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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망탁조의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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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4-19T12:16:52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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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년 1월 30일 (월) 13:38에 Maintenance script님의 편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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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1-30T13:38:1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莽卓操懿&lt;br /&gt;
한자 훈음[* 성어의 뜻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 우거질 망/높을 탁/지조 조/아름다울 의&lt;br /&gt;
&lt;br /&gt;
[목차]&lt;br /&gt;
&lt;br /&gt;
== 개요 ==&lt;br /&gt;
||&amp;lt;-4&amp;gt; [[망탁조의]] ||&lt;br /&gt;
|| [[왕망|망]] || [[동탁|탁]] || [[조조(삼국지)|조]] || [[사마의|의]] ||&lt;br /&gt;
&lt;br /&gt;
||&amp;lt;-4&amp;gt; [[망탁조의|망조의온]] ||&lt;br /&gt;
|| [[왕망|망]] || [[조조(삼국지)#s-1|조]] || [[사마의|의]] || [[환온|온]] ||&lt;br /&gt;
&lt;br /&gt;
[[중국]] 역사상 [[한나라]] 이후부터 [[위(삼국시대)|조위]] 때까지의 4명의 역적(당시 기준에서 역적. 지금은 [[권신]])을 가리키는 역사용어다. 멤버는 [[왕망]], [[동탁#s-1|동탁]], [[조조(삼국지)|조조]], [[사마의]]다. 망탁조의는 이 4명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온 말이다. 당나라 사람 조인(趙璘)의 저서 ≪인화록(因話錄)≫에 처음 등장하는 표현으로[* ≪인화록≫권 5 : ... 而莽、卓、操、懿以降，行滔天之心，援此為法，尤可悲也。[[https://zh.wikisource.org/wiki/%E5%9B%A0%E8%A9%B1%E9%8C%84/%E5%8D%B7%E4%BA%94|출처]]], ≪송사(宋史)≫[* ≪송사≫권 409 : ... 而大奸之必還，莽、卓、操、懿之禍，將有不忍言者。[[https://zh.wikisource.org/wiki/%E5%AE%8B%E5%8F%B2/%E5%8D%B7409|출처]]]에도 같은 표현이 나온다.&lt;br /&gt;
&lt;br /&gt;
이 네 사람 모두 일단 표면적으로는 [[역적|자신이 태어나 자라고 봉록을 먹던 국가를 무너뜨리려 한 자들]]로, 왕망은 [[선양]]의 시조[* 흔히 말하는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선양했다는 아름다운 전설 말고 반강제적 선양을 말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찬탈(簒奪)의 시조'로 이 멤버들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동안에 [[황제]]가 되었다. 동탁은 황제를 노렸으나 [[헌제]]의 선양이라는 미끼에 걸려 결국 죽음을 당했고 조조와 사마의는 자신의 생전에는 황제가 되지 않았으나 그 [[조비|자손]][[사마염|들이]] 황제가 되면서 황제로 추존되었다. ~~우리 중나라 [[원술(삼국지)|꿀물황제]]는 무시함?