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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남인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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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6-21T23:28:30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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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년 1월 24일 (화) 10:37에 Maintenance script님의 편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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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1-24T10:37:5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include(틀:조선의 붕당)]&lt;br /&gt;
&lt;br /&gt;
&lt;br /&gt;
[목차]&lt;br /&gt;
== 개요 ==&lt;br /&gt;
[[조선]]의 [[붕당]] 중 하나.&lt;br /&gt;
&lt;br /&gt;
[[선조]] 때 [[동인]]에서 갈라져 나왔으며 [[서인]]에 대한 온건파였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북인이 사라진 이후로는 [[예송]]을 통해 서인(노론)의 가장 큰 상대당으로 자리 매김하게 된다. [[숙종(조선)|숙종]] 시기 [[환국]]으로 몰락하여 [[영조]] 때 추방되었고, [[정조(조선)|정조]] 때 [[시파]]로 일부 세력을 얻었으나 [[신유박해]] 이후 실각하게 된다. &lt;br /&gt;
&lt;br /&gt;
== 배경 ==&lt;br /&gt;
[[정여립의 난]] 이후 강경파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동인은 분화를 시작했고 임진난 이후 서인이 정권에서 물러나자 북인이 권력을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분열되었다.&lt;br /&gt;
&lt;br /&gt;
남인은 북인과는 다르게 [[이황]]의 제자들이 주를 이루었으며 [[정여립의 난]] 중에도 별로 피해를 입은 바가 없어 서인에 대한 원한도 깊지 않았고 남인의 영수 서애 [[유성룡]]은 동인에서는 악의 수괴로 이를 갈던 [[정철]]과도 잘 지내던 사이였다. 이는 남북인의 분열을 가속화시키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고 [[광해군]] 조에 이르러서는 둘은 아예 다른 당파로 갈라졌다.&lt;br /&gt;
&lt;br /&gt;
초기 남인의 주요 인물로는 [[유성룡]], 이원익, 이덕형, 김명원, 김응남, [[김성일]][* 교과서나 일반 역사책에서는 그저 당파를 위해 거짓말이나 하는 [[찌질이]]로 나오지만 유성룡과 함께 이황의 수제자를 다투는 대 유학자였고 [[임진왜란]]이 터지자 초유사로서 의병과 관군 사이를 조율하고 지원해 경상우도 방어와 탁월한 공적을 쌓았다.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오래된 [[안경]] 착용자이기도 하다.] 등 왜란당시 전시행정부를 이끈 주역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집권 여당이었고 향촌기반이 있는 동부 경북 및 동부 경남이 왜란 때 완전히 짓밟혀 버린지라 의병활동 보다는 조정에서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lt;br /&gt;
&lt;br /&gt;
== 양란 이후 남인 - 만년 야당 ==&lt;br /&gt;
임진난 이후 남북 분열이 확실시된 이후로는 별 다른 움직임은 없었고 북인 정권 내에서 뿌리가 같다는 이유로 서인들보다 나은 대우를 받으며 조정에서 여러 자리를 차지했지만 대북의 전횡에 대해서 역시 깊은 불만을 품고 있었고 훗날 [[인조반정]]의 조짐이 보이는데도 방관하면서 사실상 그들에게 동조했다. &lt;br /&gt;
