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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라울 마그랭 베르느레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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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18:36:26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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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년 1월 29일 (일) 11:09에 Maintenance script님의 편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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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1-29T11:09:2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분류:프랑스의 인물]] [[분류:제2차 세계대전/군인]] [[분류:한국전쟁/군인]]&lt;br /&gt;
http://img684.imageshack.us/img684/6811/ghmonclarraoul.jpg&lt;br /&gt;
&lt;br /&gt;
[목차]&lt;br /&gt;
== 개요 ==&lt;br /&gt;
Raoul Charles Magrin-Vernerey (라울 샤를 마그랭 베르느레)&lt;br /&gt;
&lt;br /&gt;
[[1892년]] [[2월 7일]] ~ [[1964년]] [[6월 3일]]&lt;br /&gt;
&lt;br /&gt;
[[프랑스]]의 [[육군]] [[군인]]. [[한국전쟁]] 관련 서적에서는 그의 본명보다 가명인 '''랄프 몽클라르(Ralph Monclar)'''로 자주 표기된다. 그의 이름인 [[라울]](Raoul)은 [[영어]]의 [[랄프]](Ralph, [[영국]]에서는 [[레이프]])에 해당하는 이름이다. 두 이름의 어원은 고대 노르드어 Raðulfr(라둘프르)에서 유래한 것으로 '[[늑대]]의 충고'라는 의미이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출생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lt;br /&gt;
1892년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 육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후 그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수많은 전투에 참전해 15차례 부상을 입고 15차례 표창[* 그런데 자료마다 그의 부상 경험 및 훈장 수여 횟수를 15번에서 18번까지 각기 다르게 표기하고 있다.]을 받으면서 [[대위]]로 진급했다. [[1940년]], 그는 젊은 나이에 [[중령]]으로 진급하고 [[나르비크]] 전투에서 [[외인부대|제13외인부대]]([[여단]]급)를 지휘하여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에 유일한 승리를 안겨 주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게 항복하자 그는 [[영국]] [[런던]]으로 망명하여 이곳에 있던 [[자유 프랑스|자유 프랑스군]]에 가담했다. 이때 그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이면서 이름을 '랄프 몽클라르'로 바꿨다. 그는 외인부대장으로 재직하면서 [[이탈리아]] [[해군]] [[대장(계급)|대장]]을 포함해 1만 4천 명의 적군을 생포하고 마사우아항을 점령해 에리트레 전투를 종결짓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한국전쟁과 그의 [[대인배]]적 행보 ===&lt;br /&gt;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그는 [[중장]]으로 진급했다. 그런데 2차대전이 종전한 지 6년이 지난 [[1950년]] [[한반도]]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었던 프랑스는 영국, [[터키]], [[오스트레일리아]]에 이어 1950년 7월 22일 [[주한UN군|유엔군]]에 참여할 것을 정식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영국과 터키가 각각 1개 여단을 파견한 것과 달리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에 따른 전후 복구 작업, [[NATO]] 가입, [[베트남 전쟁|인도차이나 전쟁]] 등 국내외 사정으로 인해 정상적인 군대를 파견하지 못하고, 단지 10여 명의 고위급 [[장교]]를 포함시킨 시찰단을 구성했을 뿐이었다.&lt;br /&gt;
