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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다산초당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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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6-16T16:33:36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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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년 1월 25일 (수) 09:42에 Maintenance script님의 편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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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1-25T09:42:4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http://dbscthumb.phinf.naver.net/2644_000_6/20130613094709921_4DZ89T9O3.jpg/5de08db2-2689-48.jpg?type=m250_fst_nce&amp;amp;wm=Y&lt;br /&gt;
&lt;br /&gt;
茶山草堂&lt;br /&gt;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위치한 [[문화재]]. 사적 107호.&lt;br /&gt;
&lt;br /&gt;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쓴 글씨로 알려져 있다.&lt;br /&gt;
&lt;br /&gt;
다산 정약용이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강진으로 귀양을 와서 생활하던 집이다. 이곳에서 정약용은 유배가 끝날 때까지 생활하며 학문에 몰두한 끝에 [[목민심서]]를 비롯한 숱한 저서들을 남겼다. &lt;br /&gt;
&lt;br /&gt;
정약용이 처음부터 이곳에서 18년 간의 강진의 유배 생활을 한 것은 아니다. 처음엔 강진 읍내의 주막인 동문매반가(東門賣飯家)에서 주모의 호의로 4년간 생활하였는데 정약용은 이 주막에 사의재(四宜齋)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야사로 이 주모의 딸이 정약용을 흠모한 끝에 정약용과 '통'하여 자식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사의재는 2007년에 복원해서 문화관광 해설을 제공하는 장소로 쓰이고 있다.이후 고성사의 보은산방, 학래 이청(정약용의 제자)의 집 등을 전전하다가 윤규로(尹奎魯)가 소유한 초가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이 초가가 바로 다산초당이다.&lt;br /&gt;
&lt;br /&gt;
유배에서 풀려 정약용이 고향으로 돌아간 이후, 돌보는 사람이 없어서 폐허로 방치되어 있다가, 1958년 강진 지역민들의 주도로 집을 고치고 그 해에 사적 제107호로 지정받았다. &lt;br /&gt;
&lt;br /&gt;
이름의 초당(草堂)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는 작은 초가집이었으나, 복원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현대의 정면 5칸, 측면 2칸의 기와집으로 중건하였다. [[강진군]]에서는 다시 이를 초가집으로 복원하겠다는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90601010314430610010|계획]]을 세웠으나 2014년까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이다.&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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