&lt;br /&gt;
그 결과 인조반정 이후 서인정권이 들어서자 이번에도 --만년--야당으로서 조정에서 제법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야당으로 서인정권의 들러리나 마찬가지여서 그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없었고 남인들의 불만은 고조되었지만 막강한 서인 정권에게 대들만한 힘도 기회도 없었다. (이 과정에서 소북 등이 남인으로 흡수되었다.)&lt;br /&gt;
&lt;br /&gt;
두 차례의 [[호란]]과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인조]] 이후 [[효종]]이 즉위할 즘에 서인 정권은 [[김집]],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유계 등의 산당과 [[김육]], [[이시백]], [[이시방]] 형제, [[정태화]], [[원두표]] 등으로 구성된 한당으로 대립하였다. 하지만 이는 훗날의 피터지는 권력다툼과는 달리 다소 부드러운 것이었고 노골적인 충돌이랄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이 시기는 효종이 붕당타파를 강력히 추진하던 시기로 당파를 내세우기가 뭣한 시기였다. &lt;br /&gt;
&lt;br /&gt;
== 예송과 환국 ==&lt;br /&gt;
제대로 된 충돌이 터져나온 것은 [[효종(조선)|효종]]이 갑자기 죽고 [[현종(조선)|현종]]이 즉위하자 터진 [[예송논쟁]]이었다. &lt;br /&gt;
&lt;br /&gt;
효종보다 어린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년 입어야 하는가를 두고 논쟁이 발생한 것인데([[기해예송]]), 초기에는 효종이 차남이란 이유로 [[기년복]]으로 잠정합의가 되었으나 남인 출신의 [[윤휴]]가 효종은 [[소현세자]]를 대신한 적장자로서 효종을 위해서 마땅히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예송이 커졌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상복 입는 기간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졸곡이 끝나는 기간이라는 다소 두루뭉술한 기준을 적용시켰던 터라, 효종의 경우에도 비슷하게 1년 정도 입고 말자는 분위기여서 윤휴의 주장은 묻히는 듯 했다.[* 하루를 달로 쳐서 1달만에 끝내는 조선 초의 역월법에 비하면 1년도 충분히 긴 것이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뒤이어 남인의 거두 [[허목]]이 3년복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며 상소를 올리면서 기존의 기년복을 정면으로 비판했으며, [[송준길]]의 반박에도 허목의 논리로 [[원두표]] 등이 허목 지지로 선회하는 등 분위기가 3년상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송시열]]이 &amp;quot;체이부정&amp;quot; 논리로 정리를 하려고 했으나 [[윤선도]]가 강경한 반대 상소를 올리면서 논쟁은 다시 재격화. 서인 산당이 장악한 [[삼사]]는 윤선도가 송시열을 역적으로 몰았다며 반좌의 율을 적용하여 윤선도를 사실상 죽일 것을 청했으나, 송시열 파의 강경 드라이브에 회의를 느낀 일부 [[산당]]과 한당 세력에서도 윤선도를 지지하는 상소가 나오는 등 조정이 시끄러워졌다. 결국 현종이 예송 금지를 명하고 기년복으로 상복을 결정지으면서 기해예송은 일단 마무리지어졌다. 기해예송은 [[이이(조선)|이이]]의 이기일원론[* 이와 기가 같은데서 나옴≒왕도 사대부에 포함됨. 요즘식으로 치면 공화파로 해석할 수 있는 태도이며, 서인의 당론이다.]과 이황의 이기이원론[* 이와 기가 유별함≒왕은 특별하며 사대부와 구분됨. 북인과 남인이 취한 태도로써,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이이학파에 비해 근왕파적인 면모가 있다고 볼 수 있다.]