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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유복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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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7-06T09:23:07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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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년 2월 6일 (월) 09:36에 Maintenance script님의 편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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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2-06T09:36:2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분류:인물]]&lt;br /&gt;
&lt;br /&gt;
金遺腹&lt;br /&gt;
&lt;br /&gt;
[[1940년]]생. 본명은 김유복자(金[[유복자|遺腹子]])이며 부산 출신이다. 아버지가 태어나기도 전에 병으로 별세하셔서 '유복자'라는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남자를 좋아하게 되고, 부산에서 상업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상경하여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안타깝게도 현재에 이르기까지 55년 간 어머니와 생이별하여 어머니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또한 유일한 혈육이었던 누나마저 오래 전 세상을 떠나 현재의 보호자는 과거 트랜스젠더 바에서 일하면서 알게 된 [[이요나]] 목사가 유일하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젊은 시절에는 MBC 라디오 전속가수와 연극 배우로서 활동한 적이 있었다. 당시 풍부한 가창력으로 가수들 사이에서 인지도가 꽤 높았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그런데 낮에는 MBC 라디오 전속가수로 일하는 한 편, 밤에는 이태원 게이바에서 노래를 부르는 이중 생활을 했었다고 한다. 당시는 여성 호르몬을 맞기 전이었다.&lt;br /&gt;
&lt;br /&gt;
그러다가 30대 초반, MBC에서의 가수 생활을 그만 두고 밤무대로 발을 옮기면서 여장을 시작하게 되었고, 눈썹 문신을 하고 약국에서 여성 호르몬제를 사서 맞기도 했다고 한다. [* 지금은 여성 호르몬제가 처방전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전문 의약품으로 분류된다]&lt;br /&gt;
&lt;br /&gt;
[[이요나]] 목사와 처음 만난 곳은 [[서울특별시]] [[성동구]] [[금호동]]에 있었던 한 게이바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lt;br /&gt;
당시 이요나 목사는 [[충무로]]에서 의상실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동성애자 친구가 대구에서 올라오자 친구들과 같이 술자리를 가지려 게이바에 갔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그 때 김유복 씨는 붉은 집시 옷과 작은 손부채를 들고 쿠바의 볼레로 노래인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 (Quizas quizas quizas)' [* 쿠바의 오스발도 파레스가 1947년에 만든 곡이다. 이 후 냇킹 콜, 빙크로스비가 불러 유명해졌다] 를 부르고, 이 외에도 일본의 엔카, 라틴 음악, 팝을 자유 자재로 불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 후 김유복 씨가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았던 이요나 목사는 1980년 [[이태원동]]에서 최초의 게이바 '열애클럽'을 개업했을 때 전속 가수로 캐스팅하면서 김유복 씨는 '김마리네'라는 이름으로 단독 무대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점차 이요나 목사와 친분을 쌓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지금도 클럽 '열애'는 아직도 있는데, 자신이 개업한 게이바 (트랜스젠더바) 를 중심으로 현재 이태원에 파악된 게이바가 100개가 넘는다는 사실을 듣고 깜짝 놀랬다고 한다. 당시 게이바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큰 센세이션이 되어 당시 인기가 높았던 가수들이 많이 방문했었는데, 가수 [[패티김]]이 김유복 씨의 노래를 듣고 &amp;quot;절대 음감의 소유자&amp;quot;라고 엄청 칭찬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엄청나게 성업한 '열애클럽'은 일본 [[신주쿠]]에 지점까지 개업했는데, 이름은 '벨라미 클럽'. 김유복 씨는 일본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기 위해 1년 간 일본에 원정을 다녀왔다고 한다. 이 때 김유복 씨는 인생의 황금기를 누렸다.&lt;br /&gt;
&lt;br /&gt;
그리고 게이의 인생을 다룬 뮤지컬 '미스터 레이디'에 주연으로 출연하며 더욱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lt;br /&gt;
&lt;br /&gt;
