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feed xmlns="http://www.w3.org/2005/Atom" xml:lang="ko">
		<id>https://tcatmon.com/w/index.php?action=history&amp;feed=atom&amp;title=%EA%B9%80%EC%9D%BC%28%EB%B6%81%ED%95%9C%29</id>
		<title>김일(북한) - 편집 역사</title>
		<link rel="self" type="application/atom+xml" href="https://tcatmon.com/w/index.php?action=history&amp;feed=atom&amp;title=%EA%B9%80%EC%9D%BC%28%EB%B6%81%ED%95%9C%29"/>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tcatmon.com/w/index.php?title=%EA%B9%80%EC%9D%BC(%EB%B6%81%ED%95%9C)&amp;action=history"/>
		<updated>2026-06-26T05:40:50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generator>MediaWiki 1.28.0</generator>

	<entry>
		<id>https://tcatmon.com/w/index.php?title=%EA%B9%80%EC%9D%BC(%EB%B6%81%ED%95%9C)&amp;diff=49538&amp;oldid=prev</id>
		<title>2017년 1월 24일 (화) 04:08에 Maintenance script님의 편집</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tcatmon.com/w/index.php?title=%EA%B9%80%EC%9D%BC(%EB%B6%81%ED%95%9C)&amp;diff=49538&amp;oldid=prev"/>
				<updated>2017-01-24T04:08:3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1910년]] ~ [[1984년]] [[3월 9일]]&lt;br /&gt;
&lt;br /&gt;
본명은 박덕산(朴德山)으로, '김일(金一)'이라는 이름은 해방 직후 [[김일성]]이 '나밖에 본명을 모른다'는 뜻으로 하사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함경북도]] 출신으로 김일성과 함께 [[동북항일연군]]에서 항일 빨치산 활동을 했다.&lt;br /&gt;
&lt;br /&gt;
광복 후 귀국해서 1945년 11월에 북조선공산당 평북 당비서, 1946년 4월에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겸 정치위원 등을 지냈고, 1946년 9월에는 제1사단 문화부사단장이 되었다. 1948년 9월 정부가 수립되자 [[강건]], [[김무정]]과 함께 초대 내각의 민족보위성 부상(대한민국의 국방부 차관)에 선임되었다.&lt;br /&gt;
&lt;br /&gt;
1948년에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이후 사망시까지 계속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한국 전쟁 당시 민족보위성 부상 겸 조선인민군 문화부 사령관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했으나, 1950년 12월 패배주의적 언동을 했다는 이유로 좌천되었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계파를 막론하고 패전의 책임을 물어 좌천당한 인물들이 여럿 있었다. 연안파의 김무정, 전우 등도 그렇고, 소련파의 리청송, 심지어 김일성의 최측근이라는 빨치산파 역시 이때만 해도 [[최광]], [[림춘추]], [[김광협]] 등이 좌천되었다.]&lt;br /&gt;
&lt;br /&gt;
이후 김일성의 전폭적인 신임 덕분에 1953년 6월에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 8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 위원, 당 군사위원회 위원 등에 선출되면서 정계에 다시 복귀했다.&lt;br /&gt;
&lt;br /&gt;
[[박헌영]]을 위시한 남로당파가 대거 숙청당하자 1954년 부수상 겸 농업상에 선임되었고, 1959년 [[8월 종파사건]]이 거의 정리된 시점에선 제1부수상이 되어 [[김일성]], [[최용건]]에 이은 서열 3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서열 3위로서 각종 직책들을 역임했고, 1972년 12월 김일성이 주석, 최용건이 제1부주석이 되면서 김일은 정무원 총리에 선출되었다.&lt;br /&gt;
&lt;br /&gt;
최용건 사후에는 제1부주석이 되었고, 1979년에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면서 대남관계에서도 활동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80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에 김일성, [[김정일]], [[오진우]], 리종옥과 함께 5인의 한 명으로 선출되면서 권력의 정점에 오르게 되었다.~~서열3위 시점에서 이미 정점 중의 정점입니다만~~&lt;br /&gt;
&lt;br /&gt;
1984년 3월 오랜 병고 끝에 사망했고 장례는 국장으로 치뤄졌다.&lt;br /&gt;
[[분류:북한의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fe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