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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창숙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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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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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년 1월 24일 (화) 04:26에 Maintenance script님의 편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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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1-24T04:26:3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include(틀:다른 뜻1, other1=한국의 배우, rd1=김창숙(배우))]&lt;br /&gt;
 * 상위 문서: [[김(성씨)/목록]]&lt;br /&gt;
&lt;br /&gt;
http://www.newscj.com/news/photo/201109/94924_74310_5237.jpg?align=right&lt;br /&gt;
[include(틀:건국훈장 대한민국장)]&lt;br /&gt;
&lt;br /&gt;
金昌淑&lt;br /&gt;
1879.7.10~1962.5.10&lt;br /&gt;
&lt;br /&gt;
&amp;gt;'''&amp;quot;이분은 우리 민족의 스승이라면 스승 되시는 분이에요. 이분이 지금 살아서 나온다면 절을 안 하겠어요?&amp;quot;''' - [[김수환]] [[추기경]][* 김수환 추기경이 2000년 심산상을 수여받은 후 심산상 수상자의 관례대로 김창숙 묘소에서 절을 올리며 했던 말이다. 이 때 김 추기경은 절 뿐만 아니라 음복까지 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2000/1862968_13452.html|당시 영상]]]&lt;br /&gt;
&lt;br /&gt;
[목차]&lt;br /&gt;
== 개요 ==&lt;br /&gt;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lt;br /&gt;
자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心山)이다. 1879년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태어났다. 대한민국의 마지막 유림 계열 지도자라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독립 운동 ===&lt;br /&gt;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서울로 올라가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을 성토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lt;br /&gt;
&lt;br /&gt;
1919년 [[3.1 운동]] 후 망명을 결심, 전국 유림대표들이 서명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진정서를 휴대하고 [[상하이]]로 건너가, [[파리(도시)|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하였다. 그 해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고, 이듬해 귀국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다가 제1차 유림단사건으로 체포되었다. &lt;br /&gt;
&lt;br /&gt;
출옥 후 다시 [[중국]]으로 가서 1921년 [[신채호]] 등과 독립운동지인 《천고(天鼓)》의 발행에 이어, [[박은식]] 등과 《사민일보(四民日報)》를 발간,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며 [[쑨원]]과 교섭, 독립운동기금을 원조받았다.&lt;br /&gt;
&lt;br /&gt;
1923년 의열 활동을 위해 입을 다물고 실행한다는 의미의 다물단을 조직하였다.&lt;br /&gt;
&lt;br /&gt;
1927년 상하이 주재 일본영사관원에게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되어 징역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했었다. 일제말기 비밀결사인 [[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었다가 광복 직전 발각되어 1945년 8월 왜관 경찰서에 구속 중, 광복을 맞았다. &lt;br /&gt;
&lt;br /&gt;
=== 광복 후 ===&lt;br /&gt;
[[8.15 광복]] 후, 초창기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에 반대의사를 분명히 나타냈으며 민족주의계열에서 정치활동 했었다. 1945년 12월,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2월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민주의원 구성內 친일파, [[한민당]] 세력들이 득세하는것을 보고 바로 비난성명서 내고 민주의원 직 거부했다. 이후 정치활동 일선에서 물러나 유림계로 복귀, 유도회를 조직하고 회장 및 성균관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일제시대에 억압되었던 [[성균관]]을 계승하는 취지로 [[성균관대학교]]를 창립하여,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지금 성균관대학교 인문사회과학캠퍼스와 자연과학캠퍼스에는 각각 심산 김창숙 선생을 기리는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또한 성균관대학교 학내 언론 중 하나인 성균지에서는 그를 기리는, 심산 문학상을 매년 시상하고 있다.&lt;br /&gt;
&lt;br /&gt;
http://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15/1031/IE001888000_STD.jpg&lt;br /&gt;
국제구락부 사건 - [[1952년]] 6월 [[발췌개헌|이승만의 개헌안]]에 반대하는 시위도중 체포되는 심산 김창숙.&lt;br /&gt;
&lt;br /&gt;
[[6.25 전쟁]] 후 대통령 [[이승만]]의 하야경고문사건으로 부산형무소에 40일간 수감되고,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이 일어나자 [[이시영]], [[김성수(1891)|김성수]], [[조병옥]] 등과 반독재호헌구국선언을 발표하였고, 1959년 [[국가보안법]] 개악 당시 '''망국의 법'''이라고 강력히 비난했었다. 이러한 반독재 민주화운동 행보는 독재권력비호세력으로부터 테러를 당하였다. &lt;br /&gt;
&lt;br /&gt;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으며, 그 해 5월 10일 노환으로 별세한 뒤 사회장(社會葬)으로 예장(禮葬)되었다.  &lt;br /&gt;
&lt;br /&gt;
http://www.ehistory.go.kr/movie_pds/ImageRoot/Yesterday%2Fpix%2F11%2F28361.jpg&lt;br /&gt;
말년의 김창숙 선생. 1962년 5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투병중인 심산 김창숙 선생의 병상을 방문하였다.[[http://ko.wikipedia.org/wiki/%EA%B9%80%EC%B0%BD%EC%88%99|#]] 이 사진을 가리켜 김창숙 선생이 박정희를 외면한 모습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김창숙 관련 추모단체에서도 대체로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이는 편이다.[* 이러한 관점은 일생을 기득권, 지배층에 굴종하지 않고, 민족과 민주라는 가치에 충실하여 당대와 후세의 존경을 받은 분인데, 말년에 와서 쿠데타의 주동 세력과 원만하게 지냈다고 비춰지면 선생의 업적에 누가 될 수 있음을 감안된 것으로 여겨진다.] 반면 [[노컷뉴스]]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5469953&amp;amp;ctg=1701|임기상 기자의 연재]]에 따르면 당시 김창숙 선생은 인사불성 상태로 병문안으로 찾아온 박정희를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김창숙 선생은 병문안 며칠 뒤에 작고하셨다. 그외에도 1962년 2월 27일 [[경향신문]] 기사 &amp;quot;혁명정부하선 상받을터&amp;quot;라는 기사를 보면 김창숙 선생은 당시 박정희 정부에 대해 일부 비판함과 동시에 독립유공자 포상에 대해서는 감사의 뜻(謝意)을 표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http://kdh.skku.edu/photo/DATA/WATERMARK/watermark_P1010213.JPG&lt;br /&gt;
&lt;br /&gt;
성균관대 중앙학술정보관 앞에 세워진 김창숙의 동상. 단정하고 정적인 다른 유학자들의 동상과는 달리, 매우 역동적인 모습으로 조각된 것이 특색. &lt;br /&gt;
&lt;br /&gt;
김창숙 선생의 항일독립운동의 애국애족 정신과 유학의 선비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심산 기념 문화센터' 가 서울 서초구에 위치하고 있다.[* 세화 3개교와 반포 종합 운동장 근처에 위치해 있다.][[http://www.seocho.go.kr/site/ss/index.jsp|#]] 여담으로 문화센터에서 독서실을 운영하는데 값이 싸고 시설이 좋다. 청소년 1000원, 성인 1500원에 이용 가능.&lt;br /&gt;
&lt;br /&gt;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동명이인]]&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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