간의 논쟁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5년 뒤 2차 예송인 갑인예송이 효종비인 [[인선왕후]]가 죽으면서 벌어졌다. 이번에도 [[자의대비]]는 살아있어서 오례의에 따라 기년복으로 정해진 상복이었는데, 산당의 [[예조]]에서 효종을 위해 기년복을 입었으니 그 비를 위해서는 마땅히 [[대공복]](9개월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을 고쳐 올리자 왕은 노하여 예조 당상들을 모조리 파직하고 이어서 기년복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영상 [[김수흥]] 등이 반발했으나 왕은 반대하는 신료들을 파직하고 3일 만에 기년복으로 상복을 정했다. &lt;br /&gt;
&lt;br /&gt;
남인들이 신속하게 개입했으면 서인들을 역으로 몰아 처벌하고 정권을 잡을 수 있었겠지만 현종이 너무도 빨리 예송을 마무리지으면서 그럴 기회는 없었다. 그런데 현종이 불과 2달 후 급사하고 세자 [[숙종(조선)|숙종]]이 즉위하면서 새로운 판국에 접어들었다. 불과 14살인 숙종은 부왕의 결정을 재확인하고 송시열을 비롯하여 서인들을 대거 귀양보내거나 조정에서 몰아내고 남인에게 정권을 준 것이다. &lt;br /&gt;
 &lt;br /&gt;
50년에 가까운 서인정권에 종지부를 찍고 남인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lt;br /&gt;
&lt;br /&gt;
=== 총 10년을 못간 남인 정권 ===&lt;br /&gt;
이때 남인의 수뇌부는 [[허적]], [[허목]], [[윤휴]], [[유혁연]], [[권대운]], [[민암]], [[오시수]] 등이 있었는데 서인 정권 밑에서 벼슬을 하며 비교적 잘 지낸 탁남과 서인에 맞서 예송을 주도한 청남으로 갈렸다. 윤휴, 허목 등은 청남이었고 허적, 유혁연, 권대운 등이 탁남의 영수였다.&lt;br /&gt;
&lt;br /&gt;
탁남은 정치적 변동을 크게 추구하지 않았지만 윤휴 등 청남은 [[북벌]]을 추구하는 등 여러모로 정권 교체에 따른 변화를 추구했다. 특히 [[대동법]], [[호포제]] 등의 세역 개혁안에 대해서는 윤휴와 허목 등의 인물 사이에 의견차가 있었는데, 윤휴는 대동법에 소극적인 대신 호포제를 추진하였고, 허목은 대동법에는 호의적이었으나 호포제에는 비판적이었다[* 후에 윤휴가 송시열과 노론에 의해 확고한 [[사문난적]]으로 규정되면서 남인들은 허목을 정통으로 규정하고 그의 후예를 자처하게 된다. (예외가 선명한 노선을 좋아했던 정약용.) 사실 윤휴와 허목 모두 소북 출신인게 개그.]. 노비제를 비롯한 사회 질서를 강화하고자 하였으며, [[오가작통]]제와 [[호패법]] 등을 강화하여 호구 파악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 후에 재야 인물이 된 남인 세력([[유형원]] 등)에서는 초기 [[유교]]의 이상이었던 균전제, 한전제 등으로 토지의 집중을 방지하려고 하였다.] 이들은 송시열의 [[고묘]]를 주장하면서 협력하기도 했지만 권대운, 유혁연 등이 당시 맹렬하게 북벌을 주장하던 윤휴를 탄핵하거나 비난하고 허목 등이 허적을 탄핵하는 등 서로간의 공방을 멈추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1680년, 집권 5년만에 [[김석주]]가 허견의 역모를 밝혀내면서부터 시작된 [[경신환국]]으로 남인 정권은 축출되었다. 역모 죄로 단박에 허적, 윤휴, 유혁연, 오시수 등 남인 정권의 수뇌부가 사사되면서 남인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야사에는 영상([[영의정]]) 허적이 멋대로 유악을 가져다 써 숙종의 분노를 일으켰다는 유악 일화가 전해오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유악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고 허적을 처형할 때도 그의 죄목에는 유악 얘기가 없다. 권대운, 민암, 오정복 등 살아남은 수뇌부들도 야인이 되었고 정권은 송시열, 김수항을 위시로 한 서인에게로 돌아갔다.&lt;br /&gt;
&lt;br /&gt;
