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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원권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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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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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년 2월 7일 (화) 09:36에 Maintenance script님의 편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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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2-07T09:36:3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lt;br /&gt;
&lt;br /&gt;
[[1918년]] 12월 13일 [[해주]] 출생의 [[육상]] 세단뛰기 선수. 일본 및 대한민국 국적으로 활약했다.&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로 진학해서 대학생 신분이던. 1939년 [[오스트리아]] [[빈(오스트리아)|빈]]에서 열린 국제대학경기대회([[유니버시아드]] 대회의 전신)에 출전하여 15.37m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lt;br /&gt;
&lt;br /&gt;
당시 일본은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세단뛰기 종목에서 오다 미키오가 일본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딴 이후로 올림픽 세단뛰기 3연패를 하며 세단뛰기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하고 있었고, 1940 올림픽이 자국 [[도쿄]]에서 개최될 예정인지라 세단뛰기 4연패가 유력한 상황이었고 그 주인공이 바로 김원권이었다. 실제로 1940년 세단뛰기 세계 최고기록은 김원권이 세운 15.68m였고, 1939년엔 비공인이긴 하나 16.25m로 당시 세계신기록에 해당하는 기록을 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중일전쟁]]의 여파로 일본은 올림픽 개최권을 반납했고 이후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올림픽 자체가 취소되며 김원권의 올림픽 금메달의 꿈은 무산된다. 예정대로 대회가 개최됐다면 [[손기정]]에 이어 두 대회 연속 조선인 금메달리스트가 배출될 것이 유력했으니 아쉬움이 많이 남을 수밖에 없다.[* 비슷한 케이스로 역도의 박동욱, 남수일, [[김성집]]이 있다. 이 선수들은 각각 밴텀급과 페더급, 미들급에서 세계신기록을 경신하는 등 일본 역도계를 평정한 것을 넘어 1940 올림픽의 금메달 후보로 꼽혔지만 대회가 무산되었다. 이 선수들은 해방 후에 대한민국 국적으로 1948 런던 올림픽에 출전했고 김성집은 3위, 남수일은 4위, 박동욱은 10위를 기록한다.] 김원권은 이후로도 1941년~1943년에 거쳐 연도별로 세계 최고기록을 세우며 세단뛰기 최강자로 군림했다.&lt;br /&gt;
&lt;br /&gt;
해방 이후 태극마크를 달고 [[1948 런던 올림픽]]에 출전하며 올림픽 무대에 서는 꿈을 이루지만 선수로서는 전성기가 지난 30대였고, 예선을 7위로 통과하며 분전하지만 결선에서는 14.25m의 기록으로 12위에 그치고 만다.&lt;br /&gt;
&lt;br /&gt;
김원권의 재능이 얼마나 역대급이었느냐 하면 김원권이 수립한 15.86m의 최고기록은 1984년까지 한국 신기록이었다. 김원권 이후 어떤 한국인도 40년 넘게 이 기록을 넘지 못하다가 1984년 박영준[* 이 선수가 훗날 은퇴한 후 코치로서 가르친 선수가 김덕현이다. 김덕현은 김원권과 마찬가지로 유니버시아드 대회 금메달을 따며 육상 전체를 통틀어 세계수준에 근접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몇 안되는 선수로 꼽혔다.]에 의해 경신되었다. 시대보정도 필요없는 수준... 한 마디로 김원권은 [[마라톤]] 이외 종목에서 한국 역사상 유일한 세계 톱레벨의 육상선수였다.&lt;br /&gt;
&lt;br /&gt;
형인 김원룡 역시 육상선수였다. 김원룡의 주종목은 높이뛰기였는데 이 선수 또한 조선 신기록을 세우는 등 재능을 과시했다. 1948 올림픽에 형 김원룡은 임원으로, 동생 김원권은 선수로 참가한다.&lt;br /&gt;
&lt;br /&gt;
은퇴 이후 노년을 일본 [[고베]]시에서 보내고 있는 듯 하다.&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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