[* 원술이 망탁조의로 발탁되지 못한 이유는...다른 네명의 경우 중앙정부를 장악하고 황제를 압박하여 선양을 받아냈으며, 이를 통하여 이전까지의 황제를 폐위시키고 왕조를 교체한 데 비해 원술은 지방 군벌로써 임의로 황제를 자칭하였기에 자기 지배지역 바깥에서는 황제로 인정받지 못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저기 낄 레벨이 못된다--]~~ ~~니네 패거리들 중에서는 [[손견|무열황제]]가 있잖아. 뭘 그래?~~&lt;br /&gt;
&lt;br /&gt;
결국 이 망탁조의 4명은 후세 사람들에게 [[역적]]에 대한 기준이자 대명사가 되어서, 누군가가 역모를 꾸미거나 혹은 맘에 안드는 누군가를 디스할 때 반드시 튀어나오는 말이 되었다. 이 구성에서 실제 찬탈은 못한 동탁을 빼고 동진의 권신이었던 [[환온]]을 추가하여 '망조의온(莽操懿溫)'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lt;br /&gt;
&lt;br /&gt;
== 구성원 ==&lt;br /&gt;
=== 왕'망' ===&lt;br /&gt;
王莽. 왕망은 평제를 독살하고 [[꼭두각시]], [[허수아비]] 황제였던 유자에게 형식적인 [[선양]]을 받아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웠다.&lt;br /&gt;
&lt;br /&gt;
이미 그는 유자가 즉위했을 때 가황제와 섭황제를 칭하고 그렇게 부르게 했으며 결국 [[신]]나라를 세워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결국에는 각지에 세력들이 난립하게 만들었다. 결국에는 경시제 유현의 공격을 받아 장안 점대에서 죽음을 당하고 시신은 수천 갈래로 찢어졌으며[* [[항우]]도 공을 세우기 위해 다섯 장수들이 다섯 갈래로 찢었지만 왕망은 훨씬 더 비참했다.] 머리는 완에 효수되었다. 더 비참한 것은 '''백성들이 머리를 때리고 [[혀]]를 잘라 베어먹었다.''' 여담으로 평제의 황후였던 왕망의 딸 황황실주는 33살 나이에 불타는 건물 속에 들어가 자살했고 왕망의 조상들과 친척들의 무덤은 모두 파헤쳐졌으며[* 그나마 원제의 황후이자 왕망의 고모였던 왕씨(왕정군)은 이미 세상을 떠났기에 수모는 면했지만 곧 들이닥친 적미군에 의해 왕씨의 시체는 수모를 피하지 못한다.] 일족들은 모두 몰살되는 등 끝이 매우 좋지 못했다.&lt;br /&gt;
&lt;br /&gt;
=== 동'탁' ===&lt;br /&gt;
董卓. [[동탁]]은 [[후한]] 말 [[십상시의 난]]으로 권력자였던 대장군 [[하진]]과 [[십상시]]들이 모두 죽은 사이에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소제]]를 폐하고 [[헌제]]를 옹립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폐위한 소제는 이유에게 시켜 독살했고 일개 병주자사에 불과했던 동탁 자신은 스스로 [[상국]]에 올랐다.&lt;br /&gt;
&lt;br /&gt;
무엇보다도 백성들에게 각종 학정들을 일삼고 경제를 망쳤으며[* 동탁이 [[싸이코패스]]마냥 사람을 죽여댄 것도 크나큰 문제였지만 가장 치명적인 실책은 돈이 모자라다고 말 그대로 막 찍어대면서 후한 경제에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가져온 것이다. 아쉽게도 삼국지연의에는 이것이 묘사가 안 되어서 동탁은 그냥 단순한 살인마로 알려졌다.] 수도인 [[낙양]]을 불태우고 후한 역대 황릉을 도굴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특히 아무 고을이나 찍어서 자기 병력들을 풀어서 마음껏 노략질하게 했던 것은 동탁의 학정 중 백미다. 경제를 망친 것 역시 동탁은 돈이 많기만 하면 장땡인 줄 알고 조폐창에서 화폐를 마구 찍어댔는데 개중에는 돈인지 쇳조각인지 뭔지 알 수 없는 개체까지 찍혀나왔다. 그리고 약 18세기가 지난 뒤 [[짐바브웨|남아프리카의 모 국가]]에서 [[짐바브웨 달러|비슷한 일]]이 발생하게 된다.&lt;br /&gt;