그러나 9년 후 [[인현왕후]] 폐출과 [[장희빈]] 문제로 다시 남인에게 기회가 왔다. 숙종은 장희빈이 [[경종(조선)|경종]]을 낳은지 돌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원자의 명호를 내리려 했는데 송시열이 반대를 하다가 삭직 문외출송되었고, 송시열의 삭직을 동의하지 않은 도승지 이하 4명의 [[승지]]들과 [[대간]]들을 모조리 파직 및 체직한 후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등 살아남은 남인의 영수들을 삼정승에 기용하면서 다시 남인정권을 세우니 이가 바로 [[기사환국]]이다.&lt;br /&gt;
&lt;br /&gt;
남인들이 점령한 대간은 송시열을 안치할 것을 청하자 숙종은 이를 수용함은 물론 심지어 가극[* 유배지에 가시울타리를 치는 것을 말함]할 것을 명했다. 남인 정권을 굳힌 왕은 이번에는 [[인현왕후]]를 내칠 것을 명하고 이에 반대하고 연명상소를 주창한 소론 [[오두인]], [[박태보]]를 고문한 후 유배했으며(유배 중 사망) [[장희빈]]을 중전으로 세우고 인현왕후는 폐출했다. 그리고 서인의 거두이자 남인의 철천지 원수인 송시열을 사사할 것을 명하니, 제주도로 유배갔던 송시열은 서울로 압송되다 [[정읍]]에서 [[금부도사]]를 만나 83세로 사사되었다. &lt;br /&gt;
&lt;br /&gt;
남인은 다시 모든 것을 되찾은것 처럼 보였다. [[허목]]을 시작으로 [[윤선도]], [[오시수]], [[홍우원]] 등 관작이 추탈된 남인들이 복권되었으며 [[민회]], [[윤휴]], [[유혁연]], [[허적]]등 사형당한 남인들도 신원되어 왕에 의해 치제했다. 이이와 [[성혼]]은 문묘에서 출향(!)되고 파괴된 [[정개청]][* 동인 인물로 정여립의 난 당시 옥사한 인물. 원래 서인의 영수 [[박순]]의 제자로 박순이 영의정에서 파직되자 화가 미칠까 두려워 동인들과 어울렸다. 후에 정철이 역적의 혐의를 받은 정개청을 가혹하게 고문하여 숨지게 했다.]의 사당이 복구되었다. 또한 허적의 아들인 허견의 옥사에 대한 재조사가 명해져 전 훈련대장인 [[김익훈]]이 70세의 나이로 형장을 받다 죽었으며, 김환, 이회 등 고변자들도 모조리 참수되었다. [[김석주]] 역시 관작이 추탈되는 등 죽어서 벌을 받았으며 전 영의정 [[김수항]]이 61세를 일기로 사사되었다. 어마어마한 변화였다.&lt;br /&gt;
&lt;br /&gt;
하지만 기사환국으로 들어선 남인 정권은 그 이상의 변화를 주도하진 못했다. 과거 허견의 옥사로 핵심세력이 사사되고 삭직된 청남 대부분도 세상을 뜬 상태에서 집권한 건 탁남 뿐이었다. 대표적인 이 시대의 인물인 권대운, 목내선, 이덕원 등은 소극적인 인물이었으며, 그 중에서 민암이 장희재를 비롯한 외척들과 동맹을 맺고 왕의 철저한 예스맨들로 정권을 유지해갔다.&lt;br /&gt;
&lt;br /&gt;
그리고 고작 4년만에 남인의 세도는 기울기 시작했으니, [[숙빈 최씨]]가 왕의 총애를 얻기 시작하면서 [[장희빈]]의 총애는 비례하여 약해진 것이다. 긴장한 남인 정권은 서인의 젊은 세력인 소론 [[함이완]], [[한중혁]], 노론 [[김춘택]], [[유복기]] 등이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것을 포착하여 쟁점화시킨 후 서인을 재기불능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역으로 유학 김인의 상소에 돌변한 숙종이 민암, 장희재를 문외출송 시키면서 사태는 환국으로 치달았다.[* 명백한 복위 역모 시도가 드러난 한중혁 일당은 사형을 감해 유배를 보내고 [[이시회]], 김춘택 등은 아예 석방했으며 고변자 함이완은 형신을 5차례 한 후 절도에 정배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충분히 역옥을 구성하여 삼족을 멸할 수준의 일을 꾸몄는데도 벌이 고작 이정도였다.] 영상 권대운까지 죄다 쫓겨난 빈자리에 [[남구만]]을 영상으로 임명하고 훈련대장에 [[신여철]]을 병판에 서문중을 임명하여 핵심수뇌부를 서인으로 채웠으니 이것이 바로 [[갑술환국]]이다. &lt;br /&gt;
&lt;br /&gt;
결국 [[장희빈]]은 강등되었고 [[인현왕후]]가 복귀했으며, 인현왕후가 죽자 남인은 [[숙빈 최씨]]와 [[노론]]에 의해 거의 박멸당하게 된다(신사옥사). 결국 이런 과정에서 남인들은 거의 [[개발살]]이 나버렸고 [[경종(조선)|경종]]이 즉위할 즈음 되면 제대로 된 야당 자리도 갖추지 못하게 된다. &lt;br /&gt;
&lt;br /&gt;
