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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두보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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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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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년 1월 28일 (토) 16:37에 Maintenance script님의 편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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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분류:시인]] [[분류:수당시대/인물]]&lt;br /&gt;
||&amp;lt;tablealign=center&amp;gt;&amp;lt;tablewidth=100%&amp;gt;&amp;lt;-5&amp;gt;&amp;lt;:&amp;gt;&amp;lt;#980000&amp;gt;'''[[당나라|{{{#yellow 당 제국}}}]]''' '''[[상서우복야|{{{#yellow 상서우복야}}}]]'''  ||&lt;br /&gt;
||&amp;lt;:&amp;gt;전임 [[배요경]] ||←||&amp;lt;width=30%&amp;gt;&amp;lt;#980000&amp;gt;&amp;lt;:&amp;gt; '''{{{#yellow 두보}}}''' [BR] {{{#yellow 757년~762년}}} ||→||&amp;lt;:&amp;gt;후임 [[곽영예]] ||&lt;br /&gt;
||||||||||||||&amp;lt;:&amp;gt;&amp;lt;#980000&amp;gt;'''[[당나라|{{{#yellow 당 제국}}}]]''' '''[[상서좌복야|{{{#yellow 상서좌복야}}}]]'''  ||&lt;br /&gt;
||&amp;lt;:&amp;gt;전임 [[곽자의]] ||←||&amp;lt;width=30%&amp;gt;&amp;lt;#980000&amp;gt;&amp;lt;:&amp;gt; '''{{{#yellow 두보}}}''' [BR] {{{#yellow 764년~769년}}} ||→||&amp;lt;:&amp;gt;후임 [[최원]] ||&lt;br /&gt;
&lt;br /&gt;
[[파일:/image/dailian/2008/01/14/news1200276049_97638_1_m.jpg]]&lt;br /&gt;
杜甫, 712~770&lt;br /&gt;
&lt;br /&gt;
'''시성(詩聖)'''&lt;br /&gt;
&lt;br /&gt;
'''[[이백]]과 더불어 [[한시]] 문학의 양대 거성''',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야로(少陵野老).&lt;br /&gt;
&lt;br /&gt;
[[이백#s-1|이백]]과 함께 [[중국]] 2대 [[시인]]으로 불리는 인물. 동시대 인물이기도 하며 이백이 두보보다 12살 연상이었는데 두보가 이백의 재능에 크게 탄복하면서 그와 더불어 하남, 산동 일대를 유람하면서 친구 사이로 발전했다.[* 우연의 일치였을지 몰라도 이백과 두보 둘 다 상당히 유력한 가문의 후예였다. 이백은 전국시대부터 나름 중견가문인 농서 이씨의 후예였고(당나라 성씨이기도 하다!) 두보 역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 몇몇을 배출한 가문이었다.] 이백이 시선(詩仙)이라면 두보는 시성(詩聖). 그러나 이것이 시성보다 시선이 위대하다는 뜻은 아니다.[* 이미 중국 고전문학계에서는 이백과 두보의 시에 우열을 가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결론이 난 상태다.] 이백의 시에서는 도교적인 영향이 짙게, 두보의 시에서는 유교적인 경향이 짙게 나타나는데, [[도교]]적인 [[신선]]의 이미지를 이백이 가지고 있다면, [[유교]]적인 [[성인]]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두보라는 것이다. 때문에 도교[* 정확하겐 도가사상. 도교는 여러 사상이 짬뽕된 종교인지라 도가랑은 차이가 있다. 도교 항목 참조.]보다 유교를 더 국가가치로 삼았던 적이 많은 역대 중국왕조에서는 두보를 더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대중적인 인기는 역시 술먹고 ~~노니나~~ [[풍류]]를 읊을 때 더 좋은 [[이백]]. 조선 시대의 유명한 주당 시인들은 이태백과 자신을 견주고는 하였지만, 사실 조선시대에 세 번에 걸쳐 훈민정음 번역본을 편찬한 덕분에 한글 변천사를 잘보여주고 있는 [[두시언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실제 '교과서용'은 두보였다.[* 이 또한 두보의 시에 유교적 사상이 잘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삼국지]]를 종결시킨 인물 가운데 하나인 [[두예]]의 먼 후손이며, 조부인 두심언도 시인이었지만[* 유명한 고사성어 '[[천고마비]]'는 바로 이 두심언이 북방에서 근무하는 친구에게 편지로 써보낸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넉넉한 집안은 아니었다. 