&lt;br /&gt;
결국에는 자신의 첩과 놀아나면서 불안해하던 [[여포]]가 사도 [[왕윤]]의 사주를 받고 동탁을 살해했다. 이후로는 그 죄의 댓가를 받게 된다.&lt;br /&gt;
 * '''동탁의 일족들은 모두 죽음을 당했고 동탁의 머리는 효수되었으며 시체는 길거리에 방치되었다.''' &lt;br /&gt;
 * '''동탁의 폭정때문에 고통받은 백성들은 효수된 동탁의 머리를 때리고 뚱뚱하고 기름진 시체에 심지를 박아 불을 질렀고[* 이쪽은 연의에서 묘사되는 부분.] 원씨 문하생들은 그 시체를 완전히 불태우고 재를 길거리에 뿌렸다.'''[* [[원소(삼국지)|원소]]의 숙부였던 [[원외]]가 태부로 있었는데 원소가 [[반동탁 연합군]]을 일으키자 분노하여 원외의 일족을 멸했었다. 이에 그 문하생들이 복수를 한 것이다.]&lt;br /&gt;
 * '''동탁의 머리는 여포가 나중에 [[이각]] 등에게 패하고 [[원술]]에게 달아날때 말 안장에 싣고 가져가 버렸다.'''&lt;br /&gt;
 * 이후 권력을 잡은 이각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임자였던 동탁을 예로서 안장하려고 했지만 겨우 뼛조각 몇 조각만 수습할 수 있었다. 그는 이것에다 좋은 향나무로 몸을 깎아 왕의 예로 안장하려고 했지만 '''아무리 좋은 날을 잡아도 세 번이나 무덤이 침수되었고 결국에는 벼락을 맞아 그 남은 뼛조각도 모두 사라졌다.'''&lt;br /&gt;
&lt;br /&gt;
정말 하늘이 동탁을 이렇게 미워한 듯하다.&lt;br /&gt;
&lt;br /&gt;
=== 조'조' ===&lt;br /&gt;
曹操. 조조는 [[이각]]에게서 도망친 [[헌제]]를 옹립하고 황실을 자신의 세력으로 채워넣어 황실을 매우 약화시켰고 결국에는 위왕까지 올라 그 아들 [[조비]]가 황제가 되어 [[위(삼국지)|위나라]]가 세워지게 만들었다. 실제로 역사가들의 평가 역시 조비는 이미 아버지가 깔아준 판에 오르는 걸 좀 앞당겼을 뿐이며 실질적인 찬탈자는 조조라고 못박고 있다.&lt;br /&gt;
&lt;br /&gt;
헌제를 [[허창]]으로 강제로 옹위한 후 황제 앞에서 칼을 차고 다니며 협박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고, 암살 의혹에 연루되긴 했지만 황제의 후궁이자 황실의 아이를 임신중이었던 [[동귀비]]를 잔혹하게 죽이고 후에 황후인 [[복황후]]마저 제거하여 자신의 딸을 그 자리에 들어앉히면서 많은 이들의 공분을 샀다. 물론 조조가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에까지 관대할 수는 없었겠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조조의 패륜스러움을 천하에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이후 [[항우]]의 진인 20만 학살사건인 신안 대학살 이후 400여년만에 벌어진 대규모 학살극인 [[서주 대학살]]과 원소군 투항병 8만 생매장 사건, 여포군을 공격할 때 팽성을 함락해 학살하는 등 여러 학살을 일으켰다. 스탈린에 버금가는 각종 백성 강제이주정책[* 주로 회남 지역에 시행되었는데, 유수구 전투 직후 조조의 뻘짓으로 회남의 백성들이 집단으로 오나라로 이주하는 일도 생긴다. [[손권/인간 사냥]] 참고. 한중의 무력화 같이 제대로 생각하고 이주시킨 것도 있지만, 애초에 이 때의 집단 이주는 제대로 분양을 해주는 등의 행동을 기대조차 하면 안 된다. 그냥 안 가려고 하면 패 죽이더라도 강제로 이주하게 하는 것이 당대 정책이다. 이것을 현대의 이주 정책과 비교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의 시행 등 중원 쟁패의 결과를 떠나 백성들의 민심을 잃을 행위를 많이 했고, 자신의 최고 공신이자 모사인 [[순욱]]마저 위공의 [[구석]]을 받는 것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자결하게 함으로서 왕조찬탈의 의지가 있음을 인증, 결국 뛰어난 업적을 많이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지금 재평가를 받더라도 예전에 역적취급을 받던 이유이다.] 후세인들에게 간웅의 이미지를 크게 남기고 말았다.&lt;br /&gt;