이런 상황에서 허목의 제자 유형원의 종제인 [[성호]] [[이익(실학자)|이익]]은 &amp;quot;[[실학]]&amp;quot;을 완성시키며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진력하였고, 남인 최후의 거두가 된다. [[실사구시]]와 [[붕당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사실 붕당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의 대부분은 이익의 논리에서 비롯되었다.], 균전론을 통한 중농주의의 완성 등이 그의 학문의 특징이었다.&lt;br /&gt;
&lt;br /&gt;
== 영정조 시대 - 복귀를 위한 근왕 노선 ==&lt;br /&gt;
[[경종(조선)|경종]]은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던 노론을 제거하려고 했고 결국 [[신임옥사]]로 노론을 작살내버리고 소론 정권을 세웠다. 그와 함께 소론 중에서도 준론과 관계가 깊었던 남인들도 대거 조정에 진출하게 된다. 그러나 그 기간은 얼마 가지 않았다.&lt;br /&gt;
&lt;br /&gt;
결국 경종이 승하하고 [[영조]]가 즉위하게 되자 다시 실각한 소론 준론(강경파)-남인의 주도로 [[이인좌의 난]]이 터졌다. 그러나 난은 진압되었고, 반란군을 배신했던 전라감사 [[정사효]]가 훗날 다시 역모를 꾸몄으나 들통난 덕에 다시 초토화되었으며 영조 31년의 [[나주 괘서 사건]]에선 거의 집단 자결 수준으로 영조에 대들다가 궤멸된다. 이로서 영남은 &amp;quot;[[반역향]]&amp;quot;으로 지목되고 이 지역의 남인들은 벼슬길이 막히게 된다. 심지어 영남 출신 의병도 많았음에도 말이다! 이로서 영남 출신 남인들은 다수가 재야로 잠적하게 된다.&lt;br /&gt;
&lt;br /&gt;
그나마 살아남은 것이 영조에 의해 중용된 기호 남인의 [[채제공]] 등이었다[* 채제공은 [[사도세자]]의 측근으로, 이미 영조 시절 승지와 [[대사헌]], [[대사간]]과 여러 판서(병조, 예조, 형조, 이조)를 역임했다. 처음에 폐세자가 거론 될때 극력 막은 것 때문에 노년의 영조에게 “진실로 나의 사심없는 신하이고 너([[정조(조선)|정조]])의 충신이다.”라는 말도 들었다. ([[사도세자]]가 죽을 때 모친상으로 시골에 내려가 있었다. ) 일찍이 [[서얼]]의 허통을 반대했다가 서얼에게 봉변을 당한게 개그 포인트.]. [[사도세자]]가 죽고 [[정조(조선)|정조]]가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면서 남인은 정계에 복귀하기 시작했다. 남인인 채제공 등의 복귀에 노론 [[벽파]]와 소론 벽파인 [[서명선]] 등이 손을 잡고 격렬하게 탄핵하였고 서명선은 아예 &amp;quot;저놈이 [[역적]]이 아니면 제가 역적입니다!&amp;quot;라고 [[선언]]하기에 일렀지만, 정조가 탕평파의 옛 수장 김재로와 아들 시파 김치인을 영상으로 중용하여 중재에 나서자 채제공과 남인 세력은 한 세력으로서 자리를 잡게 된다. [[시전]]의 독점을 철폐한 [[신해통공]]이 그의 업적이다.&lt;br /&gt;
&lt;br /&gt;
채제공은 [[사도세자]] 추숭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섬으로 당시 조정의 절대다수였던 노론을 죄인으로 은글슬쩍 바꾸어 실각시킨 다음 남인 정권을 세울 궁리를 했고, 이는 여려차례 벌어진 &amp;quot;영남 만인소&amp;quot;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이 때문에 노론 벽파의 지속적인 견제를 받았는데, 채제공이 죽을 때까 다 되었음에도 그의 후계자인 [[이가환]] 등은 [[이단]] 신봉자 등으로 낙인 찍혀 구심점이 될 만한 인물로 성장하지 못했던 것도 노론의 지속적인 견제가 원인이었다.&lt;br /&gt;
&lt;br /&gt;