더 자세한 내용은 [[http://www.holylife.kr/default/school/school_02.php?com_board_basic=read_form&amp;amp;com_board_idx=13&amp;amp;&amp;amp;com_board_search_code=&amp;amp;com_board_search_value1=&amp;amp;com_board_search_value2=&amp;amp;com_board_page=&amp;amp;|#]],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amp;amp;mid=sec&amp;amp;sid1=103&amp;amp;oid=005&amp;amp;aid=0000788759|#]]&lt;br /&gt;
&lt;br /&gt;
그런데 1985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정부에서 퇴폐 유흥업소를 단속하기 시작했는데, 그 때 열애클럽이 적발되며 벌금과 함께 1개월 영업 정지 처분을 받았지만 [[이요나]] 목사는 게이바 이외에도 4개의 가게를 운영하면서 영업을 이어나갔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서울 올림픽]]이 끝나고 1989년 사회 정화를 목적으로 더욱 강화되고 본격적으로 유흥업소를 단속하기 시작하면서 [[이요나]] 목사는 1989년 말 일본으로 몸을 피했고, 이 때 김유복 씨와의 인연이 끊어졌다고 한다.&lt;br /&gt;
&lt;br /&gt;
그러다가 1993년 일본에서 탈동성애를 하고 이후 신학을 공부하면서 일본 갈보리채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994년 6월 현재의 갈보리채플 서울 교회를 창립한 이 후 수소문 끝에 1995년 5월 김유복 씨를 찾게 되었는데, 이태원의 5평 남짓한 쪽방에서 비참한 상태로 생활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만성 척추 측만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증세가 더 악화되고 거기에다 여성 호르몬 과다 투입으로 인한 후유증이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이요나 목사의 설득 끝에 여자 옷과 악세사리 등을 다 버리고 여성 호르몬 주사 투여도 중지하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고 한다.&lt;br /&gt;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김 씨는 동성애를 버리지 못하고 &amp;quot;미안하다&amp;quot;라는 말만 남긴 채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이 후 10년 뒤 주변 지인들로 부터 김 씨에 대한 소식을 들었는데, 2004년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다가 의료사고로 신경이 끊어져 한남동 [[도깨비시장]] [* 이태원 (한남동) 이슬람 성원을 지나 더 올라가면 나온다. 쉽게 설명하자면 [[한남대교]] 강북 방면으로 건너다보면 왼편으로 언덕에 집들이 촘촘히 모여있고 그 위에 조그마한 교회가 보이는데 그 부근이다.]  구석의 단칸방에서 알몸에 기저귀만 찬 채로 생활하고 있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김 씨는 이요나 목사의 도움으로 2007년 재수술을 받았지만 소용없었고, 이 후 10년을 외출도 못 한 채 누운 채로 생활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2015년 3월, 이요나 목사와 함께 &amp;lt;나는 더 이상 게이가 아닙니다&amp;gt;라는 [[탈동성애]] 다큐멘터리에 출연하였다.&lt;br /&gt;
&lt;br /&gt;
그러다가 2016년 4월, 서울 [[양천구]]의 요양원으로 입원하였다.&lt;br /&gt;
&lt;br /&gt;
2016년 8월 6일, 갑자기 패혈증세가 심각해지면서 [[한남동]] [[순천향대학교]] 서울병원 응급실에 입원하였고, 입원 첫 주에 &amp;quot;주말을 넘기지 못할 것&amp;quot;이라는 의사의 예상이 있었지만, 현재까지 중환자실에 입원하면서 퇴원은 불가능하고 현재 상황으로 임종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그리고 임종 전 이요나 목사에게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amp;quot;장례는 이요나 목사가 맡아서 집례하고, 후원금에서 요양비와 장례비를 치르고 남은 돈은 교회 사역하는데 보태달라&amp;quot;라고 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그의 말을 [[국민일보]]가 정리한 것 [[http://blog.daum.net/jonah/13743091|#]],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9586074&amp;amp;code=61221111|#]]&lt;br /&gt;
&lt;br /&gt;
편집에 8월 22일자 [[팩트올]] 기사와 이요나 목사의 다음 카페 게시글을 참고하였다. [[http://factoll.com/page/news_view.php?Num=3477|#]], [[http://cafe.daum.net/consult/NOPk/149?sns=facebook&amp;amp;svc=sns|#]]&lt;br /&gt;
&lt;br /&gt;
2016년 10월 11일 오전 1시 5분, 투병 중이었던 폐혈증으로 인해 만 76세를 일기로 소천하였다.&lt;br /&gt;
&lt;br /&gt;
발인은 10월 13일 오전 10시 [[이요나]] 목사가 담임하고 있는 갈보리채플 서울교회장으로 [[순천향대학병원]]에서 치뤄졌다.&lt;br /&gt;
&lt;br /&gt;
[[서울특별시]] [[서초구]] [[원지동]] 서울추모공원에 안장되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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