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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만중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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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6-26T22:56:54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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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년 1월 24일 (화) 03:28에 Maintenance script님의 편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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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1-24T03:28:5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5/52/Kim_Man-jung.jpg/225px-Kim_Man-jung.jpg[* 사진 출처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5/52/Kim_Man-jung.jpg/225px-Kim_Man-jung.jpg|위키백과]]]&lt;br /&gt;
&lt;br /&gt;
金萬重&lt;br /&gt;
(1637~1692)&lt;br /&gt;
&lt;br /&gt;
호는 서포. 본은 광산(光山).&lt;br /&gt;
&lt;br /&gt;
아버지 김익겸이 정축호란([[병자호란]] 이듬해) 당시 [[강화도]]에서 순절[* 강화성이 청군에게 무너지자, 책임자가 아님에도 화약으로 자폭한 김상용(아우가 [[김상헌]]이다. 형이 이렇게 죽었으니 더더욱 청을 증오할 수 밖에)과 같이 자살했다. 정작 책임자인 찌질이 [[김경징]]은 달아났다가 [[사약]]을 먹고 죽는다.]한 탓에, 아버지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태어났다. 다시 말하면 [[유복자]]. 어머니 [[해평 윤씨]]([[윤두수]]의 고손녀) 밑에서 엄한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어머니 윤씨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자녀교육에 심혈을 기울였고, 어린 김만중이 집안 살림을 걱정해 보고싶은 책을 사지 않자 회초리를 치면서 자기가 하루종일 짠 옷감 절반을 뚝 잘라 줬을 정도였고, 또 자신이 직접 서책을 빌려와서 교본을 만들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김만중은 대단한 효자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소설 [[구운몽]]이 홀로 되신 어머니의 여흥을 위해 지어진 소설이라는 설이 있을정도이다...[* 그런데 저게 사실이면 굉장히 해괴한 상황이 벌어지는 게, 구운몽은 공부한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현대 미연시 구조와 굉장히 흡사하다.(특히 하렘) 이런게 어머니의 취향에 맞았다면 그 어머니는 설마 여덕후?(…)][* 여성들 개개인에게 초점을 맞춰 보면 그 시대의 순종적인 여성상과는 다른 진취적이고 능동적인 여성상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 부분이 어머니를 위해서라고 볼 수도 있다.]&lt;br /&gt;
&lt;br /&gt;
그의 형 김만기는 [[숙종(조선)|숙종]]의 장인[* 숙종의 첫째 왕후인 [[인경왕후|인경왕후 김씨]]가 그의 여식이다.]으로, 현종 말엽부터 숙종 초엽까지 막강한 권세를 행사했던 인물이었으며 숙종의 [[환국(조선)]] 정치에도 적극 관여하여 남인들을 박살내는 데 큰 몫을 한 인물이었다. 당파적으로 김만기와 김만중은 모두 서인에 속했고, 만기-만중 형제 모두 [[송시열]]의 열렬한 추종자였다고 한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김만중 형제의 증조부가 다름 아닌 [[이이(조선)|이이]]의 학통을 이어 조선 중기 서인의 사상적 흐름을 주도한 '''[[김장생]]'''이다. 또한 [[송시열|우암]]이 김장생의 학통을 이어받은 입장이기도 했고.[* 하지만 의외로 교조주의 성리학적 관점을 가지진 않았을거란 설이 많다. 그의 소설을 봐도 알겠지만 [[불교]]적, [[도교]]적 용어를 거침없이 사용하기도 하고 별로 대접받지 못한 소설을 그것도 한글로 쓴 것만 해도... 때문에 그가 과연 당대의 교조주의자였던 송시열의 추종자였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부분. 근데 송시열이 열혈 주자추종자였던 것이야 이론이 없지만 그렇게까지 꼴통이었던 건 또 아니다. [[송시열]] 항목 참조. 그리고 김만중의 행위는 송시열 추종자가 아니면 도무지 안할 짓들이 많아서리... 송시열을 위해 유배까지 간 양반이 김만중이다.]&lt;br /&gt;