&lt;br /&gt;
=== 사마'의' ===&lt;br /&gt;
司馬懿. 사마의 또한 자신이 정권을 장악하여 두 아들 [[사마사]]와 [[사마소]][* 사마의는 승상이었고 사마사는 대장군이었다. 사마소는 대장군이었다가 진왕까지 올랐다.]의 대를 지나 결과적으로는 그 손자 [[사마염]]이 황제에 올라 [[위(삼국지)|조위]]를 무너뜨리고 [[서진|진나라]]를 세웠다. 다만 사마의의 경우 본인은 그냥 권력만 찬탈했고 따로 한 것이 없었으며 실제 제위찬탈의 작업은 둘째 아들이 주도해 행했다는 점이 좀 다르긴 하다.[* 이 점은 사마사도 마찬가지. 황제의 지위를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결정적인 조치는 그가 아니라 동생 사마소가 했다.]&lt;br /&gt;
&lt;br /&gt;
그런데 정작 사마의의 유언은 &amp;quot;나라에 충성하라.&amp;quot;였으나 그 자식들이 말 안 들은 것 때문에 끼였으니 좀 억울하겠다. 하지만 일부러 자식들을 위해 자신은 충성을 바치는 식의 연기를 했다는 의혹도 강하다. 실제로 이 부분은 조조도 비슷하게 지적받는 부분이다. 말년에 갑자기 기존 황제가 받던 특전과 같은 것을 누리고 위왕(魏王)이 되려고 하는 등 권력에 크게 집착하고 한 황실의 권위를 최대한 망가뜨리려는 모습([[헌제]]의 금교전을 대놓고 사용하거나 헌제 앞에서 칼을 차고 돌아다니는 등)을 많이 보였는데, 사실상 아들이 황제로 쉽게 추존되게끔 멍석 깐 걸로 해석한다.&lt;br /&gt;
&lt;br /&gt;
재미 중국인 리둥팡(黎東方; Orient Lee; 1907년 ~ 1998년)의 경우 조조와 사마의에 대한 평가가 좀 다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조조-조비로 이어진 찬탈의 경우는 그래도 변호할 만한게 '''한나라는 사실상 조조가 재건설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즉 승상으로서 조조가 재건설한 나라였기 때문에 그 아들인 조비가 이어받고 이름을 위로 바꿔도 그 나라를 만든건 조조였기 때문에 그나마 변호가 가능했지만 사마의의 경우는 위나라 황제를 구속하고 친족들을 죽인데다가 사마의가 위를 건설한데 미친 영향은 조조가 한을 재건한데 미친 영향보다 미미하기 때문에 도둑질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결과적으로 당시 후한은 [[암군]]들과 [[환관]]들의 집정, [[황건적의 난]]과 동탁의 집권과 이각의 집권 이후로 쇠약했던 정권을 조조가 20여년 동안 안정시켰다는 점에서 변호해줄 수 있지만, 사마의는 위나라가 아직 쇠약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황제였던 제왕 [[조방]]이 즉위한 틈을 타서 [[조상]] 등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을 똑같이 대접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조상이 무능하긴 했어도 국가를 대놓고 말아먹거나 한 자는 아니었다는 점도 관건이다. 다만 [[낙곡대전]]으로 한번 말아먹긴 했다.&lt;br /&gt;
&lt;br /&gt;
게다가 많은 조조의 일족들을 문초하고 죽였는데 이 과정에서 조위는 뛰어난 인재들을 많이 잃었다. 내정에 매우 뛰어난 치적과 업적을 달성한 바 있는 [[하후현]]은 끌려가서 사형당했고 [[하후연]]의 차남이자 조위 차세대 유망주 격인 장수인 [[하후패]]는 [[촉한]]으로 도망쳐야 했다. 그나마 촉이 암군 유선과 간신 황호에 의해, 그리고 오는 폭군 손호와 간신 손준, 손침, 잠혼 등에 의해 망해가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역으로 당했을 것이다. 게다가 [[마륭]] 같은 유능한 인재를 [[독발수기능]]의 난 진압에 투입한 거야 둘째쳐도 그 뒤 서량에 머물게 하는 등 사마씨들, 그 중에서 특히 사마염은 인재 보는 눈은 몰라도 인재를 쓰는 능력은 없었다.&lt;br /&gt;
