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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병로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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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6-26T20:41:48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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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년 1월 24일 (화) 03:34에 Maintenance script님의 편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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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1-24T03:34:1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amp;lt;tablealign=center&amp;gt;&amp;lt;tablewidth=500&amp;gt;&amp;lt;:&amp;gt; [[대법원장|역대 대한민국 대법원장]] ||&lt;br /&gt;
||||||||||||||&amp;lt;:&amp;gt; http://kmug.co.kr/board/data/logo/%EB%8C%80%EB%B2%95%EC%9B%90.png ||&lt;br /&gt;
||&amp;lt;width=30%&amp;gt;&amp;lt;:&amp;gt; 남조선과도정부[br]사법부장[br]'''김병로''' ||&amp;lt;:&amp;gt; {{{+1 ←}}} ||&amp;lt;width=30%&amp;gt;&amp;lt;:&amp;gt; '''1대 김병로''' ||&amp;lt;:&amp;gt; {{{+1 →}}} ||&amp;lt;width=30%&amp;gt;&amp;lt;:&amp;gt; 2대 조용순 ||&lt;br /&gt;
&lt;br /&gt;
http://ncc.phinf.naver.net/ncc01/2012/10/29/78/frame01.jpg?type=w323&lt;br /&gt;
&lt;br /&gt;
金炳魯&lt;br /&gt;
1887∼1964. &lt;br /&gt;
&lt;br /&gt;
{{{#!html&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www.youtube.com/embed/4gd7P9nUT0w&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목차]&lt;br /&gt;
== 소개 ==&lt;br /&gt;
&amp;gt;'''&amp;quot;이의 있으면 항소하시오!&amp;quot;'''&lt;br /&gt;
&lt;br /&gt;
&amp;gt;'''&amp;quot;사법관으로서의 청렴한 본분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될 때는 사법부의 위신을 위하여 사법부를 용감히 떠나야 한다.&amp;quot;'''&lt;br /&gt;
&lt;br /&gt;
한국의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이자 정치가이다. 호는 가인(街人)이다. 일제강점기 시기 [[이인]], [[허헌]]과 더불어 '''3대 인권 변호사'''로 유명했다.&lt;br /&gt;
&lt;br /&gt;
== 일생 ==&lt;br /&gt;
=== [[구한말]] ~ [[일제강점기]] ===&lt;br /&gt;
1887년 [[전라북도]] [[순창군]]에서 태어났다.&lt;br /&gt;
&lt;br /&gt;
아홉 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집안의 가장이 되었으며, 조선 최후의 거유(巨儒) 라 불리는 간재 전우 문하에서 전통적인 성리학 교육을 받다가 1906년 창평군[* 1914년 [[담양군]]에 흡수되었다.]의 창흥학교에 입학했다. 1910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 전문부 법학과와 [[메이지 대학]] 야간부 법학과에 입학하여 동시에 두 학교를 다녔으나, 폐[[결핵]]으로 귀국했다. 1912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 대학 3학년에 편입하여 이듬해 졸업하고, 1914년 주오대학 고등연구과[* 일종의 대학원 과정]를 마치고 귀국했다.[* 니혼대학 법학과는 1889년 일본에 일본제국 헌법이 제정공표된 뒤, 당시 법무대신이던 야마다 아키요시 가 법률연구를 위해 설립한 일본법률학교(1889년)를 모체로 한다. 일본 제국헌법이 독일제국 프로이센 헌법을 받아들인 것이므로 독일법 위주의 법학과라 볼 수 있다. 반면 메이지 대학 법학과는 프랑스법을 연구한 학자들이 설립한 메이지 법률학교(1881년)가 모체이며, 주오대학교 법학과는 1885년 설립된 영국(英吉利) 법학교가 모체이다. 김병로는 세 학교를 다니며 독일법, 프랑스법, 영국법 모두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lt;br /&gt;
&lt;br /&gt;