&lt;br /&gt;
하지만 [[미국]] 정부는 프랑스 장교시찰단이 [[극동]]지역에 도착해도 [[일본]]을 벗어나지 않게 할 것임을 프랑스 정부에 통고했다. 왜냐하면 미국 정부는 전쟁 초기부터 좀 더 많은 [[유엔]] 회원국의 전투부대가 미국 측에 동참해 한국전쟁에 참가함으로써 이 전쟁이 단순히 '미국 대 [[소련]]' 간의 전쟁이 아니라 '''자유세계 대 공산세계 간의 전쟁'''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너무 적은 수의 부대를 파견하려는 나라의 참전 의사를 거부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이때 프랑스에서는 많은 시민과 군인들이 실질적인 [[군대]] 파견을 요구했는데, 프랑스 육군참모총장인 블랑 장군과 제2차 세계대전 나르비크 전투의 [[전쟁 영웅]]으로서 당시 [[알제리]] 외인부대 감독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몽클라르 장군 등이 군대 파견을 주장하는 대표적 인물이었다.&lt;br /&gt;
그러나 파견 결정권을 쥐고 있던 프랑스 국방차관 막스 르젠은 위의 몇 가지 사정 때문에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에 블랑 장군과 몽클라르 장군이 그를 설득하고 나섰다. 블랑 장군은 &amp;quot;기존 부대와 관계가 없는 특별부대를 창설하고, [[현역]] 및 [[예비군|예비역]]에서 지원병을 받아 [[미군]] [[보병]][[대대]] 형태로 구성하겠다&amp;quot;고 제안했다. 그러나 르젠 차관은 &amp;quot;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부대를 단시일 내에 창설해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amp;quot;면서 거절했다. 이에 블랑 장군은 &amp;quot;제2차 세계대전이나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했던 용사들 중에서 엄격한 기준에 따라 선발한다면 가능하다&amp;quot;고 말했고, 몽클라르 장군도 이에 덧붙여 &amp;quot;만약 부대가 창설되면 제가 그 부대의 대장직을 맡겠습니다&amp;quot;라며 르젠 차관의 결심을 촉구했는데, 이 말에 르젠 차관은 몽클라르 장군에게 &amp;quot;내가 알기로는 미국의 대대는 육군 중령이 지휘관인데, 장군인 당신이 어떻게 [[대대장]]을 할 수 있겠는가?&amp;quot;라고 묻자, 몽클라르 장군은 '''&amp;quot;저는 육군 중령이라도 좋습니다. 저는 언제나 전쟁터에서 살아 왔습니다. 저는 곧 태어날 자식에게 제가 최초의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습니다.&amp;quot;'''라고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오오 트롤남캐 오오|오오 장군님 오오]]~~ 그 결과 르젠 차관도 마침내 이를 받아들이게 됐다.&lt;br /&gt;
&lt;br /&gt;
이로써 몽클라르 중장은 장군인 채로 대대장이 되어[* 일반적인 계급 강등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대대장]]에 격을 맞추기 위해 만든 임시 [[중령]] 계급장을 달았다.] 유엔군 프랑스 대대의 초대 지휘관[* 재임기간: [[1950년]] [[11월 29일]] ~ [[1951년]] [[11월 30일]].]을 역임하게 되었다. 비록 대대급 부대의 지휘를 위해 몽클라르는 자신의 계급을 중령으로 자처했지만 유엔군의 다른 지휘관들은 여전히 그를 중장으로 대우해주었다. 몽클라르는 당시 [[미8군]]사령관이던 [[매튜 B. 리지웨이]] 중장과 나이도 군 경력도 비슷했다. 그래도 그는 자신보다 군 경력도 짧고 나이도 어린 미군 지휘관들이 명령을 내려도 이에 개의치 않고 포탄이 난무하는 최일선에서 부대를 진두지휘했다. 그는 한국전쟁에서도 과거 2차대전 때 썼던 가명인 '몽클라르'를 그대로 사용했다.&lt;br /&gt;
&lt;br /&gt;
그가 지휘하는 프랑스 대대는 [[한국]]에 도착한 후 [[미 육군]] [[제2보병사단(미국)|제2사단]] 23연대 휘하로 들어갔다. 1951년 2월 13일에서 16일까지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에서 벌어졌던 [[지평리 전투]]에 참전한 프랑스 대대는 [[중국 인민지원군]] 제39군을 상대로 [[총검 돌격]]까지 해가면서[* [[중국 인민지원군]] 부대가 [[주한UN군|유엔군]] 진내에까지 쳐들어오자, 프랑스 대대는 '''모두 [[철모]]를 벗어던지고 머리에 빨간 수건을 동여맨 채 [[총검]]과 [[개머리판]]을 휘두르면서''' 중공군을 격퇴했다.] 혈투를 벌인 끝에 1950년 10월 중국 인민지원군 부대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래 처음으로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게 된다. 지평리 전투가 승리로 끝나자 몽클라르는 대대를 향해 '''&amp;quot;그대들은 이제 영광의 포로가 된 것이오!&amp;quot;'''라고 외쳤다고 한다.&lt;br /&gt;
