&gt;
||&amp;lt;#C0C0FF&amp;gt;&amp;lt;:&amp;gt; '''피해규모''' || 불명 || 지휘관 전사 ||&lt;br /&gt;
[*템플릿이미지출처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_id=CP_THE009&amp;amp;cp_code=cp0208&amp;amp;index_id=cp02081356&amp;amp;content_id=cp020813560001&amp;amp;search_left_menu=4|문화컨텐츠닷컴 군사/외교]]]&lt;br /&gt;
[목차]&lt;br /&gt;
== 개요 ==&lt;br /&gt;
[[조선]]의 [[병자호란]] 때 벌어진 전투. [[김화 전투]]와 함께 병자호란 당시 대표적인 승첩이다.&lt;br /&gt;
&lt;br /&gt;
이 전투에서 [[청태종]]의 매부인 양굴리(揚古利[* 음차해서 한자로 양고리가 되는데 대게 이 음차로 많이 알려져있다.])가 전사했다. 양굴리는 전투 경험이 많은 명장으로, [[험천 전투]]에서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충청도 근왕병을 격파하기도 했다. 당연히 양굴리의 전사는 청군에 큰 충격을 줬다.&lt;br /&gt;
&lt;br /&gt;
병자호란 자체가 [[삼전도의 굴욕]]으로만 알려지다 보니 대중들에겐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전투다.&lt;br /&gt;
&lt;br /&gt;
== 전라도 근왕병과 양굴리의 움직임 ==&lt;br /&gt;
1636년 12월 20일(이하 음력), [[인조]]가 [[남한산성]]에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전라감사 이시방과 전라병사 김준룡은 급히 전라도 각 고을에서 병력 6,000명을 모왔다. 이때 화엄사의 승려인 벽암(碧巖) 각성(覺性)이 이끌던 승병 2,000명도 합류하여 총 8,000명의 전라도 근왕병이 남한산성을 향하여 북진하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1637년 1월 2일, 양지에 도착하자 이시방은 김준룡을 선봉장으로 삼아 병력 2,000명을 주고 먼저 남한산성에 진군하게 했다. &lt;br /&gt;
&lt;br /&gt;
한편, 청군의 양굴리 장군은 1월 2일 [[험천 전투]]에서 충청도 근왕병을 격파했다. 전투가 끝난 후 양굴리는 김준룡의 2,000 선봉대의 소식을 들고 곧장 병력 2,000명을 광교산 동쪽에 배치하여 남한산성과 김준룡 부대의 연락을 차단하고, 자신은 직접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김준룡을 격파하기 위해 [[광교산]]으로 향한다.&lt;br /&gt;
&lt;br /&gt;
== 전투 전개 ==&lt;br /&gt;
1월 4일, 광교산에 도착한 김준룡은 병력을 배치하고 군수품을 진영 중앙에 비축하여 태세를 갖추며 남한산성과 연락을 시도한다.&lt;br /&gt;
&lt;br /&gt;
1월 5일, 마침내 청군이 광교산 부근에 도착한다. 청군은 수차례에 걸쳐서 공격을 시도하나, 조선군은 청군에 공격에 대비하여 미리 진영 주변에 목책을 세우고 진형을 잘 정비해놨다. 청군이 공격해 들어오면 총포로 집중사격하여 타격을 입히고, 청군이 퇴각하면 궁병과 창병이 청군의 배후를 가격하여 타격을 입혔다. 수차례 청군의 공격을 막아낸 조선군은 총포를 쏘고 불을 지피는 등 자신들이 왔다는 걸 남한산성에 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lt;br /&gt;
&lt;br /&gt;
1월 6일, 양굴리는 다시 총공세를 펼친다. 조선군은 대오를 지키며 맞서 싸웠으나 숫적 열세에 마침내 청군이 조선군 진영의 후방을 돌파하여 난입하기 시작한다. 이에 김준룡은 '''&amp;quot;이는 바로 충신(忠臣)이 나라에 보답할 때이다!&amp;quot;'''라고 외치며 표하군(지휘관 직속 병력)수백을 이끌고 진영에 난입한 청군을 향해 돌격한다. 마침내 전투는 혼전에 돌입하고, 혼전 도중 조선군 저격수~~[[공스나]]~~가 양굴리를 사살한다. 지휘관을 잃은 청군은 순식간에 흐트러지며 진열이 붕괴했고, 이에 조선군이 총 반격에 나서 청군은 패주한다.&lt;br /&gt;
&lt;br /&gt;
이 전투로 청군은 지휘관을 잃고 병력 다수를 상실, 동쪽으로 패주한다. &lt;br /&gt;
&lt;br /&gt;
== 전투 이후 ==&lt;br /&gt;
전투에서 승리한 김준룡은 지휘관을 잃은 청군이 복수를 위해 다시 공격을 할 것이라 예측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앞선 전투로 탄약과 군량이 거의 바닥[* 왕이 포위된 상황에서 급하게 병력과 군수품을 모은 터라 넉넉하게 모으지 못했다.]났고, 결국 김준룡의 선봉대는 보급을 위해 수원을 향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이시방은 김준룡이 수원을 향한 게 패전을 했기 때문이라 오판하고 급히 공주로 병력을 후퇴시킨다. 이시방이 후퇴함으로써 본대와 연락이 끊긴 김준룡의 선봉대도 수원에 계속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이시방이 다시 남한산성으로 향했을 때는 이미 [[삼전도의 굴욕|인조가 항복을 하기 위해 나온 상황이었다]]...&lt;br /&gt;
&lt;br /&gt;
== 여담 ==&lt;br /&gt;
병자호란의 또 다른 승전인 [[김화 전투]]에서도 조선군이 승리하고도 탄약 등 군수품이 부족해 진격이 늦춰졌다. 전국 각지의 조선군에게 이런 식의 물품 부족 현상이 일어난 이유는 인조가 남한산성에 포위 당하여 항복할 위기에 처하자 조선군들이 제대로 준비도 못한 채 인조를 구출하기 위해 급히 출발했기 때문이다. 만약 인조가 [[선조]]처럼 도망이라도 잘 쳤으면 조선군도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었겠고, 지휘권도 통일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병자호란은 오히려 [[청태종]]이 [[역관광]] 당했을 가능성이 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이러한 물품의 부족으로 인한 후퇴는 당시 조선군의 근본적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장기전을 감당할 수 없을 경우 전술적으로 공세를 취하여 빠른 시간 내에 전투를 끝내야 하는데, 당시 조선군은 물품이 부족한 상태에서도 야전에서 청군을 격파하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전력이었기 때문에 방어전으로 일관해야 했다는 것이다. 심하게 말해서, 청군이 공격하지 않았다면 조선군은 광교산에서 사흘동안 구경만 하다가 식량이 떨어져서 후퇴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lt;br /&gt;
&lt;br /&gt;
광교산에서의 승전 소식을 들은 남한산성은 [[희망고문|곧 구출될 거란 ~~헛된~~ 희망을 가졌다고 한다.]]&lt;br /&gt;
&lt;br /&gt;
그리고 이 승전은 [[수원화성]]이 축조 될 때에서야 [[채제공]]에 의해 전승비가 새겨져 기려졌다.&lt;br /&gt;
&lt;br /&gt;
[[분류:병자호란]]&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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