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feed xmlns="http://www.w3.org/2005/Atom" xml:lang="ko">
		<id>https://tcatmon.com/w/index.php?action=history&amp;feed=atom&amp;title=%EA%B9%80%EC%96%B5%EC%B6%94</id>
		<title>김억추 - 편집 역사</title>
		<link rel="self" type="application/atom+xml" href="https://tcatmon.com/w/index.php?action=history&amp;feed=atom&amp;title=%EA%B9%80%EC%96%B5%EC%B6%94"/>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tcatmon.com/w/index.php?title=%EA%B9%80%EC%96%B5%EC%B6%94&amp;action=history"/>
		<updated>2026-06-26T12:46:47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generator>MediaWiki 1.28.0</generator>

	<entry>
		<id>https://tcatmon.com/w/index.php?title=%EA%B9%80%EC%96%B5%EC%B6%94&amp;diff=49204&amp;oldid=prev</id>
		<title>2017년 1월 24일 (화) 03:52에 Maintenance script님의 편집</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tcatmon.com/w/index.php?title=%EA%B9%80%EC%96%B5%EC%B6%94&amp;diff=49204&amp;oldid=prev"/>
				<updated>2017-01-24T03:52:1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金億秋(생몰년도 미상)[* 일반적으로 생몰년도 미상으로 알려저 있으나 충주김씨종친회측의 설명으로는 1548년 10월 23일 출생하여 1618년(광해군 10년) 사망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조선]] 중기의 [[무신]].&lt;br /&gt;
[목차]&lt;br /&gt;
== 개요 ==&lt;br /&gt;
본관은 청주이고 자 방로(邦老), 시호 현무이다. 전라남도 강진군 작천면 박산마을에서 출생하였다. 1577년(선조 10) 알성무과에 급제하였는데 무이만호가 되어 북변에서 전공을 세웠고 제주판관·사복시판관, 진산·순창 등의 현감을 지냈다.&lt;br /&gt;
&lt;br /&gt;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김억추를 방어사로 임명했으나 전투에 패하여 관직을 잃었다. 1594년 만포진첨절제사가 되고, 이어 진주목사·고령진첨절제사를 지냈다. 1597년 정3품에 올라 전라우도수군절도사가 되어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을 따라 어란포해전과 [[명량해전]]에 참전하여 ~~[[막장]]~~전투력을 보이며 추태 끝에 육지로 보직 변경을 신청하여 밀양부사를 거쳐, 1608년(광해군 즉위) 종2품에 올라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되고 뒤에 제주목사를 지냈다.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강진군 박산마을로 낙향하여 여생을 보내다가 71세에 사망하였다.&lt;br /&gt;
== 현무공실기 ==&lt;br /&gt;
김억추 장군의 후손들이 20세기 초반에 김억추 장군을 기려 행장기인 《현무공실기》를 쓰게된다. --후손들이 조상세탁--&lt;br /&gt;
&lt;br /&gt;
이 책은 크게 두 가지로 논란이 되었는데 첫째는 김억추 장군을 --[[왜곡]]--[[미화]]하였는데 후손들이 썼다는 것을 감안 하더라도 --[[양판소]]급 [[판타지]]-- [[소설]] 수준으로,  꿈에서 [[관우]]의 계시를 받고 쇠사슬을 완력으로 짊어지고 올돌목 양 쪽에 설치했다든가, 왜선에 단독으로 뛰어들어서 검풍으로 수백명을 죽였다는 등등이었다(…).&lt;br /&gt;
김억추 [[이누야샤]] [[http://history21.egloos.com/1779430|설]]이 [[인터넷]]에 있을 정도이다.&lt;br /&gt;
&lt;br /&gt;
또한 철쇄를 사용했다는 내용이 있어 이 부분도 논란거리가 되었다. 현대에 알려진 철쇄설은 사실상 현무공실기에 기반을 두고 있다. 물론 임진왜란 이후 수백년 후에 지어진 이 기록의 신뢰성은 위에 나왔듯이 제로.&lt;br /&gt;
== [[난중일기]]상의 기록 ==&lt;br /&gt;
&amp;gt;9월 8일 (양력 10월 18일) &amp;lt;병신&amp;gt;--(깜짝이야)-- 맑다.&lt;br /&gt;
&amp;gt;적선이 오지 않았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우수사 김억추(金億秋)는 겨우 만호[* 일부 사람들을 이 표현을 보고 이순신이 김억추의 능력을 폄하했는지 아니면 그나마 좋게 평가한 것인지 의문시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순신은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굉장히 엄격해서 후대에 전공을 높이 평가하는 [[사명당]]이나 [[곽재우]]를 각각 협잡꾼 &amp;amp; 평범한 인재로 평가할 지경이었다. ]감이나 맞을까 대장으로 쓰일 재목은 못되는데도 좌의정 김응남(金應南)이 서로 친밀한 사이라고 해서 억지로 임명하여 보냈다. 이러고서야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뿐이다. &lt;br /&gt;
&lt;br /&gt;
&amp;gt;9월 16일 (양력 10월 26일. [[명량 해전]] 당일)  &amp;lt;갑진&amp;gt; 맑다.&lt;br /&gt;
&amp;gt;(전략)&lt;br /&gt;