무엇보다 정치에서 밀려난 남인들이 서학([[천주교]])에 상당히 심취하게 되었던 것이 복귀 후 재성장을 가로막은 결정적 원인이었다. [[천주교]]와의 연관은 정조 시기엔 어느정도 용서를 받았으나, 정조 사후 순조가 즉위하자 집권한 벽파에게 용납되지 않았다. 결국 [[신유박해]]로 이가환, [[이승훈]] 베드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의 목이 한꺼번에 날아가며 남인은 대타격을 입었다.[* 충청도 일대와 경기도 일대에 [[천주교]] 순교[[성지]]가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기호 남인이 [[신유박해]] 때 주르륵 순교한데다가, 이후에도 새남터, [[절두산]], 해미읍성 등지로 끌고 와서 처형했으니…] 이후 벽파는 실각했으나, 시파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이어지면서 노론을 제외한 당파들은 사실상 아무런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된다.  &lt;br /&gt;
&lt;br /&gt;
다만 [[흥선대원군]] 집권 이후 &amp;quot;[[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겠다&amp;quot;는 야사와 같이 유성룡의 후손 등이 등용되었고, 이후로도 영남 세력은 대원군의 지지세력인 위정척사 세력이 되었다. 남인의 후예들은 후에 [[독립운동가]]로도 일부 이어지게 되었지만, 이미 세력으로서의 의미는 정조대에 끝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lt;br /&gt;
&lt;br /&gt;
== 남인의 역대 영수 ==&lt;br /&gt;
 * [[유성룡]] - [[선조]] &lt;br /&gt;
 * [[이덕형]](?) - 광해군[* 당색이 거의 없는 사람이라 참으로 애매하다.]&lt;br /&gt;
 * [[이원익]](?) - 광해군~인조 초기[* 남인으로 분류되긴 하나 당색이 거의 없던 인물이라 애매하다. 하지만 동시대에 이름있던 남인 인물은 그가 유일하다.]&lt;br /&gt;
&lt;br /&gt;
=== 탁남의 역대 영수 ===&lt;br /&gt;
 * [[허적]] - [[효종(조선)|효종]]~[[숙종(조선)|숙종]] 초기 [[경신환국]]이 터지기 전까지&lt;br /&gt;
&lt;br /&gt;
=== 청남의 역대 영수 ===&lt;br /&gt;
 * [[윤휴]]&lt;br /&gt;
 * [[허목]][* 허목은 이미 현종조에 80살이 넘은 상황이라서 윤휴가 실세였다.]&lt;br /&gt;
&lt;br /&gt;
=== 남인의 원로 ===&lt;br /&gt;
 *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실세 [[민암]] - [[갑술환국]]이 터지기 전까지. &lt;br /&gt;
&lt;br /&gt;
=== 영,정조 대 ===&lt;br /&gt;
 * [[채제공]]- [[영조]], [[정조(조선)|정조]][*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일망타진된 이후에 역당으로 몰린 남인들은 한동안 힘을 쓰지 못하다가 영조 시기에 채제공이 신임을 받으면서 간신히 오랜만에 정치세력화하여 권세를 노려볼 수 있었다.]&lt;br /&gt;
 * [[정약용]] - [[정조(조선)|정조]][* 남인의 영수라기 보다는 정조 대 남인 노장파의 핵심이 채제공이었다면 소장파의 핵심이 정약용. 차세대 선두주자의 위치.]&lt;br /&gt;
 * ~~[[이가환]]~~[* 원래 채제공의 후계자로 정조가 키워주려 했으나 벽파의 거센 견제로 성장하지 못했고 역적으로 몰린 이잠의 종손인데다가 [[천주교]]신자라는 혐의가 있었고 나중에 실제로 그 혐의를 받아 처형된다.]&lt;br /&gt;
&lt;br /&gt;
== 남인의 집권기간 ==&lt;br /&gt;
 * 정철이 건저 사건으로 숙청된 이후 유성룡, 김성일의 남인과 이산해, 정인홍의 북인을 망라한 범 동인 정권:[[정철]] 실각(1591)~[[임진왜란]] 발발(1592)&lt;br /&gt;
 * 유성룡의 전시 내각:유성룡의 영의정 제수(1593)~유성룡이 북인의 탄핵으로 사임(1598)[* 사실 이 시기는 특정 당파의 집권 기간이라고 할 수는 없다.] &lt;br /&gt;
 * 허적의 탁남과 윤휴, 허목의 청남이 합쳐진 범 남인 내각: [[예송논쟁|갑인환국]](1674)~[[경신환국]](1680)&lt;br /&gt;
 * 민암 내각: [[기사환국]](1689)~[[갑술환국]](1694)&lt;br /&gt;
 &lt;br /&gt;
[[분류:조선의 붕당]]&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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