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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레나트 스코일룬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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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5T06:28:37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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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년 1월 29일 (일) 15:29에 Maintenance script님의 편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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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1-29T15:29:1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 * 상위 항목 : [[축구 관련 인물]]&lt;br /&gt;
&lt;br /&gt;
http://storiedicalcio.altervista.org/stranieri/images/Skoglund_02.jpg&lt;br /&gt;
흔들리는 옥수수 파이프[* 그의 드리블 스타일로 인해 [[브라질]]에서 붙은 별명]&lt;br /&gt;
&lt;br /&gt;
|| 이름 || 칼 레나트 스코일룬 [br] (Karl Lennart Skoglund) ||&lt;br /&gt;
|| 생년월일 || [[1929년]] [[12월 24일]] ||&lt;br /&gt;
|| 사망년월일 || [[1975년]] [[7월 8일]] ||&lt;br /&gt;
|| 국적 || [[스웨덴]] ||&lt;br /&gt;
|| 출신지 || [[스톡홀름]] ||&lt;br /&gt;
|| 포지션 || 레프트 윙 ||&lt;br /&gt;
|| 신체조건 || 170cm / 68kg ||&lt;br /&gt;
|| 등번호 || 11 ||&lt;br /&gt;
|| 소속팀 || 함마르비 IF (1946-1949) [br] AIK (1949-1950) [br]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1950-1959) [br] [[UC 삼프도리아]] (1959-1962) [br] [[US 치타 디 팔레르모]] (1962-1963) [br] 함마르비 IF (1964~1967) [br] 쉐르토르프 IK (1968) ||&lt;br /&gt;
|| 국가대표 || 11경기 / 1골 (1950~1964) ||&lt;br /&gt;
&lt;br /&gt;
[목차]&lt;br /&gt;
== 생애 ==&lt;br /&gt;
=== 어린 시절 ===&lt;br /&gt;
레나트 스코일룬은 1929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삼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축구]]뿐만 아니라 [[아이스하키]], [[농구]] 등에도 재능을 보였다. [[영웅은 공부 따원 안 한다네|그는 학교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고 친구들과 축구하고 노는 것을 즐겼다]]. 그리고 테니스공으로 드리블을 하며 드리블 능력을 키웠다.&lt;br /&gt;
&lt;br /&gt;
스코일룬은 1943년 IK 스차르난[* BK Stjärnan. 한국어로 [[별]]이라는 뜻]의 유스팀에서 축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지만 유스팀이 해체되는 바람에 1944년에는 함마르비 IF로 옮겼다. 2년간의 유스 수업 끝에 1군에 데뷔하였고, 여기에서 활동하는 동안 그의 가장 유명한 별명인 나카[* Nacka. 그와 관련된 여러 차례의 이적 제의를 보냈던 축구팀의 이름이자 그의 형이 뛰었던 축구팀이었다는 설도 있고, 사실 불분명하다]가 붙여졌다.&lt;br /&gt;
&lt;br /&gt;
=== 클럽 ===&lt;br /&gt;
그의 데뷔 시즌은 1946-47이었는데, 당시 소속팀 함마르비의 상황은 극도로 어려웠다. 2부 리그의 동부 지구에서 꼴찌로 처진 팀은 리그 재조정으로 인해 4부 리그로 추락했고 스코일룬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기 기사로 일을 하며 [[투잡]]을 뛰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의 실력 하나는 대단했고 곧 함마르비의 아이콘이었다. 몇 년을 노력한 끝에 결국 1부 리그로 팀을 끌어올리는데에는 성공했고, 이로 인해 더 큰 클럽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결국 함마르비는 재정 문제 때문에 AIK로 그를 팔 수 밖에 없었다. 당시 AIK는 헨리 칼손의 이적으로 인한 공백을 메울 필요가 있었고, 그를 대체자로 낙점하였다. 하지만 그는 한 시즌 동안 단 다섯 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계약상의 문제로 그에게 너무 비싼 돈이 들어간 것. &lt;br /&gt;
&lt;br /&gt;
그러던 중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브라질 월드컵]]에 출전한 그는 칼-예리크 팔미에르와 좋은 호흡을 보여주며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스웨덴]]의 결승 리그 진출을 이끌었다. 결승 리그에서도 김빠진 마지막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스페인]]전을 제외한 앞선 2경기에 모두 출전하였고, 그의 활약에 꽂힌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브라질]]의 [[상파울루 FC]]가 만 달러로 이적 제의를 했다. 하지만, AIK는  더 많은 돈을 갖고 오기를 원했고, 이 제안에 혹한 팀이 바로 [[세리에 A|이탈리아]]의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인터 밀란]]이었다. 인터 밀란은 상파울루가 제의한 금액의 5배인 5만 달러의 이적료를 제의하였고, AIK는 그에 응했다. &lt;br /&gt;