&lt;br /&gt;
[[http://worldoftanks.kr/ko/news/pc-browser/9/1610_chipyoung/|지평리 전투관 답보 링크]]&lt;br /&gt;
=== 말년 ===&lt;br /&gt;
1964년 그가 프랑스 [[파리(도시)|파리]]에서 사망했을 때, [[샤를 드 골]] 프랑스 [[대통령]]은 현 프랑스 군사박물관인 앵발리드에서 직접 장례식을 주관하는 등 장군의 위국헌신에 대한 국가적 예우를 표했다.&lt;br /&gt;
&lt;br /&gt;
== 평가 ==&lt;br /&gt;
몽클라르 장군은 위에서 서술한 그의 행적에서 볼 수 있듯이 여러모로 비범한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이분은 [[1950년대]]를 살아가던 당시 유럽인들은 '''어디에 붙어 있는 나라인지도 몰랐던''' [[동아시아]]의 [[듣보잡]] 약소국이었던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 '''현역 [[중장]]이었지만 [[중령]]을 자처하면서까지 전쟁에 참전한 진정한 [[대인배]]이시다!''' 그는 이미 2차대전의 영웅으로서 명성을 날리고 있었기 때문에 본국에 그냥 남아 있었다면 좀 더 편안히 살아갈 수도 있었겠지만, 한국의 자유와 군인의 명예를 위해 기꺼이 참전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사실 위에서 보듯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프랑스 대대 전원이 프랑스 본국에서 실시된 지원병 모집을 통해 창설된 것이니 부대원 전원에게도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다. 참고로 프랑스 대대는 한국전쟁이 휴전하자마자 바로 당시 [[베트남]]에서 벌어지던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 왜냐하면 당시 프랑스에서 가용가능한 장비와 부대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도차이나 전선에서 프랑스군은 장비가 없어서 구 일본군과 독일군의 장비까지 끌어다 썼어야 했다.http://blog.naver.com/sundin13/140011315491]하였고, 이 전쟁의 결정적 전투라고 할 수 있는 [[디엔비엔푸 전투]]에 참전하여 부대원 대부분이 전사하였기 때문에 생존자가 얼마 남지 않았다.&lt;br /&gt;
&lt;br /&gt;
== 일화 ==&lt;br /&gt;
[[6.25 전쟁]] 도중이던 1951년 1월 10일에 있었던 전투에서 프랑스 대대는 '''단 1개 [[소대]], 25명의 총검 돌격으로 [[북한군]] 1개 대대를 격퇴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 대대가 입은 피해는 '''부상자 단 2명'''에 불과했다. 당시 [[소대장]]은 그 공으로 미군으로부터 엄청난 찬사를 받고 은성훈장까지 수여받았으며, 미군은 이에 큰 감명을 받아 미8군사령부는 [[리지웨이]] 장군 명의로 다음과 같은 명령서까지 내릴 정도였다.&lt;br /&gt;
&lt;br /&gt;
&amp;gt; [[총검]]은 아마 연합군의 최후의 비밀무기는 아닐지라도 귀관들이 무시할 수 없는 [[전략]]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총검이 단지 [[통조림]] 깡통을 따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 [[미군]]은 이때까지만 해도 [[총검 돌격]]을 [[제1차 세계대전]] 때나 하던 구식 [[전술]]이라고 등한시했다. 물론 [[기관총]]의 등장과 기관단총의 보급(현대에는 돌격소총)으로 총검 돌격이 구식 전술로 전락할 이유는 충분하고도 남지만, 양호한 급양상태에 높은 사기와 제대로 된 군사훈련을 받은 군대가 그렇지 못한 병사들에게 발휘하는 총검 돌격은 적군에게 엄청난 심리적 압박과 공포감을 줄 수 있다. 다만 미군은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과 싸우면서 [[반자이 어택|총검 돌격의 한계]]를 경험했으니,''' 당시 전쟁의 전훈을 충실히 좇았다고 볼 수 있다.]을 모든 장병들은 유의해 주길 바란다.&amp;quot;&lt;br /&gt;
그러나 이에 대한 베르느레 ~~중령~~중장의 평가는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lt;br /&gt;
&amp;gt; &amp;quot;뭐라고? 우리 병사들이 한 총검 돌격은 '''보병전술의 기초 중의 기초잖아?''' 그런데 저 [[양키]]놈들은 그걸 가지고 왜 난리인 거지?!&amp;quot;&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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