과거도 억울하게 계속 낙방하여 방랑의 삶을 살았다. [* 이때 시험관 이림보가 너무 뛰어나서 낙방시켰다는 소리가 있는데 당시 시험관 이림보는 아예 시험지 자체를 안 보고 전원 낙방시켰다. 그리고 현종에게 &amp;quot;인재를 다 뽑아서 이제 인재가 없어요!&amp;quot;라는 희대의 개소리를 했다. ~~[[허균]]이 그 당시에 있었다면 두들겨팼을지도~~] 게다가 성격도 강직하여 아첨을 싫어했기에 과거에 급제했어도 높은 벼슬을 차지하긴 어려웠다. 이런 성품 때문인지 두보는 백성들의 가난하고 궁핍한 삶을 시로 써[* &amp;quot;처음 변방에 수자리 살러 갈 적에 마을 이장이 머리 싸맬 것을 주셨는데, 머리 세어 돌아오니 다시 변방으로 가라네&amp;quot;, &amp;quot;'''변방에 흐르는 피가 [[바다]]를 이루어도 황제의 가시려는(변방 정벌하려는) 뜻은 변하지 않는다네'''&amp;quot;(병거행)라는 구절이 있는가 하면, 어느 노파가 징발을 피해 달아난 남편을 잡으러 온 관리에게 아들 둘 있던 것도 전쟁 나가서 죽고 손자는 이제 젖도 못 뗐다면서 '''남편 말고 자기를 데려가면 병사들 밥 짓는 일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비는 처절한 장면을 그린 작품(석호리)도 있다.] 고위층의 사치와 대비하고 부패한 사회상을 비판하는 시를 많이 지었다. 이 때문에 두보는 현실적이고 사회성이 높은 시를 썼다는 평가를 받으며 당시 사회상을 거울과 같이 그려내어 사람들이 그를 ‘시사(詩史)’라고도 불렀다. 물론 두보의 시 가운데선 낭만주의적인 시도 꽤 많다.&lt;br /&gt;
&lt;br /&gt;
이백과 달리 [[안사의 난]]이 그에게는 입신양명의 발판이 되었다. 장안에 연금된 지 1년 만에 탈출, 새로 즉위한 황제 숙종의 행재소로 도망쳤다. 그리고 그 공에 의하여 좌습유(左拾遺)라는 벼슬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강직한 성격은 그대로라서 결국 지방관으로 좌천되었고, 그나마도 그 지역에 어마어마한 기근이 닥치면서 끼니도 못 구할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굶주리던 백성들을 외면할 수 없어서 상관들에게 구호식량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하자 분노하여  48세에 사직하고 처자와 함께 [[감숙성]](甘肅省)을 거쳐 촉 땅의 [[청두]](삼국지의 그 성도 맞다. 현재 [[쓰촨성]]의 중심지이다.)에 정착해  성 밖에 완화초당(浣花草堂)을 세웠다. 잠시 친구였던 촉 절도사의 막료로 있기도 했다.[* 일단 이 때가 두보의 생활에서 제일 좋았던 때였다. 그런데 문제는 둘의 사이가 친구라고 보기에는... 심지어 절도사가 두보를 죽이려다가 참은 적도 있었다.] 이후 54세 때, 귀향할 뜻을 품고 청두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내려가서 기수夔州의 협곡에 이르러, 여기서 2년 동안 체류하다가 다시 2년간 더 방랑하다가 배 안에서 병을 얻어 [[동정호]](洞庭湖)에서 58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lt;br /&gt;
&lt;br /&gt;
야사에 따르면 매우 굶주리다가 간신히 잔칫집을 방문하여 폭식하다가 생긴 배탈로 사망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대만의 시사만화가 어부는 두보의 열전을 만화화하면서 이 '어사설'은 그다지 신빙성이 없다고 논박하긴 했는데, 어쨌든 물에 비쳐진 보름달을 보고 잡으려다가 물에 빠져죽었다는 이태백보단 현실적이다.(...)&lt;br /&gt;
&lt;br /&gt;
왠지 이백과 대조되어 문약하고 꼿꼿한 선비 이미지가 강하긴 하지만 이백 못지않은 술고래였다. 그래서 친구들을 대동하고 2차, 3차까지 끝장을 보았으며 장안에서 이백과 잠깐 교류할 때에는 둘 다 고주망태가 되어 한 침상을 쓰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심지어 그 강직한 성품을 무색케 할 정도로 관아의 빈민구제용 비축미까지 암시장에 내다 팔아(...) 술을 마셨다고 한다. 두보 자신의 말로는 몇 말 안 된다고 하지만.&lt;br /&gt;
&lt;br /&gt;
또한 말까지 잘 탔는데 어느날 술김에 말을 타고 벼랑을 넘겠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된통 다친 적도 있다고 한다. 가난한 시절, 어렵게 사람들이 저급술을 빚어서 주자 무척 기뻐하며 그 심정을 시로 쓰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재능에 비해 삶은 [[안습]]한 인물이었다. 이백이 [[곽자의]] 한 명에 대한 시만을 남김에 비해, 두보는 심심하면 그 당시 인물에 대한 시를 남겼고 그 중에는 [[고선지]] 장군에 대한 고도호총마행(高都護馬行)이라는 시도 남겼는데 고선지의 애마 한혈마와 같이 고선지를 찬양한 시였다.&lt;br /&gt;
&lt;br /&gt;
그의 후손은 한국에도 100여 명이 살고 있는데 정확히는 [[정유재란]]이 끝나고 두 아들과 [[조선]]으로 귀화한 장군 [[두사충]]의 후손들이다.&lt;br /&gt;
&lt;br /&gt;
두보의 이명인 두공부에서 유래한 [[공부사우루스]]라는 [[공룡]]이 있다.&lt;br /&gt;
[[분류:시인]]&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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