&lt;br /&gt;
이탈리아에 진출한 첫 시즌. 21살짜리 풋내기 윙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냐는 대답에 그는 12골(29경기 출전)로 답을 했다. 비록 우승에는 [[데르비 델라 마돈니나|한 지붕 두 가족]] 라이벌인 [[AC 밀란]]에게 단 1점차이로 아깝게 실패했지만 그의 데뷔 시즌 임팩트는 대단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기어코 스쿠데토를 차지했고, 다음 해에도 우승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스코일룬은 두 번의 챔피언 확정 시합에서 모두 골을 넣는 활약을 보였다.&lt;br /&gt;
&lt;br /&gt;
이렇게 나름 대단한 기록을 남겼지만,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술]]이었다. 스코일룬은 술을 엄청나게 좋아해서 [[알코올 중독]] 수준까지 이르렀고, 훈련장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밀라노]]의 [[바#s-2|바]]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였다. 이는 점점 인터 밀란 보드진들의 [[어그로]]를 쌓았고, 출장수도 반 이하로 줄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결국 그는 1958-59 시즌을 끝으로 [[UC 삼프도리아|삼프도리아]]로 이적하게 되었다. 새로운 팀에서는 잠깐 정신을 차리는 듯 했지만, 그는 술 때문에 결국 [[이혼]]당하고 술에 취한 채로 경기를 하는 등 [[막장]]으로 치달아갔다. 삼프도리아도 견디다 못하고 그를 팔아치웠고, 그의 또 다른 행선지는 [[US 치타 디 팔레르모|팔레르모]]였다. 이미 이때의 그는 이탈리아에서 뛸만한 실력은 사라졌고, 팀에서는 야간 [[통행금지|통금]]까지 해가며 그를 단속하려고 애썼지만 결국 실패. 여기서도 1년밖에 버티지 못하고 방출당하고 말았다. &lt;br /&gt;
&lt;br /&gt;
스웨덴의 친정팀 함마르비로 돌아온 그는 커리어 사상 최고의 골을 넣기도 했지만, 팀은 강등과 승격을 오르내렸고, 커리어의 마지막은 그의 형이 감독으로 있던 쉐르토르프에서 보냈다. &lt;br /&gt;
&lt;br /&gt;
===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 ===&lt;br /&gt;
명성에 비해 국가대표 출전 수가 상당히 부족한데, 이탈리아에서 뛰는 원인도 있었지만 그의 술 사랑도 큰 문제였다. 1950년 월드컵 이후로 A매치 출전이 없던 그를 결국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홈에서 열리는 월드컵]]에 부르기는 했고, 여기에서 모든 경기를 뜀으로서 조국의 준우승에 기여했다. 그리고 스티그 안데르손은 그를 위해 Vi hänger me(We hang me)라는 노래를 헌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두 번의 월드컵이 그의 A매치 출장의 전부였다.&lt;br /&gt;
&lt;br /&gt;
=== 은퇴 이후 ===&lt;br /&gt;
선수 생활을 마친 후, 스코일룬의 인생은 완벽히 망가졌다. 중독에 빠진 몸 상태는 날로 나빠졌으며, [[스톡홀름]]에서 홀로 살며 [[이탈리아]]에 남은 아이들을 그리워했지만 다시 볼 수 없었다. 어린 시절의 친구와 함께 잡지사를 세워 재기를 노렸지만 그는 1975년 7월 8일에 자신의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lt;br /&gt;
&lt;br /&gt;
== 플레이 스타일&amp;amp;평가 ==&lt;br /&gt;
볼 기술이 대단했고 빠른 윙어였다. 또한 정확한 킥을 가지고 있어서 [[코너킥]]을 직접 골로 넣은 적도 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amp;gt;나카는 박수를 받으며 살기를 원했고, 코미디언처럼 남들을 웃기며 살기를 원했다. 나카는 많은 이들을 행복하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웃음소리가 잦아들면 코미디언은 죽는다. 환호가 잦아들자 나카는 죽었다. - 스웨덴의 한 저널리스트&lt;br /&gt;
&lt;br /&gt;
== 뒷 이야기 ==&lt;br /&gt;
 * 이탈리아에서 뛸 당시 스코일룬은 시즌이 끝나고 휴식기에는 스웨덴으로 가서 사람들과 지내며 묘기를 보여주는 것을 즐겼는데 이것이 그의 인기 비결 중 하나였다.&lt;br /&gt;
&lt;br /&gt;
== 수상 ==&lt;br /&gt;
=== 클럽 ===&lt;br /&gt;
 * 스웨디시 컵 우승 1회: 1949-50(AIK)&lt;br /&gt;
 * [[세리에 A]] 우승 2회: 1952–53, 1953–54(이상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lt;br /&gt;
&lt;br /&gt;
=== 국가대표 ===&lt;br /&gt;
 * [[FIFA 월드컵|월드컵]] 준우승 1회: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1958]]&lt;br /&gt;
 * [[FIFA 월드컵|월드컵]] 3위 1회: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1950]]&lt;br /&gt;
&lt;br /&gt;
[[분류:축구선수]][[분류:스웨덴의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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