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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다나카 기이치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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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6-16T23:03:47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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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년 1월 25일 (수) 09:26에 Maintenance script님의 편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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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1-25T09:26:4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http://www.westatic.com/img/dict/rkdsr/souri26.jpg&lt;br /&gt;
&lt;br /&gt;
田中義一 [[1864년]] [[7월 25일]] ~ [[1929년]] [[9월 29일]]&lt;br /&gt;
&lt;br /&gt;
|||||||||||| [[역대 일본 총리]] ||&lt;br /&gt;
||임시겸임 / 25대 [[와카쓰키 레이지로]] ||→|| 26대 다나카 기이치 ||→|| 27대 [[하마구치 오사치]] ||&lt;br /&gt;
&lt;br /&gt;
근대 일본의 육군군인, 귀족원의원, [[남작]], 정치가.&lt;br /&gt;
&lt;br /&gt;
제26대 일본 [[총리]], 42대 외무대신, 45대 내무대신, 초대 [[척식]]대신을 역임했다. [[쇼와]] 덴노 시기의 첫 총리이다.&lt;br /&gt;
&lt;br /&gt;
하기번(萩藩) 하급무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마을사무소의 직원과 [[초등학교]]의 교원을 거쳐 20세에 육군교도단에 입대, 이후 자신의 유능함과 [[조슈]]번의 후원이 어울러지면서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졸업하여 본격적으로 직업군인의 길을 걸었다. 청일전쟁에 종군한 이후에는 [[러시아]]에 유학하고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는 등 철저하게 러시아를 연구하여 '러시아통(通)'으로 불렸다. [[러일전쟁]]에서는 [[만주군]] 참모로 근무. [[1906년]]에 『수감잡록隨感雜錄』이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높게 평가되면서 육군 중좌로서 제국국방방침의 초안을 작성했다.&lt;br /&gt;
&lt;br /&gt;
[[1910년]]([[메이지]] 43년)에 [[재향군인회]]를 조직하였다. 이 조직은 이후 다나카의 표밭으로 불렸다. [[1915년]]에 참모본부 차장, [[하라 다카시]] [[내각]] 및 제2차 [[야마모토 곤베에]] 내각에서 육군대신을 역임하고 여론확보를 위해서 육군성내에 [[신문]]반을 창설했다. --[[언플]] 돋네-- &lt;br /&gt;
&lt;br /&gt;
하라내각에서 육군대신이 된 후 남작위를 받고, 육군[[대장]]으로 승진하는 등, 이대로 가면 [[원수]]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평판을 들었으나 [[협심증]]으로 쓰러진 후 한직인 군사참의관으로 전보, 요양 생활을 하였다.&lt;br /&gt;
&lt;br /&gt;
http://userdisk.webry.biglobe.ne.jp/016/826/93/N000/000/000/126231336979816214428.jpg&lt;br /&gt;
&lt;br /&gt;
총리대신 취임 후.&lt;br /&gt;
&lt;br /&gt;
그에게 정치가로서 재기의 기회가 온 것은 [[정우회]]([[입헌정우회]], 政友會)의 분열로 인해 [[다카하시 고레키요]]가 정우회 총재직을 사임하면서 부터이다. 당초 가장 유력한 총재후보였던 [[요코다 센노스케]]는 분열의 책임을 지고 후보에서 사퇴하고, 당외인사에서 총재을 영입하기로 하였는데, 이토 미치하루나 고토 신페이 등이 거절하면서 다나카 기이치에게 차례가 돌아온 것이다.&lt;br /&gt;
&lt;br /&gt;
정우회 입당 시에 300만엔을 지참한 것으로 인해 육군대신의 관방기밀비를 횡령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으며, 총재취임후에는 군부대신 문관제라는 정우회의 정책공약을 파기하고 모리 가쿠, 구하라 후사노스케, 스즈키 기사부로 등 국수주의에 가까운 인물들을 영입하여 정우회의 색채를 친군부로 바꾸었다.&lt;br /&gt;
&lt;br /&gt;
[[1927년]] 쇼와금융공황으로 인해 와카츠키 레이지로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다나카 기이치의 정우회에게 내각조성의 대명이 내려졌고, 정우회 총재로서 제26대 일본 총리로 취임하게 되었다. 내각은 전 총리나 차기의 수상자리를 노리는 인사 혹은 장래에 총리가 유력시되는 거물들로 가득찬 내각이라는 평을 들었다.&lt;br /&gt;
&lt;br /&gt;
내치에선 금융공황을 [[모리토리움]] 선언으로 가라앉히고, [[보통선거법]]을 실시했으나 안보법 등의 악법으로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기타 반정부 운동가들을 대거 검거했다.&lt;br /&gt;
&lt;br /&gt;
외교에서는 적극적인 팽창정책으로 전환하여 자신이 스스로도 외무대신을 겸직하고 정무차관으로 대중국 강경 침략론자인 모리 가쿠를 앉혔다. 처음엔 둘은 잘 맞은 편이었지만, 그러나 모리의 지나친 강경론에 어느 정도는 조정의 필요성도 있다고 느끼는 다나카의 성향은 점차 대립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모리는 상당한 세력을 얻고 있었는데, 모리 가쿠의 주도하에서 &amp;quot;동방 회의&amp;quot;가 개최되어 외무부, 육해군 등의 중국 관련 인사들을 소집하여 중국에 대한 외교 방침을 정할 정도였다.&lt;br /&gt;
&lt;br /&gt;
[[1928년]] [[장작림]] 폭살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초기에 관련자들에 대한 엄격한 처벌을 주장하였으나, 육군내부의 반발에 밀려 포기하였다. 그러나 야당인 [[헌정당]]이 이를 계속 공격하고 쇼와 덴노까지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이 없다는 점을 들어서 '''&amp;quot;다나카를 더이상 보지 않겠다, 다나카는 아주 싫다&amp;quot;'''는 발언을 하자 결국 [[1929년]] 7월 내각총사퇴를 하면서 수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안습. 수상에서 사임한 후인 9월 28일에 귀족원의원 당선축하연회에 출석하였지만 병색은 완연하였고, 결국 그 다음날 협심증으로 사망하였다. 고작 3달 만이었다.&lt;br /&gt;
&lt;br /&gt;
다나카의 몰락은 조슈번의 몰락을 상징하였고, 이후 조슈번의 후신인 [[야마구치]] 현 출신 육군장교들은 한동안 육군대학에 입학 추천을 받지 못하는 사태까지 겪었다(...)&lt;br /&gt;
&lt;br /&gt;
쇼와는 단순히 덴노를 질책한 것이 내각 총사퇴로 번졌을 뿐만 아니라 죽음으로까지 몰아버린 것에 책임을 느껴서 이후로는 정치적 현안에 대해서는 일체 발언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고;;&lt;br /&gt;
&lt;br /&gt;
여담으로 진위 여부 논쟁으로 유명한 [[일본]][[제국주의]] 방침을 나타냈다는 &amp;quot;[[다나카 상주문]]&amp;quot;을 썼다고도 한다.&lt;br /&gt;
&lt;br /&gt;
조선총독부에 잠입해 폭탄을 투척하고 성공적으로 탈출했던 독립운동가 김익상 의사가 이후 1922년에 이 사람을 암살하고자 시도했으나 실패해 체포되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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