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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상용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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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6-26T19:35:47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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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년 1월 24일 (화) 03:38에 Maintenance script님의 편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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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1-24T03:38:3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 * [[김(성씨)/목록]]&lt;br /&gt;
 * [[동명이인/ㄱ]]&lt;br /&gt;
[목차]&lt;br /&gt;
== [[조선]] 중기의 관료 ==&lt;br /&gt;
 * [[한국사 관련 정보]]&lt;br /&gt;
&lt;br /&gt;
||&amp;lt;:&amp;gt;이름||김상용(金尙容)||&lt;br /&gt;
||&amp;lt;:&amp;gt;생몰년도||1561년 ~ 1637년(76년)||&lt;br /&gt;
||&amp;lt;:&amp;gt;사망원인||화약을 이용해 폭사로 순절||&lt;br /&gt;
&lt;br /&gt;
서울 출생. 본관은 안동.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풍계(楓溪)·계옹(溪翁)이다. 청음 [[김상헌]]의 형이다. [[장유]]의 장인으로, [[효종(조선)|효종]]의 비인 [[인선왕후]]의 외조부이기도 하다.&lt;br /&gt;
&lt;br /&gt;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절하였다.&lt;br /&gt;
&lt;br /&gt;
그의 직계 자손이 [[김옥균]], [[김가진]], [[김좌진]]이다.&lt;br /&gt;
&lt;br /&gt;
== 20세기의 시인 ==&lt;br /&gt;
 * 상위 항목: [[시인]]&lt;br /&gt;
&lt;br /&gt;
{{| 金尙鎔,1902.9.28~1951.6.22) |}}&lt;br /&gt;
&lt;br /&gt;
=== 소개 ===&lt;br /&gt;
1900년대 초에 태어난 [[일제강점기]]의 시인이다. 호는 월파(月波)이다. &lt;br /&gt;
&lt;br /&gt;
=== 일생 ===&lt;br /&gt;
[[경기도]] [[연천군]] 남면에서 태어났다. 이후 경성제일고보 입학하였고 보성고보 졸업하였다. 대학교는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이화여전]] 교수를 역임한 후 여러 시를 발표한 시인이다. 서정시 '무상' 등의 작품이 있다. [[동아일보]]에 '그러나 거문고의 줄은 없고나'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게 된다. 이후 '대화', '포구', '마음의 조각'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에 열중하게 된다. &lt;br /&gt;
&lt;br /&gt;
그의 시가 가지고 있는 특징은 '나와 자연의 동일성'이다. 나와 자연의 관계에서는 어떠한 대립도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그의 시에 반영되어 있다. 또한 '나와 자연의 화해'를 설파하며 '자연의 품에 안긴 삶'을 꿈꾸었다. 인위적인 것과 그것에 투영된 삶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자연과 더불어 살기를 동경하였다. [[1939년]], 시집 '망향(望響)'이 출간되었다. 그는 소설집인 '무궁화'도 남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허탈하면서 초탈한 듯한 ''''왜 사냐건 웃지요''''란 구절은 지금도 사람들에게 자주 쓰이는 유행어이다.&lt;br /&gt;
&lt;br /&gt;
[[광복]] 이후에는 미군정 하에서 [[강원도]] 도지사로도 임명되었으나 며칠만에 사임하고 [[이화여대]] 교수, 학무처장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1946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3년 동안 [[보스턴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연구하였다. [[6.25]]가 터지자 [[부산]]으로 피난갔지만 1951년 6월 22일, 갑작스런 [[식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다.&lt;br /&gt;
=== 작품 ===&lt;br /&gt;
 * [[남으로 창을 내겠소]]&lt;br /&gt;
&lt;br /&gt;
=== 관련 문서와 자료 ===&lt;br /&gt;
[[http://ko.wikipedia.org/wiki/%EA%B9%80%EC%83%81%EC%9A%A9_(%EC%8B%9C%EC%9D%B8)|한국어 위키백과 - 김상용 (시인)]]&lt;br /&gt;
&lt;br /&gt;
=== 흑역사 ===&lt;br /&gt;
이런 유명한 시를 남긴 시인에게도 흑역사가 있다. 바로 그가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인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벌어진, 도둑 누명을 쓴 학생의 [[자살]] 사건이다. &lt;br /&gt;
&lt;br /&gt;
[[기숙사]]에 살면서 학교 청소 등의 일을 하며 고학하던 문XX[* [[제주도]]에서 서울로 상경하여, [[진명여자고등학교|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 양이라는 여학생이 있었는데, 문 양은 금전출납부를 관리하며 사생들의 돈을 맡아주는 일도 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어느날 주XX 양이 문 양에게 40원을 맡긴 후 20원을 찾아 썼다. 이후 주 양이 남은 20원을 찾아 쓰려고 문 양을 찾아갔는데, 금전출납부에는 주 양이 이미 나머지 20원도 찾아간 것으로 되어 있었다. 주 양은 문 양이 [[도둑]]이라며 펄펄 뛰었고, 문 양은 억울하다며 펄펄 뛰었다. 문 양이 [[사감]] 박은혜[* 목사의 딸이며, [[미국]]에 유학하여 영문학과 종교학을 공부했다. [[이화여전]] 영문학 교수 및 사감,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장, 은석초등학교 이사장 등을 지낸 교육자이다. 문 양의 일로 김상용이 호된 비판을 당할 때, 박은혜도 함께 비판을 받았다.] 선생에게 불려갔다 올 때마다 학우들이 문 양을 보는 눈길은 싸늘해졌고, 문 양은 학우들로부터 철저히 따돌림을 받았다. &lt;br /&gt;
&lt;br /&gt;
당시 [[이화여전]] 문과학장이었던 김상용은 문 양을 다독이고 도둑 누명을 풀어주기는커녕 '''&amp;quot;네가 했다고 시인해라. 돈은 내가 채워주겠다&amp;quot;'''라는 말을 하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문 양을 죽음으로 내모는 결과를 초래했다. 문 양은 가족과 학교, 학우들 등에게 보내는 [[유서]] 5통을 남긴 채, 1937년 1월에 학교 교정의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lt;br /&gt;
&lt;br /&gt;
의외로 이 사건은 당대 문단에서 엄청난 논란을 초래했다. 당대의 명 시인인 김상용이 교육자로서 제대로 된 처신을 못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는데 심지어는 춘원 [[이광수(소설가)|이광수]]까지도 '''&amp;quot;김상용은 교육자로서 글러먹은 인간이다. 책임을 지고 교수직을 사임해야 할 것이다.&amp;quot;'''라고 대놓고 신문에 비판글을 썼을 정도였다.~~근데 이광수 이 양반은 [[친일파]]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김상용은 이런 세간의 비난에도 아랑곳 않고,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제국|일제]]가 모든 학교에서 영문학 강의를 금하게 되는 1943년까지 계속 [[교수]]로 [[이화여전]]에 남아 있었다. 이런 걸로 보면 인성은 썩 좋은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왜 교수질 하냐고 물으시면 '''웃지요'''였나~~&lt;br /&gt;
&lt;br /&gt;
그리고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교육/학술 부문에 선정되었다. 1943년 《매일신보》에 발표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등 총 3편의 친일 작품을 썼기 때문.&lt;br /&gt;
&lt;br /&gt;
=== 관련 항목 ===&lt;br /&gt;
 * [[문예 관련 정보]]&lt;br /&gt;
 * [[문학]]&lt;br /&gt;
[[분류:동명이인]]&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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