&lt;br /&gt;
어쨌든 이런 어머니의 정성과 김만중 본인의 노력으로 1665년에 과거에 급제,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1671년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도]]와 충청, 전라, 경상도를 시찰했고 이듬해에는 동부승지가 되었지만, 효종비 인선왕후의 사망으로 불거진 제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패배하자 서인이었던 김만중도 파직되어 처음으로 관직 생활에서 쓴맛을 보게 된다.&lt;br /&gt;
&lt;br /&gt;
1679년에 복직하여 예조참의, 공조판서, 대사헌 등을 지냈지만 탄핵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했고, 1686년에는 [[장희빈]] 일가에 대해서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분노를 사서 처음으로 선천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최근 발견된 서포연보에서는 그간 알려진 것과는 달리 [[구운몽]]이 선천 유배 시절에 쓴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lt;br /&gt;
&lt;br /&gt;
이듬해 귀양에서 풀려났지만,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 세력이 대거 축출되면서 김만중도 다시 [[탄핵]]을 받아 남해의 노도[* 렛츠고 시간탐험대가 이곳에서 조선시대 유배생활을 재현했다. 김만중이 살던 집도 복원되어 있었다.]로 유배되었다. 어머니 윤씨는 아들을 걱정하다가 사망했으며, 김만중은 어머니의 장례에 참석하지 못한 채 유배지인 남해에서 1692년에 끝내 사망했다. 알려지기로는 남해에서 숙종을 참회시키기 위해 [[사씨남정기]]를 집필했다고 한다. 실제로 [[숙종]]은 [[사씨남정기]]를 보다가 주인공[* 공부한 사람은 알겠지만, '''이 주인공의 모델이 숙종이다.''']의 처사에 분노해 책을 집어던졌다고 한다. --숙종이 빡치는게  당연하지. 자기를 깠으니까.--&lt;br /&gt;
&lt;br /&gt;
조선시대의 다른 학자들과 달리 독특하게 [[한글 소설]]을 쓴 인물인데, 한글로 쓴 문학이라야 진정한 국문학이라는 국문학관을 피력하였다고 한다. 이런 면모는 2003년 KBS판 [[장희빈]]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 구운몽의 경우는 한문본과 [[한글]]본이 모두 존재하는데, 대체로 학자들은 가장 오래된 구운몽 필사본이 한글판인 것으로 보아 김만중이 한글로 구운몽을 썼을 것이라 본다. 이로 인해 김만중은 한글로 쓴 것이 국문학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인정받는다. 당시 조선 사회의 상류층들이 [[한글]]을 '언문(諺文)', 좀 더 심하게 얘기하자면 '암클'(여자들이 쓰는 글), '중글'(승려들이 쓰는 글), '아햇글'(아이들이 쓰는 글), '상말글'(상민들이 쓰는 글)이라고 푸대접했던 데 비해, 김만중은 한글을 국서(國書)라고 칭할 정도로 한글을 높이 평가했다.&lt;br /&gt;
&lt;br /&gt;
김만중이 [[정철]]의 문학 3편([[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좌해진문장[* 우리나라의 참된 문장]이라며 높게 친 것도 한글 비중이 높고 표현이 수려했기 때문이며, 그 중에도 한글 비중이 가장 높은 속미인곡을 최고로 쳤다.[* 물론 정철과 시대는 다를지언정 김만중과 마찬가지로 서인으로 영수까지 지낸 인물이고, 정철의 미인곡의 주내용이 결국 유배중이던 정철이 '임금님 싸랑해요, 그러니까 '''나좀 풀어줘요'''라는 내용'~~하지만 관동별곡도 결국 애널서킹 문학...~~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역시 유배중이던 김만중에게는 마음에 팍팍 꽂혔을 것이다.][* 단 차이점이라면 그의 경우엔 [[사씨남정기]]를 쓰면서 숙종을 모델로 한 유연수라는 남캐를 창조하여 숙종을 대차게 깠다. 그런데 여기에는 김만중이 노론으로 인현왕후와는 인척이라서 인현왕후 옹호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라는 이야기가 있는지라...]&lt;br /&gt;
&lt;br /&gt;
현재는 김만중 문학상을 매년 개최함으로써 그의 조선에서의 활약을 기리고 있다. &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lt;br /&gt;
[[분류:조선/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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