&lt;br /&gt;
뒷날 [[오호십육국시대]]의 후조를 세운 [[석륵]]은 [[고구려]] 사신 우문옥고를 대접하는 자리에서 신하인 서광과의 대화를 하던 중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당시 이미 역적으로 인정되던 왕망과 동탁은 빼고 조조와 사마의를 [[디스]]한 것이다.&lt;br /&gt;
&lt;br /&gt;
&amp;gt;대장부가 일을 꾸미는데 있어서는 마음이 호탕해서 일월과 같아야 하오. '''짐은 [[조조(삼국지)|조맹덕]] [[조비|부자]]나 [[사마의|사마중달]] [[사마사|부]][[사마소|자]]처럼 고아나 과부[* 고아는 [[헌제]]와 위의 어린 황제들, 과부는 후한과 위의 태후와 황후들을 말한다.]를 속이며 간교한 술책으로 천하를 빼앗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오.'''&lt;br /&gt;
&lt;br /&gt;
== 재평가 ==&lt;br /&gt;
왕망은 어느 정도는 재평가를 받는다. 물론 자신이 창업군주이자 유일한 황제였던 신나라가 겨우 15년 만에 망했고 [[한서]]와 후한서 등의 정사에서는 얄짤없이 까인다. 특히 후한서의 경우 후한 자체가 전한을 멸한 왕망을 토벌하는 것을 정통성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는 폭군이 아니라 주나라식 사회에 심취한 소위 이상주의자였기에 참작할 만한 부분은 있다.&lt;br /&gt;
&lt;br /&gt;
조조와 사마의는 각각 [[조위]]와 [[서진]]이라는 새 왕조의 창건자로 황제에 추존되었으며, [[역성혁명]] 논리에 자유롭고 명분보다는 실리를 중요시하는 현대에 와서는 어쨌든 후대로 이어진 왕조를 건설한 둘을 창업군주로 평가하는 편이다. 고대의 정권교체(민주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쿠테타]] 말고)의 주체들을 무조건 나쁘다라고 평가하면 어린 황제를 몰아내고 [[북송|송나라]]를 건설한 [[조광윤]]같은 자들도 다 개쌍놈이 된다. 결론은 정치 못하고 실패하면 역적이고 어쨌든 후대로 이어지는 왕조를 건설하면 창업군주가 되는 것. 그래서 현대에는 반란자를 특별히 나쁘게 평하지 않는다. 거기다 [[모택동]]이 조조를 상당히 좋아하여 중국에서 한때 재평가가 이루어지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사마의가 [[조상]]을 죽일 때는 이미 조조는 한참 전에 사망했지만 관심없는 사람들은 '[[알 게 뭐야]].' 라고 생각한다. 사마의는 아직 조조처럼 전면전인 재평가가 이루어지지는 않고, [[고평릉 사변]] 같은 모습 때문인지 조조처럼 압도적인 [[최종보스]]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lt;br /&gt;
&lt;br /&gt;
== 선양 받은 후 황제에 대한 행적 ==&lt;br /&gt;
재미있는 것은 동탁은 실질적으로 신왕조를 세우지 않았으니 논외로 친다면[* 기실 동탁은 황제를 폐위하고 그가 왕위에 오른게 아니라 헌제를 즉위시킨거기에 반란의 여지 등을 생각하면 죽이는 것이 훨씬 유리했다. 다른 3명과는 다른 상황이라는 것.], 망탁조의의 멤버에 추가로 [[환온]]을 친다고 해도 '''이들 전원이''' 선양받은 선대 황제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모범적인 선양이라서 그렇다고 [[카더라]].~~&lt;br /&gt;
&lt;br /&gt;