귀국한 뒤 [[서울대학교|경성전수학교]]와 [[보성전문학교|보성법률상업학교]]의 강사로 형법과 소송법 강의를 맡았으며, 1919년 경성지방법원 소속 [[변호사]]로서 개업했다. 변호사 시절, 그는 수많은 독립운동 관련 사건을 무료 변론하였으며, 다채로운 사회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공헌했으며, 1927년 좌우합작 성격의 합법적인 단체였던 '''[[신간회]]'''에서도 적극 활동했다. 당시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조사하였다. 대표적인 민족변호사로서, 긍인 [[허헌]], [[이인]]과 더불어 '3인'(세 사람 모두 이름이나 호에 '인'이 들어갔으므로)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 허헌은 메이지 대학 법학과, 이인은 니혼대학 법학과, 메이지 대학 법학과 출신이므로, 김병로는 둘다 동문 선후배이기도 하다. 이외에 동시기 민족 변호사로 할동한 김용무도 김병로의 주오 대학 동문] 1932년부터는 경기도 [[양주시|양주군]]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면서 광복될 때까지 13년간을 은둔생활로 일관하였다. 따라서 [[창씨개명]]하지 않았고, [[조선총독부]]의 배급도 받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 [[미군정]] ~ [[대한민국]] ===&lt;br /&gt;
1945년 [[8.15 광복]] 직후, 초창기에 [[안재홍]]을 통해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려 했으나 이내 곧 건준위 중앙위(서울지부)내부에서 조선공산당 재건파가 주도권을 잡아 급진화되어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자 이에 반대의사 밝히며 합류하지 않고 9월 초,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1946년 [[좌우합작운동]] 활동 당시 합작노선을 지지표명하며 한민당을 탈당했다. 이후 남조선 과도정부 사법부장을 지냈다. 1948년 초대 [[대법원장]], 1953년 제2대 [[대법원장]]이 되어 1957년에 70세로 정년 퇴임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같은 인권변호사로 동지였던 [[허헌]]과 달리 보수주의자로 6.25 전쟁 중 북한군에게 아내를 잃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공보다 인권을 우선시하였으며,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1950년에는 골수암 치료 때문에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만 했다. 다리를 절단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 전쟁이 터져서, 불편한 몸으로 피난 생활을 겪었다.[* 이때 한 말이 '앉아서 연구만 할 수 있으니 잘 됐네.' (..)] 이 때 아내를 친정인 [[담양군]]으로 보냈다가, 북한군([[빨치산]])에게 아내가 살해당하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제왕적 사고를 가지고 있던 [[이승만]]과는 사법부의 독립을 위해 대립하는 관계[* 하지만 [[이승만]]은 친일파가 아니였고, 그 점에 있어 김병로도 마찬가지였다. 이 전Ver에서 이승만은 '3권분립과 사법부 독립의 중요성 모를리 없다'고 기술되어있는데, 실제로 이승만은 자신이 '''절대적인 국부'''가 되길 원하던 사람으로 의회,사법부를 다 자기것으로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명예욕은 특히 나이가 들수록 심해져갔는데, 당장이라도 [[진보당 사건]] 때 사사건건 재판에 개입하는가하면, 사법부에 압력을 넣는등 법치를 파괴하는 반민주주의적인 행태를 보였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0061400329204001&amp;amp;editNo=3&amp;amp;printCount=1&amp;amp;publishDate=1990-06-14&amp;amp;officeId=00032&amp;amp;pageNo=4&amp;amp;printNo=13759&amp;amp;publishType=00020|#]] 여담으로 이승만은 사석에서 주변인물에게 김병로 대법원장의 안부를 물을때, &amp;quot;constitution(헌법)은 잘 있는가?&amp;quot;라고 물었다 한다. 이는 자신의 권력욕 때문에 김병로 대법원장과는 대립했으나, 인격적으로 비난하거나 증오하는 관계는 아니었다는것을 보여주는 대목.]였으며 초대 대법원장 임기 중 반민특위 활동 적극지지하였고 반민족행위 처벌 재판 판사로 활동하여 이승만과 대립하기도 했다. 또한 전시중이던 1952년 이승만이 일으킨 [[발췌 개헌|부산 정치파동]]에도 반발하였다. 이승만이 법원의 판결을 비난하자 '억울하면 절차를 밟아 항소하면 될 일'이라고 받아친 것은 오늘날까지도 명언으로 꼽힌다. 그가 초대 대법원장으로서 소장 판사들을 보호한 덕에 사법부는 비교적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후임으로 친일 판사 백한성, [[민복기]], [[김용철]] 등 그의 후임 대법원장들은 그만한 역량이 없거나 오히려 독재정권에 아부한 탓에 [[진보당 사건]], [[사법 파동]], [[10월 유신]]을 거치면서 사법부의 독립은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lt;br /&gt;
&lt;br /&gt;