&amp;gt;여러 장수들이 적은 군사로써 많은 적을 맞아 싸우는 형세임을 알고 돌아서 피할 궁리만 했다. 우수사 김억추(金億秋)가 탄 배는 물러나 아득히 먼 곳에 있었다. 나는 노를 바삐 저어 앞으로 돌진하여 지자총통·현자총통 등 각 종 [[총통]]을 어지러이 쏘아대니, 마치 나가는 게 바람 같기도 하고 우레 같기도 하였다.&lt;br /&gt;
== [[실록]]상의 기록 ==&lt;br /&gt;
&amp;gt;사헌부가 아뢰길,&lt;br /&gt;
&amp;gt;(중략)&lt;br /&gt;
&amp;gt;여주 목사(驪州牧使) 김억추(金億秋)는 어사(御史)의 장계대로 파출(罷黜)했어야 마땅한데 대신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여 잉임(仍任)시켰습니다. 대저 죄를 범해 파출하여야 할 수령들을 매번 적임자(適任者)가 없다고 하여 그대로 둔다면, 봉명(奉命)한 사람의 권한이 가벼워져서 탄압할 수 없게 되는 반면 죄를 범한 이는 습성이 되어 기탄할 것이 없게 되니, 그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김억추가 범한 것은 소문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어사가 혹은 추문하여 사실을 알아내고 혹은 현장을 잡아 알아낸지라, 의심할 것이 없으니 조금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김억추를 전에 아뢴 대로 파직하소서.”&lt;br /&gt;
&amp;gt;&lt;br /&gt;
&amp;gt;하니, 답하기를, &lt;br /&gt;
&amp;gt;&lt;br /&gt;
&amp;gt;“이성임의 일은 비변사에 물으라. 이일은 원수(元帥)이니 가벼이 논함은 부당하다. 김억추는 비변사에서 의계(議啓)하였으니, 이것 역시 따를 수 없다.”&lt;br /&gt;
&amp;gt;-선조 27년 3월 7일&lt;br /&gt;
&lt;br /&gt;
&amp;gt;사헌부가 이성임(李聖任)을 체차(遞差)할 것과 김억추(金億秋)를 파직할 일을 누차 아뢰니, 상이 비변사에 하문하기를, “이성임과 김억추를 이처럼 논박하니 굳이 잉임(仍任)시킬 필요는 없는데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가?”&lt;br /&gt;
&amp;gt;(중략)&lt;br /&gt;
&amp;gt;김억추는 이미 불법을 저지르다 잡혔고, 대간이 법을 지키려는 뜻이 매우 정당하니 신들은 감히 다른 논의를 할 수 없습니다.”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고 사헌부에 이르라.” 하였다.&lt;br /&gt;
&amp;gt;-선조 27년 3월 12일&lt;br /&gt;
&lt;br /&gt;
&amp;gt;사간원이 아뢰기를, “만포 첨사 김억추(金億秋)는 사람됨이 탐오해서 전에 수령이 되었을 때 오로지 사욕을 채우기만을 일삼았습니다. 만포는 관방(關防)의 중한 곳일 뿐만 아니라 야인(野人)들이 왕래하며 통상하는 곳이어서 가려서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체차를 명하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lt;br /&gt;
&amp;gt;-선조 27년 8월 4일&lt;br /&gt;
&lt;br /&gt;
&amp;gt;고령 첨사(高嶺僉使) 김억추(金億秋)는 절박한 사정(私情)이 있더라도 이미 변장(邊將)이 되었으면 그밖의 것을 고려하지 않아야 할 것인데, 외람되게 상소하여 마침내 체면(遞免)되었습니다. 이러한 버릇은 징계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파직하도록 명하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lt;br /&gt;
&amp;gt;-선조 29년 5월 25일&lt;br /&gt;
== 창작물에서 ==&lt;br /&gt;
[[김경진]]의 [[임진왜란]]과 격류에서는 동생 김응추와 함께 악역 개그 캐릭터로 나온다. 하는 짓은 미운데 둘이 하는 걸 보면 좀 웃기다.(…)&lt;br /&gt;
&lt;br /&gt;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자신을 신임 우수사라 소개하며 거제현령 [[안위]], 미조항첨사 김응함 등과 함께 처음 등장한다. 복직한 통상 대감이 12척의 전선을 회수하러 육로를 통해 회령포로 가는 길에 합류하는 것으로 나오며, [[판옥선]] 1척을 전력에 보탠다. 그렇지만 그 이후로 비중은 [[공기]]. 명량해전에서는 존재감조차 없기에 잘 된 고증(...) 같지만, 대신 철쇄의 비중은 엄청 크게 나와서 이순신의 전공이 퇴색되는 감이 있다.&lt;br /&gt;
&lt;br /&gt;
영화 [[명량]]에서는 [[살인의 추억]]의 백광호 역으로 유명한 배우 [[박노식(1971)|박노식]]이 연기했으며, 여기서도 역사적으로도 가장 전투에 소극적이었던 것을 반영했는지, 다른 장수들이 뒤늦게나마 대장선에 합류하는 시점에서도 망설이는 표정으로 공기화되었다. ~~갑판의 군관, 사수, 포수, 수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판옥선 누각에서 망설이는 모습으로 완벽한 고증을 보이셨다~~ 특히나 해전이 시작되기 전 배멀미로 드러누워 골골대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영화 상 묘사에 불만을 가진 후손들이 항의를 하고 소송도 검토중이라고 한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amp;amp;mid=sec&amp;amp;sid1=102&amp;amp;oid=001&amp;amp;aid=0007179159|#]]) 이에 역덕후들의 반응은 &amp;quot;배설 후손이 항의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데 김억추는 뭥미?&amp;quot; 정도다.&lt;br /&gt;
[[분류:임진왜란/군인]]&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fe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