사실 동탁이 선양받지 않았다고 해서 '''황위에 대한 욕심이 없는 인물은 절대 아니었다.''' 동탁의 입버릇부터 이미 '''&amp;quot;유씨 가문은 황제로서 자격이 없어.&amp;quot;'''^^[[출처 필요|\[출처 필요\]]]^^였고 동탁이 '''황명을 밥먹듯 거절해가면서까지 지킨 자리가 병주자사'''였으며 황제였던 소제 [[유변]]을 자기마음대로 폐위시키고 그 자리에다 헌제 [[유협]]을 박아넣은 데다가 그 유변마저 나중에는 [[이유(삼국지)|이유]]를 시켜서 독살했으며 동탁이 죽은 것 역시 '''선양을 받던 도중''' [[여포]]가 난입해서 죽여버린 것이다.&lt;br /&gt;
&lt;br /&gt;
[[왕망]]이 폐위시킨 [[유자영]]은 왕망 때에는 유폐되었긴 해도 살아 있었고[* 어릴 때부터 철저히 유폐되어서 세상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었다. 훗날 경시제 [[유현]]에게 살해되었다.] [[조비]]가 폐위시킨 [[헌제]]는 천수를 누리었고 사마염이 폐위시킨 [[조환]]은 천수를 누린데다가 한술 더떠 사후 황제로 추봉되기 까지 하였다. 환온이 폐위시킨 [[사마혁]] 또한 천수를 누렸고, [[사마덕종]] 또한 환온이 아닌 [[유유(송무제)|유유]]에게 죽는다. 이는 이들이 충신이거나 역성혁명을 일으킨 선구자여서는 당연히 아니고 정치적으로 이것이 유리하다는 분위기가 그당시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전 왕조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위해서는 전 황제를 죽여서는 곤란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또한 이러한 선양 후 전 황제를 죽이지 않는 관습은 망조의온 시대 뿐만이 아니라 고대시대 부터 망조의온시대에 이르기까지 단 한번도 깨진 적이 없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요순시대의 선양도 전황제의 피가 흐르지 않은 상태에서 선양이 이루어졌고, 연나라왕 쾌 또한 살아 남았다가 제나라의 침공으로 자살했으며, 그외에는 삼국지보다 고대에 선양 기록은 남아 있지 않는다.&lt;br /&gt;
&lt;br /&gt;
그러나 [[동진]]의 공제 [[사마덕문]]을 [[유송]]의 고조 [[유유(송무제)|유유]]가 죽이면서 그 후의 왕조는 [[송태조]]가 [[대인배]]적 행동을 할 때까지 무조건 선양 후에 이전 왕조의 황제를 죽여버리게 된다.&lt;br /&gt;
&lt;br /&gt;
== 예시(?) ==&lt;br /&gt;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들을 까는 부분이 끝도 없이 많다. 업적도 많고 조선왕조의 처지로 봐도 그럭저럭 정당화가 가능한 조조나 사마의보다는 왕망을 까는 드립이 넘치는데, 왕망에 비유해서 까니까 '''어떻게 왕망에 비교할 수 있냐고''' 화를 내면서 반박하는 부분도 있을 정도다. 심지어 [[조광조]]도 사후 왕망 소리를 들었다. &lt;br /&gt;
&lt;br /&gt;
[[위안스카이]] 또한 [[신해혁명]] 직후 혁명 진압을 위해 [[청나라|청조]]에 기용되었을 때 황족 중 하나로부터 '사마중달과 같은 자'라는 평을 들었다. '[[범]]을 불러 집을 지키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라는 것이었는데, 청조로서는 당시 [[북양군벌|북양 신군]]에 절대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위안스카이의 기용 없이 [[혁명군]]의 진압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결국 그냥 선양하느니만 못한 결과가 나왔다. 당장 청 황실의 존재를 인정하고 어느 정도나마 존중을 해준건 북양군벌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과 적대하던 혁명 세력이었다.&lt;br /&gt;
&lt;br /&gt;
[[분류:위나라의 인물]] [[분류:한나라/인물]] [[분류:한자어]]&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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