정년퇴임 후 [[변호사]]로 활동하였으며, 1960년 총선 때 고향인 [[순창군]]에서 민의원 후보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떨어진 이유가 선거 벽보만 붙히고 선거운동을 안했다고 한다. 선거 운동을 안한 이유가 가관인게 '어떻게 아랫사람들한테 표를 달라고 고개를 숙이나?' 라는 이유였다고.] [[5.16 군사정변]] 당시 [[박정희]]의 민정 참여와 군정의 지속을 반대하였다. 1963년 [[민정당]] 대표최고위원과 ‘[[국민의당(1963년)|국민의당]]’의 창당에 참여 --정작 [[김종인|손자]]는 [[국민의당(2016년)|국민의당]]이 아니라 [[더불어민주당]]에 비대위원장으로 있다-- 하여 그 대표최고위원으로 [[윤보선]], [[허정(정치인)|허정]]과 함께 야당통합, 대통령 단일후보 조정작업 등 야당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인 1964년 향년 77세로 별세하였다.&lt;br /&gt;
&lt;br /&gt;
말년에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후손 중에는 손자 [[김종인]]이 있다.&lt;br /&gt;
&lt;br /&gt;
== 어두운 이면 ==&lt;br /&gt;
 *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인 [[이태영]]씨와 약간의 인연이 있다. 이태영이 여성 인권의 향상을 골자로 한 가족법 개정안을 제출하자 &amp;quot;천오백만 여성들이 불평 한 마디 없이 다 잘 살고 있는데, 법률줄이나 배웠다고 건방지게 법을 고치라고 나서다니!&amp;quot;[* 이렇듯 여성 인권에 대해서는 무심한 편이었다. 여자는 집에서 밥이나 하라고 할정도로..]며 호되게 꾸짖었다고. 이것은 그가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은 보수주의자인데다 시대를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봐야할 것이다. 서구권에서도 양성평등이 제대로 시작된게 20세기이니. 하지만, 아이러니한 점으로 이승만이 판사 임용을 거부할 당시 이태영을 임용할 것을 건의한 사람이 바로 김병로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거의 평생을 미국에서 살았던 이승만보다, 평생 한복을 입었다는 유학자 김병로가 이 부분에서는 더 깨어 있었다는 것.] 판사 임용을 건의할 권한이 대법원장에게 있으니 이 또한 당연한 행동이지만..~~츤데레~~&lt;br /&gt;
 &lt;br /&gt;
 * [[신간회]] 활동 당시, 지도부 위치에 올랐을때, 자치론자들과 제휴를 모색하는 등 타협적인 노선을 띄어 지방의 신간회 지회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타협적인 지도부의 등장은 이후 신간회 해소론의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고, 조직은 급격한 쇠퇴의 길로 빠져들게 만든 장본인으로 비판받는 시각도 있다.[[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01217181059698|#]]&lt;br /&gt;
&lt;br /&gt;
== 여담 ==&lt;br /&gt;
&lt;br /&gt;
 * 현재 [[법학전문대학원]]생들이 참가하는 모의 법정변론경연대회로 김병로의 호를 딴 '''가인'''법정변론경연대회가 있다. 이후 다른 유사한 변론경연대회가 우후죽순처럼 생겼지만(대부분 특정 분야에 대한 대회이다) 이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대회이다.&lt;br /&gt;
&lt;br /&gt;
 * [[도봉구]]에 이 사람의 이름을 딴 [[초등학교]]와 [[터널]]이 존재한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amp;amp;mid=sec&amp;amp;oid=001&amp;amp;aid=0007816148&amp;amp;sid1=001|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집터 인근도로 '가인 김병로길'로]] ~~이 터널을 지나면 서울북부지방[[법원]]으로 갈 수 있다.~~ 고향 순창에는 가인연수원이 생겼다.&lt;br /&gt;
&lt;br /&gt;
 * 둘째 아들 [[김재열(1913)|김재열]]은 [[보성전문학교]]와 큐슈(九州)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변호사 시보를 마친 후, 변호사 개업을 하기 직전에, 그것도 해방을 불과 1년 앞둔 해인 1944년에 병마로 사망하였다. 그래서 김재열의 외아들이자 김병로의 손자인 [[김종인]]은 할아버지 김병로 슬하에서 어렵게 커야 했다.&lt;br /&gt;
&lt;br /&gt;
 * 95년 김병로의 일대기를 다룬 KBS 1TV &amp;lt;인간극장&amp;gt; 특집 '가인 김병로'가 방영됐는데 [[신구(배우)|신구]](노년), [[김경응]](청장년)이 주인공 김병로 역을 맡았다.&lt;br /&gt;
== 관련항목 ==&lt;br /&gt;
 * [[이인]]&lt;br /&gt;
 * [[허헌]]&lt;br /&gt;
 * [[유진오]]&lt;br /&gt;
 * [[김종인]]&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분류:대한민국 대법원장]][[분류:교수]]&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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